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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기독교가 한국 현대시에 미친 영향
작성자 이용남(repri@GODpeople.com)
基督敎가 韓國 現代詩에 미친 影響 硏究
- 찬송가를 중심으로 -
서 론
(1) 목적
문화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는 활동의 총체이다. 인간이 살면서 가지는 생활 수단과 양식 또는 표현이 세대를 이어가면서 전수됨으로써 전통을 이루고 문화를 이룬다.
인간은 그 사회의 문화가 성숙하건 미숙하건 간에 문화 속에 나고 문화와 더불어 살며, 또한 상상력을 갖고 심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은 자연 현상 배후의 힘을 인식하고 죽음 저편의 세계를 신앙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적인 신앙은 일상 생활과 직결된 것이므로, 종교는 문화 활동 또는 문화 현상의 주요한 부분으로 문화와 밀착되어 있다.
종교는 고도의 이론과 내세 지향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사회생활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유교가 그랬고, 한말과 일제하의 기독교가 그랬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한국 현대시에 있어서 기독교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유교가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 역시 역사적으로 한국 사회에 가치관과 윤리관을 지배했고 또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를 한국에 전파시키려는 노력은 상당 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만주와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이 이루어지면서 가시화 되었고 선교사들은 이 땅에 씨를 뿌리러 왔으나 오히려 추수하기에 바쁘다는 초기 선교사의 고백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비전을 주었는데 그것은 일반 민중의 각성을 통하여, 사상적으로는 혁구취신할 것과 서양 문화의 수입과 계급사상 타파 및 민주사상의 대두를 엿볼 수 있다.
한국에 기독교가 이입된 역사는 천주교가 2백여년, 개신교가 1백여년을 헤아린다. 기독교가 이입될 당시에 받은 박해와 함께 대중속에 스며든 기독교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다양하다.
성경과 찬송가 및 기타 교리서들과 문학작품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예배 등과 기독교 문학 작품의 번역, 서구 음악의 보급, 민족애의 고취, 자유나 평등주의적 자각 의식 등에 의해 일깨워진 인간성의 회복과 더불어 기독교의 진실과 상상력을 문학 작품의 형식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보다 강렬하게 의식하게 했다는 점에서 한국에 있어서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찬송가 번역이 한국 현대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이광수에서 윤동주까지,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의 시를 한국 현대시에 기독교시의 형성과 그 문학사적 성격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원리와 방법
이제 까지는 국문학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바라보고 자료를 수집, 분석하다 보니 그 평가와 정리가 쉽지 안아 바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 본다.
박이도, 신익호등의 글은 기독교의 변두리 학설로 기독교시를 평가함으로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시의 바른 이해를 저해했다고 감히 진단하여 본다.
그래서 사변이 아닌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사적 입장에서 문학 특히 이광수에서 윤동주까지,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의 시에 나타난 기독교의 발자취를 살피려고 한다.
지금까지 연구되어진 단행본 및 연구 논문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분야의 교수님과의 토론 등을 통하여 분석, 비판, 종합, 평가를 내려보고자 한다.
(3) 범위
한국 문학이라는 범위보다는 그 중에서 범위를 좁혀 찬송가 번역이 한국 현대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고 이광수에서 윤동주까지,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의 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시의 형성에 있어서 그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학부 논문이므로 그 사상적 깊은 연구는 차기에 할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개괄적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한국 기독교시 형성의 배경
1) 정치, 사회적 배경
개화기 한국의 정치 사조는 한마디로 "정권에 대한 주객전도의 파노라마"였다. 국내적으로의 몇 차례에 걸쳐 "외국군과의 소규모 전에서 승리"한 대원군이 배외척사에서 배외쇄국으로 줄달음치고 있었으며 일본군함 강화도 침략 사건에 꼬리를 물고 임오군란이 터졌으며, 이로써 "근대 한국 외교는 불평등 조약에 의해 민족적으로 불리한 관계"를 강요당해야 했다.
갑신정변을 통하여 "구폐의 개혁과 인민평등권 및 민족의식 앙양"에 뜻을 둔 혁신적 개화파는 "외세의 배신과 간섭 가운데 대중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지못하고 정치적 이념"으로만 그치고 말았으며 "동학란은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고 노일전쟁을 거쳐 한일조약의 강제적 조약 체결로 끝내 조선왕조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으며, 이때 당시의 개화기 한국의 정치사에 주류는 내적으로 대원군-민비-개혁파-민비-대원군 등의 순서를 거치면서 서로간의 정권 다툼과 외적으로는 청국-일본의 간섭과 배신과 정권 탐욕의 연속이었다.
한국 문학사에서 갑오경장 이후를 개화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이는 갑오경장 이후 "이 땅이 西勢東漸의 거센 물결 앞에서 내동댕이쳐졌을 때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의 욕구는 새로운 문예 양식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였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화기 문학의 주요한 발생 요인들은 개화의 보편적이고 또한 필연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생성된 것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이러한 주요 요인들은 개화기 문학의 작가들은 당시에 풍미하던 사조류들을 어떤 방법의 문예를 통하여서 든지 개화 사상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갑오경장이 어느 정도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혁신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코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타율적인 즉, 일본인들의 강권과 정치적 권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급진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파생되었을지 몰라도 문화와 사회적 환경의 제반 요소를 변혁할 만큼의 풍토 조성은 이루지 못했다.
