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이 혼자서
주요한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학우>(1919)-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서정적, 감각적(시,청각)
◆ 표현 : 균형미와 안정감의 확보
정형성을 탈피하고 균형미 있는 자유시형 확립
영탄적·직설적 어조를 절제하고, 세련된 구어체 시도
부사형 어미로 종결(1,2연) → 동적인 방향성과 미완성의 효과
도치법, 의인법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혼자서 → 한국 서정시의 정서적 특질(고독, 애수)을 보여주는 시어
* 돌, 험한 산길 → 샘물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부정적 의미를 지닌 소재들
◆ 주제 ⇒ 샘물이 솟아 흘러가는 맑고 아름다운 서정
◆ 의의 : 계몽성, 교술성, 정형성으로부터 탈피하여 최초의 현대시라 불리워질 가능성이 있는 작품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춤추며 흐르는 샘물
◆ 2연 : 웃으며 흐르는 샘물
◆ 3연 : 온누리에 울려 퍼지는 샘물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명랑하고 건강한 시상, 시각적 율동감과 웃음의 표정을 짓는 의인화된 샘물의 흐름이 산야와 맑은 하늘에 투명하고 밝은 음향으로 확산되어 울리는 시의 전개 과정이 감동을 준다. 요컨대 이 시는 정서와 공간 모두가 확대되어 가는 '열림'의 시다. '닫힘'이나 '도피함'과는 달리 밝음을 향하여 열려가는 이 시의 시상은 우리 현대시의 설레는 소망일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삶의 질곡 속에서 이같이 밝은 시상을 가다듬은 것은 허세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둠에 좌절하여 비탄과 절규를 토로하기보다 오히려 밝은 미래사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새 삶을 열려는 소망감을 보여준다. 밝고 광활한 공간을 향하여 나아가는 샘물의 행로는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노정이요, 우리 역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지향적 실상인 .
[작가소개]
주요한 : 시인
출생 : 1900. 10. 14. 평안남도 평양
사망 : 1979. 11. 17.
가족 : 동생 주요섭
학력 : 후장대학교
데뷔 : 1919년 시 '불놀이'
경력 : 1961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일보사 사장, 대한해운공사 대표이사
1960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
1945 대한무역협회 회장,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민주당 민의원
작품 : 도서, 기타
<정의>
일제강점기 「불놀이」·『아름다운 새벽』·『봉사꽃』 등을 저술한 시인. 언론인·정치인·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개신교 목사였던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맏아들이며, 소설가 주요섭의 형이다.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崇德小學校), 1918년 일본 메이지학원 중등부, 1919년 도쿄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2월호 『창조(創造)』에 산문시 「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19년 5월 상하이로 넘어가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다. 1920년 2월 흥사단에 입단했다. 1920년 9월 상하이 후장대학[滬江大學] 공업화학과에 입학했으며, 1924년 10월부터 1936년 6월까지 문예지 『조선문단』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4년 12월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출간했다. 1925년 6월 후장대학을 졸업, 난징 동명학원(東明學院)에서 1년간 영어 교사를 지냈다.
1926년 5월 발간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기관지 『동광(東光)』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으며, 1927년 7월 동아일보사 학예부장, 평양지국장,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후 1932년 11월 퇴사했다. 1929년 10월 이광수·김동환과 함께 『3인 시가집(三人詩歌集)』, 1930년 10월 시조집 『봉사꽃』을 발간했다. 1932년 9월 조선일보사 편집국장과 전무취체역(專務取締役)을 역임했고, 1933년 11월부터 1934년 8월까지 잡지부장을 지냈다. 1934년 2월 주식회사 화신(和信)의 취체역으로 재직했으며, 1934년 6월 수양동우회 이사장이 되었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사건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 전향을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 경성 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시국유지원탁회의(時局有志圓卓會議)에 참석했으며, 수양동우회를 대표해 종로서에 국방헌금 4,000원을 헌납하였다. 1939년 10월 조선문인협회 창립 때 간사를 맡았다. 1940년 9월호 『조광』에 시조「여객기」를 발표하면서 문필활동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으며, 많은 친일 글을 남겼다. 10월에는 국민훈련후원회(國民訓鍊後援會)가 벌인 일본어 보급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12월 황도학회(皇道學會)의 결성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 결성식에 참석해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족 때 경성지부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41년 12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미영타도대연설회와 1942년 5월 징병제도연설회에서 연설했으며,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의 이사 겸 시부(詩部) 회장을 맡았다. 1944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9월 국민동원총진회 발기인 및 상무이사를 맡았다. 1945년 대화동맹(大和同盟) 결성 준비위원을 맡았다.
해방 후 1946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10월 ‘흥사단 국내위원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48년 『국민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1949년 4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가 풀려났으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조만식을 중심으로 창당된 조선민주당의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1954년 흥사단 기관지 『새벽』을 창간했다. 1957년 민주당에 입당한 뒤 1956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60년 민주당 장면(張勉) 내각에서 부흥부·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66년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 1970년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으며, 이후 1973년 한국특허협회 회장, 1975년 한국능률협회 회장, 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수석 부회장 등을 지냈다. 1979년 11월 17일 사망했다.
주요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78∼46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친일문학론』(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 201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주요한 연구』(이용호, 동광문화사, 2002)
『한국근대문인대사전』(권영민, 아세아문화사, 1991)
「주요한의 상상된 ‘조선혼’과 친일문학의 도정」(최명국, 『현대문학이론연구』45, 2011)
「주요한 상해독립신문시의 문학사적 위상」(조두섭, 『인문학연구』11, 1993)
「주요한의 명치학원 시절」(심원섭, 『연세어문학』23, 1991)
[네이버 지식백과] 주요한 [朱耀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