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순이는 예쁘다] 07
S#1. 덕수궁 돌담길 (일몰-회상)
흑백 화면이다. 눈발이 흩날리는 황량한 겨울 거리. 퇴근길의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캐럴, 구세군의 종소리 사이로 바삐 오가는 사람들...
저만치 인순이 걸어오고 있다. 커다란 가방 하나 들고 초췌하고 황량한 시선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건널목 앞에 서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본다. (전에 교도소 나오던 장면과 같은 옷차림)
인순 : (N) 막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가 생각난다.
세상은 탐욕과 무질서, 그리고 남의 행복을 가로채 자기 뱃속을 채운 사람들로 가득해보였다...
아무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가 죽거나, 내가 살거나...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퇴근 인파에 떠밀려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인순의 뒷모습.
S#2. 같은 장소 (현재)
화면이 컬러로 바뀐다.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길. 총총 오가는 직장인과 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바람이 불면 낙엽과 함께 타블로이드 신문 한 장이 구른다.
표지에 소제목이 보인다. <감동 인터뷰- 우리 시대의 마지막 천사, 지하철녀 박인순씨를 만나다>
인순 모녀의 사진도 올려져있다.
인순 : (N) 그런데, 지금의 나는... 바야흐로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한숨) 사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돌담길 쪽으로 방송 장비와 차량이 보인다. 카메라가 상우를 비추고 있다.
버버리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상우, 고궁을 배경으로 리포팅 하고 있다.
상우 : 음악과 미술이 한 데 어우러진 덕수궁 문화 대축제가,
올해는 더욱 다양해진 레퍼토리로 관람객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S#3. 보도국 사무실 (밤)
씬1의 뉴스 화면이 켜놓은 티브이에 흐르고 있다.
상우 : 고궁의 특색 있는 문화 축제들과 함께,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마음껏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이상, 케이비엔 유상우였습니다.
한 귀로 흘려들으며 노트북 앞에 앉아 일하는 상우.
다가오는 재식.
재식 : 박인순이 취재... 왜 안하겠단 거야.
상우 : (힐끔 본다)
재식 : 내 말 듣고 있어?
상우 : (시큰둥) 문화부에서 다룰 껀이 아니잖아요.
재식 : 어떡하든 갖다 끼워 보라 그랬잖아.
상우 : 에이... 그럼 재미 없죠. 의미두 없구요.
재식 : 너, 박인순한테 악감정 있냐?
상우 : 네?
재식 : 안 그럼 왜그래? 친구라며?
상우 : (생각하다가) 전 그런 취지에 동의 못합니다. 누구 하나 영웅 만들기로 작정하고 달려드는 거요.
인순이 인생을 위해서두 결코 권장할 일이 못 된다구 생각해요.
(일어난다) ...제 소신일 뿐입니다. 이해해주세요.
자료철 들고 나가버린다.
어이없는 재식. 지켜보다 역시 어이없는 진태.
재식 : 왜저러냐.
진태 : (피식) 소신은 무슨 소신입니까아. 심통 부리는 거지요. 척 보믄 모르십니까.
재식 : 심통을 왜 부려?
진태 : (곰곰 생각) 짜식, 저거... 아무래두 수상해.
재식 : 뭐가?
진태 : 아,아닙니다.
S#4. 선영집 외경 (밤)
인순(E) : 예에? 시사 토론요?
S#5. 선영집 식당
찻잔 놓고 마주 앉은 인순과 선영.
인순 : (질려있다) 토론 프로에... 제가 왜 나가요?
선영 : 괜찮아, 나가서 몇 마디 대답만 하면 돼. 저번처럼 너 혼자만 불러다놓구 집중 질문 하는 것두 아니구,
이런 프로그램에 나가면 니 이미지에두 좋아.
인순 : 엄마,
선영 : 그 프로그램 담당 작가한테 내가 전에 신세를 많이 졌어. 거절할 수가 없드라. 다른 건 몰라두 이건 꼭 해줘야 돼.
인순 : 토론 프로면 엄청 똑똑한 사람들이 나오는 거 아니에요? 제가 거기가서 먼 토론을 해요?
선영 : 누가 토론을 하래니? 토론자가 아니구 시민논객이래... 말하자면 초대손님 같은 거야!
토론은 토론자들이 하는 거구, 넌 그냥 객석에서, 준비한 멘트 몇 마디 예쁘게 하면 되는 거야.
인순 : 왜 하필 저를 부르는 건데요?
선영 : 니가 요 며칠 최고루 화제의 인물 아니니... 어쨌든 앞으론 엄마가 이런 거 들어오면 더 신중하게 결정할께.
안그래두 몇 군데는 이미 거절했어.
인순 : (한숨)
선영 : (일어나며) 아휴, 정신이 하나두 없다. 운전이랑 심부름 해줄 사람부터 당장 구해야겠어!
기획사두 몇 군데 좀 알아봐야 하구,
인순 : 엄마.
선영 : 괜찮아, 걱정하지마. 엄마만 믿어. (웃고) 니가 대운이 열리긴 열릴 모양이다. 그 실술 하구두 인기 폭발이라니.
엄마 일두, 여러 군데서 제안이 들어왔어. 조건이며 역할이 다 좋아. 어쨌든 이게 모두 니 덕분이다. 고맙다.
인순 : (결심한다) 엄마, 저 이제 그만 할래요.
선영 : 뭘 그만해?
인순 : 그냥 다요. 인터뷰구 방송 출연이구... 그만 할래요.
선영 : 촌스럽긴! 긴장할 거 없어,
인순 : 긴장해서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저 안해요. 시사토론이구 뭐구 앞으론 다 사양할래요. 아셨죠? 저 절대 안 해요!!
일어나 후다닥 도망가버린다.
당황하며 쫓아나가는 선영.
선영 : 인순아! 인순아!!
순간, 울리는 휴대폰벨. 어쩔 줄 모르며 전화 받는 선영.
선영(E) : 네에...어머, 김감독님! 안녕하셨어요?
S#6. 정아방 (밤)
노트북으로 인터넷 보고 있는 정아.
슬몃 노크하고 문을 여는 인순.
인순 : 안 자니? 들어가두 돼?
정아 : (반가운) 언니,
침대로 와서 앉는 인순.
인순 : 뭐 하구 있었어?
정아 : (웃는다) 언니 나온 라디오 프로, 다시 듣구 있어요.
인순 : 어어후, 그런 걸 왜 자꾸 들어? 귀 버려!!
정아 : 너무 웃겨요.
인순 : 야, 제발 그만 좀 해. 나 진짜 괴로워. (침대에 팔 괴고 벌렁 눕는데)
정아 : (곁에 와서 같이 나란히 눕는다) ...
인순 : (잠시 조용히 누워있다가) 너... 요새는 왜 하프 안 켜니?
정아 : 재미가 없어서요. 켜든 안 켜든 엄마가 관심 없거든요.
안 켜면 안 켠다구 키면 킨다구 잔소리 했는데, 요샌 잠잠해요. 언니 덕분에.
인순 : 허,
정아 : (씩 웃고 뭔가 곰곰 생각) 근데 언니... 저어...그 오빠 말이에요.
인순 : 오빠?
정아 : 근수 오빠.... 맞죠? 언니랑 같이 자란 동생이라는...
인순 : 근수? (벌떡 일어난다) 근수가 왜?
정아 : (같이 일어난다) 생각해봤는데...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나, 그 오빠 만났어요. 돈이... 필요한가 봐요. 언니한테 조만간 찾아올지 몰라요.
인순 : (휘둥그레진다) 무슨 말이야?
S#7. 근수 방안 (밤)
극히 비좁은 쪽방. 세간 살림이라곤 옷가지와 가방 두어 개 뿐인 방안.
물병과 소주병과 담뱃갑 라면봉지 등으로 어지럽혀진 방안. 한뼘 창문으로 이웃의 불빛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어두운 방안에 취해서 누워있는 근수.
진동으로 울리는 휴대폰. 무시 하고 받지 않는 근수.
길게 울리는 휴대폰.
S#8. 인순방 (밤)
초조하게 왔다갔다 하며 전화 거는 인순. 다시 걸어본다. 여전히 안 받는다.
안되겠다. 음성을 남긴다.