문학은 일정한 사회를 지반으로 해서 성립되며 그것은 결국 "문학이 사회의 표현이며 모방"이라는 정의에 비추어 볼 때, 갑오경장은 근대적 사회 지반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당시 사회적 환경의 지반형성 미구축으로 인한 여건으로 볼 때, 한국의 새로운 문학 기점은 설정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개화기 문학의 역사적, 사회적 지반은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볼 때, 갑신정변(1884)과 동학란(1894)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두 사건이 모두 국수주의적인 입장에서 봉기된 역사적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갑신정변의 경우 민중의 거국적인 봉기는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일이 될 수 있으나 사회적인 지반을 형성하지 못하고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갑신정변은 개화의 도화선은 되었을지언정 일시적인 정변에 그치고 말았다.
이 나라의 정치 사조가 거듭되고 가중되어 가기만 하던 혼란의 암흑기에 잠식되어 있을 때 한국 교회사의 역사는 여명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연의 사건들을 문학사적 입장에서 보면 개화기 문학이 싹터서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과 지반을 구축한 정신력은 아무래도 다방면에 걸친 기독교 선교 활동으로 인한 기독교 선교의 기독교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교회사적 배경
한국의 기독교사는 A. D.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잘못된 기독론을 주장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추방된 Nestorius파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635년 중국에 전래되었고 이것이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이다.
1253년에 Gaillaume de Rubruc은 몽고의 기육 칸을 개종시키기위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cor e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를 서방에 최초로 알리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로마 카톨릭의 선교사로서 제일 먼저 한반도에 발을 디딘 이는 Gregory de Cerpedes가 종군 신부로 왔으나 접촉의 증거가 없고 다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들은 상당수가 개종하였다.
이수광은 그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그와 동시대인인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1603)를 알고 있는 것으로 말한다. 유몽인도 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천주실의에 대하여 말하면서 허균이 천주교를 믿고 있음을 말한다.
1644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Adam Shall과 사귀게 되었고 천주교 교리에 접하게 되었다.
1777년 이벽, 권일신,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등 남인의 시파(時派) 유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한강 가의 산사인 주어사에 모여 토론회를 가졌었다.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은 북경 남당에 가서 예수회신부 Louis de Grammont에게서 세례를 받고 1785년 서울 명례동(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1832년 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는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을 방문하여 쪽복음 서책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왕에게 한문 성경을 두권 바쳤다. 1865년 9월에는 Robert Jermain Thomas는 황해도 소래에 와 2개월 반을 머물면서 한문 쪽복음을 나누어주었다.
John Ross, John Mcintyre는 동만주 간도 등지에서 한국인에게 선교하다가 이응찬 김진기등의 도움으로 성경번역을 추진하고 1876년 세례를 주었다. 1883년 성경번역에 참여한 서상륜, 이성하 백홍준, 등은 매서인으로 쪽복음을 국내로 반입하여 배포하였다. 또한 이수정은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성경번역에 참여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전파가운데 성경번역이 개화기 문학에 나타난 근대적인 산문체 스타일의 문장은 광범위한 민중층을 대상으로 한, 한글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요구이기도 했다. 이렇듯 기독교의 영향은 "민중을 근대적 시민으로 교화하고, 근대적 사회분위기를 조성하여 한국의 근대문학을 태동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84년 9월20일 Horace N Allen은 미국 공사관의 공의로 입국하였고, 1885년 4월5일에 Horace G. UnderWood, Henry G . Appenzeller가 입국하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교육, 의료, 사회사업, 신문발간등에 주력하였다. 이는 당시의 사회성의 범위가 광범위하여 개화이념을 구체화하는데 공헌하였다.
결국 이 땅의 현실성이 갖는 광범위한 사회성의 지반이 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여건 가운데서 개화기 기독교문학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으니 기독교는 개화기 문학 배경 형성의 정신적 계기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기독교의 개도 이념
한말은 국권의 쇠퇴해 가는 국운 앞에 개신교인들은 사회를 개조하는 종교, 구국하는 종교, 신문화를 맞아 교육하는 종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음과 새로운 문명을 심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이런 종교적 성격으로 인하여 한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개화 구국하는 신앙으로서, 그리고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종교로써 부각되었다. 이는 한말 허물어져가는 상황속에 요청되는 종교였다고 보아야 옳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기독교의 개조, 양심의 개조, 인간의 개조 등이 크게 강조되었다. 개신교인들은 사회개조의 큰 과제로서 세가지 우매한 일을 지적하고 나서 이에 대한 개조를 제창하고 종교개혁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에서도 인간개조와 사회개조를 이룩하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주장과 활동들이 한국개화에 크게 공헌했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4) 기독교의 구국운동
1900년대 초의 한국사회는 구국운동마저 어렵게 하는 일본의 정책으로 구국에 뜻있는 선각자로 하여금 고달픈 나날을 겪게 하였으나 선교사가 있는 신앙단체는 비교적 탄압하기 어려우므로 많은 독립지사들이 개신교에 들어가 잠시나마 숨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일본은 한국 종교마저 그들 정신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교를 한국에 침식시키려 하였으나 기독교는 일본인이 주관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상태였다. 특히 기독교는 국제적인 신교 단체로서 선교사에게는 비교적 관헌이 간섭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구국하고 부국하는 길은 기독교를 신앙하는데서 비롯한다고 공공연히 신문지상에 보도할 정도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바로 잡는 정신적 통합은 기도에 있다고 보고, 만은 곳에서 기도를 드렸다.
2. 찬송가의 번역
1) 천주교의 천주가사
천주교의 천주가사는 전통가사의 형태를 완성하는 종결점의 위치에 놓인다면 그러한 전통가요의 전통성을 탈락시켜 근대적인 양식으로 이행하도록 한 결정적인 역할은 개신교의 찬송가가 담당하였다.
