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장(風葬)
이상기
저동항에 도착했다. 바다를 막고 있는 거대한 방파제와 함께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첫눈에 들어왔다. 늘어선 지붕위로 올려다보게 되는 방파제가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바다는 육지보다 낮은데 방파제가 저리 높다니? 나의 선입관은 방파제의 높이를 자꾸 키우고 있었다.
숙소를 찾기보다 배낭을 맨 채 방파제로 향했다. 부두 끝에서 경사로로 다시 올라가야 했다. 육지의 일반 방파제보다 두세 배는 더 높을 것 같은 방파제에 올라섰다.
왼쪽으로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바다를 가르고 있고, 활주로 같이 직선으로 쭉 뻗은 방파제 중간 우측에는 방파제와 한 몸이 되어버린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오후의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신 인공 구조물과, 삐죽 솟은 적갈색의 바위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방파제의 높이와 크기로 망망대해 태평양의 파도크기를 어림잡게 했다.
인간이 만든 단순한 선과 면의 구조물과는 대조적으로 바위의 거친 피부, 움푹움푹 패어진 홈, 여기저기 불규칙하게 갈라진 균열이 인간과 자연의 솜씨를 극적으로 대비 시켜 준다.
다음날 어둑한 새벽 다시 방파제로 나갔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솟아오를 붉은 태양을 보기 위해서다. 둥근 불덩이가 불쑥 솟아오르는 눈부신 일출은 수평선에 낮게 드리운 구름 탓에 펼쳐지지 않았다. 구름으로 가려진 동녘은 서서히 밝아져 수평선 위로 분주한 배들을 보는 것으로 아쉬운 일출보기를 대신했다. “사대가 덕을 쌓아야 제대로 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어판장이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선 채 부산스럽다. 경매의 외침소리와 딸랑대는 종소리가 밤 어로의 피곤함을 씻어주려는 듯 경쾌하다. 그렇게 바다의 아침은 펄떡이는 생선과 신선함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밤새 오징어를 낚고 돌아왔을 배들 옆으로 상자들이 줄줄이 쌓여있고 그 주위를 둘러선 남성들의 외침과 손놀림은 호기심과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어판장 뒤편 넓은 바닥에는 서너 명씩 조를 이룬 여인들이 막 경매를 마친 오징어상자를 가져다 바닥에 쏟아놓고 배 가르기가 한창이다. 고무호스를 걸쳐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서는 물이 철철 넘쳐나고, 흐르는 물소리에 뒤질세라 손놀림이 재빠르다. 배를 가르고, 물에 넣어 씻고, 대나무를 끼워 한편에 쌓아 놓는 일이 물 흐르듯 이루어진다. 여인들 간에 오가는 말도 없이 일에만 열중한다. 다만 쪼그려 앉은 작은 몸집, 머리 수건, 검은 얼굴 등으로 모두 나이 많은 할머니들임을 짐작하게 했다.
아침밥으로 오징어 내장탕을 마주하고 앉았다. 할복작업이 있을 때만 먹을 수 있는 울릉도명물이란다. 콩나물과 애호박이 들어있는 뚝배기 속에서 하얀 내장을 건져 올리자 문득 육탈(肉脫)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사체를 나무나 바위 위에 올려두고 비바람을 맞게 하여 죽은 자의 영을 천계로 장송한다는 제사방법이다. 왜 풍장이 떠올랐을까? 뼈만 남은 것 같은 촛대바위 때문일까? 새벽에 보았던 등 굽은 할머니들 때문일까?
울릉도는 신생대였던 3세기말 4세기 초에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는가? 바위는 아마도 200만년 이상 해풍에 시달려 왔을 것이다, 그러니 육탈의 과정은 지나도 한참을 지났다고 할 수 있다. 오징어를 가르는 노파들도 보낸 세월과 함께 몸이 마르고 작아졌으니 육탈의 과정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낮에는 육탈의 과정을 거치는 바위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육안으론 불명하여 전화기로 찍은 사진을 확대해 보니 누워있는 향나무 뿐 아니라 단정하게 바로선 나무도 보인다. 이 나무도 분명 향나무다.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식물들이 여기저기 자라고 있다. 육탈당한 바위에 흙이 있을 턱이 없다. 더구나 물이 있을 거라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자라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에 솟은 뾰족한 바위섬에서 향나무가 어떻게 자랄 수 있었을까?
얼마 전의 뉴스를 기억한다. 지난여름 유래 없는 더위와 가뭄으로 채소가격이 배로 뛰었다는 이야기다. 기름진 문전옥답이라도 물이 없으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금기 품은 바다 한가운데 뼈만 남은 듯 보이는 높다란 바위에서 나무가 살고 있다. 분명 누가 심은 것도 아닐 것이고 물도 줄 수 없는 곳이다.
관광안내기사가 여기를 가리키며 둘레가 아름이 넘는 향나무가 살고 있다고 했다. 먼 거리라 장말 아름드리 인지는 알 수 없지만 향나무가 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육탈! 바람을 견디다 바람처럼 간다는 것이 삶이다.
찬 물에 손을 당구고, 쉼 없이 오징어 배를 가르고, 내장을 떼어내고, 씻고, 들어 옮기는 바쁜 손, 굽은 허리 할머니들도 일이 끝나면 굳어진 몸을 유모차에 의지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손에 쥔 몇 잎의 지전을 손자를 위해 쓰겠다는 생각이 어둔한 걸음을 서두르게 만들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세차다. 역시 바람이 많은 섬, 유구한 역사와 함께 태어나고 사라지는 순환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