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배은망덕 과 배신자"
차원에서 김재규와 황교안 비교시 그들은 무엇이 다른가?
박정희 대통령과 패륜아 김재규
박근혜 대통령과 배신자 황교안
(주제)
패륜아 김재규의 10.26 범행은 계획적인가 아니면 우발적 행동인가?
1957년에 김재규는 진해 육군대학에서 부총장(준장)으로
김계원 총장(소장)과 함께 근무했는데 어느 날 진해에서 회식 후 관사로 오는 도중 지프 전복사고가 원인이 되어 군문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문에 적을 두게된 계기는 어릴 적에 나폴레온 전기를 읽은 후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후 만주에 있는 봉천 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봉천 군관학교는 졸업 시 우수한 생도 박정희,이한림에게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는 특혜를 주었고 2년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별첨; 1
당시 봉천군관학교의 관례는 우등생에게는 일본육사에 유학하는 특전이 주어졌는데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이 특전으로 1942년 10월 도쿄 교외에 자리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였고 성적은 3등으로 졸업하였다.
별첨; 2
일본 육사를 졸업한 한국인 명단
지청천(26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홍사익(26기)
김석원(27기)
영친왕(29기)
모모야마 켄이치(42기, 의친왕의 장남)
이우(45기, 의친왕의 차남)
채병덕(49기)
이종찬(49기)
이용문(51기)
지인태(51기)
정일권(55기)
박임항(56기)
박정희(3학년 편입, 57기)
정래혁(58기)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장교로 근무 하던 중 이승만 대통령의 간절한 육사 창설 희망에 미국 정부의 협조로 육군사관학교가 탄생했고 2기 생도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입교는 진급에 있어서는 덕이 아니라 손해를 보게 된 결과로 생각한다.
그당시는 1년의 기간에도 몇차례씩 진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고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후 다시 대한민국 육사에 입교했기 때문이다.
김재규도 안동 농림학교를 졸업후 중등교원 양성소를 거쳐 교사생활을 하던중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군의 입문 과정이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합니다.
1961년 5.16 혁명시 반 혁명세력의 선봉에 섰든 이한림 1군 야전사령관(육군중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봉천 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함께 다닌 절칠한 동기였다.
혁명직후에 반기를 들고 비협조적이었든 이한림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배려로 혁명후 건설부장관을 지냈고 이 사례는 박정희의 인간미가 돋보이는 인사발령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가 생사고락을 함께한 혁명동지는 아니었지만 고향 후배이고 삶의 역정이 비슷한 그를 특별히 배려케 되었고 동기였지만 졸업 후 박정희는 대위, 김재규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나이는 박정희가 1917년생,김재규는 1926년생으로 9년의 년령 차이가 났습니다.
혁명전 예편한 김재규는 민간인으로 혁명과정을 멀리서 지켜만 보는 처지였으나 어느날 최고회의로 고향 선배이며 육사 동기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찾게 되었고 박정희 의장의 배려로 호남비료사장의 직책으로 첫 등용의 기회를 맞습니다.
그후 김재규의 간절한 현역 복귀 요청에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 소장으로 6 관구사령관에 임명했고,박정희의 끊임없는 배려속에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10,26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는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
김계원, 정승화는
"우발적 사고"
라고 주장했는데 판단은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김재규 주장대로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이라면 대통령 시해 후 궁정동 안가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황급히 떠나면서 중앙정보부와 육본 두 곳 중 어디로 갈 것인지 당황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이진 않았겠지요.
중정과 육본중 어디가 비상시 사회 전반과 군부를 지휘하고 통제하기가 좋겠냐는 김재규의 질문에 육본이 좋겠다는 전속부관 박흥주 대령(육사 18기) 의 답변에 육본 지하벙커로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박흥주 대령은 현역 신분이라 1심의 구형대로 곧바로 사형이 총살로 집행됐고 그당시 어린 두딸이 울면서 아빠를 살려 달라는 간절한 호소가 지금도 운봉의 귓가에 들립니다.
상명하복의 체제에서 어쩔수 없이 희생된 서울고 출신의 전도가 유망한 군인이 희생된 불행한 결과였습니다.
애초에 치밀한 계획에 따라 거사했다면 중앙정보부 조직을 활용치도 못하고 쉽게 그르치진 않았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김재규 주요 공직 약력
호남비료사장
6관구사령관
보안사령관
6군단장
중앙정보부차장
9대 국회의원
13대 건설부장관
8대 중앙정보부장
마지막 보직으로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직책을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수행해 왔으나 무능력자의 과욕끝에 은인을 시해하는 배은망덕을 보이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차지철은 1934년생으로 용산고를 졸업 후 해병 대위로 5.16 혁명에 참여해 한강 다리를 선두로 건넜고 혁명과정 수행 시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역할로 박정희 의장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20평도 안되는 주택에서
80대 중반의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 사리사욕에는 무관심이고 오직 대통령의 안위에만 온 힘을 다하는 자세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관심 속에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권력다툼과 신임도 경쟁에서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밀리자 갈등과 번뇌 속에서 대통령을 시해하는 패륜의 10.26 사건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에서 반성은커녕 불순 민주세력의 꼬임에 빠져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끝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 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서대문 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한마디로 김재규를 요약하면 "의리 없는 패륜아 배은망덕의 표본"
일 뿐입니다.
황교안은 언급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지만, 검찰의 중심에서 밀려난 후 별 볼일 없이 변호사로 소일하든 그를 박근혜 정부에서 법무장관으로 입각시켰고 그 후로 총리까지 혜택을 누렸지만 촛불의 탄핵 쿠데타 시 대통령 권한대행인 황교안은 촛불세력의 눈치를 보느라 정중동의 자세로 일관하고 자신의 보신에만 급급한 비겁한 졸장부였습니다.
교회의 전도사로 2년여 숨죽이고 있다가 문재인의 지지도가 국민으로부터 이완대기 시작할 무렵 불법 탄핵 쿠데타에 가장 큰 공로자 김무성의 꼬임에 빠져 자유한국당에서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고 나선 기회주의자,이율배반의 인간, 교활한 인격의 소유자로 국민을 속이고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어정쩡한 자세로 자신의 입장을 표현한 황교안은 한마디로 은혜를 배신으로 갚는 비열한 자로 김재규,김무성,홍준표 보다도 못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군 미필자입니다.
수정 2019년 9월 3일
운 봉 박종태
국민들의 진정한 지도자였든
구국의 박정희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