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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 시모음
적막 / 안도현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거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
적막 / 나태주
모처럼 눈이 내린 날
그것도 1월 중순
종일
그 흔한 문자메시지 카톡 하나
날아오지 않는다
다만 바가지를 엎은놓은 양
고요하고 고요할 뿐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이런 날은
지구의 숨소리라도 들릴 듯
지구야, 그대도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를……
적막한 봄 / 정완영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 풀에 지쳐 오도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 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적막 / 유재영
오래 된 그늘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가
툭! 떨어졌다
참 조용한
하늘의 무게
어떤 적막 / 정현종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적막 / 정현종
떠나는 것들은 모두
적막을 남긴다.
한동안은 한동안의 적막
영원히는 영원의 적막
적막은 시간의 알맹이
적막은 공간의 알맹이
알맹이 중의 알맹이
(가령 내가 내 방을 떠날 때도
뒤에 남는 적막은
깊고 가없다)
들판이 적막하다/ 정현종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은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생명의 황금고리가 끊어졌느니------
적막한 식사 / 이승희
잠결에 밥 먹는 소리 들린다
물소리 달그락대는 강가를 걷는 중이다
잠시 물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들여다본다
적막하다
촉수 낮은 불빛이
분필가루처럼 식구들의 얼굴에 내리는 동안
두어 번 조용한 허기가 다녀간다
물소리 점점 멀어진다
나는 강가에서 돌이나 던져본다
물 위를 날아가는 생각의 끝에서
잠깐의 정지
나는 다시
물 속으로 오래 가라앉고 있다
적막 한 채/이재무
빈집 장광에 놓여있는 금 간 항아리
사나흘 전 다녀간 비가 바닥을 간신히 적시고 있다
구름이 얼비췄다 가고
달빛 혀 내밀어 맛보다 내빼고
엊그제 헛청에서 건너온 늙은 거미가
입구에 쳐놓은 그물엔 새벽 별 몇 송이 파닥거린다
한때는 얼마나 뜨거운 몸이었던가
사철 내내 짠 간장과 되직한 된장과
맵고 뜨거운 고추장 담고도 내색 없이 살았던 살(肉) 아니었던가
다 비워낸 자연으로 들어앉아
지금은 다만 산그늘, 산새 울음,
길 잃은 바람이나
들렀다 가는
적막 한 채
적막 한 채 / 임동윤
누구든지 출입을 허락한다는 듯
무너진 싸리 울타리 너머
털썩 주저앉은 너와집 한 채 있다
감나무는 말라죽고
켜켜이 쌓인 먼지를 깔고 앉으면
조금씩 삭아 내리는 내력으로
뒤뜰 대숲엔 바람소리만 스산하다
조금씩 그 시간을 돌아보기로 한다
잡초 황망히 뒤집어쓴 우물을 돌자
반쯤 내장을 비운 장독과 댓돌들
사금파리조각은 눈을 찌르고
속살을 다 드러낸 처마 밑에서
거미들만 알을 까고 새끼를 친다
오직 천근 무게의 적막만 주춧돌로 남은
울안을 지나 폭삭 내려앉은 대문에 선다
눈보라에 견디지 못한 굴피지붕
판자는 떨어져 나가고
웃자란 풀들이 적막을 내뿜는다
휙휙 바람소리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외로움에 익숙해진 탓일까
멧새 몇 마리 날아와 재잘거린다
이젠 눈 뜨고도 늙어가는 집
서둘러 고요 속을 빠져나온다
적막 한 채/ 이사랑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고요가 움트는 신생의 시간
가위로 어둠을 오려냈더니
거기 적막 한 채 보인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규격이나 틀도 모르고
거침없이 형식을 파계하고
석 달 열흘, 무엇에 홀린 듯
적막강산에 지은, 시의 집
적막 한 채!
이사랑 시인의 시집 『적막 한 채』 중에서. 다시올
적막강산 / 백석
오이밭에 벌배채 통이 지는 때는
산에 오면 산 소리
벌로 오면 벌 소리
산에 오면
큰솔밭에 뻐꾸기 소리
잔솔밭에 덜거기 소리
벌로 오면
논두렁에 물닭의 소리
갈밭에 갈새 소리
산으로 오면 산이 들썩 산 소리 속에 나 홀로
벌로 오면 벌이 들썩 벌 소리 속에 나 홀로
정주 동림 구십여 리 긴긴 하룻길에
산에 오면 산 소리 벌에 오면 벌 소리
적막강산에 나는 있노라.