인순 : 근수야... 근수야, 누난데... 전화 좀 해. 알았지?
S#9. 근수 방안 (밤)
메시지 수신 신호 불빛이 반짝거린다.
희미하게 눈을 뜨는 근수. 불빛을 보고 휴대폰을 집어든다.
심드렁히 번호를 내려다보다가 저만치 휙 던져버린다.
S#10. 고모집 마당, 툇마루 (다른날 낮)
옥선과 인순, 마주 앉아 과일 깎아 먹는다.
옥선 : 울 엄마 살았음 얼마나 좋아라 하실까. 아, 우리 인순이 라디오두 나오구 신문두 나오구,
일케 유명인사 된 거 아시믄 얼마나 기뻐하셨을까나.
인순 : 어어후, 유명인사는 무슨.
옥선 : 유명인사지, 그럼! (주위에 들으란 듯 크게) 지하철녀!!
인순 : (당황) 고모,
옥선 : 이것아, 이게 다 니 할머니가 하늘에서 보살펴주는 거야... (눈물 찍는다)
인순 : 맞아... 나두 그렇게 생각해, 고모.
옥선 : 흑... 불쌍한 울 엄마... 호강 한 번 못하구 돌아가시구... 맨날 그저 남들 뒤치닥꺼리나 하구...
누가 그걸 알아주기나 하믄 또 몰라!! 고놈, 고놈, 이름이 뭐였드라?
고 녀석두 데려다 기껏 키워줬드니, 은혜두 모르구 도망가버렸잖아?
인순 : (어두워진다) 다... 나 때문이야, 고모.
옥선 : 아,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인순 : ...(주눅) 나 때문이지.
S#11. 쪽방촌 (오후)
변두리 동네 쪽방촌.
주소 적힌 쪽지를 들고 이리저리 헤매는 인순. 복잡하고 지저분한 골목을 헤맨다.
S#12. 근수 방 (오후)
어두운 방안.
코펠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 근수. 한젓가락 후룩 삼키는데 문이 확 열린다.
움찔 놀라 바라보는 근수.
인순이 서 있다. 기막히고 화난다는 표정.
인순 : 너...!! (말이 안 이어진다)
근수 : (어이없다)
인순 : (방안을 둘러본다. 더욱 기가 막힌다) 근수 너...
근수 : (기분 상한다는 듯 라면 그릇 덮어버린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들어오는 인순.
인순 : 앉으라구두 안해?
근수 : 어떻게 알았냐 그랬잖아!
인순 : 너두 나 찾아냈는데 난들 너 못 찾겠니?
담당 형사님한테 부탁했어. 세상에서 젤루 속썩이구 말썽 많은 놈 좀 찾아달라구.
근수 : 허, 담당형사? 자랑이다.
인순 : 그래, 이 나쁜 자식아, 나 이래봬두 모범수였어. 빽 좋아! 니가 어디까지든 가봐라, 다 찾아내지.
근수 : (외면)
인순 : 어떻게 된 거니. 무슨 빚을 얼마나 진 거야? 자초지종 다 말해 봐.
근수 : (쓴 웃음) 그 기집애, 보기보단 입 가볍네.
인순 : 나가자. 밥 사줄께.
근수 : 됐거든.
인순 : 나가!!!
억지로 근수를 일으켜 세운다. 마뜩찮게 보는 근수.
S#13. 삼겹살집 (오후- 저녁)
인순과 근수, 마주 앉아있다.
고기 구워 근수 쪽으로 건네는 인순.
인순 : 먹어.
근수 : (시큰둥하게 소주만 들이킨다)
인순 : (억지로 젓가락 쥐어준다) 먹으라니까!
근수 : 됐어, 너나 먹어.
인순 : 너가 뭐니. 누나한테. 얘는 지 기분 좋을 때만 누나야. 내가 너보다 몇 살이 더 많은데!!
근수 : (피식)
인순 : 빚이 얼만진 모르지만... 갚을 수 있어. 열심히 일하면 돼. 세상에 못 갚을 빚은 없어. 맘 다부지게 먹고...
근수 : (OL) 설교 고만 하시지.
인순 : 취직부터 해. 어디든지! 누나두 힘 닿은 데까지 도와줄께.
근수 : 됐어. 관둬. 신경쓰지 마.
인순 : (버럭) 그럼 왜 날 찾아왔어!!
근수 : (역시 버럭) 다신 안 갈테니 걱정 마!!
인순 : 누나 말 들어. 우리가 피는 안 섞였어두, 어쨌든 나는 니 누나야.
근수 : (OL 피식) 착한 척 고만 할래? 나 신경 쓰지 말구, 죽은 니 친구 식구들이나 챙기시지 그래!
인순 : (확 어두워진다)
근수 : (짜증스레 소주잔 들이킨다)
가만히 마음 가다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는 인순.
손수건 안에는 두 돈 쯤 되는 금반지가 들어있다.
인순 : 자... (내민다) 이거 받아. 니 꺼야.
근수 : ?
인순 : 할머니 반지야.
멈칫 하는 근수.
가만히 근수 손을 잡더니, 가만 있어봐, 하고 억지로 손에 끼워주는 인순.
인순 : 임종 때.. 너한테 주라 그러셨대. 나두 임종을... 못 지켰어. (잠시 맘 아프다)
돌아가시면서 나는 안 찾구 너만 찾으셨대. (심술난 척) 흥, 나쁜 할머니...!
근수 : ...(표정이 얼핏 변했다가)
인순 : 이 자식아... 할머니가 지금 널 내려다 보시믄 얼마나 맘 아퍼 하시겠니.
근수 : (외면)
인순 : 그 반지, 마법의 반지야! 내가 갖구 있었드니... 봐라, 내가 지금 온 국민의 영웅이 됐잖니? 우하하...
인제 너한테두 금새 행운이 올 걸?
근수 : 허,
인순 : 근수야... 괜찮아. 힘내라. 다 잘 될 거야. 얘기하기 싫음 아무 얘기 안해두 돼.
그치만 앞으론 나랑 자주 연락하고... 착실하게 돈 모아서...
근수 : (휙 일어난다) 시끄러워! 꺼져!!!
놀라서 바라보는 인순.
근수 : (고함)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너 땜에 내 인생이 어떻게 됐는데?! 어따 대구 설교야!
니가 누구한테 설교할 자격이나 있어??
인순 : (굳는다)
뛰쳐 나가버리는 근수. 멍하니 앉아있는 인순.
주위에서 수근거리며 바라본다.
S#14. 삼겹살집 앞 길 (오후)
뛰쳐나오는 근수. 불안과 공포,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골목 어귀에 이르러 손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본다. 빼내서 아무렇게나 휙 집어던지려다 다시 꾹 움켜쥔다.
눈물이 그렁그렁 어린다.
S#15. 경준 학교 교정 벤치 (오후-저녁)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경준 옆에 앉아있는 인순. 발로 괜히 툭툭 바닥을 차고 있다. 침묵 흐른다.
난감하게 돌아보는 경준.
경준 : 녀석아, 왔으면 무슨, 말을 해얄 거 아냐? 나 보충 수업 들어가야 된다.
인순 : (무심하게)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요, 선생님.
경준 : 허,
인순 : (맘이 아프다... 잠자코 있다가 이윽고) 저기... 혹시요. 누구 취직 좀 시켜주실 수 있으세요?
경준 : 취직?
인순 : (머쓱 웃는) 예. 남자앤데요... 아, 애는 아니구나, 인제 어른이네...
암튼 착실하고.. 무지 잘생긴 앤데... 뭐 아무거나, 할만한 일 없을까요?
경준 : 누군데?
인순 : 어,그러니까... 동생...
하는데, 뒤에서 보다가 다가오는 영양사 미진.
미진 : 어머, 이게 누구니.
인순 : (멈칫 일어나서 인사) 안녕하세요.
미진 : (좀 샐쭉하게) ... 유명해졌드라, 너.
인순 : 어어, 그러게요.
미진 : (슬몃) 근데 무슨... 취직...? 취직 부탁하러 왔어?
인순 : 네? 어어휴, 아니에요! (짐짓) 취직은요 무슨! 저는 요새 오라는 데 많아서 큰일이에요.
취직 자리가 넘치네요. 온갖 회사에서 다 오래요. 지하철 공사에서도 오라그러구요, 으하하.
