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상님께서 요청하신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실제로 우리 모두가 다 고개를 끄떡일 만한 사랑과
평화를 준 분들의 list를 올립니다.
이슬람 쪽은 제가 잘 몰라서 우리나라 스님들 열분만 올리죠.
정재상님께서도 목사님들의 생몰연대와 일대기를 요약해서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열분들의 일대기와 행적을 찬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열분들의 삶과 수도의 방법은 모두 달랐지만 어떠한
행적을 남겼는지 곱씹어보세요.
참고로 아래 내용은 여러 사이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리고 게시판의 이글 아래에 있는 "[반론] 유골함이...."에 대해서
다른 과학적인 근거로 다시 저를 설득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
(머.... 하기 싫으면 안해두 됩니다.....)
참고로 저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그냥 붉은 십자가 네온만 봐도 넌덜머리가 나는 안티 기독입니다.
1.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 :
조선 중기의 고승이자 승군장(僧軍將).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 이에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 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惟政)은 금강산에서
1,000 여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은 문도1,500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 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다가,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때 선조는‘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원효는, 세속적인 체험을 승화시켜 수도승의 고행을 하면서 구국(救國)까지 한다.
원효는 도둑과 거지떼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여러 가지 수난을 겪지만, 마침내 그들을 모두
신라군에 편입시켜 황산벌 싸움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게 한다.
원효(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유학의 꿈을 품어 온 원효가 한 순간에 전회(轉回)하여
신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직 불교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 석학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다.
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그러나 교학연구나 관념적인 사상 속에만 머물러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소용돌이치는 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는 왕실·귀족불교도 인도해야 할 대상이었고,
더구나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정복지역의 유민들도 다같이 뜨겁게 안아야 할 이 땅의 가엾은
중생들이었다.
당시의 승려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지방의 촌락이며 시장거리며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를 지어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누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라 생각
했을 것인가 ?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그런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
그들은 가슴 절절히 와닿는 생기를 얻었으며, 염불을 따라부르며 정토에 때어날 희망을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가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채
小姓居士라 자처한 일은 분명 놀라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다.
3.효봉(曉峰)스님 (1888∼1966) :
현대의 고승.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밑 에서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901년 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 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10년 동안 법조계에 투신하여 서울과 함흥의 지방 법원,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에 직책상 한 피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었지만,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인다는 데 회의를 느껴
법관직을 팽개치고 전국방랑의 길에 올랐다.
엿판 하나를 들고 3년 동안 참회와 고행의 길을 걷다가 1925년 여름 금강산에 이르러 출가 수도인이 될
것을 결심하였다.
신계사(神溪寺) 보운암 (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을 찾아 간단한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뒤 머리를
깎고 5계(戒)를 받았다.
38세의 출가는 매우 늦은 나이였으므로 이때부터 깨달음을 위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좌선하였 으며,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하여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출가한 지 5년이 지났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1930년 늦은 봄 금강산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을 짓고,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밖에는 나오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토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 한끼만 먹으며 토굴 속에서 용맹정진하다가, 1931년 여름 도를 깨닫고 벽을 발로 차서 무너뜨리고
토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석두화상에게 오도송(悟道頌)을 지어올리자 석두화상은 오도를 인가하였다.
1932년 사월초파 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와 보살계(菩薩 戒)를 받았다.
그 뒤 1933년 여름 여여원(如如院)에서 수행하며 오후에는 불식(不食)하였고, 겨울에는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안거하였다.
이어서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전국의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였고,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 안착하여 1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확고한 구도관을 열어주었으며, 이때 대종사 (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46년 가을 가야산 해인사의 승려들이 해인사에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伽倻叢林)을 만들고 초대 방장(方丈)
으로 추대하자, 6·25사변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1956년 11월에는 세계불교도우의회 제4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동산(東山)·청담(靑潭)등과 함께 네팔에 갔다.
귀국한 직후 조계종의 의결기구 인 종회(宗會)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57년 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종무원장이
되어 정화불사에 골몰하였으며, 석우(石友) 종정(宗正)이 입적하자 새 종정에 추대되었다.
