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양백산맥 원문보기 글쓴이: 박희용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16)
16- 모두가 실패한 이상한 전쟁 8 |
번호 2456 글쓴이 이정환한국전쟁사 조회 209 누리 10 (10/0) 등록일 2007-9-7 02:28 | 대문 0 톡톡 0 |
다시 쓰는 한국전쟁사 (16)
-모두가 실패한 이상한 전쟁 8-
미 지상군은 세 가지의 약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차량이 지원되지 않는 지역에서의 전투를 회피한다. 둘째, 야간전투에 익숙하지 않다. 셋째, 지나치게 공군력에 의존, 항공지원이 없는 전투 상황에 취약하다.
-항미원조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 더화이 장군-
2.미국의 전략적 실패/후편: 오판 쾌조의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고 승리와 함께 종전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 했지만 전선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중국어를 쓰는 낯선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기 시작했고, 최전선의 징후들이 하나같이 패퇴하던 적의 대규모 반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열린 회담에서 맥아더 원수는 거기까지 찾아온 미군의 최고통수권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국의 본격적인 한국전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50년 겨울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는 이렇게 오판으로 막을 열고 있었다.
2-1.치밀한 중국군의 작전계획 & 지능적인 제 1차 공세(10월25일-11월 5일)
고심 끝에 참전을 결심한 중국은 미군이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작전계획문서와 마오가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미군의 화력우세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 중국군의 병력이 최소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 또 미군의 약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매우 치밀한 분석과 준비가 수반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 시점에서 중국의 의지와 능력을 오판했던 것이 분명하다, 50년 여름 북한이 미국의 의중을 오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13병단(38군,39군,40군,42군,50군,66군, 포병 1,2,8사단)과 9병단(20군,26군,27군)의 총 27개 사단을 투입키로 하고 총사령관에 국공내전의 명장 펑 더화이를 내정한다. 당시 중국군의 총병력은 약 33만정도로 추정된다.
흔히 우리가 아는 백만 대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 온 것은 아니다. 펑 더화이 장군은 인민군 지휘부를 통해 얻은 정보를 분석한 결과 미군 1개 사단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최소 2개 군(6개 사단)이 필요하고 한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1개 군(3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초반 기선을 제압하고 적의 대오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취약점이 많은 한국군사단을 먼저 격파하기로 마음먹는다.
10월 19일 평양이 함락 되던 날, 중국군 선발 4개 군 12개 사단은 이미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기습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야간 정숙기동을 엄히 요구하였고 중국군의 모표와 흉장을 떼고 조선인민군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조선에 의용군으로 참전한다는 선서를 하였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적유령 산맥 속으로 스며들었다.
50년 10월 25일 국군 6사단 7연대가 압록강 초산에 도달하였고 6사단 2연대는 온정에, 국군 1사단 15연대와 미 1기병사단 8연대가 운산에 도달했지만 그들은 여태까지 보이지 않았던 힘에 의해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전진이 저지된다.
국군 6사단은 중국군 118사단의 포위망에 걸려버렸고 중국 120사단역시 국군 1사단 15연대를 기습한 후 6사단 7연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7연대를 궤멸시킨다. 중국 40군이 6사단 2연대를 온정에서 맹타를 가하자, 이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온 국군 8사단 10연대와 6사단 19연대에게까지 공격을 가해 결국 국군 2군단(6사단,7사단,8사단)은 대혼란에 빠지면서 총체적인 붕괴상황에 빠진다. 국군 1사단의 전진이 운산에서 저지되자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미 1기병사단 8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였는데, 이는 적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자진해서 호랑이굴로 들어간 형국이 되고 말았다.