미진 : 어어...
경준 : (허, 웃고)
그 순간, 달려오는 고교생1,2. 수첩과 펜을 내민다.
고교생1 : 싸인 좀 해주세요!
인순 : 예?
고교생2 : 지하철녀 누나 맞죠? 누나 인기 캡이에요!!
마주보며 좋아라 키득 웃는 고교생1,2.
인순 : (당황) 어휴, 인기 캡은 무슨... (짐짓 으쓱한다) 녀석들, 눈은 밝아가지구.
보란 듯 싸인을 슥슥슥 해준다.
떨떠름하게 보고 있는 미진. 웃고 있는 경준.
S#16. 방송국 도서관 (저녁)
자료 찾고 있는 상우.
다가오는 예능 피디1.
피디 : 유기자,
상우 : 아, 안녕하세요? 홍선배님.
피디 : 지하철녀하구 중학교 동창이라며?
상우 : 예? ...네.
피디 : 그 아가씨, 우리 프로에 고정 패널루 앉힐까 하는데, 어때? 끼가 많아?
상우 : (당황) ...
피디 : 오락 프로랑 잘 어울릴 거 같든데... 라디오 나와서 노래 부르는 거 보니까 완전 개그맨의 피가 흐르더라구.
평소에두 그쪽으루 재주가 좀 있어?
상우 : (난감) 잘...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기두 하구 아닌 것 같기두 하구...
피디 : ...그래? 직접 만나봐야겠네. 에이, 미리 정보 좀 얻을려 그랬드니... 수고!
가버리는 피디.
한숨 쉬는 상우. 다시 자료 찾는데 다가오는 여자 작가1.
작가 : 안녕하세요, 유상우 기자님이시죠?
상우 : 아,예. 그런데요.
작가 : 저 생방송 즐거운 아침 구성작간데요. 지하철녀 박인순씨랑 배우 이선영씨 미니 다큐를 기획 중인데요...
유기자님이 박인순씨 친구분이시라구...
상우 : (OL) 누가 그러든가요?
작가 : 송진태 기자님이 그러시던데, 아니에요?
상우 : ... 맞는데요.
작가 : 저희 프로그램에 유기자님이 출연을 좀... 해주시면 어떤가 해서요.
상우 : 제가요?
작가 : 네. 박인순씨 어린시절 이야기라든가... 친구로서 해주실 말씀이라든가...
난감하다. 한숨이 나오는 상우.
S#17. 선영집 거실 (밤)
마주 앉아있는 선영과 인순.
선영 : (초조한데) 너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어쩌겠단 거야?
방송, 그거 하나두 두려워할 거 없어. 엄마랑 리허설 충분히 하구, 맘 편하게 하면 돼.
자꾸 하다 보면 아무렇지두 않아져. 정말이야.
인순 : (시선 내린 채 곰곰 고심하고 있다)
선영 : (달랜다) 일단 약속한 프로는 나가얄 거 아냐. 내 입장이 뭐가 돼? 방송 펑크는 내지 말아야지. 안 그래?
인순 : ...
선영 : 알았어, 알았어. 앞으론 니 의사 존중할께. 존중한다구. 그러니까 일단...
인순 : 엄마, 대신 조건이 있는데요.
선영 : 조건?
인순 : 네. (비장한 표정으로) 사람 필요하다 그러셨죠? 엄마 일 도와줄 사람요.
선영 : 그랬지. 누구 있어?
인순 : 네... 근수요. 저번에 우리집에 왔던... 그애... 기억 나세요?
저한텐 친동생이나 마찬가진데요. 걔가 요즘 취직자리 구하고 있어서요.
선영 : (찌푸린다)
인순 : 제가 데리구 있고 싶은데... 우리집에 그냥은 못 데리구 있겠고... 걔 알구 보믄 착한 애거든요?
(실수했다) 아니, 그냥 봐두 착하고요, 하하. 암튼 기왕 다른 사람 월급 주실 거면 걔를 써주세요.
선영 : (마뜩찮다) ... 뭐하는 앤데?
인순 : 이것저것... 얼마전까진 트럭 운전 했었대요. 지금은 놀지만.
선영 : 흠... (갈등) 걔 써주면 나간다 이거야?
인순 : (굳은 결심) 나가죠 뭐. 시사 토론? 좋아요, 문제 없어요.
선영 : (삐뚜름하게 팔짱 끼고 바라본다. 마뜩찮다) ...
인순 : 토론 주제가 뭔데요.
선영 : 자살률 증가에 관한 거래나 뭐래나.
인순 : 자살...증..가...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선영 : 니가 사람을 구했잖아. 자살하려던 사람을 구한 건 아니지만, 뭐 어쨌든 의미가 있잖아.
요샌 지하철 투신이 워낙 많으니까... 괜찮아,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간단하게 니 소견만 말하면 되는 거야.
인순 : (멍해진다)
S#18. 보도국 사무실 (다른날 낮)
들어오는 상우.
책상 앞에 앉아 일하던 진태. 상우 쪽으로 다가온다.
진태 : 인순씨, 오늘 시사토론 나온다며?
상우 : 토론? 거길 걔가 왜 나와?
진태 : 그러게. 사회부 황선배가 그러드라고. 자기가 오늘 거기 나가는데 지하철녀두 나온다 그러면서.
상우 : (한숨) ... 인젠 별 거 별 거 다 나오는구나.
진태 : 그러게... 다른 프론 몰라두 거긴 좀.. 살짝 안 어울리는 거 아니냐? (씩 웃고) 걔들두 시청률 땜에 어뜨케 된 거 아니냐.
상우 : (난감)
진태 : 근데, 인순씨... 방송에 재미 붙인 모양이야. 언제 같이 밥이나 한 번 먹자.
S#19. 방송국 로비 (오후- 저녁)
야구 모자 쓰고 고개 푹 숙인 채 쭈삣쭈삣 들어오는 인순.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스튜디오를 찾아간다.
저만치서 누군가와 얘기하며 걸어오던 상우. 인순을 발견했다.
일행과 헤어지고 다가오는 상우. 인순 앞에 마주 선다.
눈 마주치자 헉 놀라는 인순.
인순 : 자주...본다.
상우 : 자주...온다.
인순 : 응.
상우 : 토론 하러 왔어?
인순 : (놀라) 어떻게 알았어? 어어후, 역시 기자라 정보 빠르구나.
상우 : (삐딱하게) 너무 노출이 심한 거 아니냐, 너.
인순 : 노출? (자기 옷을 내려다보며) 노출 심한 옷 아닌데?
상우 : 흠...
인순 : 아아, 방송? 방송 노출? 하하... (놀리는) 왜에? 샘나는구나?
상우 : 샘?
인순 : 와, 너만 방송 나오란 법이 어딨냐. 방송은 온 국민의 것이야.
상우 : (어이없어 보다가) ...그래두 너무 한 거 아냐? 토론 프로까지?
인순 : 토론 프로가 왜? 나 토론 잘 해.
상우 : 토론을 니가 뭘 잘 해.
인순 : 하, 얘가 사람을 무시하네. 토론 하면 박토론이야. 오프라 윈프리가 장래희망!
상우 : 그건 토크겠지.
인순 : ...아, 그런가. 암튼 그게 그거지!! 말이든 말씀이든!! 하하.
상우 : (한숨) 암튼...잘해라. 사고 치지 말고.
인순 : 걱정 마. 노래만 안 시키면 돼! 그럼...취재 잘하고 와라,
인사하고 가는 인순.
그 순간, 앞을 가로막고 인사하는 재은.
재은 : 안녕하세요.
인순 : (멈칫) 아,안녕하세요.
상우 : (돌아본다)
재은 : 저, 감동했잖아요. 어쩜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셨어요.
인순 : 어어... 별 말씀을요. 고맙습니다.
재은 : 프로그램 출연하러 오셨어요?
인순 : 네...저...시사토론요.
재은 : (멈칫) 어머, 시사토론요? 그런 것두 나오시게요?
인순 : (주눅) 예에...
상우 : (걱정 된다)
인순 : (한숨) 걱정이 많아요. 이런 프로에 나가서 뭘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잘 모르겠고...