1962년 4월 11일 통합종단 초대종정에 추대되었다. 1966 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
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월 15일 오전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마지막까지 "무(無)라 무라."하였는 데, 이는 평생의 수행도구로 삼았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화두를 한시도
놓지 않았음을 뜻한다. 평소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고 제자들을 엄하게 가르쳤는데, 문하에서는 조계종의 수행승
들을 지도하는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4.혜암(慧庵)스님(1884∼1985) :
현대의 고승. 1896년 부친상을 당하자 이듬해 출가하여 양주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서 삭발하였다.
1900년 보암(保庵)을 은사로, 금운(錦雲)을 계사(戒師)로 하여 득도하였다.
이무렵 의탁할 곳이 없는 어머니를 절에 모시고 살다 1902년 어머니가 죽자 전국의 이름 있는 고승들을 찾아
다니며 수행하였고, 1908년 통도사 내원선원(內院禪院)에서 처음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가 참선수행을 시작하였다.
당시의 그는 "신령 의 힘으로 색신(色身)을 입고 벗기에 임의자재하는 신통력을 얻어야지, 법문을 들어서 무얼 할
것인가 ?"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내원선원의 조실(祖室) 성월선사(性月禪師)는 "선방의 밥은 썩은 밥이 아니다."하고 쫓아내었다.
세 번을 들어갔다가 쫓겨난 뒤 양산으로 가다가, 그동안 여러 고승들에게 지도를 받은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다시 돌아가 가르침을 청하자, 성월선사는 그의 편견과 아집을 지적하여 주었다.
이때부터 법문을 들으며 새로운 수행을 시작하였다.
1911년 해담화상(海曇和尙)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성월선사의 밑에서 선(禪)을 공부하였으나,
1913 년 성월선사로부터 화두(話頭)를 간택받았다.
그 뒤 만공(滿空)·혜월(慧 月)·용성선사(龍城禪師)를 차례로 모시고 6년 동안 용맹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오도송
(悟道頌)을 지었다.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내게 동정(動靜)을 여의고 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語默動靜句 箇中誰敢着 問我動靜離 卽破器相從)."
그 뒤 묘 향산 상원사(上院寺) 주지와 정선 정암사(淨巖寺) 주지를 역임하였고, 1929년 수덕사의 조실 만공선사로
부터 오도를 인가받고, "구름과 산을 다름없으나 또한 대가풍도 없다.
글자 없는 도장을 그대 혜암에게 주노라(雲山無同別 亦 無大家風 如是無文印 分付慧庵汝)."라는 전법게(傳法偈)를
받고 법통을 이어 받았다. 그 뒤 전국의 주요사찰을 순례하면서 보임(保任)을 하는 한편, 참선 수행자들을 지도
하다가,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되어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면서 3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고 중생을
제도하였다.
또, 1984년에는 100세의 나이로 미국 서부의 능인선원(能仁禪院) 봉불식(奉佛式)에 참여하여 우리나라의 선을
미국에 전파하고 귀국하였으며, 1984년말에 설립된 덕숭총림(德崇叢林) 제1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다.
마지막까지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즐기다가 1985년 삼월삼짇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세상을 떠나거든
이 육신을 간단히 화장하여 사방에 흩어버릴지언정, 결코 사리(舍利)를 수습하거나 부도(浮屠)를 세우지 말라.
만약 탑이나 부도를 세우면 나는 세세 생생 지옥고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이 101세,
법랍 89세로 입적하였다.
5.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 :
고려말의 고승.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뒤 가지산(迦智山)으로
가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 (話頭)를 혼자서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그뒤 불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하였으나, 불경의 연구가 수단일 뿐, 진정한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였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가을에는 성서 감로암(甘露庵)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7일 동안 정진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두 아이가 나타나서 더운 물을 권하였는데 받아서 마셨더니 감로수였으며, 그때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
1337년 가을에는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 하였다.
그뒤 송도의 전단원( 檀園)에서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으며, 1338년 1월 7일에
대오(大悟)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는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 중국 영가대사(永嘉大師)의 <증도가 (證道歌)>를 본떠서 유명한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1347년 7월에 호주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석옥(石屋)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고, 40여일 동안 석옥의 곁에서
임제선(臨濟禪)을 탐구하였다.
