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nNewsNumb=20140214233&nidx=7326
하급 사무라이가 주도한 근대국가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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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무라이 반란군이 정부군이 지키는 구마모토城을 포격하고 있다.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명치유신)은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겨냥한 근대일본의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이며 「軍國日本」의 출발점이었다. 그것의 성공에 의해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서양의 제국주의 침략 방식을 그대로 학습했다. 따라서 日帝로부터 국권을 강탈당했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메이지 유신은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오늘의 일본 또한 이해할 수 없다.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은 사쓰마藩(번)과 조슈藩의 사무라이(武士)들이었다. 藩이라면 도쿠가와 막부(幕府)체제下의 지방정권이었다. 일본에는 그런 藩이 260여 개나 있었다. 藩의 규모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의 군(郡)보다 약간 컸다.
사쓰마藩은 규슈(九州)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일대를 영지로 삼은 藩이었고, 조슈藩은 혼슈(本州)의 서쪽 끝 시모노세키(下關) 일대(지금의 야마구치縣)를 영지로 삼은 藩이었다. 그러니까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藩이 메이지 유신의 진원지였다. 더구나 메이지 유신을 推動(추동)한 핵심세력은 藩主(번주)나 상급무사가 아니라 사쓰마藩과 조슈藩의 하급무사들이었다.
이런 하급무사 출신 중에서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유신3걸(維新3傑)」로 회자된다. 西鄕과 大久保는 사쓰마藩 출신이고, 木戶는 조슈藩 출신이다.
변두리 藩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출생성분이 열악한 그들이 일본 역사상 가장 빛나는 국가발전의 역할을 감당한 셈이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2004년 5월, 필자는 메이지 유신의 진원지를 취재하기 위해 4박5일간, 후쿠오카 국제공항에 내려 구마모토-가고시마-미야자키 코스를 거치는 규슈 종단 답사에 나섰다.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을 강국으로 만든 메이지 유신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역사의 요행이 아니라 교육의 힘이었다―이것이 이번 답사를 통해 필자가 느낀 솔직한 소감이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성장한 마을 가고시마는 일본 근대사의 주역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西가고시마 역 앞 대로를 지나면 곧 甲突川(갑돌천: 코츠키가와)을 만난다.
그 위에 걸린 高見橋를 건너면 왼쪽의 녹지공원 안에 오쿠보 도시미치의 동상이 있다. 그 남쪽 마을이 메이지 유신의 에너지기를 키워 낸 하급 사무라이 주거지인 가지야마치(加治屋町)이다. JR 西가고시마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다.
서쪽으로 甲突川을 끼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이, 유신의 최고 원훈이며 일본 무사를 대표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그의 동생 츠쿠미치(從道: 메이지 시대 9人 元老 중 1人), 유신3걸의 1人으로 손꼽히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태어나 자란 곳이다.
바로 이웃엔 러일전쟁 때 만주군 총사령관(元帥)으로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크로파트긴의 대군을 격파한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동해해전(東海海戰)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킨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등의 탄생지가 200∼300m 안팎의 거리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이고 형제와 오쿠보의 생가를 휘감아도는 甲突川 에는 高麗橋라는 다리가 걸려 있다. 그 위론 1994년에 개관한 「維新후루사토(고향)館」이 있다. 이곳의 지하층 「유신체감홀」에서는 첨단 하이테크 기기를 사용하여 유신 드라마를 재현하고 있다. 사이고·오쿠보 등을 형상화한 로봇이 등장하여 약 20분에 걸쳐 메이지 유신의 배경과 목표를 설명한다.
가지야町 동쪽 대로를 1km쯤 따라 내려가면 사쓰마번 시절 상급 사무라이 거주지인 천문관(天文館)거리인데, 현재 가고시마 제1의 번화가이다. 천문관거리에서 좌회전해 5분쯤 달리면 縣立박물관이 있고, 그 동쪽 시립미술관 일각에 성산(城山)을 배경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성산이라면 서남(西南)전쟁 최후의 전쟁터로 사이고가 자결한 곳이다. 가고시마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숨결로 가득 채워진 느낌을 주었다. 下龍尾町에는 西鄕南洲(남주는 사이고의 아호)공원까지 조성되어 있다.
