독일 사람들은 주식이 빵과 감자이다보니 제과점, 빵집이 중요하다.
다른 기술직과 마찬가지로 수 십 가지 종류의 빵을 만들 수 있는 제빵장인(매스터: 견습생을 훈련시키고 가르칠 자격이 있는 그 분야에 인정받은 달인)은 자부심을 가진다.
내가 사는 작은 도시에도 빵집이 많지만 주로 가는 조그만 단골빵집이 있다. 그 빵집 주인아저씨는 집안 대대로 빵을 만드는 장인정신을 이어오는 분이다. 그 아저씨만 만들 수 있는 특히 맛이 좋은 빵이 있어 단골손님이 많다. 그러나 감탄스러운 것은 그 분의 제빵기술이 아니라 성격 즉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기술, 능력이다.
얼굴에는 '낙천'이란 도장이 찍힌 듯 항상 싱글벙글이고 소탈한 유머와 순진하고 경쾌하고 편안하고 푸근한 분위기에 빵집을 들어온 사람은 잠시나마 한 번 웃고 나간다.
일일이 손님들에 맞추어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닌데 그 아저씨가 평생 빵을 만들며 터득한 자신의 인생철학을 유머스럽게 한 마디씩 던지는 것을 사람들이 즐거워 한다.
다른 손님 크롸상보다 자기 크롸상이 너무 작으니 반값을 받아야 한다고 투덜거리는 까다로운 손님한테 아저씨 왈...
" 밀가루 반죽양은 똑같이 했는데 걔가 오븐에서 자라질 않았네요. 그렇다고 똑같은 크롸상인데 그 애를 싸게 팔면 서운해 할텐데... " 하고 웃으며 큰 것으로 바꿔준다.
크롸상의 인격 아니 빵격에 대한 존중심과 평등심!
20년이 넘도록 그 빵집만을 오신다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그 할머니는 시계바늘처럼 정확하셔서 늘 같은 시간에 오시고 같은 빵을 사시는데 가끔 내가 그 시간에 가면 만난다.
이 할머니는 빵집 아저씨와는 또 정반대다.
엄격하고 완고한 분위기에 무뚝뚝하고 폐쇄적이고 모든 것에 무관심, 냉담한 굳은 표정이다.
보통 길거리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과도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Hallo! 정도는 하는데 이 할머니는 사람을 잘 쳐다보지 않는다. 그래도 수 년간 그 빵집에서 규칙적으로 할머니를 만나다 보니 친근하다. 그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닌데 그 할머니가 사시는 장소가 나로서는 특별하다.
우선 독일의 묘지문화에 대해 설명을 좀 해야할 것 같다.
대개 유럽도시들의 형성, 발달과정을 보면 도시 중앙에 대성당이 있고 그 성당을 중심으로 나무테처럼 한 도시가 발달해 간다. 요즘 대도시들은 거의 번화한 관광, 상업도시가 되어 버려 모습이 변했지만 아직도 작은 도시의 중심에는 성당이 있고 그 성당 근처에 반드시 공동묘지가 있다. 매일 성당에서 울려퍼지는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당과 가장 가까운 명당자리라고 생각해서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공동묘지 근처에 주택가가 있는 것이 보통이고 그 도시 사람들은 멀리 성묘 갈 필요 없이 매일 산책을 하며 비석의 먼지도 닦고, 화초도 심고, 꽃병의 물도 갈아주고 하며 조상의 묘를 관리한다. 한 동양관광객이 잘 모르고 묘지에 갔다가 묘의 작은 비석들이 꽃과 나무에 가려 잘 안 보이고 벤치도 있고 새소리도 들려 공원에 들어 왔다고 착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즐겨 산책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사실 공원묘지다.
독일 사람들이 묘지근처에 사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 별로 없고 오히려 조용하고 공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화, 정서의 차이일 것이다.
이 할머니도 시내 성당 묘지 바로 곁에 사시는데 수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묘를 눈이 오나 비가오나 매일 들르시는 것이 하루 필수 일과중의 하나라고 한다.
빵집 아저씨와 할머니 -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 그대로 낙천주의와 염세주의, 긍정과 부정, 가벼움과 무거움, 밝음과 어두움, 부드러움과 딱딱함, 봄과 겨울, 희망과 절망, 흐름과 막힘, 개방와 폐쇄, 화해와 방어, 수용과 거부, 관심과 냉담, 참여과 고립, 이완과 긴장의 융화다.
독일말에 그 사람을 알기는 해도 형식적이고 표면적으로 겉돌며 거리감이 느껴지는 냉랭한 관계에서 어떤 계기에 마음의 문이 열려 인간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 사람을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 <드디어 얼음이 깨졌다.>라는 표현을 한다.