재은 : 에이, 걱정 마세요. 잘 하실 수 있을 거에요. (짐짓 웃고) 파이팅.
인순 : 고맙습니아다...
상우 : (복잡하게 바라본다)
S#20. 스튜디오
방송 전의 어수선한 분위기.
패널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 객석의 시민들... 서로 인사하고 이야기 주고 받는 모습들.
입구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지켜보는 인순. 한숨이 나온다. 후회된다. 내가 여기 왜 왔을까.
스튜디오 앞에 붙어있는 오늘의 테마. <자살률 증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 바라보다가 조용히 뒤돌아선다.
S#21. 스튜디오 앞 복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머뭇 물러나는 인순. 준비한 수첩을 들어 꺼내본다. 혼자 중얼거려본다.
인순 : (심호흡하고 중얼거리는) 저는...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구요...
음... 저는... 힘들어도 용기를...용기를...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우두커니 굳은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인순 : (중얼거리는) 바보...
인순 : (N) 바보... 돌대가리... 난 역시 멍청한 인간이다.. 난...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걸 잊어먹었지?
내가 어떻게 여기 나와있지? 자살에 대해 얘기하겠다구? 생명에 대해? 내가? ...살인자인 내가?
창백해진다. 식은땀이 주룩 흐르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이 넋을 잃고 서있는 인순을 이상한 듯 힐끔힐끔 바라본다.
순간, 다가와 툭 치는 상우.
상우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인순 : (흠칫 놀라)
상우 : 이리 와 봐.
팔을 끌고 가는 상우. 놀라서 얼떨떨 따라가는 인순.
S#22. 출연자 대기실
텅빈 대기실 안.
인순을 데리고 들어오는 상우. 안을 살핀 뒤 아무도 없자 안심하고 들어온다.
의자 끌어다 인순을 앉힌다. 어안이 벙벙한 인순.
인순 : 왜? 뭐하는 거야?
상우 : 주제가 뭐야?
인순 : 주제?
상우 : (무심한 척) 토론 주제. 나랑 리허설 한 번 하자.
인순 : (멈칫하는)
상우 : 어쨌든 난 너보다 방송 선배고, 이런 일은 나름 전문가야. 도와줄께.
인순 : (니가 웬일로...)
상우 : (계속 진지하다) 주제가 뭐야?
인순 : (머쓱해진다) 사실은 나 토론하는 거 아냐.
(씩 웃고) 무슨 뭐, 국민 논객이라나. 그냥 지하철녀로서 딱 한 마디만 하면 된대.
상우 : (멈칫) ...그래? (허탈하게 웃고) 다행이다. 하긴 널 토론 패널루 앉힐리가 없지. 나두 참... 심하게 넘겨짚었네.
인순 : 야, 그거 무슨 섭한 소리냐? 나두... 똑똑해. 토론 쪽으루 나가두 끄떡 없어.
상우 : 알았다, 알았어. 그럼 니가 해야 되는 얘기는 뭐야? 주제는 뭔데?
인순 : ...자살...자살률 증가에 관한 거래. (말끝 흐려진다)
상우 : 자살? (멈칫하다가) 흠...그렇군.... 좋아, 그럼 어쨌든 한 번 연습해보자. 인순씨는 자살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순 : 어휴, (웃는다)
상우 : 해 봐. 긴장하지 말고 자, 말해 봐.
인순 : ......
상우 : 와, 이거 또 방송 사고 내겠네.
인순 : (애써 씩 웃는다) 아냐, 아냐, 할 수 있어, 할께. 저는.... (심호흡)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괴로운 건 다 지나가기 마련인 거고...용기를...용기를...
(표정이 점점 굳어지며 시선 떨군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상우 : (기운을 북돋워주자) ...됐어. 좋아. 흠, 생각보다 잘하는데? 이대로 그냥 하면 돼.
카메라 똑바로 보고, 맘 편안하게 먹고, 여기가 내방 우리집이다, 그런 기분으로...
한 번만 다시 가볼까? 자, 이게 카메라야...
열심히 코치하는 상우를 가만히 바라보는 인순. 마음이 조금 묘해진다.
인순 : (슬몃) ...너 왜 이러는데? 갑자기?
상우 : 내가 뭘.
인순 : 하하, 이러니까 너같지 않다. 너 뭐... 잘못 먹었니?
상우 : 허, (지레 찔려서) 내가 뭘 어쨌게?!!
인순 : (머쓱) 아,아니...
휴대폰 울린다. 놀라서 얼른 받는 인순.
인순 : 여보세요? ...네, 지금 가요! (후다닥 일어난다) 가봐야겠다!!
S#23. 레스토랑 (저녁)
마주 앉은 병국과 선영.
오렌지색 넥타이에 오렌지색 셔츠를 입은 병국이다. 쑥스러운 듯 넥타이를 흠흠 조였다 풀었다 한다.
차를 마시는 두사람. 두사람 사이에 인테리어 시안과 팜플렛 같은 것이 놓여있다.
선영 : (팜플렛 넘겨보며) 바닥재는 그럼... 이걸로 할께요.
병국 : (긴장) 아, 그러시겠습니까. 참 잘 선택하셨습니다. 역시 탁월한 안목이세요.
선영 : 이런 사소한 거까지 사장님이 직접 챙기시지 않아두 되는데...어떡해요, 죄송해서.
병국 : 제 기쁨입니다.
선영 : (웃는다) 감사합니다.
병국 : 따님이 좋아하겠습니다. 엄마가 이렇게 방도 멋지게 꾸며주고.
선영 : 뭘요. 당연히 해야할 도리죠. 그동안 엄마 노릇이라곤 못했는데, 이거라두 해야죠.
(냉소 어린다) 저 속보이죠? 제가 이런 인간이에요. 방송 탄다니까 그제서야 방 고쳐주고...
병국 : ...저라두 그러겠습니다. 뭘 그렇게 자책하십니까.
선영 :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자제분이...
병국 : 아들 녀석 하납니다. 저두 좋은 아버지는 못 됩니다. 오래전에 번번이 사업 실패하구,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다가
캐나다루 도망치듯이 갔어요. 거기서 죽어라 일만 했어요. 그게 마누라랑 애를 위하는 일이라구 생각했거든요.
결국 뭐 이렇게 나름 돈은 모았지만... 아들녀석하구 서먹서먹합니다. 절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선영 : 왜요, 이렇게 자상하신 아버진데.
병국 : 허허, 전 별로 자상한 성격 아닙니다. 같이 살았다고 꼭 좋은 부모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근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잘 모르겠거든요.
선영 : (끄덕)
병국 : (얼굴 벌개진다) 초면이나 마찬가진데... 이런 얘기 두서없이 늘어놔서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냥....
(손수건 꺼내 땀을 닦는다)
선영 : 아닙니다. 저도 이상하게 사장님이... 그리 어렵지가 않고 편하네요. 고향 오빠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앞으로 종종 뵙고 인생 상담을 해두 될까요.
병국 : (환해진다) 그,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제가?
선영 : (웃는다) 아휴, 무슨 말씀을요. (시계 본다) 어머, 우리 딸 방송 나올 시간이에요. 어서 가봐야겠어요.
S#24. 레스토랑 앞 거리 (저녁)
나란히 나오는 선영과 병국. 선영의 차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낙엽이 뒹굴고 바람이 싸하게 분다. 묘하게 설레는 두사람.
어색한 듯 기침을 흠흠 하는 선영.
돌아보는 병국. 옷을 얇게 입고 추위에 떠는 선영이 너무 애틋하다.
망설이다가 겉에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건넨다.
병국 : 걸치십시요. 감기 걸리십니다.
선영 : 예? ...아,아뇨. 괜찮습니다.
병국 :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나중에 돌려주십시오. (쑥스러워 외면한 채)
선영 : (마지 못하는) ... 고맙습니다.
발레파킹했던 선영의 차가 두사람 앞으로 다가온다.
S#25. 거리 (저녁)
차 몰고 가는 선영.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병국의 카디건.
신호 대기로 차가 멈춰서자 무심하게 힐끔 카디건을 돌아보는 선영.
선영 : (싸늘히) 인테리어 비용이나 깎아주지... 영감탱이 참 눈치 없네.
신호 바뀌면 심드렁히 다시 운전 한다.
