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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비화] 한국 최고의 두 백자필통에 얽힌 사연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19.
19세기 분원가마에서 제작된 백자철화포도문필통은 높이가 16.4cm이고, 12각의 기단 위에 원통형 몸체를 세웠고 투각의 포도덩굴이 감싸고 있다. 청화와 철사(鐵砂)로 채색을 했다.
19세기 분원리 가마에서 제작된 백자청화소나무호랑이무늬필통은 높이가 16.7cm인데, 양각으로 소나무와 호랑이를 가득 차게 배치했고, 청화로 나무, 돌, 호랑이 얼굴을 채색했다.
한국에서 백자필통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명품이 두 개가 있는데 모두 이화여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청화백자철화포도문필통과 청화백자소나무호랑이무늬필통이 그들이다. 19세기 분원가마에서 제작된 백자철화포도문필통은 높이가 16.4cm이고, 12각의 기단 위에 원통형 몸체를 세웠고 투각의 포도덩굴이 감싸고 있다. 청화와 철사(鐵砂)로 채색을 했는데, 유약의 발색이 좋고 또 다람쥐가 포도덩굴로 기어오르는 조각의 구도가 사실적이며 현대적이라 세상이 인정하는 걸작품이다. 역시 19세기 분원리 가마에서 제작된 백자청화소나무호랑이무늬필통은 높이가 16.7cm인데, 양각으로 소나무와 호랑이를 가득 차게 배치했고, 청화로 나무, 돌, 호랑이 얼굴을 채색했다. 호랑이는 해학이 깃든 한국 호랑이의 표정이며 금방 움직일 것같이 생동감이 감도는 명품이다.
일본인이 소장했던 필통이다
조형기법과 색깔에서 극치의 아름다움을 지녀 백자 필통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할 청화백자철채포도문필통과 청화백자송호문필통은 일본인 미요시(三由)가 소장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에 들어 와 원산에 정착한 미요시는 몸집이 뚱뚱하고 눈이 옆으로 날카롭게 째져 마치 사무라이처럼 생겼는데, 어장(漁場)을 크게 경영하고 원산의 명물인 운단(雲丹)을 독점 판매하는 공장도 소유해 일품의 도자기를 많이 소장한 큰 부자였다. 소장품은 대부분 조선백자였으나 현재 보물 제401호로 지정된 금동여래입상을 비롯해 다수의 금속유물도 있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패전국의 포로가 된 미요시는 그동안 알토란처럼 모아 소장했던 고미술품을 일본으로 가져 갈 수 없었고, 세상이 바뀌니 어장과 운단공장도 한국인에게 넘어가 덫에 갇힌 생쥐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였다. 당시는 소련의 군정 치하라서 작은 보따리 하나도 일본으로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전후사정을 꿰뚫어 본 골동거간인 김학선(金學善)과 청진에서 골동상을 하던 최창환(崔昌煥)이 때를 놓칠세라 미요시의 집을 쳐들어갔다.
“당신이 소장한 조선백자는 이 나라의 문화재요. 어차피 한 점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어요. 우리에게 파시오.”
“뭐라고? 사겠다는 뜻인가, 빼앗겠다는 것인가?”
“적당한 값을 처 주겠소. 어차피 빼앗길 물건이니 다행인 줄 아시오.”
“무슨 소리! 얼마나 많은 돈을 주고 수집한 것인데.”
“당신의 돈은 어디서 났소? 어장을 경영하며 얻은 수입과 운단을 팔아 생긴 돈 아니오? 애당초 당신의 재산은 하나도 없소. 모두가 조선 사람의 피와 땀을 착취해서 얻은 것들뿐이오.”
“네 놈들이 감히! 내 재산을 빼앗으러 왔단 말인가?”
백발의 미요시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만약 일본만 망하지 않았다면 순사를 불러다 요절을 내도 시원찮았을 일이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했으니, 그의 신변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극도로 화가 난 미요시가 말을 잊지 못하자 옆에 있던 부인이 울먹이며 말했다.