1348년에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保任)하였다.
이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짓기도 하였다. 1363년에 신돈(辛旽)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므로, 보우는 "나라가 다 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 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하여졌으므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 여름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는데, 이듬해 3월 왕이 이를 뉘우치고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우왕 7) 겨울에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부임하던 날에 우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였다.
<태고집(太古集)>에는 그의 사상과 경지를 알게 하는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이와
경지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공민왕이 불러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을 때는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고, 때의 페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선문구산(禪門九山)을 일문(一門) 으로 통합하여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으로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1382년 여름에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고는 곧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12월 17일에 언어와 동작이 기이해지더니, 23일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 : 군수)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하라."고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유시가 되자 단정히 앉아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니,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그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6.원광법사(圓光法師) (555∼638) :
신라의 고승.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경주 안강의 삼기산(三岐山)에 금곡사(金谷寺)를 창건하고
수도 하였다. 34세에 주술을 좋아하는 한 승려가 와서 가까운 곳에 암자를 짓고 2 년을 살았는데, 원광이
그 승려의 잘못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다가 화를 입어 죽었다.
이에 불교공부를 더 깊게 하여 사람들을 제도하겠다고 발심하고 589 년(진평왕 11)에 진(陳)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 중국의 금릉(金陵) 장엄사(莊 嚴寺)에 머무르면서 민공(閔公)의 제자로부터 강의를 들었으며, 그 뒤 여러
강석에 다니면서 <성실론(成實論)>·<열반경> 등을 공부한 뒤, 오(吳)나라 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서 선정에
힘을 기울였다.
남북조(南北朝)로 갈라져 있던 중국이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 된 후, 장안의 흥선사(興善寺)로 갔다.
그곳에서는 <섭대승론(攝大乘論)>에 대한 연구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섭론종(攝論宗)의
논서들을 연구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중국 불교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설법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귀국을 자주 청하였다.
600년에 조빙사(朝聘使)나 마제문(奈麻諸文)을 따라 귀국하여 유학 전에 머물렀던 삼기산에 머무르면서 임금과
신하들의 두터운 존경을 받으며 대승경전을 강의하였다.
그 뒤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렀는데, 이때 귀산(貴山)과 추항이 찾아와서 종신토록 지닐 계명(誡銘)을 구하자
당부한 것이 세속오계였다.
세속오계는 뒤에 화랑의 실천덕목이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데 정신적인 큰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특히, 살생은 불교이념에 위배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고구려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고 백제와 항쟁을 계속하던
신라사회로서는 필요불가결한 행동윤리가 요청되었으며, 이에 따른 그의 현실주의적 불교관의 일단면을 나타내는
것이 되고 있다.
613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皇龍寺)에서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법회가 개최
되었는데, 이때 최상석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왕이 병이들어 의약으로 고칠 수 없을 때에는 법을 설하고 계를 주어 참회하게 함으로써 병을 치유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수계(授戒) 참회의 법으로써 깨우치고자 가서사(嘉栖寺)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정기적 으로 베풀 기금(寶)을 마련하였다.
원광의 역사적 위치는 시대를 배경하여 살펴볼 때 크게 3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그는 신라의 승려로서 대승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신라에서 강의한 최초의 학승이었다.
저술로서 <여래장경사기 (如來藏經私記)> 3권과 <여래장경소(如來藏經疏)> 1권 등이 있 었다는 것으로 보아
여래장 사상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 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래장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다.
둘째, 불교의 토착화에 크게 노력하였다. 재앙을 쫓고 병을 고치는 주술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당시의 주술을 불교의 수계와 멸참(滅懺)의 법으로 대치 시킴으로써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였다.
가서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고, 임금의 병을 수계·멸참으로 치료한 것 등이 그 일례이다.
셋째,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깊은 소양을 쌓아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귀산·추항 두 사람에게 세속오계를 주고, 진평왕의 명을 받아 <걸사표>를 쓴 것 등이 그 러한 면을 입증하고
있다.
