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검진과 위암 수술
1993년 10월 12일이 밝았다. 그간 나는 아무래도 몸의 상태가 좋지 않게 느껴져 12월까지 기다리기 무엇하여 지난 해와 같이 고려병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기로 작정하였다. 조동복 부원장이 편의를 봐주었는데 이번에는 위내시경 검사를 받기로 하였다. 이 때까지 줄곧 위 X-선 투시만 하였지, 내시경 검사는 하지 않았는데 조 부원장과 통화중 그가 "위검사는 X-레이로 할래요, 내시경으로 할래요?" 하며 나의 의사를 물어준 것이 내시경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때 趙東福씨가 그렇게 물어준 것을 나는 두고 두고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건진센타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초음파의 박 선생은 언제나처럼 나의 내장이 좋다면서 갑종합격이라고 하였다. 문제는 마지막 코스인 위내시경 검사에 도사리고 있었다. 난생 처음 받는 검사라 괴롭기도 하였지만 젊은 의사가 마지막에 "위가 헐었으니 입원치료하는 게 좋겠다" 고 하여 겁이 덜컥 나게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단골 최용직 내과에 들러 경과를 상의하였고 작은 처남에게도 전화로 물어 보았으나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저녁에는 또 호박죽 먹고 나가 경영지도사 강좌 들었다. 저녁 늦게 송서방이 대구지법원장으로 발령이 난 것에 전화로 축하하였다.
13일에는 삼성사보에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에 관하여『나부터 변하자』는 제목으로 기고문을 써서 게재토록 조치하였다.
15일 드디어 운명의 선고일이 왔다. 고려병원 건진센타에 가서 검사 결과를 들으니 분위기가 역시 심상치 않았다. 조동복씨가 연결시켜준 대로 바로 내과의 유영석 과장한테 갔더니 놀라운 선고가 나왔다. "위에 악성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라는 것이다. 이어서 종양의 크기가 1Cm~1.5Cm로 크지 않으나 조직검사 결과 악성으로 판명되었는데 조기발견이라 수술하면 된다고 하였다. "완치 가능성이 몇 %나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자기가 보기에는 80% 이상 된다고 하였다. 그는 요사이는 의사도 다 얘기한다고 하면서 단숨에 여기까지 말해주었다.
오히려 알고 나니 여유가 생긴다고 할까, 『역시 무엇이 있었구나...』하는 심정이 되면서 이젠 도리 없이 병원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겠다고 판단했다. 처음엔 고려병원에서 수술할까 했으나 주위의 의견을 들어 그래도 서울대병원에서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마음 정했다. 회사에 들어와 박 대표에게 먼저 보고하고 정 이사에게도 알렸다. 회사에서 곧 서울대병원에 수소문하였으나 하필 이 날이 서울대 개교기념일로 휴무라서 전화가 통하지 않아 낮 동안에는 수배가 되지 않았다.
퇴근하여 아내에게 알리고 곧 처남, 동서, 조카 등 친척들에게 알려 서울대 병원에 들어가는 루트를 찾았다. 궁즉통(窮卽通)이라더니 수소문하니 친척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유서방이 내과 최규완 박사에서 진찰 받게 주선하였고 입원실은 큰처남이 병원 인맥을 통해 구해 주었다. 그리고 옥이는 조병규 교수에게 연락하여 병원 내 진행을 맡아 일반외과 쪽에도 수배해 주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15일 하루는 정신없이 가버렸다.
이튿날 16일(토) 회사에 출근하여 입원 기간 동안의 결근에 대비, 업무상의 지시와 준비를 하고 들어갔다.
18일(월)에 아내와 같이 서울대병원에 가서 소아병원의 신경외과 과장 조병규(曺炳圭) 교수를 찾았다. 그는 우산 어른(曺忠植 선생)의 장남으로 나보다 고등학교로 5년 후배이기도 하지만 미리 병옥이의 연락을 받고 나름대로 외과에는 집도의까지 수배를 다 해 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최규완(崔圭完) 박사한테도 얘기가 되어 있다고 설명하여 최 박사 한테로 갔다.