차가 밀려서 다시 멈춰 서자, 조수석을 힐끔 돌아본다. 한 손으로 카디건을 들어 슬몃 어깨에 걸친다.
선영 : ..... 뭐, 뜨듯하긴 하네.
S#26. 생방송 스튜디오 (저녁)
<자살률 증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생방송토론이 시작 된다.
토론에 참여할 패널들이 앉아있고 그 뒤쪽으로 국민 논객들이 차례로 앉아있다.
오프닝 음악과 함께 사회자가 멘트를 시작한다.
사회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박철희입니다. 하루 평균 33명, 44분에 한 명 꼴로 자살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OECD 국가중 자살율 1위, 어쩌다 우리 사회가 살 맛 나는 세상이 아닌
살고 싶지 않은 세상으로 변모해 가는 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토론해 주실 분들 소개에 앞서
(국민논객들을 둘러 보며) 특별한 분이 보이는데요. 오늘 국민 논객들 중에는 얼마 전 지하철에서 추락한 시민을 구해
화제를 일으킨 장본인 박인순씨께서 특별히 함께 하셨습니다. (카메라, 인순이를 잡는다)
이렇게 살신성인 하는 모습이, 이 각박한 사회에 더욱 빛을 발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많은 활약 기대 하겠습니다.
긴장해서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인순.
S#27. 스튜디오 앞 복도
슬몃 다가오는 상우.
S#28. 스튜디오 입구
살며시 문을 밀고 들어오는 상우. 진행 요원에게 목례하고 스튜디오 한쪽에 서서 구경하기 시작한다.
사회 : 그럼 생명존중위원회 고문이신 김자준 의원님께 묻겠습니다.
한 해 자살자가 교통사고 사망자 보다 많다니, 충격적이던데요. 대략 얼마쯤 됩니까?
김자준 : 그렇습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2005년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가 7700명인데 자살자는 12000명이 넘었습니다.
97년 이후 이렇게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IMF가 끝나고 경제가 회복되면 감소할거라 생각했는데
2000년도에는 오히려 만 명이 넘어 버렸거든요. 이걸 봤을 때 과연 자살이 경제적인 문제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회 : 그렇다면 어떤 차원의 문제라고 보시는 겁니까.
몰입해서 진지하게 듣고 있는 인순.
가만히 인순을 바라보는 상우.
김자준 : 정치적 사회적 차원의 문제죠. 정치 불안이 우선 큰 문제라고 봅니다.
정치 불안은 곧 사회 불안으로 연결되고 개개인의 불안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정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목적인데...
반대 패널1 : (OL) 정치 불안이 자살률 증가의 원인이라는 것은 지나친 비약 아닌가요?
자살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입니다. 물론 정치가 안정되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모든 문제가 정치의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위험한 사고 방식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욱 정치가 불안했습니다!
김자준 : 저는 사실에 입각하고, 자료에 근거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정부는 이 문제에 어떤 대책을 세웠느냐, 저는 이것을 묻고 싶습니다.
사회 : 잠시만요, 이 자리는 정치 문제를 이야기 하는 장이 아닙니다...
조용히 숨죽이고 지켜보는 인순.
S#29. 고모집 방안 (저녁)
티브이 앞에 앉아있는 옥선. 생방송 화면을 열심히 보고 있다.
곁에 누워 잠든 고모부. 스르르 잠에서 깨서 시계를 본다.
고모부 : 돌려!! 축구 틀어 봐!!
옥선 : (뿌리치고) 가만 좀 있어 봐요오! 인제 우리 인순이 말해요, 인순이 말할 거에요.
고모부 : (멈칫) ...누구? 인순이? 걔가 왜 테레비에 나와?
S#30. 분식집 (저녁)
떡볶이 먹으면서 분식집 티브이로 생방송을 보는 미화. 하품 한다.
미화 : 쟤는 먼 저딴 프로에 나갔냐... 재미 없네, 참.
다시 늘어지게 하품 한다.
S#31. 스튜디오
바짝 긴장해서 얼어붙어있는 인순 모습이 보인다.
사회 : 그럼 이 자리에 한 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몇 차례 자살을 시도하셨던 분인데
요즘 치료를 받고 계시는 경험자의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경험자, 스크린 뒤 쪽으로 그림자만 보인다. (30대 여자)
사회 : 자살을 시도한 가장 큰 이유가 뭐였습니까?
경험자(E, 목소리 변조) : 저는 지금 30대 중반인데 오년 전 첫 아이를 낳고부터 산후 우울증을 앓아왔습니다.
그 동안 세 번의 자살 계획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치료를 받아 좋아지고 있지만,
그 당시에 저는 항상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인순이,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옆 사람, 신경이 쓰이는지 보다가 손수건을 건네준다.
고맙습니다, 받아서 눈물 닦는다. 표정 어두워진다.
S#32. 지하철역 (회상)
자살하기 위해 플랫폼에 서 있던 인순의 모습.
인순 : (N) 용기를 내자, 인순아! 어쨌든 부딪치는 수 밖에 없어! 당당하게 말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살아야 한다고... 사람을 죽였어도 살아야 한다고...
뻔뻔스럽다고 해도, 비겁하다고 해도, 나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S#33. 스튜디오 (현재)
어느새 눈물을 거두고 결연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인순. 비장한 각오가 서린다.
사회 : 지금까지 자살 원인과 대책, 경험자의 사례까지 들어봤는데
이번에는 국민 논객의 의견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분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국민 논객들 여기저기서 손을 든다.
인순, 바짝 긴장하고 있다.
사회자가 한사람을 지목한다.
사회 : 토론을 쭉 들으셨을 텐데 해결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논객1 : 저는 노인들의 전화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지훈이라고 합니다.
우리보다 노령화가 빨리 진행되는 일본의 아키타 현이라고 있습니다. 노인 자살률 전국 1위인 곳인데요.
그곳의 통계를 보면 독거노인 보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게 나타났거든요.
그건 뭐냐면 아까 어느 토론자께서 지적하신대로 노인 자살이 “고독사”가 아니라 오히려 가족간의 갈등,
그에 대한 대응능력 부족이 더 큰 원인으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이걸 보더라도 원인을 제대로 짚어야 예방법도 나온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회 : 예, 잘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의견 주실 분?
아름다운 미담의 주인공 지하철녀 박인순씨 의견을 들어볼까요?
흠칫 놀라는 인순. 마이크가 앞으로 온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 하는 인순.
인순이 : 예, 저는 박인순이라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회 : (OL) 예, 안타깝게도 방송 시간이 다 돼서 박인순씨의 의견은 다음 기회에 따로 듣도록 하겠습니다.
얼떨떨한 인순.
사회 : 지금까지 토론에 참여해 주신 전문가 여러분들 그리고 국민논객, 시청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울 때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정보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국번 없이 129, 여러분의 희망의 전화가 옆에 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얼굴 빨개져 앉아있는 인순.
어이없어 바라보는 상우.
인순 : (N) 내 인생은 언제나... 늘... 이 모양이다. 오늘도 어김 없이 또... (작은 한숨) 이 모양인 거다...
클로징 음악이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S#34. 스튜디오 앞 복도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어깨 늘어뜨린 채 힘없이 나오는 인순. 문득 저만치 상우의 모습이 보인다.
인순 : (멈칫) 상우야.
상우 :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있지 마. 정식으로 항의해.
인순 : 뭘?
상우 : 사람 불러놓구 뭐하는 거야? 누굴 바보루 만들려구 작정했어?
인순 : ...봤구나? ... 야, 너는 바쁜 사람이 뭘 또 이런 걸 다 지켜보고...
상우 : 프로그램을 어떻게 이 따위로 진행해? 항의 해! 당장!! 니가 안 하면 내가 해줄께!! (붙잡고 가려하면) 자, 가자.
인순 : (놀라서 뿌리친다) 어후 야, 됐어... 나는 정말 다행이야!!
상우 : 뭐?
인순 : 다행이라고. (한숨)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보살펴주시는 게 틀림없어.
상우 : 허,
쑥스러운 듯 총총 앞서가는 인순.
S#35. 방송국 로비 (저녁-밤)
걸어오는 인순. 쫓아오는 상우.
상우 : 인순아,
인순 : (봉투 꺼내며) 아참, 상우야, 나 출연료 받았다? 말두 한마디 안했는데 출연료를 주네.
