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황오제 시대는 하, 은, 주 보다는 앞선 시대로서, 신석기 시대 즉 앙소 문화, 용산 문화, 홍산 문화라는 시대가 배경이다. 이 시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신화가 복희-여와이다. 여와란른 여신이 복희와 동등한 자격으로 말하여지므로, 모계사회와 부계사회가 복합적이다 라고 말한다. 또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는 것을 말해주는 신화라고 한다.
그렇다며 고사변(古史辯 古史辨)이란 무엇일까.
중국의 사학자 구제강(顧頡剛, Gu Jiegang 고힐강), 나근택(羅根澤, Luo Genzen), 여사면(呂思勉) 등이 편저한 고대 역사에 대한 논문집이다.
중국의 고대 역사는 신화와 전설로 되어 있다. 서양의 신문화에 영향을 받은 고사변파 학자들은 입증 자료가 없는 것은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복희 염제 황제(삼황)를 앞세운 중국의 고대사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가짜라고 하였다
고힐강이 이끈 이들 학파가 고사변학파이고, 의고파(擬古派)라고도 부른다
공산당은 과학과 논리, 이성을 중시했기에 종교와 신화, 주술을 배격하였다. 문제는 1996년에 일어났다. 중국공산당이 집권하면서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중국은 정치적인 필요성에 의해 중화주의를 내세우고, 중국 민족주의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염제 황제로 부터 내려오는 단일민족이고 중국 여러 소수민족도 알고 보면 화하족에서 분지하였다고 주장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대로 복희 염제의 후손인 하나라가 중국 전체를 통일하였고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현재의 중국어이고 그들이 한자를 발명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인은 유전적으로 대부분 하나라의 후손이다. 그래서 이리두 문화를 하 나라로 받아들이고, 하, 은, 주를 역사시대로 수용하였다.
이리두문화가 하나라 문화로 낙점을 받았고,그 문화가 중국 전체로 펴져나갔다는 것을 증명만 하면 되는데. 문제는 파면 팔수록 그 줄거리가 진짜로 증명이 되는것이 아니라 조작된 거짓임이 증명된다.
이것만이 아니고, 동북공정이라면서 고구려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리두 문화를 하의 유적으로 보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이리두 문화(二里頭文化 - 얼리터우 문화)
(기원 전 2100년경 ~ 기원 전 1800년경 또는 기원 전 1500년경)
(*우리가 이리두 문화를 짚고 가는 이유는 지금 중국에서 ‘하상주 단대공정’이라 하여 전설적인 하나라를 역사로 편입하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황하 중류에서 하류를 중심으로 번창한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에 걸친 문화이며, 중국 초기 왕조 시대의 도시나 궁전을 쌓은 문화이다.
허난성(河南省) 언사 시(偃師市옌스)의 얼리터우 유적에서 그 이름을 취하여,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적을 통합하여 이리두 문화라고 한다. 현재까지 100여 개의 얼리터우 문화 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늘의 낙양과 정주 지역이다. 중국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이 낙양이다.
그 영향은 상류의 섬서성 남부나, 남쪽의 장강 중류 지역에도 미쳤다고 추측된다.
지금부터 3800년부터 3500년 전의 유적으로, 전기는 신석기 시대로, 도기를 제조하는 농경 문명이었고, 후기는 청동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도시 국가가 형성하고 있었다. 이리두 문화가 형성하였던 기원 전 2000년 경은 기후도 농사짓기에 좋았다.
이리두 유적은 거주지, 무덤, 그리고 생산시설까지 골고루 겸비한 복합적 성격의 유적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이라는 대형 국책연구사업을 통해 전설과 역사의 경계에 서 있는 중국 고대 역사에 절대연대를 부여하고자 시도하였다. 그 결론에 따르면 하 왕조는 기원전 2070년부터 1600년경까지 약 500년 간, 그 뒤를 잇는 상(商) 왕조는 기원전 1600년경부터 1046년까지 약 550년 동안 존속하였다. 이리두 문화가 하왕조의 유적이라는 증거는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리두 유적의 존속 연대와 하 왕조의 존속 연대 상당부분이 서로 겹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두 유적이 바로 하 왕조의 도읍, 지역임을 확증하는 증거는 사실 어디에도 없다. 추정은 어디까지 추정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리두 유적이 번영한 것은 대체로 기원전 1740년경부터 1520년경까지인데, 이 기간은 ‘하상주단대공정’에서 추정한 하 왕조의 연대 범위는 물론 그 뒤를 잇는 또 다른 한 왕조 상(商)의 연대 범위와도 일부 중첩되어 있다. 매우 흥미롭게도, 상 왕조의 시대를 열었다고 전하는 임금 탕(湯)의 거처인 박(亳)도,《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지금의 언사시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이리두 유적에서 보는 중국 문명의 성립은 신화와 역사의 경계 위에 서 있다.
신석기 문명에서 청동기 문명으로 넘어가는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으로 보자면, 이리두의 청동기 문명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이곳에 앙소문화라는 신석기 문화가 있었다. 이것도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우리가 신화적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거의가 신석기 시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상황오제의 신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앙소문화 시기일 것이다. 복희와 여와 신화는 이때가 배경일 것이다.
앙소문화의 특징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우리가 책색 도자기라고 하는 유물을 많이 남겼다. 또 그들이 살았던 마을도 발굴하였다. 아직 글자가 없기 때문에 문자로 정확하게 읽어낼 수는 없지만 그림은 우리에게 많은 자료가 되어준다. 그림으로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