西勢東漸(서세동점)의 물결 속에서 한·중·일의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왜 유독 일본만 자기 나라를 발전시켜 열강의 반열에 진입할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사쓰마번 특유의 교육의 힘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메이지 유신 주역들의 성장과정을 역추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사쓰마 특유의 사무라이 교육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7년 12월, 西鄕九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九郞이 藩으로부터 받은 녹미(祿米)는 겨우 47石. 4남3녀를 양육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남자 아이들은 겨울에도 이불 하나를 서로 끌어당기며 잠을 잤다고 한다.
오쿠보의 아버지는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무사가 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사쓰마의 제9대 藩主 시마즈 나리오키를 이을 가독(家督)다툼에서 나리아키라(長男: 正妻 소생)파였기 때문에 나리오키의 애첩 「오유라(お由羅)의 소동」 때 원도(遠島)유배 처분을 받았다. 오유라는 그녀의 소생인 히사미쓰를 차기 藩主로 세우려고 나리오키에게 베개송사를 했는데, 그로 인해 나리아키라 파에 대한 피의 숙청이 벌어졌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던 만큼 오쿠보의 가정형편도 사이고와 마찬가지로 유복할 수 없었다. 어떻든 오쿠보 도시미치는 어릴 적부터 이웃에 사는 세 살 연상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가까이 지냈다.
사쓰마번에서는 문무겸전을 모토로 삼는 전인교육을 하급무사 자제들에 대해서도 시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쓰마藩 특유의 향중교육었다. 城下는 30개 정도의 향(鄕)이란 행정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사이고 등은 下加治屋町의 행중(鄕中)에 속해 있었다.
향중은 연령에 따라 二才(청년)조와 稚兒組(치아조)의 두 개로 나눠졌는데, 치아조에는 또 長치아조(11~13세)와 小치아조(7~10세)가 있었다. 치아는 매일, 稚兒頭의 命에 의해 스모(씨름)·旗뺏기·大將지키기 등의 경기 및 전쟁놀이를 하여 심신을 단련했고, 長치아 및 二才는 가무와 논어(論語)·대학(大學) 등을 배웠다.
二才組는 오전 중에 藩校인 조사관(造士館)에서 한학과 습자를 배우고, 오후에는 무예를 익힌다든지, 長치아들의 지도를 맡는다든지 했다. 밤에는 윤번으로 군서(軍書)를 읽는다든지 담력을 시험한다든지 향중교육의 기본목표를 담은 「(격무조목)格式條目」을 낭독하든지 했다. 사쓰마번 특유의 사무라이 교육이었다.
그러면 사이고는 어떤 교육과정을 거친 것일까. 그는 小치아 때부터 한학을 배우고 長치아가 되면서 造士館에서 양명학 등 여러학문을 배웠다. 15세 때 번주의 눈에 띄어 元服(원복: 성인이 되는 의식)을 마치고 二才組에 들어갔고 藩의 근무자로 뽑혔다. 18세에 사이고는 郡方書役助가 되었다.
오쿠보의 경우는 14세부터 記錄所役助가 되었다. 근무라 해도 비상근이었기 때문에 향중교육에 열중할 수 있었다. 사이고는 21세 때 下加治屋町 鄕中의 鄕中頭에 올랐고, 곧 藩主 나리아키라의 中小姓(보좌역)이 되어 막부 소재지 에도(江戶)에 파견 근무함으로써 출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규슈는 「일본의 어미땅」이다. 이번 답사에서 필자는 규슈 중앙부의 아소산(阿蘇山)을 빠져나와 일본의 유명 온천지의 하나인 기리시마(霧島)로 향하던 중 祖母山 남쪽에 위치한 「천손강림성지(天孫降臨城地)」 앞을 지났다. 일본신화에서는 일본인의 시조인 니니기가 비단이불에 싸여 하늘에서 이곳 「쿠지후루」(龜旨峰)로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다. 니니기의 설화는 駕洛國(가락국: 지금의 金海)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탄강설화와 똑같다.