11월 1일 국군 1사단 15연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철수하였고 1기병사단 8연대 역시 운산에 포위된 휘하 3대대를 끝내 포기하고 후퇴하고 만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미군은 중국군의 전면개입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중국군의 1차 공세는 서부전선에서의 유엔군의 북진을 일단 정지케 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중국군의 공세는 여기서 일시적으로 중지된다. 중국군은 유엔군의 북진을 일단 저지하여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을 뿐 아니라 아직 전면적인 반격태세가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자신들이 생각했던 전술이 미군과 한국군에게 제대로 먹혀들 것인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조기의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승리감에 도취한 미군과 국군이 방심한 탓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전선이 한없이 확장되면서 단위 부대 당 할당된 지역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화력이 우세한 유엔군이라고 할지라도 약점을 노출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반격을 노리는 중국군이 이러한 빈틈을 공격하는 일은 너무도 손쉬웠다. 중국군은 맹목적인 인해전술이 아닌 펑 더화이 총사령관이 지적한 미 지상군의 약점을 철저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매우 지능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국군 2군단의 붕괴와 미 1군단의 패퇴는 분명 전체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매우 불길한 전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엔군 사령부는 이를 과소평가한다. 결국 중국군의 1차 공세 이후의 일시적인 소강상태가 만들어 낸 전략적인 노림수는 미군수뇌부에게 심각한 전략적 오판을 유도한다. 이제 자신의 전술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한 펑 더화이 사령관은 송 시륜의 9 병단이 공격준비를 갖추는 대로 전면적인 반격을 차분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미군이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투가 혹독한 겨울추위와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2.맥아더 원수는 정말 중국의 참전을 몰랐던 것일까?
이 시점에서 1차 중국군의 공세로 치명타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전면공세를 명령했던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실책에 대해서 심층적인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원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것일까? 홍 학지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군수사령관은 맥아더가 오만했다고 평가한다. 몇몇 맥아더 연구가들이 과대망상이었다고까지 혹평하게 만드는 50년 겨울의 전략적 실책의 핵심은 맥아더가 왜 1차 중국군의 공세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11월 24일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 했는가 하는 점이다.
분명 맥아더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고무되어 전편에서 지적했던 대로 방만한 병력운영과 불필요한 작전(10군단의 원산상륙작전과 187공수연대의 숙천 강습작전), 야전군 통수권의 분리(10군단과 8군의 지휘권 이원화)로 간절히 원했던 쾌속전진을 통한 승리와 종전의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50년 겨울처럼 엄청난 참패를 모면할 기회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만약 원수가 1차 중국군의 공세이후 방만했던 전선을 정리하고 39선으로의 전술적인 후퇴와 전열의 재정비를 통해서 중국군의 2차 공세에 대비했었다면 전쟁의 승패는 어떠했을까?
왜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일까? 39도선의 지형을 살펴보면 중국군의 빈약한 화력과 보급, 병력으로는 제대로 구축된 방어선을 돌파하기 어려웠다 (후일 이것은 리지웨이에 의해서 분명하게 입증된다. 다만 39도선 상이 아닌 37도 선상에서) 그리고 전체 한반도의 20%도 채 안 되는, 척박한 산악의 영토만을 가지고 과연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만일 미군이 50년 겨울 중국의 공세를 39도선에서 저지했다면 다음해 중국은 더 이상의 개입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돌아갔을 공산이 컸다. 물론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그러나 미군은 중국군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패배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제공했다. 50년 가을 미군은 빠르게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적어도 참패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이는 무조건적인 돌파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과는 매우 넓은 선택의 폭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정황상 맥아더 원수가 중국의 참전을 전혀 몰랐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반대되는 사실들이 존재한다. 우선 중국군의 1차공세로 국군과 미군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는데 사실상 궤멸상태의 인민군에게서 이런 전력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뭔가 새로운 전력이 가세했다고 당연히 의심해야 할 상황이었다. 더욱이 생포된 중국군 포로들의 진술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전면적인 반격을 예고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1년 전까지는 장 개석 군대였다가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사단전체가 항복하여 중국공산군이 되었다는 진술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 쯤 되면 전면전징후가 틀림없다고 봐야 한다.