천주가사를 성가로 보는 동시에 문학사적 가치를 가진다고 보는 이유는 첫째, 천주가사는 우리 선조들의 신앙고백이요, 참회와 선교의 노래이다. 둘째, 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셋째, 멜로디와 내용이 잘 어울리는 성가곡으로 무반주이며, 낭송조의 신앙 음악이다. 넷째, 음악적으로 볼 때 민요와 염불 낭송조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았다. 이는 천주가사는 조선시대의 가사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발전된 시가이다.
그 예로서 성교요지는 49절 504구의 장편 서사시로서 모두 4언의 짝수구(8구가 가장 많고 4, 10, 12, 14, 16, 24구 등 도 각각 상당수 있다.)로 이루어져 있는바, 전체 125장 중 86.4%인 108장이 4언 8구로 되여 있는 용비어천가 이후 거의 유일한 장편 서사시가 아닌가 한다. 천주가사는 한시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고 시작하여 발전한 것이다.
2) 개신교의 찬송가 소사
개신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국으로부터 찬송가가 들어와 있었다. 최초의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홍준(1848-1894)은 만주에서 처음 세례를 받았던 사람인데, 그는 매일 새벽이 되면 기도를 하고 또 낮은 목소리로 "주 예수 애워, 주예수 애워"를 불렀다고 한다. 선교사가 들어온 1885년 후에도 예배시에 중국 찬송가를 신도들이 뜻도 모르면서 사용하였다.
1892년 H. G. Appenzeller는 악보 없는 한국어 번역 찬송 27편을 편찬 찬미가를 출판하였다. 1894년 H. G. Underwood가 한국 최초의 악보 찬송가로 117편의 찬송을 4성부 악보와 같이 찬송가로서의 규모를 갖춘 한국 찬송가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서양음악 보급에 기초를 놓은 가장 중요한 찬송가로 9편은 한국인의 창작 찬송이고 108편은 번역 찬송이다. 1895년 54편을 수록한 찬셩시가 가사판으로 출판되었다.
1895년 81편의 찬미가(1892년)의 증보, 수정판을 출간하였다. 1897년 한국인의 창작찬송 "우리 죄악 심중하야" 배재학당 학생이, "유태국에 나신 구주"는 이화학당 여학생이 작사하여 두편이 수록되어, 90편이 수록되어 3판이 나왔다.
1898년 찬셩시 2판 가사판이 84편으로 증보되어 출간되었는데 최초로 운율시편가 14편을 Alexander A. Pieters가 한국어로 운율화한 것이다.
1900년 찬미가 5판은 176장으로 글자를 크게 하여 노인들이 보기 쉽게 하였다. 또한 찬셩시3판이 87편으로 한국인 창작곡 3편이 증보 출판되었다.
1902년 찬미가 6판이 205편으로 증보 가사판으로 출간되었다. 또한 찬셩시 4판이 37편 증보 출간되었다. 1905년에 찬미가 7판이 증보, 수정 출간되었고, 8판도 곧 출간되었다. 찬셩시 5판이 151편으로 출간되었다.
1908년 연합통일찬송가인 찬숑가가 262편을 수록하여 가사판으로 출간하였다.
1931년 신정찬송가에 6편의 한국인 창작찬송으로 총314장으로 출간되었고, 1935년 신편찬송가는 400장으로 출간되었다. 1949년 조국의 해방을 기념하여 합동찬송가 간행, 1962년 새찬송가 간행, 1967년 한국인 작사 작곡 27편을 포함한 600곡의 개편 찬송가 간행, 1983년 통일찬송가를 100주년 기념으로 발행하였다.
3) 찬송가 번역
이 부분의 자료를 수집할 수 없어 안타까움이 있다. 그래서 Albert Schrd의 논문인 '찬송가의 초창기 번역에 관한 연구'를 요약하려고 한다.
① 편집과정
한국 최초의 찬송가집은 1893년 Horace G. Underwood에 의해서 편집되고 1894년에 일본에서 발행된 찬양가와 1895년에 감리교회에서 편집한 찬미가와 1896년 평양주재 장로교회에서 편집한 찬셩시등이다.
찬양가의 영어서문에 찬양가 이전에도 1892년 G. Heber Jones목사가 그 당시 각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약 30수의 찬송가의 가사를 인쇄한 일이 있었다 하며 장로, 감리 양교파에서는 찬송가편집위원회를 구성하여 사업계획을 세웠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를 H. G. Underwood가 교정하고 나서 선교의회에 인쇄를 의뢰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자적으로 인쇄한 것이 찬양가이다.
여기에 반발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별도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감리교파 위원인 G. Heber Jones와 Miss Rothweiler가 1895년에 83수의 찬송가를 가능한 번역자를 명기하여 찬미가를 발표하였다.
찬셩시는 평양 주재 선교사들이 발간하였다
② Underwood와 Baird의 번역
Underwood는 번역자나 작가나 한국인인 경우에만 그 사실을 명시하였기 때문에 찬양가에 있어서 조차 어떤것이 Underwood의 번역인지를 모른다.
Baird의 번역은 먼저 찬양가26, 찬미가32, 찬셩시44장의 2절을 볼 때 {ㅅ랑ㅎ오}가 빠졌기 때문에 찬양가가 간단해졌고 찬셩시도 따로 찬미가의 그것을 고치었다. 2절 3, 4행을 찬미가의 경우에는 교정을 필요로 하는 미열성으로 미루어 Mrs. Baird의 원번역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찬미가의 이중적 태도는 그의 번역을 초기의 잘 통하지 않은 한국어로 옮겨진 찬송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말로 고치기에 힘을 썼을 것이다.