최 박사는 고려병원의 기록을 보더니 "한번 더 위내시경 검사를 해보자" 하여 이튿날 아침 다시 최 박사가 입회하여 검사를 하였다. 그는 고려병원에서 본 것이 대체로 맞는다고 하면서 "놓치기 쉬운 부분인데 잘 보았다" 고 덧붙였다. 그러더니 곧 일반외과 이건욱 교수에게 이관하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X-레이, 심전도, 폐활량검사 등 각종 검사를 받았다. 여기서 참고로 X-레이 받은 경험을 적을까 한다. 위내시경 검사에서 이미 종양의 부위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외과에선 X-레이 검사로 다시 확인하여야 했는데 이 검사에 문제의 종양이 나타나지 않아 사진촬영에 1시간 반이나 고생을 하게 하였다. 기사들은 나를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게 하여 몇 차례 촬영을 시도하였지만 흔적이 나오지 않는지, 나중에는 선임기사가 와서 한참 더 반복하고서야 촬영을 마쳤다.
나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시경 검사에서 이미 위치나 크기까지 확인된 부분을 이렇게 위 X-레이 검사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종양이 큼지막하게 되기까지는 발견이 사실상 안된다는 얘기가 될 것 같아서다. 그래서 나는 올해에도 만약에 X-레이 투시를 하였더라면 발견 못했을 게 아니냐 싶었고 그래서 40세 이후에는 위검사는 1년에 한번씩 반드시 내시경으로 하여야 한다는 말을 믿게 된 것이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12층의 특실로 12121실이었다. 서향이라 햇빛은 잘 들지 않아 싸늘하였지만 창 밖으로 창덕궁의 멋진 나무와 숲이 단풍으로 물들고 있어 전망이 좋았다.
21일 아침 7시 나는 수술실에 들어가 그날 첫번째 순서로 수술을 받았다. 집도한 이건욱 교수는 조병규 교수와 동기로 위 수술에는 경험과 평판이 나 있는 분이라 안심하였고 마취과장 김용락 박사도 동문으로 유서방 친구라서 수술할 때 곁에 붙어 주어 고마웠다. 처남, 처제를 비롯하여 친척, 친구 여러분들이 입회해 주어 마음 든든하였다.
오후에 김용락 박사가 깨우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주위를 살피니 낯익은 얼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어 한잠 깊이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였고 나도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았다. 그래서 가스가 나오도록 운동을 하며 퇴원할 날을 기다리며 지났다. 회사에서도 총무과 유세하 부장을 비롯하여 과원 몇 사람과 한원석 기사가 수고를 하여 주었고 친지 여러분들이 쾌유를 빌어 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위액인지, 담즙인지가 계속 나와 병에 가득 차이고 가스도 처음 한번 나오는 듯 하더니 더 나오지 않았다. 주치의 안 선생은 25일에는 나를 방사선과로 데려가 한참 동안이나 X-레이 투시를 하며 위장을 관찰하였다. 늦기는 해도 마신 검사액이 내려 간다는 소견을 내리며 괜찮다고 하였지만 어딘지 시원스럽지 않았다.
10월 26일 이건욱 교수가 오더니 나를 방사선과로 데리고 가서 위투시로 관찰하더니 이어서 내시경 전문교수를 불러 같이 위내시경 검사를 하였다. 아마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확인한 모양으로 갑자기 재수술해야겠다고 하면서 오후 3시 15분 다시 나를 수술실로 옮겼다. 이때 나는 좀 긴장이 되었지만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두번째 수술은 약 2시간 걸려 첫 수술보다는 일찍 끝났지만 김용락 과장이 깨울 때 나는 첫번째 수술 때와 같이 가볍게 깨지 못했고 기운도 쳐져 있었다. 그래서 곧 병실로 돌아와 안정을 취했다.
다음날 아침 이건욱 교수가 올라와 재수술 경위를 설명하였다. 그는 시선을 아내를 향해서 한참 설명하였는데 아마 장 유착 증세가 생겼던 것 같다. 이런 일은 몇 백 명에 한 사람 일어나는 일이라면서 나를 가리켜
특이체질이라고 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자세한 경위를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잘하려고 한 것이 결과적으로 수술 기술상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난 일 따질 수도 없어 나는 간병인-재수술 후에 들였다-과 운동 열심히 하며 가스 나오기를 기다렸다.