10월말 일련의 전투에서 생포된 중국군 포로들을 직접 심문했던 국군 1군단과 미 1군단 등 주요 야전사령관들은 이들 포로들을 통해서 중국군의 개입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포로들이 유엔군 총사령부로 이송되어 심문한 결과는 ‘중국군 부대가 부대단위로 한국전쟁에 참가했다는 확실한 정보는 없다’였다. 맥아더 원수의 유엔군 사령부는 고작해야 2개 사단규모의 의용군이 북한을 돕기 위해 개입했다고 낙관론을 폈으나, 맥아더 원수는 애써 진실을 무시하고 싶어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아무리 중국군이 야간에 은밀하게 이동하였다고는 하나 30만이 넘는 대군이 움직이고 있었다면 미 공군의 항공정찰에서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였을 리가 없다. 중국군의 한반도 진입을 막기 위해 11월 5일 압록강 모든 다리의 파괴를 지시했던 맥아더 장군이 왜 중국의 참전사실을 끝내 몰랐다고 변명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기서부터 군 전략전술이 아닌 정치의 문제를 톺아볼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트루먼 대통령의 9.27훈령을 되새겨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우리민족의 통일문제보다는 한반도의 전쟁이 중소와의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이것은 한국전쟁 개전 당시 미국의 개입에 이은 전면전으로의 확대를 가장 두려워했던 소련 중국의 생각과도 궤를 같이 한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 때문에 또다시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38선을 돌파하면서 상당히 구체적인 훈령을 통해서 미군의 행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즉 38선 돌파를 허용하되, 작전의 목표를 침략군인 인민군 격멸이라는 군사목표에 엄격히 한정하고 특히 중,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작전지침이었다. 그 결과 10월 19일 서해안 선천에서 동해안 성진에 이르는 목표 선을 정하고 그 이상의 북진은 국군만이 작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맥아더 원수는 10월 24일 워커 8군 사령관과 알몬드 10군단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휘하의 전 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국경선까지 진격하라’ 미국 내에서도 유엔군의 북진 제한 선을 풀어버린 이 지시가 9.27훈령을 위반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발생한다. 이미 중국이 참전해버린 상황에서 이 것은 단순한 논란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9.27 훈령의 핵심은 중,소 와의 충돌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10월 24일 원수의 명령은 그 제한 선을 해제해버린 것이고 그 이면에는 동월 15일 웨이크 섬 회담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장담 했던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이 상황에 직면한 맥아더의 입장이 어떠했을까?
자신의 예언과는 달리 중국군은 소규모도 아닌 대규모로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국은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중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가 대통령의 훈령을 무시하고 미군 부대들을 국경지역으로 진출시켰기 때문이라는 비난이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정이 이런데 전쟁에서 시간을 끈다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촉수를 가졌던 맥아더 장군이 몰랐을 리 없다. 워싱턴 정가에서 반드시 누군가가 훈령을 어긴 책임을 물어올 것이고 맥아더 원수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다. 중국의 참전은 국군과 유엔군에게 크나큰 군사적 위기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맥아더 원수 개인에게도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몰고 온 셈이다.
결국 이 상황을 큰 문제없이 극복하는 방법은 무조건 신속하게 전쟁을 조기에 끝내 버리는 길외엔 없었다. 승전과 전쟁종결이라는 화려한 피날레에 중국의 참전 자체는 그대로 묻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수는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한반도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고 승리를 기정사실화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너무도 명백한 중국군의 전면적인 반격징후들을 유엔군 사령부가 인정했을 리 만무하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진격을 늦추고 전선을 정비해야 하는데 그런 조치 자체가 자신의 장담이 실수였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책임추궁을 면할 길이 없었다.
여기서부터 원수는 결정적으로 상황판단을 그르치기 시작한다. 그의 11월 24일 크리스마스 대공세는 중국군의 2차 대공세로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고 거듭된 실패로 궁지에 몰린 맥아더는 더욱더 강경한 조처와 현실성 없는 대안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한반도에 진입한 중국군을 격퇴하기위해서 핵을 동원하고 만주를 폭격하여야 하며, 중국해안을 봉쇄하는 것은 물론 대만의 국민당 군과 합세하여 중국본토를 공격해버리자는 매우 극단적인 주장까지 하게 된다. 통일을 바랬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야 정말 고마운 일이었을지 모르나 미국정부와 여타 자본주의 진영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일 날 소리’였다.
