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17
6월10일[연중 제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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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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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4P3A6iPxTfs
(전호엽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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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에게 언제나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시대 율법 학자들은 유다 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녔던 입권 기관이자 사법기관이었던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일했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필사자, 혹은 편집자로 구약성경의 정경을 확정했고, 성경 원문의 순수성을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들은 나름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상류층, 식자층에 속했었고, 그러다보니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고 쓸 데 없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름 잘 나가고, 자칭 경건하고 훌륭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사정없이 ‘까’버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에는 때로 너무나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따발총처럼 다음과 같이 격한 말씀을 되풀이하십니다. 그들을 바로 면전에 두고 말입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는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린 실상과 허례허식, 겉과 속이 다른 가식적인 삶을 공개석상에서 낱낱이 고발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은 율법 학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던진 목숨을 건 도전장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이 위선자야, 이 눈먼 인도자야’ 하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물론 우리 모두 완벽하지는 않기에 크게 반성도 하겠지만, 우선 크게 ‘빈정’이 상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가 뭔데 내게 그런 말을 하나’ 하며 따지고 대들 것입니다.
율법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의 실제 생활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크게 분노했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도전장으로 여겼고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따로 모여 대책회의를 시작했고, 계속되는 예수님의 쌍날칼 같은 말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단 한 가지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된 꼬투리 하나를 잡아 예수님을 고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결국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율법학자들을 향한 진심 어린 사랑의 말씀, 그 말씀이 비록 너무 강경해서 받아들이기 힘든 점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빨리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눈물겨운 말씀은 더 이상 그들에게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가장 하느님을 잘 알고 가장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칭 하느님의 장자라고 여겼던 그들은 가장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고 하느님 구원의 대상에서도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이 지속적인 자기 성찰입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그리고 이웃들을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때로 받아들이기 힘들고 가슴 아프지만 내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 쓰라린 체험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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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마르코 12장 38-44절
<(2)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
극단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유다인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바가 있었으니 헌금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헌금의 액수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여겼습니다. 많은 헌금을 한 부자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의 보잘것 없는 헌금을 크게 업신여겼습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하는데, 금액이 고작 렙톤 두 닢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렙톤 두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작은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4~500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만 원이나 5만 원이나 10만 원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이 과부가 지니고 있던 전재산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았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2장 43~44절)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드린 헌금은,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의 큰 헌금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녀가 두 렙톤을 헌금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그날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쓰고 남는 것을 바쳤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진심이 담겨있었습니다. 지극한 정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삶 전체가 녹아들어가 있었습니다. 의무감에서 하는 봉헌, 보란 듯이 우쭐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봉헌, 쓸 것 안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을 바치는 봉헌이 아니라 준비된 봉헌, 감사의 마음이 담긴 봉헌을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헌금,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작더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미드라쉬 랍바(랍비들의 가르침) Ⅲ’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제가 어느 가난한 여인이 봉헌한 한줌 밀가루 제물을 손에 받아들고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 사제는 즉시 하느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밤 꿈에 그는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바친 것을 멸시하지 말아라.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과 같으니라.”
봉헌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 역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우리의 예물이 보다 귀하고 값진 것이면 좋겠습니다. 보다 큰 액수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주어진 처지가 각자 다릅니다. 만원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만원이 하늘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액수보다는 마음과 정성을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봉헌이나 자선 금액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 때문에 소외당하거나 상처받은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각종 헌금이나 기부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사목자들은 가난한 신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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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u69GndPu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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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이 어떻게 이웃사랑을 완성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어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사랑이 이뤄지려면 율법만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율법 학자들이 율법은 알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함을 질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비 전체를 봉헌한 과부가 율법 학자들보다 사랑을 더 잘 실천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실천에 봉헌과 무슨 상관인지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봉헌과 사랑 실천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선 사랑은 나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나에게 사랑을 주신 분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의 사랑이 ‘삼위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만이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이 싸움을 벌여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혈육인 형은 동생이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임금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형은 목숨을 걸고 그 나라를 괴롭히는 괴물을 잡기 위해 나섰습니다.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쪽 팔까지 잃었지만, 결국 형은 괴물을 쳐부수고 임금 앞에 갔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동생의 사면권을 요청하였습니다.
형은 사면권을 들고 동생을 찾아왔습니다. 동생은 풀려날 수만 있다면 자기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재판관과 자신을 신고한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형은 사면권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네가 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사면권을 너에게 줄 수 없단다.”