③ 기타 작가의 번역
찬양가 90, 91장과 찬미가 50장과 찬셩시 51장을 비교하면, 찬셩시 51장은 Mrs. Baird로 되어 있고, 찬미가 56장은 Underwood로 기재되어 있다. 찬양가 90장과 찬셩시 51장은 그 전체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대략 비슷하나 종부에 있어서 너무나 차이가 많아, 다른 사람에 의해 따로 번역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반면 찬양가 91장과 찬미가 56장은 차이가 없으므로 동일인의 번역으로 간주할 수 있으나 찬셩시에서는 Mrs. Baird로 되어 있으므로 Mrs. Baird의 번역을 Underwood가 손질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찬양가 56장과 찬미가 14장을 비교할 때, Underwood의 번역을 Mr. Miller가 전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찬양가 109장과 찬미가 79장을 볼 때, Underwood가 타인의 번역을 수정한 다른 경우와 비교해 볼 때 확실한 단정은 어렵지만 미상의 번역가가 이미 번역해 놓은 찬송가를 Underwood가 고친 것으로 볼 수 있다.
④ 역자 미상의 번역
찬양가 1장과 찬미가4장을 비교하면 한사람에 의해서 번역되고 Underwood가 타인이 번역한 것을 수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찬양가 95장과 찬미가 9장은 하나의 원번역 작품을 두번에 걸쳐 고친 것이 아닌가 한다. 찬양가가 Underwood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니 찬미가도 원번역가와 Underwood의 찬양가를 동시에 참조하면서 수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에서 미루어 볼 때 찬미가는 하나의 원번역자를 찾은 것이 아니라, Under wood가 수정하고 편집한 것을 다시 교정한 것같다.
이렇게 보면 한국어로 된 모든 찬송가를 찬양가의 경우는 가능한 한 다 모아 실었으나, 찬미가와 찬셩시는 표현과 음율을 고려해서 선택하였다. 초기 한국찬송가의 번역자는 상당수 한국인과 선교사들에 의해 번역되었으나 원번역자를 충분히 발히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으며, 문헌상 더 고찰하여야 되겠지만 Underwood가 편집한 것을 찬미가에서 참조하는, 세 이본간의 형태상의 이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영향
번역가로서 찬송가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한 전도를 위한 것이었으나, 개화기의 시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요한 번역 사업이었으며, 또 노래 형식을 널리 보급시킨 공적이 매우 크다.
기독교의 성경과 찬송가의 가사 번역이 언문생활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1931년 Appenzeller편으로 된 찬송가 서문에 "조선말로 찬미를 쓰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니 조선교회에서 처음에는 지나(支那) 찬미에서 얼마를 써보았으나 한문에 너무 흘러 부르나 그 뜻을 알 수 없었으며 또 서양곡조에 조선글을 부치고 보니 구절과 억양이 잘 맞지 않어 크게 곤란하였나니 찬미를 짖고 쓰는 이들이 이점에 있어서 오래동안 많은 애를 썼나니라"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얼마나 애들을 썼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로써 언문일치의 신소설운동과 신시의 모체인 창가운동이 전개되었으니 한국내의 기독교의 성경과 찬송가 번역 사업은 실로 한국민의 언어 및 문자생활에 지대한 은택을 입혔던 것이다.
1886년 배재학당에서는 성경, 영어, 독본, 한문,... 창가, 도화등의 학과목을 교수하였고 이때 창가라는 음악 시간에 부르는 노래는 초기에는 당분간 찬송가를 가르치며 부른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보면 당시에는 창가에 맞는 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찬송가가 성행하게 된 것은 기독교회가 전국에 걸쳐 속속 세워짐에 따라 신도의 증가와 이미 언급한바 있는 선교사들의 찬송가집 출판이 주요 원인도 되겠지만, 교회와 마찬가지로 역시 속속 설립되는 신교육 기관인 최신 학교들의 증가도 그 일역이 된 것이다. 찬송가만 가르치던 초기 학교도 점차로 외국민요 따위를 번역하여 가르쳤으니, 주로 미국, 영국 민요들이 많이 퍼진 것 같다.
한국에서 부르게 된 개신교의 찬송가는 이 땅의 서양음악을 형성케 했을 뿐 아니라, 창가운동과 애국운동을 전개시켰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문학 운동에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국의 창가는 단지 노래 부른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창가를 불렀지만, 그들에게 창가는 하나의 즐거움을 나타내는 방편으로 불렀겠으나, 우리나라 창가는 그 의의가 자못 크고 신중했던 것이다.
이 시대에 부르는 우리 학도들이나 민중들의 노래가 즐겁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개화기 개신교의 찬송가는 처음에는 순수한 교회의식 목적에서 부르던 것이 시세에 따라 발전되어 창가의 형태로 탈바꿈하면서 세속적인 생활내용을 내포한 창가로 변모했고, 찬송가와 창가라는 모체를 통하여 민족의 울분과 비통을 흐느끼는 애가의 역할도 했던 것이라 보아 마땅하다.
교회안에서의 찬송가가 창가화되면서 사회로 튀어나와 사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896년 음력 7월25일인 고종황제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기독교신도들이 서울 새문안 교회에 모여 축가를 불렀다는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다.