미국의 의도 자체가 한반도의 전쟁을 적당히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챙기자는 수준이었지 중국 그리고 나아가 소련과의 전면전을 벌이자는 차원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핵 독점의 절대 우위가 사라진 상황에서 미국은 그러한 모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반도 통일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맥아더의 해임은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한 귀결이었다. 14년 만에 귀국하여 그는 황제보다 더한 환영을 받았지만 곧이어 벌어진 상원 청문회에서 맥아더는 훈령을 무시하고 상황을 결정적으로 오판했다는 명백한 정황에 대한 해명요청에 대해서 앞뒤가 맞지 않는 궁색한 변명 외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맥아더는 상원청문회를 통해서 자신의 오판과 실책이 모두 드러나는 망신을 당하고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다. 육사 최초의 올 A 수석졸업과 1차대전에서의 화려한 전공, 최연소 참모총장과 육사교장 역임, 2차대전의 전공으로 1차대전의 퍼싱 장군에 이어 미 육군사상 두 번째로 원수가 되었던 맥아더였지만 한국전쟁의 전략적인 오판으로 그는 화려했던 군 생활과 그보다 더 원대했던 정치적 야심을 이렇게 접어야만 했다. 맥아더에게도 한국전쟁은 큰 실패로 끝났다. 노병은 그렇게 사라졌다.
2-3.중국군의 2차 대공세 (1950년 11월 25일-12월 14일)
중국군의 전면전 개입 징후가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 8군과 유엔군사령부는 이를 2개 사단 규모로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워커 8군사령관은 불안의 징후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특히 자신이 지휘권 밖에 있는 10군단과의 연결이 유지되면서 진격이 이뤄질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10군단(3사단,7사단,1해병사단)은 독자적으로 빠르게 북진한다. 그 결과 두 부대사이의 간격은 더더욱 벌어지고 있었다.
10군단 예하 7사단의 선두가 혜산진을 향해서 국군 1군단 역시 청진과 길주로 향하고 있었다. 원산에 상륙했던 미 해병 1사단은 북한의 임시 수도였던 강계를 조속히 점령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결국 10군단과 동부 측면 국군 1군단(수도사단,3사단)의 쾌속전진에 고무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독촉으로 미 8군은 다시금 불안한 전선으로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11월 24일 일명 크리스마스 공세로 명명된 이 공격에서 미8군은 맨 서측의 미 제 1군단(1기병사단,24사단, 국군1사단, 영27여단)이 신의주와 수풍댐을 향하여 중앙의 미 9군단(25사단, 2사단, 터키여단)이 초산, 맨 우측의 국군 2군단(6.7,8사단)이 강계방향으로 전진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이미 1차 공세를 통해서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한 펑 더화이 사령관은 송시륜의 9병단까지 배치를 완료한 채 흡사 유령처럼 적유령의 깊은 삼림 속에서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는 유엔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3병단은 맨 서측에서부터 50군,66군,39군,40군,38군,42군순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강계지역에 위치한 9병단은 서측에서부터 20군,26군,27군순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 들의 선 타격 목표는 적정을 전혀 모른 채 전진하고 있던 미8군의 우측방에 위치한 국군 2군단 그리고 중국 9병단 정면으로 돌진해오고 있는 10군단 예하 미 해병 1사단이었다. 중국군 9병단이 강계지역으로 진입함에 따라 13병단 예하 중국 42군과 38군이 남서진하면서 국군2군단의 측면을 치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11월 26일 38군은 덕천의 국군 7사단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42군은 영원에서 국군 8사단을 괴멸시킨다. 11월 28일 38군의 선봉 113사단은 군우리 후방 삼소리를 점령하여 미 9군단 2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한다. 북진하던 미8군 예하부대들은 또 한번 기습을 당하게 되었고 2차 대공세는 1차 때보다 훨씬 더 거셌다.