두번째 수술 받은 날(26일)은 상옥이 생일이라 아내가 병원에서 미국으로 전화하게 하였다. 내 수술 사실은 알리지 않고 공부 잘 하라는 얘기만 하였다.
29일 한밤에도 나는 간병인과 늦은 밤 3시까지 가스가 나오게 복도에서 왔다 갔다 운동을 하였다. 보람이 있어 30일 새벽 5시 10분에 처음 가스가 나왔고 이어서 계속 나왔다. 이날 낮에는 코줄도 풀었다. 이젠 좀 살 것 같았다.
31일은 일요일이었다. 지친 몸을 쉬면서 보리차를 처음 조금 마셨다. 체온도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그간 재수술 후에는 기력이 쇠하여 외부의 문병을 며칠 사양하였다. 11월 1일 회사에서 박 대표가 문병 온다더니 안 부사장과 같이 나타났다. 안 부사장은 그전에 다녀갔는데 박 대표가 가자니 또 동행해야 했던 모양이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날 오후부터 미음이 나와 조금씩 넘겼다.
2일부터는 죽이 나왔고 절반 정도 먹었더니 과한 듯 속이 괴로워졌다. 비리루빈 수치가 높다고 최규완 박사는 나를 볼 때마다 눈썹을 재껴 보았는데 오늘은 수치가 낮아졌다고 하였다.
그간 많은 친지, 친구들이 다녀갔다. 3일 점심시간에 원달(源達)이와 같이 온 이용진(李容珍)이 자신의 15년에 걸친 암과의 투쟁 경험에서 체득한 얘기를 해 주어 공감이 가고 마음으로 위안이 되었다. 그는 웬만한 것은 잊어버리고 강한 생명력으로 버티어 나가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날 오후에는 회사의 아모코측 임원인 수석부사장 Norberg씨와 재무담당 Texter씨가 문병 와서 위로하였다. 그리고 미국 간 전부사장 Mangel씨도 소식을 듣고 위로 전문을 보내 왔다. 고마운 마음이 일어나기에 충분하였다. 이건욱 교수도 오후에 들려 이젠 퇴원해도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기력이 모자라 주말에 나가기로 작정하였다.
11월 4일 - 아침에 깨어나니 지난 밤에야 입원 후 처음 제대로 수면을 취한 것 같았다. 기운이 좀 나아지길래 부인 조 여사를 대신 보내 위문한 광학(光學)이에게 전화하였고 유동(有東)이와도 통화하였다.
이 날 라디오 정오 뉴스에서 성철(性徹) 스님의 입적소식을 들었다. 창 밖의 창덕궁 단풍은 그사이 비에 젖었고 떨어져 뒹구는 낙엽은 어느새 겨울을 알려 주었다.「우리 곁에 왔던 부처]의 참모습은 퇴원한 후에야
문헌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간 여러분들이 문병 오시고 난이나 음식을 보내 쾌유를 빌어 준 것에 감사한다. 누님 내외분과 질부를 위시하여 처제, 친지, 친구, 동문, 회사 동료 등 어떤 분은 두 번, 세 번씩 다녀가기도 하였고 병원내의 동문 여러분들의 도움은 참으로 컸다. 최규완 교수, 김용락 교수, 이건욱 교수, 그리고 조병규 교수-그는 매일 한번씩 빠짐없이 들렀다-등 여러분께도 감사한 마음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병상에 날아온 퇴임(退任) 통고
11월 6일(토) 낮에 입원한지 19일만에 퇴원했다. 이 날 아침 일찍 남정우 사장이 3번째 방문하였고 이병준(李炳準)이도 몇 차례 들리고 전화하였다. 지난 10월 18일 내 발로 걸어 들어와 입원하였으나 나갈 땐 간신히 걸어 나와 차에 올랐다. 무릇 수술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하였다. 회사의 유세하(柳世夏) 부장과 유지홍씨가 와서 수고해 주었고 병옥이가 와서 도와 주었다.