동생은 갈등합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것이 뭐 대수겠습니까? 동생은 형에게 그들을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형은 동생에게 사면권을 주고 동생은 그것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형과 사면권과 동생, 삼위일체입니다. 무엇 하나도 없으면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가 아닌 사랑은 다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상대를 이용하는 이기적인 일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아무리 사랑해도 남편과의 사랑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랑은 항상 한계를 지니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씨도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에 찾아갔습니다. 이것도 삼위일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용서하겠다고 찾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평안한 모습의 그를 보고는 울화가 치밉니다. 그녀는 교회에 돌을 던집니다. 왜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용서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일까요? 왜 사랑이 지속되지 않을까요? 삼위일체의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무엇에 죽어야 할까요? 상대가 나에게 해 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봉헌입니다.
밀양에서 주인공은 하느님께서 용서하라는 명령만이 아닌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묵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게 되는 것이 자기 봉헌입니다. 나를 위해 돌아가신 분께 나의 탐욕의 대상을 봉헌하는 일이 지속되지 않으면 결국엔 그분의 뜻이 내 안에서 지속될 수 없어집니다.
만약 빌 클린턴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도 자기희생을 한 힐러리 클린턴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묵상했다면 백악관 인턴 르윈스키와 불륜에 빠질 수 있었을까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묵상함은 봉헌으로 이어지고 그 봉헌이 나의 욕망을 죽여 상대의 뜻이 내 안에서 지속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하느님 희생이 필요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봉헌은 하느님 뜻을 위한 자기 죽음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여전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영국의 저명한 작가 C.S. 루이스와 미국 작가 조이 데이빗먼의 사랑은 유명합니다. 독신이었던 루이스에게 조이가 다가옵니다. 조이는 결혼의 실패로 두 아들과 함께 영국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장결혼이 필요합니다.
루이스는 그녀와 위장결혼을 해 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위장결혼 직후 조이가 골수암에 걸려 얼마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루이스는 위장결혼만으로도 조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정식 결혼식을 올립니다.
예상과 달리 조이는 결혼식 후 잠시 차도를 경험하며 함께 몇 년을 더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 루이스의 글쓰기에 조이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가 글을 쓰는 것을 도왔고 일부는 조이가 나니아 시리즈를 만드는 데 손을 댔다고도 믿습니다. 또 일부는 루시 여왕의 캐릭터가 그녀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루이스는 조이를 끝까지 챙겼고 아내의 죽음으로 자신도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의 아들도 끝까지 챙기고 위로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충실하지 않으면 루이스는 조이의 아들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이를 챙기는 것은 루이스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조이를 향한 자기 봉헌이 조이의 아들들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혼을 하고 아이들에게 소홀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아내를 위해 봉헌했기에 아내의 아들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랑에 죽지 않으면 삼위일체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피로 죽여야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에 나의 죽음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이것이 봉헌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나를 죽여 봉헌하지 않으면 삼위일체의 사랑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하신 분을 위해 내가 봉헌될 때야만 삼위일체 사랑이 지속됩니다.
이 때문에 감사의 마음도 없이 일부를 봉헌하는 율법학자들이 아닌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한 과부가 더 큰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사랑에 봉헌이 꼭 필요한 이유는 사랑이 삼위일체가 되려면 나를 사랑해주신 분께 대한 감사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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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LA에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4월, 성지순례를 함께 했던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자매님께서 평화신문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성지순례에서 은총을 많이 받았다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후원금을 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우연히 자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물품판매 봉사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이익이 남으면 모두 본당으로 봉헌했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났을 때 이익금을 계산하니 상당히 많은 액수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수고한 보답으로 성지순례를 보내드렸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그 성지순례의 비용도 기꺼이 봉헌하였다고 합니다. 성지순례 중에 하느님께 청원기도를 하였는데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다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후원금을 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봉헌하니 하느님께서도 축복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봉헌에 인색한 형제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집이 3채나 있고, 지금도 열심히 일해서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형제님입니다. 아내는 형제님이 원하지 않아서 익명으로 봉헌한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나중에 가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돈을 아낀다고 합니다. 열심히 번다고 합니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마치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지만 결국 하느님께 가지 못하는 부자의 이야기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Mother’s Day’ 때였습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LA에 방문하면서 그동안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게 꽃다발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분들이 제게 주신 도움에 비하면 아주 약소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물을 받으신 분들은 무척 기뻐해 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부활절에는 축하카드를 많이 받았습니다. 환갑을 맞이한 생일이라고 축하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나누는 데는 소홀했지만 생각하니 저도 나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 아침 ‘복음 묵상’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의 넉넉한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저의 묵상이 영적인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그저 가난한 과부의 정성이 담긴 헌금처럼 작은 나눔이 되면 좋겠습니다. 매달 신문사의 구독료 봉투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나눔도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처럼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신앙인들은 신앙 안에서 천사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카엘 천사처럼 나의 신앙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신앙을 증거해야 합니다.