“여보! 팔아요. 어차피 본토로 가져가지 못할 바에야 파는 것이 좋겠어요. 팔아 버리고 떠납시다.”
이윽고 체념의 긴 한 숨을 내쉰 미요시가 벽장 속으로 들어가 50여 점의 도자기를 꺼내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거물급이었다. 안정감이 있는 형태와 때깔이 빼어난 청자상감보상화운학목단문접시를 비롯해 때깔이 눈덩이처럼 흰 청화백자추초문입호, 청화도들문팔각병, 백자이중투각사각병 및 연적 등등 그 중에 두 필통도 함께 있었다. 청화백자철화포도문필통과 청화백자소나무호랑이무늬필통.
이들은 조선 필통 중 제일로 손꼽히는 명품으로 1937년 전형필이 이희섭을 시켜 이 필통을 포함해 4~5점을 전례가 없는 거금 4만 원에 사겠다고 했을 때 미요시는 콧방귀를 뀌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 후에 전형필은 10만원을 제시했으나 역시나 거절당했고, 해방이 되기 전 신보를 보내 다시 살려고 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세 번째는 10만원 이상의 금액을 제시했을 터, 그래도 거절당하자 전형필은 매우 안타까워했다는 풍문이다. 그토록 아끼던 도자기였기에 미요시는 해방이 되기 전 도자기를 몽땅 싸들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다. 김학선과 최동환이 얼마의 돈을 쥐어주고 도자기를 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배를 이용해 38선을 넘어온 두 사람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해 서울 마포에 사는 장석구의 집을 찾아갔다.
장석구(張錫九), 호가 온재(溫齋)인 그는 한국의 골동사를 얘기할 때 약방의 감초 격으로 꼭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해방 후 나이토 지로(內藤次郞), 동양제사의 사장인 이토 마키오(伊藤愼雄), 인천에서 정미소를 경영해 거부가 된 스즈시게(鈴茂), 성환농장을 하던 아카보시(赤星) 등이 일본으로 돌아가며 내놓은 국보급 문화재를 헐값에 매입해 일약 혜성처럼 대수장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는 17~18세 때 대판옥호상점(大阪屋號商店)의 점원으로 있으면서 나이토에게 상술을 배웠다. 작은 키에 스포츠형 머리를 한 그는 코 아래에 수염을 뭉툭하게 길렀는데, 머리가 비상해 심부름을 하면서 어느 새 골동품에 대해 눈을 떴다. 그는 먼저 야스오카(安岡)와 손을 잡고 곡물 거래로 돈을 벌더니 곧 서울 근교의 땅을 사 부동산업자가 되었다. 특히 일제 때 흑석동에 있던 이왕가 토지를 평당 2원 50전에 샀는데, 경전(京電:현 한국전력)에 평당 20원에 넘겨 그 당시 70만 원이라는 거액을 남겼다. 그는 이 돈으로 골동계에 발을 들여놓아 일약 나이토의 소장품과 일본인의 명품들을 모조리 사들이며 하루아침에 대수장가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돈에 욕심이 생기자 부여수리조합공사를 추진했는데 그것이 잘못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자 수리조합공사권을 한수산에게 팔고 1948년에는 남산에서 고미술품전시회를 열어 소장했던 다수의 소장품을 처분했으며 그 돈으로 일본 그림과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1948년 일본으로 떠났다. 사업 수완이 뛰어나 동경에서 대일무역(大日貿易)이란 회사도 차려 부자가 되었고, 하리무라 타카미츠(張村高光)로 창씨개명까지 한 뒤 일본인 여자를 부인으로 얻었고, 194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장석구는 한국의 문화재로 지정된 명품까지도 일본으로 반출해 큰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해외 반출이 엄격히 통제되어 반출이 어려웠다. 