적막 / 신철규
모내기가 끝난 논
이앙기 지나간 자리에 남은
앙다문 이빨 자국
두 다리가 삐죽 나온 올챙이
창자를 달고 우주인처럼
둥둥 떠 있다
일찍 태어난 게 죄다
바람이 건듯 불자
촤르르 밀려 논두렁에 부딪치는 물낯
넘칠 듯 말 듯 그렁그렁
하늘 속을 遊泳하는 구름 위에
거꾸로 매달린 소금쟁이
어지러운 듯
손톱으로 꽉, 부여잡고 있다
적막소리 / 문인수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
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
그런가보다, 여기 적막한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홀로 앉아
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소주 몇 잔 걸치니,
코끝이 시큰거려 냅다 코 풀고 나니,
배롱나무꽃 붉게 흐드러져 왈칵!
적막하다. 내 마음이 또 그걸 받아 그득하고 불콰하여
길게 젖어 풀리는
저 소리들, 적막이 소리를 더 많이 낸다.
또 그 소리에 그 소리인 부모님 말씀,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이 푸르다 / 강경호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여름 쑥부쟁이 하얀 꽃그늘에
온몸에 초록 페인팅을 한 사마귀 한 마리
조각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단란주점과 노래방에 둘러싸인
도심의 작은 숲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눈물겨운데
쌀쌀한 날씨는 저물어가고
거미줄 한 번 흔들리지 않는
날벌레 한 마리 날지 않는 정원에서
두 손에 글러브를 낀 채 주먹 단단히 쥐고
당랑권 품새로 대책 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마귀를 감싸고 있는 공기가 적막하다
언제 끝날 싸움인지도 모르는 기다림과
끈질긴 적막이 푸르다.
적막 / 고영민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올까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 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갔을
꽃의 긴 그림자
적막 / 송재학
빙하가 있는 산의 밤하늘에서 백만 개의 눈동자를 헤아렸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별과 나를 쏘아보는 별똥별들을 눈부릅뜨고 바라보았으나 별의 높이에서 나도 예민한 눈빛의 별이다 별과 별이 부딪치는 찰랑거리는 패물 소리는 백만 년 만에 내 귀에 닿았다 별의 발자국 소리가 새겨졌다 그게 적막이라는 두근거림이다 별은 별을 이해하니까 나를 비롯한 모든 별은 서로 식구들이다
적막한 허공 / 조창환
바다는 맑고 고요하고 그윽해서
해안선에서 수평선까지 텅 빈 정적이 가득하다
청결하고 온유한 달이 저 적막한 허공에
견고한 혼을 새긴다
적막한 허공과 견고한 혼은 하나다
해안선에서 수평선까지 아득한 월인(月印)이 퍼져있다
새 날아간 하늘길과
배 지나간 바닷길과
꽃 떨어진 사람의 마을에도 아득한 월인(月印)이 퍼져있다
기억도 없고 망각도 없는
야만도 없고 자비도 없는
광기도 없고 지혜도 없는
저 적막한 허공 속에는 너무 환한 필라멘트가 켜져 있어
은은하면서 두렵고
투명하면서 컴컴한
가슴 떨리는 신성(神性)의 그림자가 얼비친다
이토록 적막한 / 전동균
나무는 왜 서 있어야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아야 하는지
날마다 해와 달을 깨우고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지
그 힘이 왜
없어도 좋은 우리를 여기 있게 하고
아침이면 눈꺼풀을 열게 하는지
해달은 왜 물에 떠 해초를 감고 잠자는지, 털도 없는 톡토기는 어떻게 영하 70도의 혹한을 견디는지, 피파개구리는 왜 혀가 없는지, 오리너구리는 어떻게 알을 낳게 됐는지
이 작은 가슴에 어떻게 바다와 사막이 함께 출렁이고
사랑은 늘 폭탄을 감추고 있는지
헛된 꿈들은 사라지지 않는지
왜? 왜? 왜?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휘몰아치는 질문의 소용돌이 속을
우리는 걸어간다 우리는
비늘들이 얼굴을 뒤덮어도 응답처럼
지느러미가 돋아나도
우는 대신 웃는 표정으로
적막이 오는 순서 / 조승래(1959~ )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리를 끝으로 조용해 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적막 / 박남준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아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쌓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적막하다는 말 / 정복여