상우 : 무안해 하지 마.
인순 : ...
상우 : (위로해줘야겠다) 어쨌든 너무 무안해하지 말구... 담에 또 출연할 기회두 있을 거고, 만회할 기회두 있을 거다.
망신 당했다 생각하지 마. 저번하군 질적으로 다른 사태니까... 방송이란 게 늘 그래. 변수 투성이야.
하긴 세상 일두 다 그렇드라. 예상한대로 되는 게 없드라구.
인순 : ... (좀 뭉클해진다) 고맙다. 근데 어차피 앞으루 방송 출연할 일두 없을텐데 뭐.
그리구 나, 솔직히 말하면... 디게 홀가분해.
상우 :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인순 : (멈칫 바라본다) 너 오늘 ...왜 그래?
상우 : 내가 뭘?
인순 : (슬몃) 너 오늘 점심에 뭐 먹었어? 확실히 뭔가... 이상한 거 먹었지?
상우 : (괜히 발끈) 허, 내가 뭘 어쨌다 그래! (무안하다) ...약속 있어?
인순 : 오늘은 내가... 심적으로 좀 안정이 안돼서... 담에 먹자.
상우 : (실망) 그래?
인순 : 바쁠텐데 들어가봐. 오늘 고맙다.
아쉽게 보는 상우. 손 흔들고 멀어지는 인순.
S#36. 방송국 앞 (밤)
한숨 쉬며 걸어오는 인순. 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기분이 어쩐지 좀 묘하다.
다시 뒤돌아 터벅터벅 걷는다.
인순 : (N) 그런데... 상우 말이 옳았다.
S#37. 보도국 사무실 (밤)
인순 : (N) 세상 일은 역시... 예상대로 되는 게 아니다.
터덜터덜 들어오는 상우. 다가오는 진태.
진태 : 일루 와서 이거 좀 봐봐.
상우 : 왜애.
진태 : 난리가 났어.
상우 : 뭐가 또 난린데에. 나 바쁘다. 일 하나두 못 했어.
진태 : (잡아끌고 가며) 이쪽으루 와보라니까아.
노트북 보여주는 진태. 화제의 검색어에 <지하철녀 눈물>이 떠 있다.
진태 : 지하철녀 눈물... (돌아본다) 이게 뭔지 알어?
상우 : ?
진태 : 인순씨, 인제보니 은근히 카메라를 알아. 인순씨 눈물 흘리는 게 화면에 딱 클로즈 업이 됐는데...
너무 이쁘게 잡힌 거라...! 완전 얼짱이야, 얼짱.
상우 : (황당한데)
진태 : 인순씨 발언 안 시켰다고 방송국 폭파하겠다는 사람두 있고 ... 게시판 지금 난리야.
(화면 읽는) 누가 천사를 울게 했는가! 방송국은 각성하라! 무조건 다시 출연시켜라!! 이야......
상우 : ...허,
S#38. 지하철역 앞 (밤)
터덜터덜 걸어오는 인순.
남자 직장인 두 명이 인순을 알아보고 다가온다. 싸인 좀 해주세요! 수첩을 내미는 사람들.
당황하는 인순.
이어서 여대생 행인 두 사람이 알아보고 다가온다. 휴대폰 디카로 함께 사진 찍자고 달려든다.
인순 : (N) 세상은... 뭐가 이런가? 전과자는 뭘해도 전과자, 지하철녀는 뭘 해도 지하철녀다.
아니, 아무 것도 안 해도 지하철녀인 거다! 나는 그저 조용히... 조용히 객석에 앉아있었을 뿐인데......
행인1 : (OL) 정말 감동했어요, 언니!!!
당황하는 인순. 아닙니다, 저 아닙니다, 사람들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인순의 모습 위로...
인순 : (N) 세상은...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런가요, 할머니...!
S#39. 선영집 거실 (밤)
서성이며 인순을 기다리는 선영.
들어오는 인순. 와락 끌어안는 선영.
선영 : 어서 와라, 우리 딸!
인순 : (당황)
선영 : 방송 끝나구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담당자한테 전화까지 했는데... 이게 웬 전화위복이니.
니가 정말 운이 열리긴 열린 모양이다! 인터넷에 니 팬클럽까지 만들어졌대.
인순 : 예?
선영 : 아참, (손 붙잡고 이층으로) 보여줄 게 있어.
식당 쪽에서 나오다가 지켜보는 정아.
S#40. 서재 (밤)
책꾸러미며 박스들이 놓여있다. 빈 책장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커다란 방.
인순 손을 이끌고 들어오는 선영.
선영 : 앞으로 이 방, 니가 써. 엄마가 여기서 대본 연습두 하구 책두 읽구 그랬는데... 앞으로 너한테 양보할께.
진작 꾸며줬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인순 : 허,
선영 : 오늘 나가서 바닥재두 새로 맞추구 전문가 상담두 받고 왔어. 인테리어 컨셉 정해지는대로 너한테 다시 알려줄께.
집 전체를 뜯어고칠까 했는데... (한숨) 방송국에서 오는 날까진 공사가 어렵겠다 그래서 우선 니 방만 꾸미기로 했어.
혹시 원하는 스타일 있니? 공주풍으루 해줄까?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인순 : (얼떨떨 바라보는데)
열린 문 밖에서 살며시 들여다보는 정아.
S#41. 정아방 (밤)
들어오는 정아. 밖을 잠깐 돌아보다가 이윽고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는다.
왠지 좀 쓸쓸하고 허전해진다.
S#42. 상우집 외경 (낮)
S#43. 상우집 거실 (낮)
신문을 보는 상우. 건너편에 앉아 과일을 깎는 명숙.
명숙 : 모처럼 쉬는 날인데... 너는 누구, 만날 사람두 하나 없니?
아유, 내가 걱정이다, 이러다가 우리 아들 총각귀신으루 늙는 거 아니냐.
상우 : (슬몃 신문 너머로 고개 들고)
명숙 : 그... 아나운서 아가씨랑 어떻게 좀 안되는 거냐? (조심스레) 니가 먼저 적극적으루 대쉬해보믄 안되겠어? 너 싫대?
상우 : 저기... (괜히 태연한 척) 지하철녀 기사가 났네요. 지하철녀 기사 보셨어요?
명숙 : 지하철녀가 뭐라니.
상우 : 어휴, 신문 좀 보세요.
명숙 : (무안) 나는 요새 눈이 어두워져서... 그게 뭔데? 무슨 사건이 났어?
상우 : 제 동창인데요. 중학교 때 우리 여기 살 때요. 참 이쁘구 착하구 공부 잘하던 애가 있어요. 인순이라구... 분식집 손녀.
명숙 : 분식집?
상우 : 그 왜 찐빵... (한숨) 아니에요... 하긴 엄만 모르겠다. 엄마 매일 울면서 돈 꾸러 다닐 때니까...
암튼 그런 애가 있거든요?
명숙 : 걔가 왜? 걔가 요새 지하철 운전하니?
상우 : ... 됐어요.
명숙 : 뭔데? 왜그래?
상우 : (혼란스럽다) 아니에요... 저두 이게 뭔지... 왜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네요.
일어나 현관 밖으로 나간다.
명숙 : (얼떨떨) 어디 가?
상우 : 운동 하러요.
S#44. 헬스 클럽 (낮)
러닝 머신 위에서 달리는 상우. 마음을 추스르려 애쓴다.
S#45. 근처 공원길 (낮)
헬스 클럽을 나온 상우. 커피 한 잔 들고 공원길을 산책한다. 바람에 낙엽이 뒹굴고 있다.
놀러 나온 가족들, 연인들 모습이 보인다.
벤치에 앉는 상우. 커피 한 모금 마시며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생각난 듯 가만히 휴대폰을 꺼낸다.
인터넷 검색으로 프로그램 다시 보기를 찾아서, 마침내 인순의 얼굴을 찾아낸다.
객석에 앉아 바짝 긴장하고 있는 인순 표정이 가끔 클로즈업 된다.
가만히 들여다보는 상우. 화면이 지나가면 얼른 다시 돌려서 또 본다.
상우 : (빙그레 웃는다) 촌스럽긴, 하하 ...무지 얼었네!