그러자 그는 하지(Hodge,J.R) 중장을 찾아가 일본의 명검, 마사무네(正宗)를 선물하고는 그 대가로 미군전용수송기를 빌려 타는 행운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동안 한국에 남겨 두었던 모든 고미술품을 이삿짐처럼 꾸민 후 아무런 검열도 받지 않고 한꺼번에 일본으로 싣고 갔다. 지금도 그 수량과 내용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때에 팔려 간 백자들은 일본 도록에 실리기까지 했다. 특히 국보 제372호로 지정됐던 청자흑유백상감매병(靑磁黑釉白象嵌梅甁)은 1950년 ‘건국기념국보전시회’에까지 출품된 물건인데, 박태식(朴泰植)에게 맡겨둔 것을 되찾아서 밀반출했다. 그의 문화재 밀수와 불법반출 사실은 곧 당국이 알게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장석구를 체포해 압송하라는 지명체포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비웃기나 하듯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다가 죽었고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가 말년에 저지른 문화재의 불법반출은 조국이나 민족 관념은 추호도 없는 매국노적인 행위이고, 자신의 안위와 영화만을 위해 무수한 문화재를 밀반출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하다
원산에서 미요시가 소장했던 도자기들은 우여곡절을 격은 뒤 장석구에게 일괄로 팔렸는데 함께 있던 두 필통도 각각 거래되지 않고 최창환이 가져온 전체 도자기에 합쳐져 일괄적으로 매매됐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두 필통이 세상에 다시 선을 보인 것은 1946년 가을 한국고미술협회가 주최한 해월관(海月館) 전시경매 때이다. 장석구는 자기가 소장한 물건을 남에게 자랑하길 좋아했다. 입수한 뒤 소원이 성취됐다며 춤을 출 듯이 기뻐했던 두 필통인데, 팔려는 마음도 없이 오직 ‘이런 명품을 소장한 사람이야.’하고 자랑할 요량으로 경매에 출품한 것이다. 현재 중구 충무로 2가에 있던 일본식 요정인 해월관 2층에서 경매가 열렸다. 참가자들의 맞은편에 두터운 담요가 깔린 커다란 테이블을 놓은 뒤 그 위에 여러 고미술품을 올려놓고 큰 소리로 번호와 품명을 부르며 경매가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자, 혹구(ほっく,시가) 얼마?”하고 부르면 이쪽저쪽에서 가격을 불러 점차 값이 올라가는데 최고로 올라갔을 때 그 값을 연거푸 세 번을 부르고, 더 이상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없으면 나무방망이로 테이블을 탕하고 쳐 낙찰을 선포하였다. 사람에겐 누구나 경쟁심이 있어 자기가 점찍었던 물건을 힘겹게 낙찰 받으면 얼굴에 기쁜 표정이 활짝 넘쳐 퍼진다. 어떤 사람은 경쟁이 붙어 값이 올라갈 때면 본체만체하고 있다가 값이 높이 올라가면 엉뚱하게 한층 높은 값을 내질러 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마치 두꺼비가 파리를 잡아먹듯 냉큼 물건을 낚아채는 사람도 있다. 드디어 특별히 진열돼 있던 두 필통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고, 청화백자철화포도문필통은 거금인 10만원에 청화백자소나무호랑이무늬필통은 9만5천원에 출품자인 장석구가 낙찰을 받았다. 즉 자기 물건을 경매에 내놓았다가 혹시 누가 살까 두려워 최고가를 불러 다시 차지한 것으로 ‘도로 뗐다.’고 말한다. 경매장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장석구는 직접 두툼한 보자기에 필통을 싼 뒤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이중으로 된 오동나무상자에 넣었다고 한다. 이처럼 장석구가 애지중지한 두 필통이다. 그런데 어떻게 두 필통이 일산토목(一山土木)을 세워 부자가 된 한수산(韓繡山)에게 옮아갔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장석구가 부여수리조합공사권을 한수산에게 팔 때 함께 팔았을 것이라 추측한다.