이 때에 부른 노래는 1950년에 발행한 합동찬송가에 실린 제486장은 원래 영국국가에 축하의 가사를 붙여 부른 곡이었던 것이다. 이때 부른 축가의 가사를 누가 썼으며, 찬미가에 실린 가사는 누가 쓴 것인지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같은 해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에 배재학당의 학원들이 부른 우리 애국가의 가사(곡은 영국의 Auld lang syne)는 윤치호의 작사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축가의 가사도 동인의 것이리라 추측해도 무방한 것 같다.
이보다도 조금 앞서서 즉 1896년 4월 11일자 독립신문(1896년 4월 7일 창간- 순한글 전용) 제3호 2면에 「셔울 슌쳥골 최돈셩의 글」이라고 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었다.
대죠션국건양원년 ㅈ쥬독닙깃버ㅎ세 텬디간에사ㄹ되야 진츙보국뎨일이니
님군긔츙셩ㅎ고 졍부를보하ㅎ셰 인민들을ㅅ랑ㅎ고 나라긔를놉히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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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것도몰은사ㄹ 감히일언ㅎ옵내다 「셔울 슌쳥골 최돈셩의 글」에서
이와 같이 이 계통의 작품 총 27편이 수록되었고, 작가는 교원과 학생, 관리, 교인 기타로 되어 있고 창작을 전업으로 하는 시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창가로 불리어졌는지에 관해서 고증이 없으므로 모르겠지만, 그 문맥이나 용어와 표현법이 개화사상을 여실히 나타내는 근대적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개화기에 일어난 창가운동은 점차 애국가 운동을 전개시켰다. 그러므로 당시의 창가와 애국가의 개념은 동일시해서는 아니 된다 보겠다. 애국가인 창가는 교회나 학교, 또는 집회 장소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애국가가 불리어졌다.
이렇듯 애국가를 많이 부른 것은 일본이 강제 합방하기 이전부터 국운을 염려한 나머지 경고·개몽적 생각에서, 또는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려는 생각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아 마땅하다.
애국가운동이 활발했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부러ㅎ셰 부러ㅎ셰 부국강국 부러ㅎ셰
아국인민 일심되기 자나개나 축수ㅎ셰
우리만민 협력ㅎ야 정부ㄹ 도와주셰
성심으로 알지ㅁ고 열심합력 애쎠보셰
당시 애국가류는 대개 4·4조 2행이 한 짝이 되어 한 연의 구실을 하고 있는 형태의 것(이런 것이 대부분)과 둘째는 기술한 바 있는 '니필균의 ㅈ쥬독립가'에서 같이 '강강수월래'나 기타 여러 잡가에서 볼 수 있는 한국 재래의 양식으로 된 한 사람이 일정한 가사를 선창하면 여러 사람이 복창식으로 제창하게 되어 있었다.
독립신문에 발표된 애국가류를 그 형태면에서 고찰할 때 이 애국가류가 이조시대의 가사나 시조와 마찬가지로 4·4조의 자수률을 가지고 있지만, 거기엔 시조나 가사와는 달리하는 특색이 눈에 띤다.
재래의 시조는 초중종의 3장으로 된 행구분을 가지고 있으나, 애국가류에는 4·4조 2구가 1행이 되어 마치 한시에서처럼 8·8조 2행이 한 짝이 되어 연(stanza)의 구실을 하고 있다.
한국인이 창작한 찬송가나 찬미가의 가사가 4·4조로 되어 가 창할 수 있게 된 형태이고 보면 애국가보다 3, 4년 앞선 찬송가의 영향을 애국가의 가사가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작사자들(애국가)은 젊은 인텔리로서 독립신문을 구독하는 개화사상가요 기독교인들이라는 점에서 찬송가가 애국가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다.
외국 노래, 외국 찬송가곡에 우리 가사만을 붙여 부르는 단계를 지나 창작에로 방향 전환을 보이기 시작했으니, 김인식은 평양 시내 소학교 운동회에서 즐겁게 노래할 간이한 노래를 작곡했으며, 조국의 장래를 속마음으로 걱정하면서 젊은 학도들에게 경각심을 일캐우는 학도가를 지었는가 하면, 정서적인 작품, 즉 풍경을 그린 표모가를(빨래하는 아낙네의 모습을 그린)작곡한 것이다.
운동회에서 부르는 노래와 학도가의 형식과 선율은 유아적인 것으로 보아 좋으며, 그중 학도가는 그런대로 약간의 비약적인 형식이라 보아진다. 더욱이 표모가는 7·5조의 형식이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기법이 그 시절에서 측정하여 비상한 진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표모가는 장차 나타날 예술가곡의 미약한 씨앗의 역할이라볼 수 있겠고, 한편 이 시절, 즉 한일합방이라는 수치스럽고 울분한 마음을 달래며, 망국의 슬픈 감정과 함께 일어난 절망감에서 고국을 떠나는 많은 지식인들 속에 도산 안창호의 거국가가 생겼다. 가사는 도산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누구의 작곡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이곳 역시 하나의 창작이라는 초창기의 선각행위로 보아야겠다.
이처럼 창가가 찬송가에서부터 애국가, 권학가, 독립가, 거국가 등등으로 변천 내지 발전의 양상을 띠었던 것은 시대감각을 민감하게 나타냈을 뿐 아니라, 일반민중생활과 애환을 같이 하면서 뿌리를 박았던 것이다.
1901년에 한국초유의 악대가 조직되어 독일인 Franz Eckert을 초빙하고, 대원들에게 정식으로 악리를 가르치며, 악기 다루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음악교육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이고 정규적인 음악교육이라 보겠다.
