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사도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행했던 직무와 업적에 대하여 보고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치도 사장님께서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듯이 말씀하시죠.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이 떠나려고 하니 사람들이 따라 붙습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마르 6,33)
사람들은 그들과 어떻게든 함께 있고 싶어합니다.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거 있죠. 함께 있으면 행복을 주는 사람, 믿음직스러워서 동행하면 무엇이든 잘 풀릴 것 같은 사람,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지 않고 언제나 미소와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하여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제게는 비춰집니다.
고민이 많아집니다. 자비와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심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게는 하느님 나라의 번영을 위한 한 명의 사제로 불리움 받았기에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매력적인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꾸려나가야 하는 책임과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시대가 급변하고 세상엔 좋은 컨텐츠가 많아지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간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하느님이 없다.’며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죠.
물론 이러한 무신론자는 어떤 시대든 항상 있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더욱 더 크게 세속화의 도전 앞에 가톨릭교회와 하느님이 서 있다는 묵상을 하게 됩니다.
매체는 보다 더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 혈안이 되어 있기에 사제와 수도자를 하나의 표상으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컨텐츠가 역설적으로는 가톨릭교회의 홍보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에 대한 무게 또한 절감되었다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합니다.
사제성소자와 수도성소자의 수는 이미 급감하고 있는 추세이며
미사를 봉헌하는 교우분들이 점점 줄고 있고 그만큼 냉담자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미 유럽교회는 그렇게 되었지만 희망이 있다는 아시아 교회도 점점 초고령화의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특별히 젊은 이들이 하느님의 품과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며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려는 생각 또한 하지 않는 현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앙은 그저 하나의 ‘세상적 문화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중 하나의 선택적 취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움직임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의 도전에 놓인 현 교회의 주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도전에 놓여 있는 신앙인들입니다.
‘2,000년 전에 왜 사람들은 배타고 저멀리 떠나는 나자렛 예수와 제자들을 따라서 육지를 뛰어 함께 하려고 하였을까?’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설렘과 기대, 충만한 기쁨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그려집니다.
십자가 앞에 앉아 자문하게 됩니다. ‘주님,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까?’
교우 여러분, 함께 고민해 주시기를 두 손 모아 청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들의 자유 의지와 하느님의 은총의 협업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소중한 열매입니다.
우리의 의지 또한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교회가 당면한 상황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만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내 자손들에게, 내 이웃들에게 대대손손 물려주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결코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 사도직’에 대해 천명하였습니다.
직무가 다를 뿐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중에, 묵상 중에, 성당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 중에, 삶 안에서 겪는 신앙 체험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앞으로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하고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고민을 하느님께서 굽어보시고 동행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사도로 세워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