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토법문 속에는 본래부터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사람들에게 염불하여 극락왕생을 구하라는 법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법문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홍원사에서 인쇄한 소책자 한권이 있는데, 제목이 『순수한 정토법문』입니다. 우리는 선도대사의 정토사상을 선양하면서 선도대사의 사상이 순수한 정토법문임을 강조합니다. (혜정)상인께서도 수·당시대의 정토는 순수한 것이고, 송나라·원나라·명나라 이후의 정토는 순수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정토법문은 모두 사람들에게 염불하라고 가르치는 것인데, 무슨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이 있단 말인가?” 이러한 인식도 나름대로 도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기준과 무슨 상황인가를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는 모두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기를 “핸드폰이야 모두 남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거는 것인데, 무슨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이 있겠는가?”라고 한다면 그렇습니다. 만약에 모두 각자의 간판을 내걸고 있고, 또 사람들이 당신의 가격 대비 성능을 안다면, 당연히 이른바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위조품이 나와서 “내 것도 i폰이다”는 간판을 내건다면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겠지요. 그럼 당신은 정품과 짝퉁이 없다고 말할 건가요?
이론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상품에도 이른바 정품과 짝퉁은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짝퉁이 나타났는지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로, 누군가 위조품을 만든다면 반드시 정품과 짝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 누가 그것을 지키고 보호하겠습니까? 틀림없이 정품을 만드는 제조업자일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내 것이 정품이다.”라고 말할 겁니다. 누가 이 경계를 모호하게 할까요? 바로 그 짝퉁인 모조제품이겠지요. 마찬가지로 만약에 정토법문에 대해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기준을 모른다면, 방금 말한 것처럼 “무슨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이 있겠어? 전부 사람들에게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가르치는 거잖아!”라는 말을 하게 되겠지요. 방금 든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물질계의 제품이 그러하듯이 정신계의 법문수행 역시 마찬가지로 반드시 바름과 바르지 않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 불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불교에 빌붙은 외도(附佛外道)들은 “나도 불교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만약에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교라든가 도교라든가 또는 무엇이라고 말한다면 바르니 바르지 않니 하며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런데 그들은 “나도 불교다”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그들이 불법의 일부 개념들을 가져다 사용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순수하지가 않을뿐더러 심지어 견해조차도 정확하지가 않겠지요.
정토법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을 말하는 데는 한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염불하여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가르친다.” 물론 우리 모두 이 기준에 부합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순수함을 말한다면 다릅니다. 예를 들어 모두 사람들에게 염불을 가르친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은 실상염불을 가르치고 어떤 사람은 관상염불을 가르치며, 또 어떤 사람은 무상염불無相念佛 등등을 가르칩니다. 이런 것들은 정토법문에서 말하는 염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럼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난행도에 속하는 것으로 정토법문에서 말하는 염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토법문에서 말하는 염불이란 바로 아미타불의 본원에서 설정한 칭명염불입니다. 따라서 정토법문에서 말하는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은 “본원인 칭명으로 범부가 보토에 들어감(本願稱名,凡夫入報)”이란 이 두 구절 여덟 자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어서 여기에 부합하면 순수한 것이고, 부합하지 않으면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다시 칭명을 말해 보겠습니다. 칭명은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선도대사께서 해석하신 “중생이 칭념하면 반드시 왕생함”“정정의 업”입니다. 어떤 사람은 칭명에 대해 “만약에 사일심불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청정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공부가 순일하지 못한다면, 지계가 청정하지 못한다면, 지혜를 개발하지 못한다면, 견혹·사혹을 끊지 못한다면……왕생할 수 없다.”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견해와 인식은 아주 명백하게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그런 요구가 없으시기에, 그것은 개인의 견해와 인식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떠한 국토에 왕생하느냐를 두고 예를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천태종에서는 “범부는 다만 범성동거토에 왕생할 수 있을 뿐이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만 화토에 왕생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모두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범부가 보토에 들어감”은 왕생한 국토가 보토의 경계라는 것입니다. 범부가 어떻게 보토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부처님의 원력에 올라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므로, 아미타불께서 인지因地에서 세운 서원에 부합하고, 부처님의 본원에 수순하여 해석하며, 개인의 생각을 섞지 않았다면, 그것이 바로 순수한 것입니다. 각종각파의 관념들을 더하고 자력수행인 난행도의 내용을 더한다면 아주 명백히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부단히 제련하다보면, 오직 “본원인 칭명으로 범부가 보토에 들어감”만이 순수한 정토법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순수함과 순수하지 않음이 없다면 묻겠습니다. 애초에 선도대사님께서 무엇 때문에 “관경소”를 지어 고금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셨습니까? 고금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곧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정토법문에 대한 인식에 오류와 순수하지 않음·뒤섞임이 있었기에 때문에 비로소 잘못된 점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설마 그 사람들이 모두 극락왕생을 제창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분들은 모두 극락왕생을 제창하고 또 모두 염불을 제창하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염불은 본원칭명이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극락은 삼부경에서 말하는 순수한 보토가 아니었습니다.
선도대사님에게는 정행과 잡행에 대한 분판(分判:분별하여 판석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점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이 정행과 조행을 제외한 나머지 선들은 모두 잡행이라 부른다.”“비록 회향하여 왕생할 수는 있으나, 전부 소원하고 잡다한 행이라 부른다.” 잡행은 비록 회향하여 왕생할 수는 있으나 아미타불과 소원하고 잡다한 것인데, 잡다하다는 것은 순수하지가 않다는 것이지요. 염불의 다섯 가지 정행은 정정의 업이므로 당연히 순수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들었을 때, 지혜가 있어야 하고, 냉정하게 사유하고 분별할 줄 알아야지 어리둥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강조하고 견지하는 이유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게 아니라, 순수한 정토법문을 선양하지 못한다면 중생들이 해탈하는데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올곧은 큰 길을 분명하게 가리켜 주지 않아서, 사람들이 옆에 있는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걸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면, 그 길을 아는 사람으로서 가이드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는 걸 느끼지 않겠습니까?
서방극락세계에 가는데 있어서 “본원인 칭명으로 범부가 보토에 들어감”은 하나의 더 넓은 큰 길이고 아주 순수한 정토법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여러 종파의 관념들로 뒤섞이다 보니 순수하지 않게 변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특별히 그것을 두드러지게 드러낼 필요가 있으니, 이는 중생들의 해탈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매우 감은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