국군 2군단과 미 9군단은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면서 우측면에서부터 붕괴하고 말았다. 8군 담당지역 맨 우측면을 담당하던 국군 2군단 예하 6,7,8사단이 완전히 분산되면서 미9군단의 측면이 노출되었고 9군단은 전진을 멈추고 우측면의 공격에 맞섰지만 북쪽에서의 거센 압박과 38군에 의해 배후가 차단되면서 포위되고 만다 (전선 붕괴의 단초를 제공했던 국군 2군단은 치욕적인 해체를 명령받았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재창설된다)
특히 미2사단은 군우리 일대에서 38군 112,113,114사단의 포위망에 걸려 치명타를 입는다. 이 과정은 흡사 ‘인디언의 태형장*’을 연상시키는 가혹한 것이었다. 산악전투과 야간전투에 익숙하지 않았던 미2사단은 펑더화이가 간파했던 그대로 협소한 단일도로위에서 대규모 매복부대의 집요한 공격에 걸려 거의 모든 사단 중장비와 화포를 유기한 채 산길로 분산 탈출하는 치욕을 당한다.
이러한 모습은 역습을 당한 모든 유엔군에게 거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도로망을 통해서만 이동하던 유엔군은 산악매복에 휘말려 재빠른 야간 기습과 성동격서 식 기동전에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전 전선이 붕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국군은 그동안 통상 인해전술로 알려진 무지막지한 전술을 사용해서 미군과 국군을 압도한 게 아니었다. 중국군이 사실상 인해전술을 사용한 전투는 9병단과 1해병사단간의 장진호 사투가 유일하다고 봐야 할 만큼 중국군의 전술에 대해서는 좀 더 합리적인 이해와 분석이 요구된다. 중국군은 열세인 화력과 보급의 약점을 산악 지형을 이용한 야간 기동과 집중적인 병력운영을 통해 극복하고 드러난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여 대승을 거둔다. 특히 전투가 벌어진 대부분의 야간상황에서 미군은 공중화력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북한의 혹독한 추위는 미군이 자랑하던 장비와 화력의 장점을 상당부분 감소시켰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악전고투를 시작한지 이틀 후 험준한 개마고원 산악지대 골짜기에서 한국전쟁사상 가장 치열했던 장진호 전투가 벌어진다.
11월 23일 미 해병 1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 점령을 목적으로 하갈우리까지 전진한다. 송시륜의 중국 9병단 예하 9개사단이 은밀하게 미 1해병사단을 포위섬멸 하려는 대형으로 장진호 주변 골짜기 마다 전개하고 있었다. 해병 7연대가 유담리에 도착한 25일 서부지역 미 8군이 중국 13병단의 일제 반격으로 대혼란에 빠지자 해병 1사단은 목표를 강계에서 무평리로 전환하고 8군의 측면으로 지원기동하려 하였으나 유담리에서 압도적인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 포위되고 만다. 험준한 산악지역 곳곳에 매복한 중국군의 밤낮 없는 공격과 인해전술에 가까운 파상공세, 혹독한 추위로 소총마저 제대로 발사되지 않는 상황에서 전사자보다 동사자가 더 많았던 혹한기 장진호 전투는 수많은 진기록을 남겼다.
11월 27일 선두 해병 7연대의 첫 교전을 시작으로 해병 1사단은 중국군 9개 사단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하갈우리에서 고토리, 황초령고개, 진흥리를 거쳐 흥남항까지 약 125킬로의 험준한 산악도로를 16일간 밤낮없이 싸우면서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미 해병 1사단 역사상 이보다 더 처참한 전투는 없었으며 해병의 전통을 깨고 전사자들마저 서둘러 현지에 묻고 떠나야 할 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그러나 미 해병대를 섬멸하기 위해서 전력을 모두 쏟아 부었던 9병단 역시 장진호 전투이후 51년 3월까지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9병단의 전열이탈은 후일 중국군이 37도선 이남으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중국 역시 참전하자마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만 한국전쟁의 완전한 승기를 여기서부터 놓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미 해병대처럼 완벽한 포위상태에서도 기강과 투지를 잃지 않는다면 결코 부대 전체가 산산조각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 해병대만큼 혹독하게 중국군의 포위를 당했던 부대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서부전선 국군 2군단의 붕괴는 우리 군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우리는 6사단의 압록강 초산 진출만을 기억하기 보다는 2군단의 붕괴가 한국전쟁 승리의 기회를 날려버린 단초가 되었다는 점을 더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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