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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묵상글 (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 은총은 청해야지 강요해서는 안 되는 법.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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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은총은 청해야지 강요해서는 안 되는 법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불행한 이유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케 되지요.
지식이란 어떤 지식을 말하는 것이고
들어간다면 어디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인지.
단순 명확하게 얘기한다면 들어갈 곳은 천국이고,
지식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아는 지식이며,
그러니까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다는 말은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는
법에 대한 지식의 열쇠를 율법 학자들이 치워버렸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오늘 로마서 말씀과 연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는 모두가 죄인이고 모두가 의롭지 않으며
그래서 아무도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면 의롭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도 믿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결국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맙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율법을 잘 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율법 학자가 율법에 대해 많이 알기는 하지만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요.
복음을 보면 율법에서 제일 중요한 두 계명에 대해 현명하게 대답하고,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 보다 사랑 실천이 더 낫다고 대답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은 율법 학자도 있지만 대다수는 율법의 정신과 핵심을
잘 알지 못하여 율법에 얽매이는 율법주의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는 천국 문을 열 수 없습니다.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 곧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만 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천국 문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느님도 내가 열어드려야 내 안에 들어오시는 것처럼
천국 문도 하느님께서 열어주셔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열어주시기를 바라지 않고 내가 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준수나 나의 공로로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행위나 공로와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
곧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열어주시기를 청할 때
하느님은 거저 주시는 사랑으로 천국 문을 열어주십니다.
은총과 자비는 청해야지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잖아요?
천국 문을 내가 억지로 열려고 해서는 더더욱 안 되고요.
이것을 아는 것이 천국 문을 열기 위한 올바른 지식입니다.
은총을 믿고 청하는 것이 천국 문이 열리는 행복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지식과 같은 믿음을 가집시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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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앞부분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또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불행하여라.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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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트집을 잡는 사람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카11,47).
요즘 정치 현실을 보면, 할 말을 당당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고, 발뺌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자기만 살면 되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우리가 뽑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 불행을 발판 삼아 행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내년 총선에는 꼭 기도하고,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은 거짓을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전기는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말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실을 포장하려고 하다가 진실을 잃고 맙니다. 진실은 그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새 삶이 시작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그들의 나날은 행복으로 뿌듯하고 즐거움이 해마다 철철 넘칠 것이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러실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물자를 얼마나 많이 만들고 있는지요? 세상은 전쟁 중입니다.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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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 지역은 사는 곳이 넓고, 시차도 있기에 한곳에 모여서 강의를 듣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면서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 기획팀’을 발족하였고,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면서 강좌를 기획하고 준비하였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좋은 강의를 준비해 주시는 강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에 함께 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열정과 헌신으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기획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9월에는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 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구체적인 사료와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 작성한 ‘사학징의(邪學懲義)와 형추문목(刑推問目)’에는 천주교인들의 현황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초대 한국 천주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압수한 물품에는 다양한 성물과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은 한문과 한글로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책은 한글로 번역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책을 통해서 교리를 배웠고, 신앙생활의 규범을 배웠습니다. 