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처럼 나의 뜻이나 나의 욕심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라파엘 천사처럼 신앙의 여정에 좋은 안내자가 되어야 하고, 상처 입은 이웃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선(善)을 쌓은 집안은 언젠가는 경사를 맞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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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예수께서는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지만, 외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하시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하신다. 내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신경 쓰는 그들의 불행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부인들을 위해 마련된 13개의 헌금 궤가 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위한 헌금 궤이다. 많은 사람이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였다. 그런데 한 과부는 동전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을 헌금 궤에 넣었고, 예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 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희생하고 바쳤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마음으로 재어진다. 즉 예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셨다.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실히 응답하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귀퉁이만으로 응답하는 이들보다 더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코는 은총에 호응하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조건 없이 단순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과부를 비교하고 있다.
자선을 베푸는 데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뿐이다. 비록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동전 두 닢을 넣는다면 우리는 힘자라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한 것이다. 보리빵 한 조각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자선 행위의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냉수 한 잔으로 하늘나라를 얻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늘 헌금을 한 과부의 모습을 통하여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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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론이 아니라 삶>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이 말씀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나를 먹어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빵, 나의 살, 내 피’라는 말들은 모두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나타낸 말씀이라고 믿고 있고, 성체성사도(영성체도) 상징적인 예식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사 중에 축성하는 빵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게 되고, 동시에 우리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곧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입니다. 이 말은, 지상에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들은 일시적인 양식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으로 무슨 거창한 극기고행이나, 평생 걸리는 수행과 수련 같은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고, 성체를 받아먹으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누구나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성체성사를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조건입니다.
믿음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는 아주 상관없는 일이고,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성체는 먹는 사람에게 무조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마법의 약이 아닙니다.> 또 믿고서 받아먹긴 하는데, 그것으로 그치면서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어버립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만찬’과 관련된 문제로 코린토 신자들을 크게 꾸짖은 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1코린 11,33)
그 당시에는 주일 저녁에 신자들이 모두 모여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미사를 드렸는데, 각자 자기 집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봉헌한 다음에 성체성사를 겸한 만찬을 행했습니다. 부자들은 먹고 마실 것을 많이 가지고 왔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적게 가지고 오거나 빈손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끼리만 모여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것을 먹어치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배고픈 것도 서러웠을 것이고, 따돌림 당하고 소외당하는 것은 더욱 서러웠을 것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교회에서.>
그런 일이 코린토만의 문제는 아니었는지, ‘주님의 만찬’, 또는 ‘아가페 식사’는 초대 교회 때 잠깐 시행되다가 폐지되었고, 지금과 같은 성체성사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부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해져라.”가 아니라 “함께 먹어라.”입니다. 함께 먹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쉬운 일도 안 하는 것은 ‘사랑 없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앞에서 ‘믿음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된다는 말을 했는데,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을 합하면, ‘사랑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도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가지고 있는 재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일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과 같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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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있는 헌금 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많은 부자가 찾아와 큰돈을 넣는 모습도 보시고, 가난한 과부가 찾아와 렙톤 두 닢, 곧 콰드란스 한 닢에 지나지 않는 적은 돈을 넣는 모습도 보십니다. 콰드란스는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단위로, 값어치가 가장 낮은 로마 화폐였습니다. 부자들 ‘다수’에 대비되는 가난한 과부 ‘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봉헌한 ‘거액’과 ‘소액’의 대조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 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이 말씀은 많은 돈을 기부한 부자들 가운데 누구보다 —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보다도 — 더 많은 돈을 넣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부자들이 기부한 모든 돈을 합친 금액보다 그 과부가 더 많은 돈을 넣었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콰드란스 한 닢과는 견주지도 못할 엄청난 금액일 텐데,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왜곡된 말씀을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신 부분은 봉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봉헌하는 정황입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활비로 옮긴 그리스 말 ‘비오스’의 본뜻은 ‘생명’입니다. 과부는 자신의 온 생명을 봉헌한 것입니다. 