7.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 :
조선 중기의 고승.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 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 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 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 (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8.만해(卍海)스님 (1879∼1944) :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대원군의 집정, 외세의 침략, 등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그 자신의 술회대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게 하였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27세 때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 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36세 때 <불교대전(佛敎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內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40세 되던 해에 월간 <유심(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
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유심>지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으나, 불교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잡지였다.
41세 때 3·1독립운동이 있었는데,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47세 때 인 1926년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2세 때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그의 불교사상은 (1)불교행정조직혁신론, (2)사원운영의 혁신론, (3)청년불교의 제창, (4)선교(禪敎)진흥론,
(5)경전의 한역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주장은 50여년 후인 오늘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다.
종단행정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곧 총무원으로 나타났고, 승려자질 향상은 오늘날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국역(國譯)의 중요성 강조는 숱한 불교성전의 편찬과 함께, 역경 원(譯經院) 등의 발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과격한 부분이 없지않아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결심으로 이 '불교유신'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무질서한 불교교단의 통제를 주장하였고, 이른바 불교현대화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실천적 불교정신의 응결이 바로 청년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비록 다음의 혁신적 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위대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 불교인의 일반적 자세를 탈피하여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도 특기할만한 점이다.
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히려 1960년대 이후부터 빛을 발하여 현대불교의 이론적 근거로서, 또 실천윤리의 강령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예언자적 가치를 부여받기에 충분한 불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입적하였다.
9.경봉(鏡峰)스님 (1892∼1982) :
현대의 고승. 7세 대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1907년
6월에 출가하여 양산 통도사 성해(聖海)의 제자가 되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를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국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하루는 불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 他寶 自無半錢分)."라는
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 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
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 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 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철야로 불사하고 정진하던 중,
4일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 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話頭)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의 원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 화의 선구적 소임을
하였다. 1935년 9월에는 통도사주지, 1941년 3월에는 서울 안국동에 있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국원
(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 院) 이사장, 1949년 4월에는 다시 통도사주지를 역임하면서,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하여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1953년 11월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
(逍遙自在)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侍者)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회마다 1,000여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가람수호(伽藍守護)에도 힘을 기울여 통도사의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와 장엄석등(莊嚴石燈) 18좌(座)를
세웠고, 극락암 조사당의 탱화조성 및 추모봉행, 특별 정진처인 아란야(阿蘭惹)의 창건, 극락암 정법보각
(正法寶閣) 신축 및 무량수각(無 量壽閣)의 중창 등을 주관하였다.
이밖에도 경봉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파고다 공원 안에 만해선사기념비 건립도 추진하였다.
또 18세 때부터 85세까지 67년 동안 매일의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는데, 이 일지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 최근세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1982년 7월 17일에 미질을 보인 뒤 문도들을 모아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라 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10.성철(性徹) 큰스님(1912∼1993) :
현대의 고승. 아명은 영주(英柱)라 하였다.
스님의 집안은 대대로 부농이었다. 비록 일제가 이 땅을 강점한 이후라 시절인연이 암울 했다고는 하지만 스님은
어린 시절을 비교적 유족하게 보낼 수 있었으며, 장남으로서 부모님은 물론이요 집안의 기대와 귀염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났다.
게다가 스님은 천성이 명민하고 상호가 수특(秀特)하여 더욱 총애를 받으셨다. 3세에 글자를 알고 읽기 시작했고,
5세에는 김시습처럼 글을 짓고 시를 지을 만큼 자질이 뛰어났으며, 이미 열살 무렵에 사서삼경 등 유서를 읽고
모든 경서를 독파하였으니 인근에서는 신동이 났다 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는가 하면 더 가르칠 선생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청소년기에 이르자 그 명민한 두뇌는 더 이상 고리타분하고 낡은 세계에 머물지 않고 좀 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당시 물밀 듯이 들어오던 신학문과 철학과 종교 등 여러 학문에 대해 지나치리만 큼 열정을 가지고 독서와
관심을 쏟았으나 그 모두가 참다운 진리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을 자각하고 그중 「장자」를 읽고 소요유(逍遙遊)
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지나가던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대사의 「증도가(證道歌)」를 받아 읽고 이제까지 찾아
헤매던 구도의 길이 거기에 있음을 발견하니, 홀연히 심안이 밝아짐을 느껴 거듭 읽고 그 깊은 뜻을 밝히게 되었다.