집에 돌아오니 한결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가 그동안 병원에서 줄곧 나와 침식을 같이 하느라 건강이 많이 상해 걱정이 되었으나 잘 견뎌내었다. 집에 와서 정성스레 음식을 마련해 내어 먹으며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회복은 기대만큼 빨리 되지 않았다. 수술 전 63Kg 나가던 체중이 10Kg는 빠져 53~4Kg 밖에 나가지 않았고 변비 기운이 심해 며칠 째 대변을 보지 못해 오랫동안 고생을 해야했다.
변비약의 광고 문안에 눈길이 가곤 하였다. 나중에는 좌약을 쓰기도 하고 별별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쉽게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한두번씩 아파트 주변 산책로를 거닐며 찬바람 쏘이면서 걷기를 하다 감기가 들어 고생하기도 했다.
병원에 입원 중 신문에서 그룹 비서실장이 이수빈 부회장에서 현명관 사장으로 바뀌었다는 뉴스를 보았고 이어서 10개 관계사 대표이사가 퇴임하여 상담역 또는 경영고문으로 물러났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승영 사장을 비롯하여 면면들이 현업에서 물러났고 여타 임원급 인사도 이달 하순경에 예정되고 있다고 들려 왔다.
그러던 11월 10일 서울대병원에서 조병규 교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좀 전에 나의 수술을 담당했던 이건욱 교수한테로 삼성석유화학의 사장이란 사람이 전화하여 나의 수술 경과를 묻고 회복이 되어 언제쯤 현업 복귀가 가능한지 등을 물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교수는 병원 규정상 그런 문의에는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면서 내 의향을 궁금해 한다고 하였다.
나는 듣는 순간 박대표의 소행이란 것이 직감되었다. 나한테서 듣는 것으로 믿지 못하고 굳이 집도의 한테까지 물어보는 저의가 무엇인지 불쾌하였지만 나는 조 교수에게 사실대로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고 전하라고 하였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나 퇴원후 20일이나 한달 정도 요양하면 출근할 수 있다고 이 교수는 나에게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16일 오후 6시경에 식탁에서 랜싱(Lansing)에서 걸려온 상옥이 전화를 받았다. 처음 수강한 3과목 점수가 나왔는데 모두 A를 받았다고 했다.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이 놀라더라고 하며 새벽 4시까지 공부하다 집 생각이 나서 전화한다고 하여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러나 건강을 해쳐서는 안되니 몸 생각하여 식사 거르지 말고 쉬어가며 공부하라고 일렀다.
11월 27일 드디어 최후의 통보가 날라왔다. 오후 2시경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정진천 이사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그는 차마 말하기 힘든지 주저하는 듯하더니 "전무님, 퇴임하시게 됐습니다." 라고 하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병석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통고해 올 줄은 짐작 못했다. 그래도 애써 담담한 심정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알았다고 답했고 저녁에 유세하 부장이 가져온 서류를 보니 내 이름란에「퇴임」이라 쓰여 있었고 비고란에는「자문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실로 이제 오나, 저제 오나 하던 통고가 입사 28년만에 드디어 날아온 것이다. 임원이 된지는 15년만의 일이다. 어지간히 있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당장 병후 회복도 안된 처지에 앞 일이 걱정되기도 하였다.
이 날 저녁 나는 박 대표의 전화를 받았다. 그의 말은 명확하지 않고 미안해하는 느낌은 주었으나 모든 것을 비서실에서 결정한 듯 말하였다. '어쩐지 염려스러운 생각이 들었는데 비서실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 가지지 마십시오"라고 응답하고 끊었다.
그러나 이 날 통화에서 한 그의 말은 사실과 달랐음이 며칠도 안가 드러났다.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그가 회사의 임원인사 상신서류에 나를 퇴임자 명단에 넣어서 비서실에 올렸음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지난 일 모두 다 밝힐 필요는 없지만 그후 확인된 바로는 박 대표가 나를 퇴임자 명단에 넣어 올렸기 때문에 비서실에서 퇴임 처리하였고 비서실장이나 차장은 내가 입원수술 받았던 사실조차도 몰랐다고 했다.