털이 있고 움직이죠
네 개의 다리로 어슬렁
그러나 게을러 멀리 가진 못하죠
허리는 뚱뚱한 불면
뼈로 굳은 연애의 흔적이
끌칼로 솟아 잠을 깎고
등은 낙타같이 막막하죠
젖무덤은 희망을 몇 낳아 기른 적도 있어 제풀에 쭈글 울고
거길 휩쓸고 간 회한의 꼬리는 길고 길죠 살금살금 들어가보는 옛 사원
벽돌처럼 휘둘러진 자주색 커튼
정색을 한 형광등아래
낮의 파도처럼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 비켜서는 모래언덕처럼
앞발이 우뚝 서기도 하죠
회색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소리치며 갇혀 있는 사물들
잘못 들린 초인종에
반가움을 와그르르 쏟아넣지만
한번도 문이 열린 적은 없죠
달그락달그락 자개농 속 달 그릇을 당겨
희고 조용한 우윳빛을 기울여 먹으며
웅크린, 늙고 뚱뚱한
캄캄함이 혼자서 하얗게 세지요
적막황홀의 아침에 / 고형렬
눈을 뜨면 먼저 손목시계를 찾는다
철커덕, 한 뭉치의 늘어진 시계줄과 시계
눈 감고 왼손 팔목에 채운다
아내가 사준 크리스털의 렌즈만한 시계
하지만 오늘도
저 과거로부터 있어온 지루한 삶의
그 환하고 눈부신 아침이다
대대로 시간과 희망에 속아서 은빛 시켓줄은
살이 되었다, 한 뭉치의 살
나의 시간은 태양의 햇살처럼 간다
이젠 태엽도 풀리지 않으면서
우라늄이든 빛이든 한 조각의 티끌로
재깍, 재깍, 재깍, 재깍
방 안에 햇살 들어오는 눈거울에
오늘은 무사일출 이 시나 한 편 짓는다
옛 시인들처럼
시골은 조용해서
간혹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뿐
적막한 식욕 / 박목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 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 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식성.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 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웃마을 이 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적막
ㅡ광안리
배재경
소줏병 우우 울어대는 광안리 방파제 너머 저물녘 태양이 이기대 능선에 걸려 기침을 한다 광안대교의 꼬물거리는 개미군단들이 어둑어둑 백사장을 가로지르고 눈치 없는 요트들만 아무렇게나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둥실둥실이다 끼룩끼룩 갈매기들 황혼의 포말에 앉았다 일어서고 앉았다 일어서고, 심드렁한 갯강구들만 귀가를 서두른다
어디로 갈 거야?
여자는 말없이 백사장에 도장을 찍는다
남자가 앞서 걷고 뒤따르던 여자 모래톱에 발을 심고는 광안대교를 보는 것인지, 대교 밑 요트를 보는 것인지, 대교 너머 바다를 보는 것인지 불안하다 나는 분명 여자를 응시하였고 여자는 무연히 바다만 바라보았고 멀찍이서 그녀의 남자는 소줏병을 들이키고, 그새 화장을 끝낸 광안대교가 듬성듬성 부항을 놓기 시작한다
남자가 버리고 간 소줏병 가득 빠져나오지 못한 바람만 울음을 토하고
적막/안규례
그해 사월은 동굴처럼 어둡고 깊었다
녹음 짙어진 가지 사이로
바람 소리조차
아랑곳하지 않는 밤이 오면
세상에 없던 적막이 자유를 쓴다
오늘도 어둠의 꼬리를 물고
올망졸망 별들은 사방에서 모여드는데
불꺼진 창가에
수북이 쏟아져 내린 별빛마저
차고 쓸쓸하다
불현듯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넘기며
허공 저 멀리 달아난
지난날들을 잡아 당겨 본다
밤은 깊어가고
불 꺼진 창은 온전히 나만의 것
엎치락뒤치락
훅 파고들어 온 외로움도
스스로 날개를 접는 시간
집 떠난 네게 닿지 않는 마음을 열어
물음표를 던져본다.
적막(寂寞) / 백인덕
빈 행간에 기록된
골목의 어제
하수구 근처
밤새 세찬 비
무단투기 된 쓰레기를
한껏 펼쳐놓았다.
사소(些少)의 불투명한 역사
고개 숙인 채
어쩌면 팔 하나 올리고
누군가 서성거렸겠지만
바닥도 벽도
그 흔적 지운지 오래
낮 빛은
다리 잃은 안경에 부딪혀
꽃 자리 그늘로 몰리고
어제를 지나간 사람
무거워진 발걸음 이유를 모른다.
적요(寂寥) / 백인덕
매일 죽는데
끝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뒷담의 아침 장미
사람 없는 틈
가장 억센 가시를 세운다.
본능으로 벼려진 의지
버려진 의자는 여전히 서 있고
어떤 이유도
그의 다리를 걷어차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하루
상처는 안에서 아물고
매 순간이 끝인데
죽음이 걱정일 수는 없다.
벼랑 위 잔도(棧道)처럼
지난 길
다 태우면 된다.