다시 보기를 또 하고 또 한다.
자기도 모르게 애틋한 표정이 되며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S#46. 거리 - 상가 앞길 (낮)
책 몇 권 사들고 서점에서 나오는 상우. 근처에 액세서리점이 보인다.
각종 펜던트, 귀걸이, 반지 등을 파는 가게.
지나쳐 가다 슬몃 돌아오는 상우. 걸려있는 펜던트 목걸이들을 하나하나 구경한다.
어느새 나와있는 점원.
점원 : 여자친구 선물 하시게요?
상우 : (흠칫 놀라) 예? 아,아닙니다.
부랴부랴 돌아서서 간다. 그러나 가다가 다시 돌아온다. 펜던트 하나 가리킨다.
상우 : 이거... 얼마죠?
S#47. 인순방 (낮)
음성 메시지 보내고 있는 인순. 삐소리가 나면 녹음 하십시오, 안내음이 나오면...
인순 : 근수야... 니가 이거 다 듣구 있는 거 알아. 전화 안하면 백 번 천 번 계속 전화 걸 거야. 전화 해.
힘없이 전화를 끊는다. 그 순간, 울리는 벨소리.
얼른 전화 받는 인순.
인순 : 여보세요?
상우(E) : 점심 사라, 박인순.
인순 : 누,누구...? (멈칫 하다) ...상우구나?
S#48. 거리 (낮)
태연한 척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 하는 상우.
상우 : 출연료를 받았으면 한 턱을 내야지. 점심 사라... 긴히 할 얘기가 있어.
S#49. 인순방 (낮)
통화하는 인순.
인순 : 할 얘기? ...뭔데?
S#50. 거리 (낮)
통화하는 상우.
상우 : 음... 중요한 문제야. 만나서 얘기하자.
S#51. 인순방 (낮)
통화하는 인순.
인순 : 어...그래...... 알았어, 거기루 나갈께.
얼떨떨 전화 끊는다.
S#52. 커피 전문점 (낮-저녁)
분위기 쉬크한 강남의 어느 커피점.
책 한 권 들고, 커피 한 잔 내려놓고, 창가에 앉아 인순을 기다리는 상우.
세련된 포즈로 멋있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도 가끔 쓸어 올리고 있다.
유리창 밖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본다. 왠지 설렌다. 입가에 미소가 어려있다.
시계를 보고 다시 사람들을 보고... 저쪽에서 인순과 비슷한 여자가 온다.
몸을 엉거주춤 일으키고, 목을 길게 뺀다. 인순인가...? 확인하는데.
인순(E) : 너 뭐 해?
뒤에서 툭 치는 인순.
헉 놀라 의자에서 꼬꾸라질 뻔 하는 상우.
상우 : (창백) 너... 어디루 들어온 거야?
인순 : (의아하게 밖을 살피는) 뭐...구경 났어?
상우 : (얼른 둘러대는) 아,아냐. 어, 저기... 교통사고가 난 거 같아서...
인순 : 와, 역시 기자 정신!
상우 : (태연한 척 헛기침)
인순 : 저녁 뭐 먹을래? 뭐 먹고 싶어?
상우 : 뭐, 아무거나.
인순 : (씩 웃고) 에이, 아무거나 먹을 수야 있나. 한 턱 내는 건데!!
S#53. 한강 시민 공원 (노을-저녁)
강가에 앉아있는 근수. 뭔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할머니의 금반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바라본다. 점점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어린다.
이윽고 일어나 반지를 힘껏, 있는 힘을 다해 저 멀리 강물 위로 던져버린다.
주먹을 꾹 움켜쥐는 근수. 움켜 쥔 손이 자기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려온다.
결심한 듯 입술을 지긋이 깨문다.
S#54. 선영집 외경 (저녁)
S#55. 거실 (저녁)
외출복 차림으로 방에서 나오는 선영. 들어오는 파출부.
파출부 : 손님 오셨는데요.
선영 : 누구요?
현관에 서 있는 근수. 인사를 꾸벅한다.
유심히 보는 선영. 알아봤다.
선영 : (금새 표정 마뜩찮게 변한다) ...어어, 너구나. 이름이...뭐드라?
근수 : 첨 뵙겠습니다. 장근숩니다.
선영 : 그래, 들어 와. 인순이한테 들었어. (시계 본다) 나 지금 나가야 되는데..
미리 전활 하구 오든가, 사전 약속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근수 : (멈칫하다) ... 죄송합니다.
선영 : 이쪽으로 앉아라.
소파에 마주 앉는다.
선영 : (파출부에게) 차 좀 내오세요. (다시 근수를 유심히 본다. 맘에 안든다)
근수 : ...
선영 : 당분간 일해보구... 괜찮아야 계속 하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근수 : 네, 압니다.
이층에서 내려오던 정아. 멈칫 걸음을 멈춘다.
선영 : 인순이 땜에 할 수 없이 쓰는 거야. 쟁쟁한 사람들 다 놔두구.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근수 : ...
선영 : 일단... 내가 나가봐야 하니까, 오늘 말구 내일 다시 올래?
아참, 내 정신... 타이어 갈 줄 알지? 내 차 타이어 좀 갈아놀래? 타이어가 어디서 뭘 밟았나 구멍이 났드라구.
근수 : (담담히) 알겠습니다. 걱정마세요.
가만히 숨어서 지켜보는 정아.
S#56. 집 주차장 (저녁)
선영 차의 타이어를 갈고 있는 근수. 다 갈고난 후, 생각난 듯 차 앞트렁크를 열고 부속 점검을 한다.
음료수 캔을 들고 살며시 다가오는 정아. 눈앞으로 슥 내민다.
멈칫 놀라서 돌아보는 근수.
정아 : 드세요.
근수 : 됐어요.
정아 : (무안하다) 드세요. (다시 공손히 내민다)
근수 : (마지못해 받는데)
정아 : 트렁크는 왜 열어보세요?
근수 : 정비소에서 일한 적 있어요. 점검하는 거에요.
정아 : (아아, 끄덕하는)
근수 : 왜요? 비싼 차 고장낼까봐 걱정돼서?
정아 : 어후, 아뇨. 누가 그렇대요? (안 들어가고 계속 구경한다) 이상 없어요?
근수 : (거슬린다) 안 들어가요?
정아 : (무안하다) 저기...언니한테 내가 다 말한 거에요.
근수 : 알아요.
정아 : 엄마한테는 말 안했으니까 걱정마세요.
근수 : 말해도 돼요. 걱정 안해요.
정아 : (무안) ...
근수 : 들어가요. 추우니까.
정아 : (금새 맘이 풀린다) 언니가 오빠 취직시켜줄려구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근수 : (피식) 언니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정아 : 예?
근수 : 언니에 대해 뭘 얼마나 아느냐구 물었어요.
정아 : 뭘요?
근수 : 원래부터 그렇게 순진해요? 순진한 척 하는 거에요?
정아 : (굳는다)
근수 : (냉소 어린다) 사람 너무 믿지 말아요. 인간 다 거기서 거기니까.
S#57. 의상실 (저녁)
고급 디자이너 부띠끄.
한쪽에서 옷을 고르고 있는 선영. 곁에서 디자인 잡지 읽고 있는 소정.
선영 : (들떠 있다) 내 인생에 해가 다시 들려나 봐.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니.
소정 : (미소) 걔가 복덩인가보다, 얘...
선영 : 뭐...그런 것두 있겠지만... 걔 유명해진 거에는 누구 딸이라는 시너지두 있는 거야.
소정 : (피식) 그래, 그렇긴 하겠다만... 어쨌든 좋은 일이다. 축하한다.
선영 : 축하는 무슨! 인제부터 시작이라니까? 전략적으로 생각해야 돼. 걔나 나나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구...
얘, 이 옷은 어떠니? 요즘은 트렌드가 내 취향엔 영 아니라서...
소정 : (못 말린다는 한숨) 뭘 입은들 안 어울리겠니.
선영의 가방 옆에 놓인 쇼핑백이 보인다. 힐끔 들여다보는 소정.
소정 : 이건 뭐니.
카디건을 꺼내본다.
얼른 다가와 도로 쑤셔넣는 선영.
선영 : 어, 별 거 아냐. 누구한테 빌린 건데..... 세탁해서 돌려줄려구.