문화재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 기생 즉 해어화(解語花)라고 한다.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장자의 애환과 사연이 겹겹이 묻어 있지만 누가 만들었는 지도, 어떤 주인을 만났는 지도, 또 몇 살이 되었는 지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한다. 그저 자기를 더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팔려 다닌다. 그렇지만 세상 물건에는 모두 때에 따라 주인이 있다. 매일같이 쓰다듬고, 닦아주고, 천하의 지인(知人)에게도 보여주지 않던 두 필통 역시 세상 풍파를 겪으며 미요시로부터 장석구를 거쳐 한수산에게 옮아가더니 또 다른 주인을 찾아 방랑을 했다.
1950년 대 말이다. 장규서(蔣奎緖)와 마주 앉는 한수산이 넌지시 이 필통을 팔 수 있다는 말을 꺼냈다. 장규서는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할 때 이화여대의 김활란총장을 도와 이화여대박물관의 전신인 필승각(必勝閣) 미술관 때부터 고미술품 수집의 책임자로 활약했고, 이화여대박물관의 건립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장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해 두 필통을 가지고 김 총장이 기거하는 대학교 공관을 찾아갔다.
이화박물관의 초대 박물관장을 겸임한 김 총장은 모든 것을 잃은 6.25전란의 포화 속에서도 우리 문화의 정통성을 정립하고 밝은 미래문화를 조성하는데 기여할 박물관을 재건하고자하는 큰 뜻을 세웠다. 우리 선조의 고고한 정신문화가 반영돼 있으면서 우리의 영혼을 순화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예술품의 교육적 가치를 인지하고 문화유산을 사랑하여 국보와 보물을 포함하는 우수한 고미술품의 수집에 심혈을 기울여 이화박물관을 육성하였다.(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명품도록에서 발췌함)
김총장의 말은 자상하지만 아무런 수식이 없이 핵심만을 이야기하는 성품이었다. 두 필통을 보더니 평소와 다르게 매우 기쁜 표정을 지은 뒤 곧바로 경리과로 전화를 걸어 문화재 수집에 책정된 가용 예산을 물었다. 하지만 예산이 소진되어 필통을 사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잠시 담담한 표정을 짓던 김총장이 말했다.
“장선생, 예산이 부족해 당장은 살 수 없어요. 방도를 찾아 볼 터이니 필통은 두고 가세요.”
장규서가 간절한 마음으로 말했다.
“이 물건은 놓쳐서는 안 될 물건입니다. 잘못하면 현해탄을 건너 외국으로 반출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김총장은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관을 물러난 장규서는 김총장이 무리를 하지 않는 성품임을 잘 아는지라 마음이 불안했다. 이대박물관이 두 필통을 소장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만약을 생각해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을 머리 속에 떠올려봤다. 홍성하(洪性夏)는 국회의원· 금융통화위원장을 지냈는데, 물건만 좋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들이던 중이라 그에게 필통이 넘어가면 현해탄을 건너갈 염려는 없었다. 그는 도자기와 서화를 비롯해 1,780점의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사후에 소장품은 선문대박물관에 매도하였다. 그런데 몇일이 지났을 때 이화여대 공관에서 연락이 왔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장규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공관을 찾았다. 김 총장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3백만환을 건냈다.
“필통 두 점은 학교에 예산이 없어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마련해서 인수한 겁니다.”
돈을 받은 장규서가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서 있자, 김 총장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째 그렇게 서 있어요. 용건이 있으면 앉아서 말하세요.”
장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가슴 깊은 곳에서 존경심이 끌어 올랐다. 오늘 날의 이화여대박물관은 김 총장의 굳은 결의와 용단이란 바탕 위에 장규서의 피나는 노력이 보태져 이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이 흘렀다. 두 필통을 매우 아끼며 소장했던 김총장은 이대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영원히 이대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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