그러나 한국의 음악교육은 주로 교회와 성악대, 미션스쿨 등에서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음악교사가 희귀했던 까닭에 관립학교에서는 배정된 시간이라도 음악 시간다운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미션스쿨에서 초창기부터 음악 교육이 이행되고 있음에 비추어 음악 교육의 필요성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초등교육에서도 실시하려고 사범학교에 일본인 교사를 초청, 임용했던 사실을 알 수 있고, 또한 관립에서는 손을 대지 못하는 실정에 놓여 있은 둣하다.
1920년에 도일한 난파 홍영후는 바이얼린곡으로 '哀愁' 를 작곡하면서 한민족의 짓밟히는 처참하고 애통한 운명을 구슬프게 그려냈다. 이곡이 후일 김형후의 작사 '봉선화'가 붙은 국민의 노래이며 차원높은 예술가곡의 형태로 등장한 것이다.
1922년에 李尙俊이 엮어 낸 '최신유행가집'에 보이는 靑年警戒歌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민족이 부르기에 적절하고, 불러서 속시원하게 되는 노래로 밀어닥치는 怒濤와도 같이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하나의 유행가로 등장한 것이다.
또한 동요는 1920년대 초기에 평양숭실전문대학에서 수학하던 박대준이 동요 '가을 밤', '꽃봉투', '가을', '물새'등 13곡이 작곡되었다. 1921년 소파 방정환이 '사랑의 선물'이라는 동화집을 내고, 2년 후에는 '어린이 신문'이라는 월간잡지를 자신이 편집 발행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색동회'가 조직되고, 전에 없었던 어린이의 발전을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무렵 즉 1924년에 윤극영작인 '반달' 노래가 발표되자 경향각지에서 남여노소들이 애창했다. '따리아회'를 조직하고, 어린이 수십명을 모아놓고 노래를 지어 가르쳤다.
이 회에는 '새싹회'회장인 윤석중 어린이가 끼어 있었고, 후일 많은 동요가사를 지어 작곡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이렇듯이 1920년대에 예술가곡에서 동요로 분립되던 기세는 가라앉을 줄 모르고 계속 창작가들의 작품이 나오며 노래 없는 어린이들에게 풍요한 선물로 되어 갔다.
한국최초의 신체시인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것이 1909년의 '소년지'였으며, 당시 찬송가의 발행 부수가 6만이었고, 2년후에는 22만 5천부, 이렇게 해서 20년 동안에 발행한 총 부수가 무려 87만 4천 5백부에 달했다고 하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최남선의 작품은 8·6조 6·4조 6·5조 등의 다양한 율조로 나타나는데 8·6조나 5·4조등의 다양한 율격은 찬송가의 영향이며, 이는 기독교의 번역 사업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찬송가의 영향을 받은 창가, 애국가, 학도가, 거국가 등을 찬송가와 함께 부르면서 애국, 독립정신과 부지런해야겠다는 자각과 경각심을 고취시켜, 힘과 용기를 불어넣었으며, 3·1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 작가들은 거의가 개화사상을 기조로 하고 애국사상과 자주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 특히 찬송가의 영향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이라 할 것이다.
3. 기독교시 형성
장구한 민족사의 흐름을 통해 근대화의 전환점이 되었던 시기가 갑오경장이란 것은 틀림없지만 그 이전 임진왜란 이후 실학사상이 대두될 무렵부터 근대화의 자각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천주교가 전래되고 개신교가 수용된 이후 우리의 사회구조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의 정신적 사상과 외래문화가 수입될 때는 자국의 전통적인 문화와 주체적인 사상이 혼합되어 일대 변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것은 한문화와 사상이 뿌리를 내려 찬란히 꽃필 때는 독자적인 발생보다 외래문화와 사상의 수용관계에서 더 발전하여 자생적인 창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기독교 즉 개신교는 자생적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 즉 영적 진공상태에 선각자들은 기독교만이 이 나라가 살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국외에 가서 직접 들여와 성경과 찬송가가 출판 보급되었는데 성경은 문명퇴치 언문일치 운동과 산문체 스타일 언어의 풍부한 비유 등에 이바지했고 찬송은 외국의 고전파와 낭만파의 시가로 그 형태는 8ㆍ6, 7ㆍ7, 8ㆍ8, 8ㆍ7, 7ㆍ6, 6ㆍ6조 등이 중심인데 이러한 다양한 내재율은 4ㆍ4조의 전통적인 리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이광수에서 윤동주까지
(1)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1950?)
일본에서 유학할 무렵인 명치학원에서 성경을 배우고 미션계 계통인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개화주의자인 그가 보수적인 상황에서 신식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고 구원시키려는 선각자로서 인도주의적인 기독교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작품인 (하나님), (내죄), (미쁨), (가시관), (사랑) 등에서 기독교의식을 추출할 수 있는데, 이들 작품에는 의와 진리와 사랑을 실행하며 진정한 양심의 신념을 노래하고 있다.
(기도)는 금강산의 비로봉을 다녀온 후 쓴 것으로 자연의 신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구약의 이미지를 인용하여 평화와 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자신이 순교적 번제물이 될 것을, (미쁨)에서는 요한복음 13:37-38절의 베드로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허위 허식과 죄악의 근원인 거짓을 물리치고자 참회하는 마음을, (사랑)에서는 우주의 원리 안에서 모든 이웃에게 사랑과 평화를 베풀어 악의 미움ㆍ원망 등을 떨쳐 버리자고 노래한다.
