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란 무엇인가?
- 아기 예수를 사랑한 성녀 데레사
욥 3,1-23; 루카 9,51-56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24.10.1.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여 ‘작은 꽃’ 즉 소화(小花)라는 애칭으로 불린 데레사 성녀를 기리면서 전교 성월을 시작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인체에 비유한 ‘그리스도의 몸’ 표상을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일생을 걸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인체를 움직이는 머리에서는 온 몸에 전달되는 그리스도의 뜻이 가장 중요하고 이것은 사랑입니다. 또 머리에서 전달된 이 사랑의 뜻에 따라 온 지체들을 움직이는 몸에서는 피가 필요한데 그래서 이 피를 만들어내는 심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아기 예수님의 심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에 담긴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자신은 봉쇄 수도원의 담장 안에서 살지만 기도를 통해서 전 세계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영적으로 전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랑이라는 피는 기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얼마든지 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자신의 수도 생활로 증거하며 밝혀낸 공로로 그는 교회 학자로 칭송을 받습니다.
선교사들의 원조가 된 사도들도 처음에는 제자들로 시작하여 현장 실습을 통해 양성되었습니다. 애초의 열두 제자가 첫 파견에서 얻은 예순 제자를 더해 모두 일흔두 제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쳐주었고 마귀 들린 이들을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보잘것없다고 무시당하는 바람에 병들고 마귀 들렸던 그들은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고, 결국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이 가난한 이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인들로부터 경원시되던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시던 예수님 일행을 배척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나중에 따로 사마리아에 들러 한 여인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고 이 여인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사마리아의 복음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4,41) 이 복음화의 결실은 훗날 초대교회 시절에 필리포스가 거두게 되지요.(사도 8,5; 9,31)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통한 선교의 모범 사례로 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을 제시하기도 하셨습니다.(루카 10,30-37 참조) 사실 예수님께서도 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조건 없이 정성껏 사랑을 베푸셨고, 이것이 선교와 복음화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봉쇄수도원에 살거나, 지구 반대편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사는 낯선 지방에서 선교하거나 간에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이들을 통공하도록 이어주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에 담긴 하느님 사랑의 피는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영적인 통공을 이룩합니다. 특히 기도 중에서도 시편 기도가 유용합니다. 왜냐하면 시편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 신심 깊은 이들이 하느님께 바쳤던 찬양과 감사, 탄원과 속죄 등 모든 지향을 다 담고 있는 기도이기 때문이고, 이 기도에서는 그 아나빔의 생생한 신앙 감각을 느끼고 배우며 통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공으로 나뉘어진 하느님 사랑으로 선교사들이 그 사랑을 현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선교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이 사랑이 모든 피조물들을 원래의 창조 계획대로 움직여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 있음을 믿는 존재였고, 욥기의 저자도 이 같은 이상적 유다인의 상으로 욥을 그려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사탄의 계략으로 억울한 재앙을 만나 온통 슬픔과 비탄에 빠졌던 욥은 본래 지녔던 신앙을 조금도 손상치 않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고백하여 말년에는 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서 파견된 복음 선포자들이 온 세상에 가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민족과 집단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 자체를 심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활동을 일반적으로 ‘선교’라고 한다.”(선교교령, 6항)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때만 해도, 백인들로 구성된 유럽 라틴 교회를 기준으로 삼는 고정 관념이 은근히 통할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럽 라틴식 교회 모델을 옮겨 심는 일이 선교라고 여겼었습니다. 이를 ‘부식(扶植) 선교’라고 합니다. 과거 18~19세기에 전 세계를 누비며 약소국을 정복하던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주의 정책을 정당화시켜준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러한 ‘부식 선교’였습니다.
선교사들이 무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아시아에서 토착 종교나 현지 문화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배척하고 일방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강요한 정복 선교의 또 다른 얼굴이 이 부식 선교였기에,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이 선교관은 더욱 폭넓게 바뀌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 폐막 직후인 1967년에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반포하면서, 아예 ‘선교’라는 용어 대신에 ‘발전’이라는 용어로 바꾸었습니다.
“민족들의 발전 특히 기아와 빈곤, 질병과 무지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민족들, 인간의 자질을 더욱 적극적으로 향상시키고 좀더 문명의 혜택을 입기 바라는 민족들, 굳은 결의로써 완전한 발전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민족들의 발전에 관하여 교회는 깊은 관심을 가진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1항) 절대적 빈곤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이들을 돕고, 상대적 빈곤도 넘어서고자 하며, 사회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발전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을 선교라는 말 대신 복음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회사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 없이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시켜서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는 일이 선교요 복음화입니다. 선교와 복음화 활동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의 신앙도 살아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