넉넉한 가운데 얼마씩 봉헌하고도 남는 것이 있는 부자들과 달리,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희생 제물로 내주신 예수님과도 무척 닮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 과부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히 칭송받아 마땅합니다.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마음속 곳간에 쌓아 둔 소중한 것들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내드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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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지도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이끌고 가르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막중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삶의 모범으로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것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보여 주어야 할 모범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새 마음 안에 교만함과 공명심이 더 커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의 공명심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타인을 억누르고, 자신들의 가르침과 견해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것을 가르치든지, 그 수단과 방법만을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지도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혼을 담아서 그것에 몰두하고, 자신의 온 삶을 담아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고, 그 자체가 진정한 가르침이고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비록 액수가 렙톤 두 닢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자신의 온 생명을 바친 것이기에, 어떤 헌금이나 어떤 가르침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봉헌이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가진 직무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참된 삶을 보여주는 사람이 진짜 스승이요, 참된 봉사를 보여주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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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모습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만난 과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에 사는 과부를 찾아가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 이때 과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열왕 17,12)
오늘 복음의 과부가 봉헌한 돈은 렙톤 두 닢입니다. 요즈음 돈의 가치로 환산하자면 그녀의 전 재산은 약 천 원에 불과합니다.
한 끼를 겨우 때우기에도 부족한 이 돈을 그녀는 왜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여력이 없는 것에 한탄하며 가지고 있던 돈을 하느님께 바치고 난 뒤에 사렙타의 과부처럼 죽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녀가 놓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을 전 재산을 바친 것에 대한 칭찬으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풍족하게 가진 것이 많음에도 목숨이 위태한 과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을 두고 탄식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는지에 대해서는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라는 율법 학자의 말을 두둔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할까요? 단순히 교회에 많은 헌금을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새겨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 하루하루 삶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를 오늘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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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가난한 과부가 성전의 헌금함에 봉헌합니다. 렙톤 두 닢입니다. 렙톤은 한 데나리온의 1/144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므로 편의상 하루 일당을 오늘날 10만 원으로 생각하면, 렙톤 두 닢은 약 1,388원 정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과부가 봉헌한 렙톤 두 닢은 천 원이 조금 넘는 금액입니다. 매우 가난한 과부입니다.
그녀의 궁핍한 일상이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지요?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의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이 나의 생활비라고 한다면, 그러한 삶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나의 가난을, 나의 어려움을, 나의 불편함을 호소하면서 불평과 투정으로 가득한 모습이 예상됩니다.
그러나 과부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묵묵히, 조심스레 성전으로 다가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합니다. 과부의 헌금은 우리에게 그녀의 삶의 자리가 지닌 불편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마음은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떠한 모습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십니다. 내 조건과 상황이 본질이 아닙니다.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더라도, 그것이 극심한 가난과 어려움이더라도, 하느님을 향한 부유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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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부는 전부보다 많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 온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핸드폰도 최고급 사양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따돌림당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AI 로봇의 지배를 받고 사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 중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손희송)
오래전 일입니다. 컨테이너 박스에 거처를 삼으시고 살고 계시는 아가다 할머니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네잎클로버입니다. 전날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행운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시들까 봐 물컵에 담아서!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잎클로버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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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는 글 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지만, 20년 넘게 글을 쓰다 보니 오히려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곧바로 글이 써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 생각을 돕는 것이 바로 일상의 단편들과 책 읽으면서 얻는 영감들입니다. 그래서 계속 메모합니다. 특히 포스트잇을 가지고 다니면서 제 생각을 메모합니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할 때, 이 메모를 띄었다 붙이면서 구성하고 정리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글을 완성합니다.
누구는 일반 메모지를 사용하지, 왜 훨씬 비싼 포스트잇을 쓰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포스트잇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잇은 적당한 접착력이 중요한데, 오래되면 자연스럽게 접착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접착력이 떨어지기 전에 모두 사용하기 위해 팍팍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포스트잇을 주신 분이 2016년 주님 곁으로 가신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구청에서 근무할 때, 연말에 마니또를 해서 선물을 나눴는데 그때 저의 마니또가 주교님이셨고, 제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포스트잇 뭉치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포스트잇을 쓸 때마다 주교님이 생각납니다. 워낙 글을 잘 쓰셨던 주교님이시라 저 역시 글을 쓸 때 도움을 받는 것만 같습니다.