교우들은 성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미 순교한 신앙인들의 머리카락과 그들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였으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따를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여성과 양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명도회는 오늘날 사목회와 비슷한 조직인데 명도회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는 천주의 영광을 밝게 드러냄(明顯天主光榮), 둘째는 성모의 공덕을 찬송함(頌揚聖母功德), 셋째는 어리석은 이를 가르침(訓誨愚蒙), 넷째는 냉담자를 일깨움(提醒冷淡), 다섯째는 곧 죽을 어린이에게 대세를 줌(洗將死之孩), 여섯째는 임종의 어려움을 도와줌(助臨終之險), 일곱째는 이단의 주장을 물리침(闢除異說), 여덟째는 미혹한 길을 열어 인도함(開導迷途)이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조선교회가 100년간의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10,000명이 넘는 순교자가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옮겨감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깊은 산골의 교우촌에서도, 감옥에서도, 죽음을 앞둔 형장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주교님께 보낸 편지에서 교우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2박3일을 걸어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마치면 다시 2박3일을 걸어갑니다. 고백성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우들의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박해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회를 성찰해 봅니다.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일미사 참례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80%가 넘는 교우들이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각 본당마다 예비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불 때도 선교했는데 선교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사제성소가 줄고 있습니다. 박해의 시간에도 신학생을 선발하였고, 멀리 마카오까지 보냈던 교회입니다. 환영의 꽃다발이 아닌 포도청의 몽둥이가 기다릴지라도 굳센 믿음으로 사제가 되었던 교회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교회의 활력이 약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욕심, 원망, 불평, 교만’한 사람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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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왜 주님께서는 유독 주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책임에 관해 이야기하셨을까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가지 주님께서 들려주신 예화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포도밭의 소작인들에게 주인이 밭의 임대료를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소작인들은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주인이 보낸 아들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전의 종들을 때리고 죽인 책임도 져야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아들마저 알아보지 못한 소작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에 대한 책임, 즉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소작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우리 신앙의 길 위에 많은 주님의 종들이 다녀갔습니다. 더러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러는 감사의 기도를 봉헌했을 것이고, 더러는 감사보다는 책망과 후회로 보냈을지 모릅니다.
오늘도 주님의 종이 혹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 순간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이 행복할 수는 없지만 매일에 숨어 있는 행복을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함께 걷기의 힘
어제는 근처 본당에 있는 친구 신부님과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메뉴는 닭볶음탕.
사실 둘이 나가서 사 먹으려 했는데
집밥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사를 한 후
걸었습니다.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한 시간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한잔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을 걸어왔습니다.
돌아보니 멀리 걸었습니다.
그런데 걷던 그 순간에는 멀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함께 걸어서입니다. 함께 걷는다는 건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힘든 것을 힘든지 모르게 하는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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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어느 가정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책을 좋아해서인지 습관처럼 방문한 집의 책장을 주의 깊게 봅니다. 이 집의 책장에는 대부분 의학서적, 그리고 건강에 관한 책이 가득했습니다. 의료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가족 중에 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의료 관련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뇨. 제 아내가 암 환자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런 책만 보게 됩니다.”
아내의 건강을 생각하면서, 의료 관련 서적과 건강에 관한 책들을 계속 읽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알려는 그 형제님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더 알고 싶었던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건강이 좋아지는 음식이나 운동 등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왜 나 힘들게 아픈 거야?’라면서 짜증만 낼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보다 자기 고통이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문제는 아픈 아내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행하여라.”라면서 따끔한 회초리를 날리십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 사회에서 분명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쓴소리를 내뱉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라면서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오히려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더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바라면서 그 이웃을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위선과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위선과 교만으로 인해 사랑을 보지 않았고, 사랑의 대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좀 더 알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만 최고라는 위선과 교만을 벗어버리고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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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의 모습이 완성됐다고 착각하지만, 누구나 미완성의 존재다. 지금까지 당신이 경험한 대로 현재의 당신 모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금방 바뀐다(대니얼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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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9.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예수님만이 참행복이시다-
오늘 루카복음은 여섯의 불행선언중 마지막 두 개입니다. “불행하여라”를 읽는 순간, “회개하여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원하셨고 하신 것은 불행선언이 아니라 “행복하여라”로 시작되는 행복선언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는 진복팔단으로 시작됩니다.
행복이냐 불행이냐? 행복도 불행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원하는바 행복이요 불행을 택할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바 참행복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선택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선택-훈련-습관의 영적 도식입니다.