입으로 지은 죄는 바다와 같사옵고
몸으로 지은 죄는 산과 같사옵고
마음으로 지은 죄는 허공과 같이 끝간데를 모르나이다.
조그마한 혓바닥이 어떻게 그리도 많은 죄를 지었던가?
남을 헐고,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남의 마음을 더럽게 하고
이 모든 죄를 지은 나의 혀를 불로 살아 버리오리까?
만일 내 혀를 살라버려 바다와 같은
이 죄를 소멸할 수 있을진대, 기쁘게 사르오리다.
( 내 죄 ) 중에서
이 시는 장시 형태로서 위에서 인용한 내용은 작품 내에서 여러번 반복되는 부분이다. 그는 바다ㆍ산ㆍ허공과 같은 상상적인 비유로써 죄의 깊이ㆍ넓이ㆍ높이 등을 표현하여 마음과 언행을 통해 지은 죄를 눈물 흘리며 참회하는 것이다. 입과 몸으로 지은 죄를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바다와 산' 같은 구체적인 사물로 표현했지만 마음으로 지은 죄는 불가시적이기 때문에 허공과 같은 관념적인 비유로 표현하였다.
하나님, 당신은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어른이십니다.
당신의 손에 지어진 나는 당신의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가비로 바다물을 되어 보는 것과 같고
내 뼘으로 하늘의 둘레를 재어보는 것과 같겠읍니다.
당신의 지혜와 내 지혜를 비기는 것은 마치
해에 반딧불을 비기는 것과 같겠읍니다.
(하나님) 중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비교하여 피조물의 한계성을 생생히 보여준다.
(2)이용도( 李龍道1901-1933)
감리교 협성신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목사로서 활동하며 그의 산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투철한 신앙관 속에서 토해내는 생명의 기도 소리를 작품으로 썼다.
살림이 가난하여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세상이 어려워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나라는 망하여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사회는 소란하여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배울 길은 막혀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사람들이 욕하고 비웃어도 주님은 사랑!
몸은 병들어도 주님은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육신은 죽어도 주님은 사랑이니이다.
(주님의 사랑) 전문
개인적 삶의 고뇌와 갈등보다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 신에게 간구하며 사랑을 찬미하는 그의 시적 분위기는 마치 성경의 한 구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의 많은 작품은 운율과 시적인 이미지보다는 산문체의 서술 형태로 자기의 심정을 고백하여 신앙적 삶을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의 단면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진리의 전달보다는 행동의 실천에 있고 단순한 믿음보다는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다.
똑같은 구성법에 주제와 내용도 중복되는 것이 많으므로 지루한 느낌이 드나 읽는 이에게 직접 가슴으로 와 닿는 생동감이 있다. 그의 시관은 예술적인 아름다움보다 신앙심에 투철함으로써 생의 기쁨과 감사를 간구하며 사랑의 구현을 추구하는 수도자의 모습으로서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한다.
(3)남궁억(南宮檍1863-1939)
일하러가세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9:37-38절의 내용을 가사에 삽입한 것으로 오늘날도 찬송가로 널리 불려지고 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이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봄돌아와 밭갈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동산
곡식익어 거둘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4)윤동주(尹東柱 1917-1945)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일본의 구주 복강의 형무소에서 옥사했으며 유고 시집도 해방후에 출간되었다.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1948년, 육사시집 1946년, 북간도 영동촌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연전, 동지사대학 등 미션계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경건한 신앙심과 이웃에 대한 희생적 사랑의 체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창작했다.
특히 십자가, 팔복, 새벽이 올 때까지 등에서 기독교 의식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현실에 순응하지 못하고 내적 좌절과 갈등의 자의식에서 야기되는 순결 의식을 속죄의 희생양으로 나타냈다. 불합리한 사회적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을 윤리적 원죄의식의 부끄러움으로 표출시켰다.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에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십자가) 중에서
그는 행동적이기보다는 내적인 자기 성찰과 사색을 통해 자의식 속에서 혼자 괴로워한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괴로움과 행복을 함께 지닌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시켜 모든 이웃을 위해 희생양이 되겠다는 순종의 결단이 나타난다.
육적인 고통을 통한 그리스도의 괴로움은 신과 단절된 모든 인간을 다시 구원시킬 수 있는 대속의 피이기에 한편으로는 행복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어두운 하늘 밑에" 처한 윤동주의 현실적 삶은 그의 시에 민족과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희생양이 되겠다는 행복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제 말엽 많은 선각자들이 일제의 탄압과 희유책에 의해 민족과 조국을 버리고 변절하지만 그의 순교인적 삶엔 기독교적 양심과 희생적 사랑이 밑받침을 이루었을 것이다. 폭정이 심한 일제시대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윤리적인 자의식에서 볼 때 참으로 부끄러운 일로서 죄인으로 느꼈을 것이다.
2) 김현승(南風 金顯承1913-1975)
茶兄 金顯承은 모태 신앙으로부터 태어나 엄격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고 미션 계열인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서정적 낭만주의와 감상주의의 시풍에서 출발한 그는 60년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고독과 신앙의 문제가 작품의 구조를 이루며 내적인 갈등을 체험한 후 70년대 다시 신앙에 귀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의 고독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신앙에 대해 회의하면서 부터 시작되지만, 한편으로는 신과 인간, 현실과 양심의 대립적인 관계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모더니즘의 신선한 언어감각과 견고한 이미지의 투명성을 통해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그의 형이상학적 시풍은 개인적 구원의 대상으로 신을 찾게 된다.