본인에게 의미 있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좋은 의미는 미소를 띠게 됩니다. 저 역시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를, 화를 내게 하는 의미가 아닌 기쁨을 주는 의미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 의미로 다가오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모범을 따라 이웃에게 의미 있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은 자랑하듯 큰돈을 넣었지만,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지요. 이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제물의 양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제물을 바치는 마음, 솔직함, 겸손함 등이 필요했습니다. 다른 부자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욕심과 이기심을 봉헌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온 정성을 봉헌했습니다. 주님께 진정한 의미로 다가온 사람은 가난한 과부였던 것입니다.
남에게 의미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를, 나쁜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로 주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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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이기를>
마르코 12,38-44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나이기를>
보여지는
겉 나 안에
보이지 않는
속 나 있으니
속 나만큼
겉 나이기를
없어도 있으려는
헛 나 앞서
있는 그대로
참 나 있으니
헛 나를 벗고
참 나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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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남겨 두지 않고>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
내가 바치는 모든 것, 그것도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돌려드리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복음의 과부처럼 그걸 자기의 것으로 꿍쳐 놓지 않고 모두 다 바칠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저께 복음인 12장 28절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12장 38-44절의 얘기에서는 율법 학자들과 비교하며 가난한 과부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친 사람이라고 하심으로써 가난한 과부가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께서 주셔서, 자기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자기를 위해 남겨두지 않고 다 바친 사람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가 바로 과부와 같은 삶을 산 분입니다. 그의 가난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돌려드리고 자기의 것으로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은 자의 가난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두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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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찬미, 봉헌, 자선, 사랑이 답이다-
어제 피정중인 자매가 저녁 성무일도 시간을 앞둔 오후 5시쯤 갑작스럽게 집무실을 녹크했고 궁금 사항을 질문했습니다. 왜 모세가 모압 평야를 건너 약속한 땅에 가지 못하고 죽고 여호수아가 건너갔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처지가 너무 안됐고 하느님이 너무 야속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의 요지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각자 역할이 있는 법입니다.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모세의 역할인 것입니다. 모세는 겸손과 순종의 믿음으로 지혜롭게 훌륭히 자기 역할의 책임을 다했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그 뒤를 잇습니다. 마치 릴레이 경주시 바톤 텃치와 같습니다. 혼자 계속 달릴 수는 없습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사는 일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부단한 떠남의 여정입니다. 제가 여기 요셉수도원에 부임한 해가 1988년 나이 40이었는데 35년이 지난 올해 2023년에는 나이 75입니다. 35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연미사를 드리다 보면 저보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됩니다. ‘아, 이분들이 얼마나 살고 싶어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이래서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을 좌우명 삼아 살아가는 요즈음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주변의 자연환경도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의 교사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웠던 꽃들도 지나가면 다른 꽃들이 뒤를 잇습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요즘 수도원 주차장에는 샛노란 금계국꽃이 한창입니다. 이제 곳곳에 피어나는 야생화 금계국 꽃들입니다. 꽃말은 “상쾌한 기분”의 금계국꽃입니다. 저절로 읊어지는 시였습니다.
자리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활짝 꽃피어 내어
하늘 담으면
거기가 바로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다
그러니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 이란 성가를 기억할 것입니다. 놀랍게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 227항에도 소개되고 있는 성녀의 격려 말씀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할 것이며 신앙은 역경중에도 하느님을 신뢰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
오늘이 내일입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삶이 아름답고 중요합니다.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지막 떠남의 죽음도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바로 시종여일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물론이요 복음의 가난한 과부, 그리고 토빗기의 토빗과 라파엘 천사가 바로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멋지고 아름다운 떠남의 연속이요 마지막 죽음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자기 증여(self-giving)’의 삶입니다.
바로 이의 반대가 자기 중심의 ‘자기 섬김(self-serving)“의 삶이요,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이요, 부자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기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율법학자들입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요, 외적본능의 욕구대로 살아가는 허영의 사람들입니다. 외화내빈, 내적공허의 헛된 삶을 살아가는, 알맹이가 아닌 껍데기의 삶을 살아가는 본말전도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수 있겠는지요? 저는 셋으로 요약했습니다.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입니다.