사쓰마·조슈藩과 우리의 악연 일본 민족은 크게 보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과 남방계통 폴리네시안으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도래인이 먼저 정착한 곳은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일 수밖에 없다. 가락국(駕洛國)은 고대의 일류 해운국이자 무역국이었다. 왜나라 왕가의 발생지도 규슈였다. 이것은 가락국과 왜 왕가 사이의 혈연적 관계를 말해 주는 흔적이다.
또한 가고시마縣과 미야자키縣의 접경지대에 「한국악(韓國岳)」이라는 높이 1700m의 준봉이 있는데, 일본어 발음으로 「가라쿠니다케」라고 불린다. 가락국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향수에 젖어 이 봉우리에 올라가 멀리 가락국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기에 이렇게 명명된 것이 아닐까.
어떻든 규슈에는 한반도와 관련한 지명이 많다. 예컨대 규슈 서남부 미야자키(宮崎)현 소재 南鄕村에는 「백제리(百濟里)」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義慈王)의 왕자가 정착한 곳이라고 전해진다(별항 기사 참조).
고대의 관계사 부분은 일단 생략하고 여기서는 근세 이후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우리 역사에선 어떤 존재인지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묘하게도 두 藩이 모두 우리와는 깊은 악연이 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사쓰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제4군(병력 1만5000명) 대장, 조슈 번주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제7군(병력 3만명) 대장이었다. 특히 시마즈는 1598년 10월1일 사천왜성(泗川倭城) 전투에서 明의 중로군 대장 董一元(동일원)이 이끄는 조명연합군 3만6000명을 전멸시켜 그 武名을 明나라 궁정에까지 크게 떨쳤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598년 8월 침략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이때 倭의 제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순천의 왜교성에서 농성하며 탈출을 기도했지만, 李舜臣 장군에 의해 퇴로를 봉쇄당하고 있었다. 고니시는 사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에게 화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시마즈는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500척의 대함대를 거느리고 순천 방면으로 출진했다. 시마즈 함대가 서진해 오자 이순신 장군은 지금의 남해대교 해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했는데, 이것이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露粱海戰.1598년 11월29일)이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왜적의 유탄을 가슴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는 이순신 함대와 시마즈 함대가 격돌하는 틈에 탈출로를 얻어 도주했다.
히데요시의 사후, 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도요토미 정권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출전하지 않음으로써 실력을 비축할 수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고 에도(江戶: 지금의 東京)에 막부를 세웠다(1603). 도쿠가와 막부는 그 후 260여 년 동안 일본 열도를 지배하게 된다. 도쿠가와 정권을 성립시킨 결전이 1600년 9월15일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였다.
세키가하라 패전 후 260년간 복수전 노려 세키가하라 전투는 동군 12만 명과 서군 8만 명이 충돌한 일본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의 대다수는 反도쿠가와 연합군인 서군(8만 명)에 가담했다.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壬亂 당시 제8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壬亂 당시 제1군 대장),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시마즈 요시히로와 모리 테루모토 등이 그들이다.
동군의 총대장은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壬亂 당시 제2군 대장)는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이었지만, 서군의 핵심세력인 이시다(石田)와 고니시를 유별나게 미워했던 나머지 동군에 가담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서군의 일익을 담당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배신하여 갑자기 서군을 공격함으로써 동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히데요시의 정부인인 北政所의 조카여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불과 16세의 나이로 원정군의 총대장이 되었지만,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수준 이하였다.
포로가 된 미쓰나리와 고니시는 참수를 당했다. 우키다는 항복을 했지만 외딴 섬에서 무려 50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사망했다. 모리 테루모토는 영지의 대폭 삭감에 의해 石高가 120만 석에서 36만9000석으로 깎였다. 그러나 시마즈의 사쓰마번만은 石高의 변동 없이 건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동원한 병력은 1500명에 불과했지만, 서군의 총붕괴에도 불구하고 매우 선전했다. 전후 사쓰마번의 건재는 「적이지만 잘 싸웠다」는 평판에 힘입은 바 컸다. 그러면 시마즈 군은 도대체 어떻게 싸웠던 것일까.