특히 중기에는 인간적 삶에서 오직 고독과 그의 자의식에서 배태되는 신앙적 회의로 신과 정면 대결하여 신을 부정하였지만, 죽음에 직면해서는 다시 참회하며 신을 발견하는 신앙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신앙적 회의란 신을 부정하며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확신하며 자각하는 영적 체험의 단계라 할 수 있다.
더러는
沃土에 덜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것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 눈물 -
3) 박두진(兮山 朴斗鎭 1916- )
혜산(兮山)의 기독교시에서 자연을 통해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며 신의 섭리와 자연의 신비감을 노래한다. 그의 시에서 이 자연의 공간은 밝음과 어둠, 약자와 강자가 화해하는 장으로서 함께 공존하는 낙원의 모티브로 드러난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집단적 구원으로서의 기다림과 희망을 갖기 때문에 현실의 좌절, 죽음, 상실 등을 극복하기 위한 갈등과 대결 의식이 중심을 이룬다. 초기에는 자연과의 융합으로 희망과 경건한 신앙심을 예찬하다가, 중기 이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에서 구원의 추구보다 사회의 모순과 삶의 불합리성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역사의식을 반영하였다.
후기에는 (사도행전, 수석열전, 포용무한)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고백형태로 나타내거나 수석을 현상학적으로 관조하는 등 시적 체험과 종교적 체험을 일치시키고 있다. 그의 시는 언제나 능동적인 입장에서 의미를 부여하여 미래 지향적인 생명력이 담겨 있다. 또한 시어는 사변적이지만 유창한 리듬이 조화를 이루어 강한 호소력을 자아낸다.
북망 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읫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엇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묘지송-
4) 박목월(木月 朴泳鍾 1916-1978)
1950년대에 들어와서 기독교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초기의 국가적 서정성에서 출발하여 시집 (난ㆍ기타) 이후에 평범한 일상적 삶에 눈을 돌리면서 신앙시를 썼는데, 이러한 작품으로는 (밥상 앞에서, 전화, 효자동, 정원, 이 사람을, 빈컵) 등이 있다.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 보아 우주적 질서를 찾으며 소박한 향토성을 시종일관 추구해 온 그는 순수한 객체로서 자연 질서를 묘사하다가, 후기에는 자연과 인간을 합일된 조화의 경지로 보고 있다.
아우의 죽음을 보고 형의 애절한 심경을 읊은 (하관)같은 작품에서는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현실적인 삶을 초월하고자 하는 경지를 보여 준다. 여기서 그는 단지 슬픔의 상황이 아니라 담담한 자세에서 인간의 유한적 능력의 한계 앞에서 모순을 느끼며 고독한 존재로서 구원을 간구한다.
관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서 얹어주고 (하관) 중에서
이 작품에서 '밧줄'의 이미지는 인간과 신의 거리를 이어주는 구원의 표상이다. 그는 생활의 평범한 소재를 통해 신을 찾고 평범한 일상사의 죽음에서 신의 은총을 발견하며 삶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으므로 시 쓰는 작업을 신앙 생활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국 백성을 사랑하시어 세종대왕을 통하여 한글을 주셨고, 정책적으로 많은 노력이 있었으면서도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어인 한글을 자유스럽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었으니 안타까움이 얼마나 더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참다 못하여 한국 백성을 깊은 잠에 누이시고,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인 한글 사용을 열망하게 마음을 주셨다. 그런 후에도 일제의 강점기를 통하여 더욱 사모하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그 한글에 대하여 연구하도록 백성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고, 그래서 많은 성과가 있었으며, 한글의 저변화, 보편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그 한글을 우리 손으로, 입으로 얼마나 학대하고 있는가? 참으로 가슴 아픈일이 아닐 수 없어 본 논문에서는 그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한국 문학사적 측면에서 기독교 시문학으로 한정하여 고찰하였다. 본 논문을 준비하면서 느낀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한국민족을 이렇게, 여기까지 사랑하셨고, 또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한글과 기독교라는 선물을 주신 것이다.
한국 기독교시의 형성배경을 통해서 그것을 알 수 있었고, 찬송가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한국인에 의한 찬송가가 소개되었으며, 그것이 교회와 학교를 통하여 한국 사회에 보급되면서, 이 땅의 서양음악을 형성케 했을 뿐 아니라, 창가운동과 애국운동을 전개시켰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문학 운동에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창가가 찬송가에서부터 애국가, 권학가, 독립가, 거국가 등등으로 변천 내지 발전의 양상을 띠었던 것은 시대감각을 민감하게 나타냈을 뿐 아니라, 일반민중생활과 애환을 같이 하면서 뿌리를 박았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흐름이 애국하는 정신이 바로 기독교를 믿고 깨우치는 일이며, 반면 기독교를 믿는 것은 바로 애국 애족의 뜻인 동의 개념이 은연중에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많은 시인들을 고찰하는 중에, 시간을 거듭하면서 기독교가 한국 현대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많은 기독교 시를 발표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박목월은 한성기의 시를 읽고 답을 하였는데 기독교 신앙의 저변과 함께, 삶에서 우러나는 신앙고백적 문학성을 표현 한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참 고 문 헌
1. 1차자료
1. 양영선, 개화기의 찬송가와 창가의 변천 및 사회문화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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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lbert Schrd, 찬송가의 초창기 번역에 관한 연구, 고대, 1972
3. 구병림, 「한국 개화기의 민주교화 사상연구」, 건대석사학위청구논문,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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