첫째, “찬미의 삶”입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하느님 찬미가 모두입니다. 찬미의 믿음, 사랑의 찬미, 찬미의 축복, 찬미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것이요 토빗처럼 찬미로 살다가 찬미로 끝나는 해피엔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로서 끝나는 제1독서 토빗기를 통해 배우는 찬미의 삶입니다. 놀랍게도 라파엘이 수호천사처럼 토빗과 늘 함께 했음을 봅니다. 삶은 우연이 없고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섭리 안에 있음을 봅니다. 우리 하나하나와 함께 하는 수호천사도 분명있을 것입니다.
토비야가 귀가했을 때 라파엘은 은밀히 불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잘 해 주셨으니, 살아 있는 모든 이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하라”고 격려합니다. 또 임무를 다 마치고 파견하신 분께 떠날 때도 토빗에게 당부합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자, 나는 나를 파견하신 분께 올라간다.”
둘째, “봉헌의 삶”입니다.
사랑의 봉헌입니다. 찬미란 말도 좋지만 봉헌이란 말도 좋습니다. 찬미의 봉헌입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루하루가 봉헌의 삶이요 마지막 거룩한 봉헌이 죽음입니다. 바로 봉헌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입니다. 예수님이 극찬하는 가난한 과부는 예수님의 봉헌의 삶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봉헌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 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정말 세상 우상들로부터 자유로운 “참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부자요, 참 자유인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살아 있는 보물인 하느님을 소유한 참부자, 참자유인 가난한 과부에게서 자기를 본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우리 봉헌의 삶을 부끄럽게, 분발하게 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셋째, “자선의 삶”입니다.
사랑의 자선입니다. 이웃 불우한 이들에게 하는 자선은 일종의 봉헌입니다. 자선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인색함보다 추하고 인간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이 권하는 수행 셋이 기도, 단식, 자선입니다. 라파엘이 자기 임무를 다하고 떠날 때 토빗과 토비야 부자에게 신신당부하는 자선의 실천입니다.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그러나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된다.” 정말 오늘날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는 금과옥조의 말씀들입니다. 부자 나라들이 사람 죽이는 무기 만드는데 쓰는 돈을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선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같은 생각도 듭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찬미가, 사랑의 봉헌이, 사랑의 자선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로운, 참으로 부요한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하느님 중심의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아름다운 참부자, 참자유인으로 살게 하는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이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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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12,41)
<마음을 다하여~>
오늘 복음(마르12,38-44)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해 있는 나의 척도가, 드러나는 외적인 것들, 헌금함에 돈을 넣는 액수와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가는 계명', 곧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계명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되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2)는 계명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입니다. 5월 한 달은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인도네시아를 다녀오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시작된 기침감기로 열흘 넘게 고생을 했습니다. (코로나.독감.폐렴은 정상) 고성 올리베타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피정집으로 피정(6.7~)을 오고 난 후 점차 좋아졌습니다. 어제 저녁에 몸과 마음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침도 멎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못했던 성경필사도 제대로 하게 되었고, 어제는 40일 만에 가장 많이 필사했습니다. (2열왕23,20~25,11)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 덕분입니다. 요즘 독서인 토빗기에서 토빗과 사라를 살려낸 하느님의 천사인 라파엘 천사와 같은 분들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니 5월1일부터 어제까지 약 40일 동안 하느님께서 제게 많은 천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천사들도 보내주셨고,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천사들도 보내주셨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큰 하느님 체험에 대해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겠죠.
그래서 하느님이시며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시아요 구세주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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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jCfmDtJh6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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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 43)
가난보다
더 힘든 것은
히느님까지
잊고사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가난이 있기에
은총도 있습니다.
은총의 밥상을
차려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끊임없이
나누시는
주님께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고마운 마음 없는
신앙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고마움의
밑바침이
바로 생활의
밑바침이
되어야합니다.
가난은 가난끼리
서로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부여잡고
있는 그것마저
하느님께
내어드립니다.
하느님께
내어드리니
갇혀 있던
마음이
풀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안전하고 편안한
것들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일까지
하느님과 나누는
것입니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은
나눔의 때이며
가장 좋은
기도의
봉헌의 때입니다.
생활은 나눔이고
나눔은 생활을
권유합니다.
그 어떤
우리의
생활 안에서도
함께하시는
생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의 생활이
가장 아름다운
기도임을
믿습니다.
생활과 신앙은
이렇듯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마음입니다.
하나의 마음을
한 분이신
하느님께
아낌없이
봉헌합니다.
봉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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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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