하여간 경위야 어쨌건 나는 이렇게 병상에서 퇴임 통고를 받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냈다'고 하든,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당했다'라고 하든 이렇게 해서 나는 일단 삼성의 임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주변 소식은 나 외에도 상당수의 관계사 임원들이 퇴임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자회사로 옮기거나 얼마 후 모회사 연관사업을 맡거나 하였다.
며칠 뒤 나는 집에서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현명관 실장과 이학수 부사장에게 그간 신세 많이 졌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한결같이 미안하다고 했다. 특히 이학수 부사장는 더욱 미안해 하는 심정을 드러내듯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인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하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이젠 출근이 급할 것도 없다고 생각되어 무리하지 않게 회사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요양하였다. 변비가 계속 나를 괴롭혔고 기력회복에 예상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한의사 허의원 한테 전화했더니 한번 집에 와서 집맥하고 한약을 지어 주었지만 조금씩 밖에 먹을 수가 없었다. 허 선생은 자기가 암의 진행을 미리 알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였다.
성철스님의 전기소설과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옥이가 사다 주어 틈틈이 읽었다. 그리고 호조(浩助)가
건강관련 서적과 「금강경(金剛經)」을 가져와서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또 한 해를 마감하였다.
덤으로 사는 여생(餘生)
20여년전 고인이 된 순하(淳夏)가 대구에서 진영건설이란 중소 건설회사에 다닐 때 한 얘기가 떠오른다.
월급쟁이 생활의 고충을 말하던 그가 나를 향하여 "그래도 제일모직 같은 데는 규모가 커서 주인이
직접 챙기지 않고 큰 머슴, 작은 머슴 하며 일할테니 더 편할 것 아니냐?"라고 하였는데 당시에는
그 말의 뉘앙스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
이제 지난 날을 회상해 보면 나는 삼성에서 30년 머슴살이 하면서 큰 머슴도 되지 못했고 작은 머슴으로 큰 머슴의 지시를 받고 그 등쌀에 시달리다가 마감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임원이 되고 나서도 직접 사주(社主)의 지시를 받아 일 하거나 그 근처에서 일한 적이 없다. 다만 신세계 이사 시절 이명희 여사 덕에 잠시 선대 회장의 기억에 오른 것을 제외하고는 사주의 측근에는 얼씬하지도 않았다. 후계자가 된 이건희 회장과는 한번도 독대(獨對)한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언제나 한 두 사람 건너 사주의 지시를 받아 일했다. 그러면서도 관리분야에서 주로 일하다 보니 주인의 의향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받들어야 했고 회사 살림살이에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야 했다. 머슴살이란 주인의 의도에 맞추어 일해야 한다는 소박한 인식은 살림의 규모나 내용에 관계없이 진리인데도 나의 경우는 언제나 큰 머슴을 통하여 주인의 의향을 파악하고 지시사항을 수행하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자주 큰 머슴의 견제나 질시를 받았다. 물론 거기에는 그렇게 될만한 사정과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내 성격이나 태도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면전에서 무조건 순종하고 친화적이지 못했던 성격이 분명 큰 머슴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그들의 시기나 견제도 작용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 와서 큰 머슴 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주인 탓을 할 생각도 없다.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 남의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니다. 그들도 어떤 면에선 고용 중역으로 자기 더 오래 살려는 욕심에서, 사주로서는 사람보다는 회사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란 짐작이 가기도 한다. 다만 인간관(人間觀)이나 가치관(價値觀)에서 나와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처음 사회진출하려 직장 선택할 때 좀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는 자탄의 심정이 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나는 세상을 너무나 몰랐다. 그저 어느 곳에 들어가든 열심히 하면 되리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적성이나 자질을 살려 바람직하고 장래성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런 직장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기야 그 당시는 모든 것이 어려운 때였고 이런 저런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그리고 삼성 재직 중에도 도중에 퇴장하는 선배들을 많이 보아 왔다. 저 모습이 얼마 후의 나의 모습이라고 느껴 왔지만 그간 아무런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했으니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결말도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탓이고 자업자득일 뿐이다.
