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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악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인류의 조상들은 큰 먹잇감을 잡기 위해 여러
사냥꾼을 통제하고 그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화하거나, 적대 부족의 침략을 알리기 위해 음악을 활용했다. 이를 위해 자연에서 쉽게 획득 가능한
방법, 예를 들면 속이 텅 빈 통나무를 막대기로 두드려 서로 약정된 신호를 전달하는 등의 행위를 본능적으로 터득했고, 이를 전문화·고도화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군악의 시초로 보이는 대목이다. 이는 고대 사회일수록 두드러진 현상으로 당시의 사냥 방법과 기술이 곧 부족 간의 전쟁에도
사용됐고, 평시 놀이와도 연결됐으며, 음악 역시 같은 과정의 연장선 위에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악기 나이를 들고 행진하는 군인의 모습. |
이집트 역사상 기록된 군악의 시초
전장에서 군악으로 신호 전달
군악의 역사성을 규명하는 가장 오랜 흔적은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12대 파라오인 투탕카멘(BC 1361~1352 재위)의 무덤에서 나온 악기에서 발견된다.
사진① 은 룩소르의 나일강 서안 ‘왕의
계곡’에서 발견된 트럼펫을 닮은 악기 ‘나이(Nai)’를 들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군악대로
간주된다. 생김새로 짐작할 수 있듯 파라오의 등장을 알리는 팡파르 같은 단순한 연주만 가능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달랐다.
전투대형이나 작전명령같이 긴요한 신호를 전달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통신수단이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나무로 만든 마개를 끼워 보호했는데, 최초
발굴 당시엔 소리가 났을 정도로 정교했다고 전해진다.
전투대형 팔랑크스의 전진 속도를 조절하는 군악병. |
아울로스 연주에 맞춰 5종경기를 하는 장면. |
그리스 군악 운용 체계화
행군 땐 최전방, 전투 땐 후미에서 전투 지휘
연구에 의하면 이집트와 아시리아 등 고대
강대국에선 공통적으로 군악대와 다양한 악기를 사용했다. 이런 습관이 지중해로 전파되면서 본격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리스에는 ‘당시
군대의 군사훈련에 필요한 구령을 붙이기 위해 군악대를 편성했고, 전투에서는 트럼펫이나 호른과 유사한 악기를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사진② 의 악기는 플루트나 리코더를 닮은 ‘아울로스(Aulos)’다. 특징은 가늘지만 날카로운 음을 길게 연주하고, 한꺼번에 두
개를 동시에 연주해 한 개로 부족한 각도를 보강했다는 것이다.
이 악기는 특별히 스파르타군이 애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영화 ‘300’에는 결전지 테르모필레로 향하는 레오니다스 왕의 근위대 선두에서 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전투 중에는 어땠을까? 사진③에서 보듯 그리스군의 밀집전투대형 ‘팔랑크스(Phalanx)’ 바로 뒤에 위치해 연주함으로써
전투원의 행동을 통일시키고, 대형의 전진 여부와 속도를 조절했다. 왼손에 방패, 오른손에 창을 들고 아울로스가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상대
진영으로 돌진하는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팔랑크스야말로 공포와 전율 그 자체였다.
정리하면 그리스군 군악병은 행군할 땐 가장 앞에서,
전투 중에는 대열의 가장 후미에서 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군의 전투력은 음악으로 발현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트럼펫을 닮은 악기 ‘나이’. |
전시를 대비해 평시 음악에 맞춰 경연 (스포츠)하다
그리스인들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남다르다. 생활 전반에 음악이 녹아 있으며, 올림픽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는 전시에 필요한 전투기술을 스포츠로 고안해 평시
연마하도록 했고, 악사의 연주에 맞춰 연습이나 경연을 진행했다. 아울로스 연주에 맞춰 적진을 유린하는 중장보병들처럼 말이다.
후대에 들어 올림픽에는 아예 아울로스를 비롯한 악기 연주가 제전의 일부가 됐는데 여기서 무려 아홉 번이나 연속 우승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올림픽 우승자를 칭송하는 합창 형태의 송가(頌歌·Epinicia)도 있었는데 나중엔 전쟁영웅도
포함됐다.
국가의 존망과 시민의 생사가 달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평시부터 준비해야 했던 그리스인들에게 이 정도는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요컨대 고대 그리스에서 스포츠와 음악은 국방 그 자체였다. 군악은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가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더욱 꽃을 피우게 된다.
그리스군의 악기 ‘아울로스’. |
해설 미니박스
고대 그리스는 전시에 필요한
전투기술을 평시 숙달할 수 있는 경기 종목을 고안해 종교제전의 일부로 진행했는데 이것이 현대 올림픽과 스포츠의 원형이 됐다. 특히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4종목은 모두 전투에 필요한 핵심기술을 반영했다. 양손에 돌을 들고 하는 멀리뛰기는 왼손의 방패와 오른손의 창을 상정한 것이다.
권투에서는 방패를 들어야 하는 왼손은 방어만 하고, 타격은 창을 쥔 오른손만 할 수 있었다. 달리기도 그냥 하지 않았다. 무장 상태로 달리며
검투를 벌이는 무장달리기는 최고의 전투성을 보여 준다.
-필자 저(著)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나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