“무기들이 침묵하게 하소서. 가자지구에서의 상황이 절망적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대문자 말마디가 절박한 상황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이요 불행한, 참혹한 현실입니다. 예루살렘 성지의 평화를 위해 10월27일 모든 신자들에게 기도와 단식을 호소한 교황님입니다. 참으로 인간 무지로 인한 전쟁이요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마태복음의 참행복이란 주제하에 전개되는 진복팔단의 내용들은 늘 들어도 정신이 새로워집니다. 가짜 행복이 아닌 진짜 행복이라 하여 참행복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의 “불행하여라”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행복을 나눕니다. 정말 오늘날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목마르게 와닿는 이런 참행복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참행복 선언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결론같은 말씀도 참 고무적입니다. 아니 하늘에서 상을 받기 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참행복입니다. 바로 참행복의 근거는 하느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두 말마디와 황옥연의 “사랑”이란 시도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없이 보낸 날은 웃지 않고 보낸 날이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의 희망은 겨울의 서리처럼 녹아버리고, 허비된 물과 같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바닷가에 서면
조가비만한 나
치악산에 가면
여치만큼 작은 나
그런데 하느님은
나를 산보다 바다보다
더 크대요
더 크대요”-
하느님 사랑은 이처럼 감동적입니다. 교황님의 사도적 열정이란 주제로 나눈 어제 수요일(10,18) 주중 알현시간 강의는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꼬의 일화입니다. 성인은 모든 이들에게 '온유함의 사도'로 보편적 형제가 되기를 갈망하면서 하루중 12시간을 감실앞에 머물러 기도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침묵중에 활동케 하시도록 하라”란 주제로, ‘침묵중에 복음 선포’, ‘온유함의 사도직’ ‘애덕의 기쁨’이란 내용으로 성인의 삶을 압축했습니다. 마지막 결론 말씀이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미소로, 그분의 단순함으로 샤를로 형제는 복음을 증거했다. 결코 개종이 아니다. 결코 개종이 아니라 증거다. 복음화는 결코 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증거(witness)를 통해, 매력(attraction)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참사랑의 참행복만이 복음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와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깊이 젖어 살았던 성 샤를로 후꼬 성인의 영성이 그리워지는 참 시끄럽고 혼란한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탄이 대상이 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선택된 엘리트 집단이요 유식한 집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식(無識)하지 않았으나 무지(無智)했습니다. 참된 회개가 사랑과 지혜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공부많이 해도 하느님 사랑 공부 안하면 무지의 사람들일뿐입니다.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떠난 자들입니다.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무덤을 만들고 기념하면서 역설적으로 현재까지 여전히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 악행을 반복하는, 폭력의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질책입니다. 작금의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실히 증명됩니다.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저야할 것이다.”
인류사는 전쟁사이자 폭력과 보복의 역사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못하는 오늘 이 세대에게 주는, 참으로 전격적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단호히 단(斷)!, 끊어버려야 할 무지의 악과 죄입니다. 바리사이들에 이어지는 율법학자들에 대한 질책이자 하느님을 잊은 오만한 오늘의 식자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왜곡 부패 변질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는 법, 너무 부패 변질되기전 회개해야 함을 배웁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이 병이요 죄이며 악입니다. 이들의 행태가 점입가경 구제불능입니다. 마치 발악(發惡)하는 악마같습니다. 하느님을 떠났을 때, 이성을 잃었을 때, 상식과 양식을, 공정과 정의를 잃었을 때, 얼마나 사람이 악해질수 있는지, 잔인할 수 있는지,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흡사 악의 연대처럼 느껴집니다. 회개는커녕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예수님을 몰아대며 그분을 옭아매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겪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더욱 회개를 통한 참나를, 참행복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가 제1독서에서 답을 줍니다.
회개와 더불어 겸손과 믿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믿음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들이 아니라, 반대로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도 믿음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져 의롭게 됩니다.”
내 중심의 삶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의 부단한 전환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회복합니다.
참행복에 대한 궁극의 답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선택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선택입니다.
무지의 어둔 사람이 불행을, 지옥을 선택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행복이자 천국이신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신망애의 주님, 진선미의 주님입니다.
이래서 회개의 여정은 믿음의 여정이요 동시에 예닮의 여정임을 부단히 강조합니다.
참으로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참삶을, 참행복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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