얼마 전 아내 편에 내 사주(四柱)를 한번 보게 했더니 사주에 정관(正官)이나 편관(偏官)외에 상관(傷官)이 들어 있다고 하였다. 봐준 사람은 이를 '경쟁자로부터 견제나 피해를 입는 경우를 자주 당한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이는 주위의 견제나 질시로 상처를 입는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러나 식신(食神)이 있어 빈궁해지지는 않는다고 하면서도 재물이 들어와도 오래 지니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창(文昌)이 나왔으니 일찍 학위를 취득하여 학계나 관계에 나갔으면 좋았을텐데 하였다.
그러나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30여년 삼성의 울타리에서 살아온 내력을 새삼 따지고 싶지도 않고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지난 30년의 삼성생활을 돌이켜 나에게 잘해 주고 도움을 준 분들을 떠올린다.
신입사원 시절 나를 훈련시킨 송세창, 최종원 두 선배를 먼저 들고 싶다. 두 분은 대학 선배이기도 하였지만 사회 초년병이었던 나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다음으로 관리자에서 경영자로 커 갈수 있는 능력배양에 도움을 주었던 합섬시절의 손상모 사장과 인간적인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던 임기성 전무와 백학기 대표를 기억하고, 신세계 시절에는 손영희 사장, 유한섭 사장과 이명희 상무에게서 배려와 도움을 받았다.
삼성생명에 와서는 상사와의 불편한 관계로 승진에 제동이 걸려 고전하였으나 이수빈 사장을 비롯한 몇 분의 배려로 살아 나올 수 있었다. 제일기획을 거쳐 신용카드에 와서는 어려운 시절 이승영 사장께서 나를 재기시키려 여러모로 힘을 써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다시 이수빈 실장을 비롯한 여러분의 도움으로 석유화학으로 가서 마지막 봉사를 하는 각오로 임했으나 또 다른 복병이 도사리고 있어 2년간 마음 편할 날이 별반 없다시피하였다. 그러다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하여 병상에서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 퇴임 통고를 받았다.
이필곤 부회장을 비롯한 대학동기들, 남정우 사장과 이병준을 비롯한 입사동기들도 어려울 때 많이 애써 주었다. 그리고 사외에서 늘 염려해 주시던 홍성유(洪性유)선생님의 배려를 잊지 못한다. 대학 은사인 홍 선생님은 중앙일보 주필, 대표이사를 역임하다 말년에는 동방생명의 고문으로 오셔서 재회한 사이인데, 연말 나의 퇴임 소문을 듣고 전화를 하셨고 입원 수술 얘기까지 들으시곤 화불단행(禍不單行)임을 상기시켜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며 나와 좋은 인연이건 나쁜 인연이건 결국 회자정리(會者定離)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철리(哲理)를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어제는 현영진(玄英鎭) 사장의 서거 소식을 조간 신문에서 보고 영전에 가서 문상하였다. 제일기획 시절
1년반 동안 대표로 모셨던 분이나 근황을 듣지 못했는데 지난 3월에 발병하여 7개월 동안이나 병상에서 인고했다고 듣고 깜짝 놀랐다. 지난 일들이 떠올라 잠시 빈소에서 고인과의 추억을 반추하고 명복을 빌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을 설한다.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가 그것이다. 제행무상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은 덧없고 영원한 것은 없으며 만물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도 나온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諸行無常 不放逸 精進).' 다음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는「모든 존재는 연기할 뿐 무자성(無自性)이라 독자적인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인생도 인연 따라 잠시 머물다 흩어져 가는 것일 뿐 본래 나라는 실체는 없다. 일체개고(一切皆苦)란 이 세상 모든 것은 괴로움뿐이라는 뜻이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는 말 그대로이다. 그래서 열반적정(涅槃寂靜)만이 안락하고도 영원한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무명(無明)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중생은 분별과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악업(惡業)을 짓고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지난 일 회상하면 결국 이런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군상(群像)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여 생의 덧없음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잠시 지난날 감명 깊게 읽었던 로마의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명상록」을 펴드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고, 나의 인생은 오늘로서 끝이라고 생각하라. 또한 앞으로의 생활은 신께서 특별히 나에게 베풀어주신 덤이라고 생각하여 이제부터 남은 여생을 자연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라.』
「자연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은 동양의 유종자연(唯從自然)의 생활태도와도 통할 것 같다. 오로지 자연에 순응하여 마음을 비우고 무위청정(無爲淸淨)한 생활, 자유롭고 거리낌없는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는 것과 괘를 같이 할 것 같다.