소정 : 너... 연애하니?
선영 : (어이없다) 뭐? (하하 웃는다) ...연애 좋지! 그래, 연애나 슬슬 해볼까?
S#58. 설렁탕집 (저녁)
마주 앉은 상우와 인순. 두 사람 앞에 설렁탕 그릇이 놓인다.
신나서 수저를 드는 인순.
상우 : 한 턱 크게 쏜다더니... 겨우 이거냐?
인순 : 왜? 설렁탕 안 좋아해? 야, 먹어 봐봐. 여기가 세계에서 제일루 맛있는 설렁탕 집이야.
상우 : (허탈하게 웃다가 수저 든다)
인순 : 근데, 도대체 용건이 뭔데? 나랑 상의할 일이 뭔데?
상우 : 어어...
인순 : 뭔데?
상우 : (뭐라고 둘러대지? ...고민하다가) 내가 고민을 해봤는데... 넌 관리가 필요해.
인순 : 관리?
상우 : 그래. 아무거나 닥치는대로 인터뷰하고 출연하고 그러지 말라구.
앞으론 나하고 다 상의해. 프로그램 내가 골라 줄께.
인순 : 허, (보다가) 야, 나는 우리 엄마 관리만으로두 넘쳐.
상우 : (할 말 없다가) 그건...! 그거구. 언론에 관해서라면 내가 니 어머니보다 전문가야.
앞으론 나하고 의논해. 그래야 시사토론 같은 사태가 안 생겨.
인순 : (미안한 표정) 야아, 나 그 사태로 더 스타 됐어.
상우 : (할 말 없다) 알아, 하지만 그건 운이 좋았던 거구...!
그리구 그런 스타성이야말로, 지금부터 내가 얘기하려는 미디어의 폐해,
인순 : (OL) 와, 맛이 영 별로네.
상우 : (본다)
인순 : 맛이 없다. 그지?
상우 : 괜찮은데 뭘.
인순 : (웃고) 인간이 참 간사해. 여기, 내가 감옥에서 출소하던 날 왔던덴데...
상우 : (멈칫 본다)
인순 : 갈 데두 없구, 세상 다 싫구, 우울해서 딱 죽고 싶은데 설렁탕이 너무 맛있는 거야! 너무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다 나드라구.
어찌나 맛있는지 두 그릇이나 먹었어. 그리고 죽어버려야지, 그런 맘이 싹 달아났어. 하하, 내가 너무 짐승 같지, 응?
(감회 어린 미소) 어쨌든 나를 살려준 음식! 음식계의 지하철녀지...
상우 : (가만히 본다)
인순 : 근데 말이야...오늘 와서 먹어보니까 영 별로네에. 이거 참...인간 마음이 일케 간사해요.
상우 : (갑자기 할 말이 없어진다. 헛기침을 흠흠 하며 조용히 먹기 시작한다)
인순 : 상우야... 유명해지니까 너무너무 좋은 거 있지. 일단 사람들이 나한테 너무 친절해졌어. 엄마두 친절해졌어.
(생각하다) 너두 친절해졌어!
상우 : (굳는다) 난 아냐... 그거 때문에 친절한 거.
인순 : (웃는다) 괜찮아, 어쨌든 다 좋구... 고마워.
상우 : (억울하다)
인순 : 지하철녀 이거...어쨌든...해볼만 한 거 같애. 그런 의미에서...
(주방 향해) 아줌마! 소주 한 병 주세요!! 야, 우리 건배하자.
종업원이 소주와 잔을 가져다준다.
한 잔 따라주는 상우. 자기 잔에도 따르고, 두사람, 건배한다.
상우 : 난 니가 유명해져서 친절한 게 아니야.
인순 : (웃고) 안다니까? 근데, 관리 같은 거 안해줘두 돼. 야, 나두 꽤 똑똑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다니까?
(소주를 쭉 마신다)
상우 : (다시 잔을 채워준다) 그런 뜻이 아니라,
인순 : 그리구 내가 사실... 미모가 쪼끔 되잖아. 사람들이 참...이쁜 건 알아가지구. (히히 웃고 다시 홀짝 마신다)
상우 : (보다가) 니가 이쁜 건 아니지. 에이, 그건 아니지.
인순 : (멈칫) 야, 나 정도믄 미인 아니냐?
상우 : 너야말루 훈녀지. (하하 웃는다) 하긴 뭐, 착각은 자유니까... 어쨌든 그래두 앞으로 가능하면 나하고 상의를....
인순 : (OL) 걱정하지 마, 앞으론 방송 출연 안해.
상우 : 왜 안해.
인순 : (씩 웃는다) 안 해.
상우 : 왜 그래? 너 충분히 출연할만 해! 넌 사람을 구했어.
인순 : 난 사람을 죽였어.
갑자기 싸한 침묵이 흐른다.
일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두사람.
인순 : (얼굴 벌개진다) ...미안해, 분위기 죽여버렸네. 와, 나는 왜일케 인간이 어둡냐. 지하철녀라 그런가...
뭘 어떡해얄지 모르다가, 머뭇머뭇 가방에서 준비한 선물 포장을 꺼내는 상우.
상우 : 사실은 내가...사실은 내가 너한테...
그 순간, 울리는 인순 휴대폰.
인순 : 여보세요? ... (멈칫) 은석이니? ...(듣다가 놀라서) 뭐라구?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순.
얼떨떨 바라보는 상우.
S#59. 설렁탕집 앞 거리 (저녁)
급히 나오는 인순과 상우.
우왕좌왕하는 인순. 차 앞으로 가는 상우.
상우 : (차문 열어주며) 타. 내가 태워다 줄께.
인순 : 그,그럴래? 고맙다.
상우 : 어딜 어떻게 다치셨다는 거야?
인순 : 모,모르겠어. 가봐야 알겠는데?
S#60. 중소 규모의 동네 병원 (저녁)
급히 안으로 들어가는 인순과 상우.
S#61. 병실 (저녁)
이인용 병실. 들어오는 인순과 상우.
잠든 경준. 간호사가 링거를 체크하고 있다.
인순 : 어떻게 된 거에요? 많이 다치셨어요?
간호사 : 다치신 게 아니구 식중독이세요.
인순 : 어후, 저는 은석이가 많이 다치셨다고 해서... (안도)
상우 : 괜찮으시겠어요?
간호사 : 네... 첨엔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셨는데... 이젠 좀 나지신 거 같애요.
진정제 맞구 통증이 가라앉으셔서 막 잠드셨어요.
인순 : 뭘 드셨길래...
간호사 : 뭐, 상한 음식을 드셨나 봐요.
인순 : 어후, 내가 그렇게 식사 제대로 하시라 그랬는데... 어디서 뭘 드시고...
가만히 인순을 바라보는 상우. 점점 마음이 상해가는 중이다.
인순 : (잠든 경준을 애틋하게 내려다본다) 왜 이렇게 마르셨지.
상우 : ...
인순 : (애틋한 미소 짓다가 속삭이듯) 선생님, 저 왔어요. 지하철녀요! 훌륭한 선생님의 훌륭한 제자 왔어요!
상우 : ...
인순 : 쿨쿨 잘두 주무시네, 하하.
무표정하려 애쓰며 조용히 병실을 나가는 상우.
S#62. 병원 복도 (저녁)
창가로 다가오는 상우. 우두커니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다.
마음이 몹시 아프다. 그러나 애써 무심하려 노력하고 있다.
저만치 창가에 혼자 서 있는 은석의 모습이 보인다.
먼저 상우를 발견한 은석. 그리 반갑지 않은 듯 금새 얼굴을 돌려버린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신경이 쓰이는 듯 다시 힐끔힐끔 돌아보는 은석. 이윽고 먼저 말을 건다.
은석 : 아저씨...
상우 : (멈칫 돌아본다)
은석 : 왜 그러고 있어요?
상우 : (보다가) 넌 왜그러고 있냐?
은석 : 아빠가 아퍼서요... 슬퍼요.
뭐라 해줄 말이 없구나... 침묵이 잠깐 흐른다.
상우 : 아저씨도... 슬프다.
은석 : 뭐가요?
창 밖에 흩날리는 낙엽을 잠시 바라보는 상우.
상우 : ...... 인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