그 한권의 책이 불교의 전적을 대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후 스님은 책만 읽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참 구도의 길은 수행정진에 있음을 알고 거사(居士)의 몸으로 양식을
짊어지고 덕산 대원사 탑전에 들어가 불철주야 용맹정진을 하였고, 그후 제방선원에서 안거하는 등 그 수도 정진의
구도열이 이미 승려 이상의 진척을 보였다.
이에 주위의 많은 스님들이 출가를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스스로 출가를 결심하고 모든 세속적인 인연을 끊고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하동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해인사에서 수계득도하였다.
이로부터 10년간 천하제방(諸方)선원에 안거하면서 용맹정진을 단행하였는데, 음식은 언제나 생식(生食)과 현미밥과
담식(淡食)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의복은 24세에 만든 누더기를 일생 깁고 또 기워 입으셨다.
금강산의 마하연선원, 수덕사의 정혜선원, 천성산의 내원선원, 통도사 백련선원 등 모든 선원에서 안거를 할 때마다
스님의 철저한 정진력에 누구나 감복하였고, 그밖에 고성 안정 토굴의 정진이나 파계사 성전암에서의 용맹정진은
승가 내에서 그 본보기가 되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끊기 위해 토굴 주위에 가시철망을 쳤던 이야기며, 신도들이나 친지가 찾아와 수행을 방해할까봐
사람들이 오는 길목 쪽으로 돌을 굴렸다는 극단적인 이야기 등에서 스님의 수행 정진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부단한 수행중, 29세가 되던 해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정진을 하던 때 오도를 하였다.
그 후에도 스님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행자의 삶 그대로 견지하셨다. 스님의 삶의 태도는 너무나
엄격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나이 일흔이 되실 때 까지도 손수 양말을 기워 신었으며 한 겨울이라도 땔감의 양을 결코 지나치게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으셨다.
평생을 바루 하나 옷 한벌의 전형적인 수도자의 삶을 보이셨다.
이러한 삶은 이미 봉암사 시절의 공주규약(共住規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조선시대의 억불정책과 일본 불교의
영향 아래 허물어진 한국 불교의 전통과 수행 가풍에 지대한 영향을 훗날 교단 정화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현대 불교사에서 스님처럼 많은 책을 읽은 조계종 승려는 아마 없을 것이라고 일전에 법정 스님이 회고하신
적이있다.
지금도 백련암에 현존하는 스님의 개인 장서각에는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은 물론 영어, 불어,
독일어로 쓰인 수 많은 불교 서적과 종교, 철학, 물리학, 심리학 등 방대한 양의 서적이 수집되어 있으니,
스님은 이 동서양의 고전과 방대한 자료를 오로지 독학으로 공부한 학승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특히 불교 내에서도 어렵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중도(中道)사상이나 유식(唯識)사상 등 소위 불교권의 논리학이나
인식론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은 물론이요, 이미 발간된「선림고 경총서(禪林古鏡叢書)」의 목록에 오르내리는
방대한 양의 선어록과 전적에도 이미 달통해 있었다.
그 방대하고 체계적인 논리와 사고 위에,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보통 사람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의
정진력,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항상 청중을 압도하는 설법, 그리고 법왕다운 면모와 집념, 청정한
율행(律行), 그야말로 스님은 이 시대의 부처님이요 성자와 다름없는 면모를 지니셨던 것이다.
스님의 생애 가운데 1940년대와 50년대, 60년대는 각각 봉암사 시절, 안정 토굴시절, 파계사 성전암 시절, 김룡사
시절로 구분지어 이야기되는데, 그때 이미 이런 이론적 바탕, 수행적 바탕의 일가를 이루고 계셨던 것이다.
스님은 일생을 통하여 수도 정진만 했지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이른바 절집의 사판(事判) 으로 나서본 적은 한번도
없다. 승려의 삶이란 철저한 수행 정진과 교화에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스님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스님은 1955년 정화(淨化)직후 해인사 주지직에 피선되었지만 주지직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파계사 성전암으로
들어가 더욱 수도정진에만 전념했다.