바로 나 자신에게 하는 말씀인 것 같다.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좌우명이 되도록 노력하여야겠다.
ㅡ 이상은 1993년 10월, 11월의 일기장에서 발췌,정리한 글입니다.(鶴軒 記)
|
첫댓글 마음속 작은 쉼터로 나에게 남아 있는 鶴軒의 소담한 지난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흘러간 시간을 되돌아 볼수있는 길을 마련 하네요. 더욱이 小弟 와는 삼성 이란 큰 울타리 아래서 세경 살이 하면서 10 여년을 일에 미쳐 있었던 지난 시절이
조용히 찾아 오네요. 말미의 글처럼 자연속에서 유유자적 하십시요; 어느 서양인의 글이 말하기를, 사람의 지식은 25 %는 스승으로 부터 얻고, 25%는 친구로 부터, 25%는 스스로 얻고, 25%는 시간으로 부터 얻는다 하였으니 . 아마도 우리가 지금 시간으로 부터 지식을 얻는 위치 인가 봄니다.
20년 전 일기장에서 발췌한 글을 읽고 무척 놀랐습니다. 소생,당시 30년 직장생활에서 명퇴를 잎에 두고도, 하던일에 타성이 남아 이것저것 욕심을 부리면서, 관상동맥 우회수술 후유증도 재대로 챙기지 않고 살아갈 때, 학헌형은 벌써 달관한 인생관을 터득한 글을 남겼음도 놀랍거니와, 자기 심신을 챙기기에 앞서 많은 여행과 모임에 이어 사이버 교류의 리더로써 동료들과의 우의를 다지는 많은 일들을 챙겨 왔으며, 지금끼지도 동료의 사표같은 지조를 흐트러짐이 없이 간직한 학헌형의 처신에 참으로 경탄하며 존경합니다.
지난 이야기 나마 서로 회포를 풀 수 있는 글들을 공개함이 참으로 값지다고 생각하며 좋은 글 잘 음미 했습니다
비슷한 환경에 처한 분들께 희망과 꿈을 안겨주는 사연이네요. 하바드 대학의 암전문 교수가 집필한 '꿈의 해석(Anatomy of dream)'에 의사의 힘에 더해 꼭필요한것이 낫겠다는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유명을 달리한 종호 친구에게 전했습니다만.... 이 글이 모든 이에게 희망적인 꿈을 줄수있는 사연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덤으로 사는 여생을 더 즐기시고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제 글을 여러분들이 읽어주시고 공감을 표하는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은 저도 이 글을 올리기를 망설이다 올렸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글, 우리 이야기'란을 설정한 것은 '살아온 이야기'. 사는 이야기' '신변잡기' 등 회원님들의 '진솔한 삶의 기록'을 바라는 취지였는데, 그간 그런 글들이 별로 올라오지를 않아 저라도 솔직한 글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말이 있지만 越洲의 댓글은 특히 제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다만 저에 대한 과찬의 말씀에는 몸둘 곳을 찾지 못하겠습니다만.. 앞으로 회원님들의 진솔한 기록들이 많이 올라오기를 기대합니다
왜들 이러시나. 좀 더 있다가 하시지, 그래 그럴 나이가 되었구려. 학헌형 !이런 희상의 시간이 도래 했음은 인생의 최고 경지에 도달한 탓이라 생각 합니다. 일찌기 20대에 병마와 싸우면서 처절한 병원 신세 10개월 진 아우 로써는 더욱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이제 그 병마의 터널을 벗어 났으니 오래 천수 누릴거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