시마즈 군은 전면 井伊直政·松平忠吉의 군과 맞섰지만 전투가 개시되자 고바야카와의 배반에 의해 좌우에 있던 오다니 요시츠쿠(大谷吉繼)·우키다 히데이에의 양진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이시다 군도 패퇴, 3면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전투는 참담한 난전과 격투의 양상이었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 난투를 벌이던 시마즈 군도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참으로 대담하게 이에야스의 본진이 설치된 동군의 중앙부를 기습적으로 돌파, 伊勢路를 통해 탈출했다. 이때 「시마즈의 적중돌파」는 일본의 전사에서 유명하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한 병사 수명이 복병으로 남아 화승총을 발사, 다가오는 적병의 추격을 막는 사이에 본군이 퇴각하고, 그 복병이 전멸하면 또 수명이 후방으로 뛰어나가 捨石(사석)이 되는 그야말로 처절한 퇴각전술이었다.
오후 4시, 이에야스가 전투 중지의 명령을 내림으로써 동군의 추격은 끝났다. 요시히로는 이틀 후인 17일 밤에야 겨우 서군의 본거지 오사카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요시히로를 따랐던 병사는 고작 80명으로 생존율 5.3%였다. 일행은 오사카로부터 해로로 사쓰마로 돌아왔다.
이로써 사쓰마번의 시마즈家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敗者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에야스는 시마즈家의 石高 65만 석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것은 사쓰마번의 실력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동원한 사쓰마軍은 1500명에 불과했음은 앞에서 지적했다. 패전 당시 요시히로의 형 요시히사(義久)와 요시히로의 아들 이에히사(家久)가 본국에 남아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에야스로서도 3만여 명의 정병을 보유한 사쓰마번을 가볍게 처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쓰마藩의 경제력 기반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9년 후인 1609년 2월 시마즈 이에히사는 막부의 명령에 의해 오키나와(琉球)에 출병, 5월에는 오키나와王을 사로잡았다. 그해 7월, 막부는 오키나와를 시마즈家의 소관으로 결정했다. 이로써 사쓰마번의 石高는 77만 석으로 늘어나 전국 260개 藩 가운데 랭킹 3위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도시대가 안정기에 들어감에 따라 무사계급은 점차 생활에 쪼들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이야말로 사무라이의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으면 사무라이들은 공을 세울 기회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사무라이들의 祿高(녹고: 봉급)는 여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활수준은 갈수록 높아지는데다 물가도 올랐던 만큼 무사계급의 궁핍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쓰마번도 점차로 藩의 재정이 어려워져 10代 번주 나리오키(齊興)가 통치하던 1820년대 말에는 누적적자가 500만 량에 달해 파산위기에 봉착했다. 그때 나리오키의 조부 시게히데(重濠)가 즈쇼 히로사토(調所廣鄕)란 유능한 측근을 기용, 재정개혁을 단행했다.
즈쇼는 오키나와 특산인 흑사탕의 전매와 부채의 250년 분할상환 등의 정책을 강행, 만년 적자체질을 흑자체질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 10년 후 사쓰마번은 거금 100만 량을 비축하게 되었다. 바로 이 재력이 幕末에 사쓰마藩이 강력해질 수 있었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개혁의 공로자 즈쇼는 1848년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는 사쓰마번을 일본 제1의 풍요한 藩으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와 밀무역을 감행했다. 당시 막부는 藩의 해외무역을 엄격히 통제하는 쇄국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사쓰마번에 대한 막부의 추궁이 들어오자 즈쇼는 혼자 모든 책임을 떠안고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계속)
첫댓글 이런과거모르고 바람의검심 멋있다고 , 은혼 재밋다고 본 나를 반성합니다
신선조니 뭐니 그냥 사무라이 낭인들.
민비 시해한 무리들이죠.
한나라의 왕후를 윤간하고 칼로 난자한 뒤 불태운 쓰레기들.
그래서 문화세뇌가 무서운거죠.
기실은 145cm 정도밖애 안되는 숏다리들.
삿조동맹...
야조가사..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저길 지금 젤 먹여살리고 잇는 한국 관광객 ㅡㅡ
바람의 검심 켄신이 막부말에 사이고 다카모리 밑에서 암살자 역할함
그땐 사이고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는데 이제 보니 개색히네
삿쵸동맹...사이코..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