조계종단의 종정이 되고도 그 추대식에 참석하지 않거나 국정자문회의 자리에 한번도 나가지 않았던 사례를
통하여 그 위상에 넘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고 수행자는 다만 푸른 청산에 머물 뿐이라는 올곧은 생각으로
일관하신 스님의 삶을 알 수 있다.
자리를 다투는 조계종의 젯밥 싸움에 여론이 비등하던 풍토에 청산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은 스님의 자세,
그 의미는 실로 수도자의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준엄한 법문이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세수 54세이던 김룡사 시절부터 스님의 진면목인 법어와 교화의 모습을 점차 보이셨으니, 해인사
방장으로 시작되는 그 뒤의 시기는 스님에게는 중생 교화의 시기라고 한마 디로 말할 수 있겠다.
스님의 교화 방편은 특이해서 철저한 참선 수행과 삼천배로 일컬어지는 참회 정진, 화엄 경의 정화(精華)인
「보현행원품」에 들어있는 보현행자의 삶을 신도 교화의 중심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한동한 백련암에 가면 그 외우기 어려운 능엄신주다라니 소리가 언제나 도량에 찰랑찰랑 넘쳤다.
방장으로 오신 스님께서는 선원 수좌들에게 철저한 수도 정신과 용맹정진, 그리고 오계의 실천, 즉 잠을 많이
자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말을 하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을 강조하셨다.
큰스님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노구에도 불구하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점심 공양 이 후 한참 졸리는
시간이면 큰 장군 죽비를 들고 백련암에서 퇴설당까지 한걸음에 내려오셔서 禪房門을 확 열어젖히시고는 졸고
있는 禪僧들의 등줄기를 사정없이 내리치면서 "이 도둑 놈아, 밥값 내놓아라"는 벽력같은 고함소리를 쳐서
혼침과 산란을 제거해 주셨다.
스님은 승속간을 불문하고 3천배를 해야만 접견을 허락했고, 한국 불교 최고의 지 도자인 종정이면서도 단
한번도 공식행사에 얼굴을 내민 일이 없었다.
"山僧이 山을 떠날 수 없다"는게 이유의 전부였다. 그리고 3천배를 하고 스님을 만나뵈려는 신도와 승려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3천배를 하라는 것은 남을 위해서 절을 하라는 거야. 세상만물이 다 부처님이요, 세상만 사가 다 불공이니
굳이 나를 찾아올 거 없어."
대통령도 ,장관도, 돈많은 재벌도, 3천배의 절벽에 막혀 만나볼 수 없었던 性徹스님.
그러나 스님은 어린아이들을 어찌나 좋아하셨던지 백련암 마당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리면 스스로 방문을
열고 나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불교계의 신문 잡지사 기자가 뵙기를 요청하면 "내 사진이 실리면 책이 잘 팔린다고 카데. 내가 차비 줄테니
사진이나 몇장 찍어가지고 올라가그라이."하면서 돌아섰던 스님, 性徹 스님.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술집에서 웃음 파는 거룩한 부처님들, 넓고 넓은 들판에서 흙을 파는
부처님들, 우람한 공장에서 땀 흘리는 부처님들, 자욱한 먼지 속을 오고 가는 부처님들, 고요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안에서 예배하는 기독교인들까지도 부처님으로 보고, 존경하며 사랑했던 스님이셨다.
1993년 9월에 당신의 저서인 '성철스님 법어집'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나서 두 달만인 그 해 11월 4일 아침에 성철 큰 스님은 열반 하였다.
그날 새벽,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 스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참선 잘하라 !" 그 한 말씀이 마지막이었다.
그러고는 제자 어깨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처음 출가한 그 방에서 마지막 열반에 드니, 행운유수(行雲遊水)의 사문의 길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법랍 59년, 세수 82세로 큰 스님은 열반 게송을 남기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첫댓글 파라솔님....느끼면 개독입니까? 이거 읽고 먼가 티끌만큼이라도 느끼면 이미 안티입니다............포기하세요 ㅡㅡ;
{ 잘 읽어 보았습니다, 제 이름은 정중재가 아니고 이중재 입니다, 제가 올렸던글14297번을 다시 읽어 보시면 좋을듯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