적막/김우진
정전은 늘 기습적이다 불빛을 집어삼킨 새벽 두 시 아파트 지하주차장, 어둠의 똬리를 튼 이곳은 바퀴들의 귀착지, 속도에 지친 길들이 한 자리에 멈춰 있다 저 길들이 잠을 털고 일어서는 시간, 어둠도 어디론가 쏟아져 내릴 것이니
희미한 불빛으로 어둠 속을 휘젓는다 쭈그러진 어둠의 주름살이 펴지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어둠에 묶여 살았다 이곳은 도시의 늪, 통째로 먹이를 삼키는 악어가 살고 있다 불빛 한 점으로 이 늪을 점검한다 지난여름, 한 여자가 악어에 물린 기억을 조심스럽게 플래시로 밀어낸다
달리던 길도 숨을 멎은 시간, 어둠 속에서 무럭무럭 살찐 적막의 푸른 살점을 떼어내어 입 큰 악어에게 던져준다
천장에 숨어 사는 고요가 바닥에 엎드려 있다 저 고요의 현을 밟으면 짐승의 울음소리가 튀어나올 것이다 두려움이 집요하게 달려든다 몸에 고인 졸음이 빳빳해지고 보폭이 좁아진다 켜켜이 쌓인 적막에 등이 서늘해지는 순간, 신발을 질질 끌고 소리와 동행한다 지하 배수펌프가 덜컥 주저앉는 소리에 놀란 천장의 거미줄은 사유의 알을 쏟아 놓는다 보일러 배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 배후를 알 수 없는 저 뒤편 생각이 쭈뼛 일어선다
수십 층 적막의 무게가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적막한 바닷가 / 송수권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 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 바삐 서녘 하늘을 채워 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스무 살의 적막 / 최수일
울다 그쳤다를 되풀이하는 매미들이
여름 한낮의 고요를 살찌운다
두엄자리를 헤집던 벼슬 어여쁜, 장닭도
혀를 내밀고 할딱거리던 검둥이도
뒤란 대숲 바람 속으로 숨어든다
감나무 그늘이 두껍게 펼쳐진, 덕석으로
청백색 하늘의 비행운(飛行雲)이 스며든다
고요의 푸른 하늘바다,
나는 먹다 남은 소주 반병을 생각한다
소주병에 生에 대한 시름 한 타래 풀어
적막한 고요와 흔들어 섞는다
내 안의 고요가
순간, 한낮의 적막으로 출렁거린다
이따금
호박벌, 허공에 걸린 고요를 살짝 흔들다 날아간다
대빗자루 끝, 고추잠자리
생각의 무게에 짓눌린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그렇게
따가운 한낮을 멍석 말듯
느슨하게 말다가, 나는
까무룩 잠이 든다
작은 돌개바람, 내 잠든 그림자 걷어 허공으로 솟구친다
적막한 말 / 김경식
다음에 보자
악수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문득 눈앞이 캄캄해진다
동백에서 산국山菊까지 빠르게 한 순번 돌고 나면
이내 눈발이 치고
세상의 길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을
내주 혹은 내달 언제
따로 날을 정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을 터
다음에, 그 말씀은
이승의 시간 다 흐른 뒤에
열명길 함께 나서자는 서러운 약속이겠거니
이러한 때
사전 속의 유의어 사후事後는
사후死後로 읽어야 하는 법이다
적막 / 박복영
치자꽃 와락, 하애졌다
보잘 것 없는 설익은 탱자가 어쩌자고
땡법을 불러들여 그림자를 채우는지
바람은 느굿하고 탱자나무 가시는 완강하였다
마당에 가을을 닭아가는 그늘이 아무런 기척도 없이 숨어드는 동안
쓸쓸함은 노랑게 익어가겠다
먹구름이 부르튼 입술을 적시는 저물녁
식어가는 아랫목이 안타까웠다
적막이 적막을 위로한다 / 차옥혜
적막이 적막을 덮어주며
낙엽이 낙엽을 덮어주며
마른 풀들이 마른 풀들을 껴안으며
빈 나뭇가지들이 빈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적막한 겨울 들판이
적막한 겨울 숲이
적막한 나를 품는다
쓸쓸한 겨울 들이
고요한 겨울 숲이
뿜는 시리고 찬 은은한 빛이
쓸쓸한 내가
고요한 내가
읊는 시에
따뜻함으로 서린다
적멸 / 정한용
스무 해 전에 보낸 편지에
스무 해 지나 메일로 답이 왔다
알 수 없는 일, 겨우겨우
가는 목숨을 어찌어찌 이어오던 난 화분에
꽃이 달렸다
모든 목숨은 물같은 그리움이거나
빈집을 흐르는 울림이거나
상처의 흔적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