얼음은 깨졌다가 다시 꽁꽁 얼 수도 있고 또 북극처럼 평생 얼음이 녹지 않고도 별 불편함 없이 잘 유지되는 인간관계도 있다. 얼음이 깨졌다고 꼭 녹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녹기 전단계의 인간적인 친분, 교류가 시작된다는 뜻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쓴다.
쉽게 깨질 것 같지 않았던 그 할머니의 단단한 얼음을 깬 사람도 바로 빵집 아저씨다.
아니 그 아저씨의 온기에 저절로 녹은 것이다.
가족, 친척이 없으시고 또 사람과의 만남도 싫어하셔서 이웃, 친구들과도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혼자 적적하게 사시는 무뚝뚝한 할머니가 그 아저씨와는 누그러져서 편안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신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 날도 할머니가 할아버지 묘에 가져갈 장미꽃 한다발을 안고 들어 오셨다.
빵집 아저씨: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장미꽃을 사셨군요. 할아버지가 좋아하시겠어요.
나: 좋은 아침입니다!
할머니: 이제 날씨가 풀렸으니... 지난 몇 일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꽃이 다 얼어버렸어요.
이런 대화의 시작으로 오늘은 '묘지'가 또 할머니와 빵집 아저씨의 테마다. 할머니로서는 매일 이 빵집에 들러 나누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들이 창문을 활짝 열고 하루 한 번 집안을 환기시키는 것과 같이 중요하고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손님이 없어 한가할 때는 할머니와 아저씨의 대화가 좀 길어진다.
나도 어떤 때는 빵을 받고도 계속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심코 들을 때가 있다.
이런 저런 가족묘를 관리하는 얘기를 하다가 사실 대화내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혼자말처럼 한 마디 툭 던지신다.
" 나는 산 사람이 더 무서워요."
산 사람이 더 무섭다 = 죽은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평화로운 묘지곁에 사시는 것일까?
할머니가 평생을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신 경험,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 고통 모두를 압축시켜 결론 내린 냉소적인 말로 들렸다.
그 할머니의 인생, 과거 개인적 체험을 모르더라도 내가 아는 독일역사 - 히틀러와 나치, 유태인학살, 2차 대전의 악몽, 한 인간의 탐욕과 권력의지가 파괴시킨 전후의 황폐한 도시를 다 보고 겪으셨을 할머니는 산 사람이 참 무섭다고 느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낙천적인 빵집 아저씨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 그래도 나는 산 사람이 더 흥미롭고 좋아요. "
<그래도>는 '산 사람이 진짜 무서울 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 내포하는 연결접속사이다.
그러나...
" 이 세상에서 제일 흥미롭고 좋은 것은 사람이지요. "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도반님들, 흥미롭고 좋은 주말 되세요!
첫댓글 無位子님,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존재하는 그 모든 모습들이 양극단으로 인하여 공평하다고 하나 봅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사람으로 아프고..그래도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 ...경란님도 대천 한바다 같은 넉넉한 주말 보내세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무위자님, 쌍차쌍조 차조동시의 삶을 생각하게 하군요...낙천적인 빵집아저씨야말로 이세상에서 제일 흥미롭고 좋은 사람 인것 같군요...오늘도 조리있게 올려주신 글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독일사람들의 낙천적인 정서와 함께...무위자님도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오늘도 얼핏보면 평범한 독일 사람들의 일상을 심리학자는 내면을 관찰하여 마치 X- ray 사진처럼 보여주심에 참 재미있게 읽습니다. 무위자님 항상 건강하시길 부처님께 발원드립니다._()()()_
무위자님의 글을 읽으면 주말을 맞이합니다. 시어머님 생신이라 부산에서 손님이 6분이나 오시거든요.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법과 스승 아님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 주시는 無位子님의 글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_()()()_
빵집 아저씨 얼굴이 그려집니다^0^,~~성격이 業이라 했습니다,복업이 될지 악업이 될지는 주인공 에게 달렸겠지요~~허공같이 넒은 좋은 마음을 끝없이 퍼내어 쓸줄아는 지혜로운 보살이 되고자 합니다,~~무위자님 감사합니다,_()_
저도 빵을 좋아해서 한때는 빵순이란 별명을....... 빵과 함께 정을 파시고 계시는 낙천적인 아저씨가게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나이가 들 수 록 유쾌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좋아집니다. 저도 그럴수 있길 바래봅니다만 ... ^^* _()_
산 사람이 참 무섭다.... 진리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_()()()_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다. 정월 대보름 입니다 두루 원만성취하소서_()()()_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무위자님 할머님의 상처받은 마음을 누구라 치유 할 수는 없겠지요. 작은 도움은 될지라도...결국은 자신의 지혜로..그래도 그러기엔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가 넘 깊었나 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