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왜 보라색 꽃이 많은가
심후섭 지음
붉게 물든 나뭇잎이 아름다운 지난 추석 때의 일입니다. 웅이네 식구들은 산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뒷산 할아버지 산소로 성묘를 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서너 구비 산모롱이를 돌았을 때였습니다. “어머, 저기 도라지꽃 좀 봐!” 작은어머니가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 참 곱기도 해라.” 사촌여동생 현진이도 감탄하였습니다. 도라지꽃은 바위틈에서 조용히 가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살짝 내린 가을비가 온 세상을 깨끗이 씻어 하늘은 매우 맑았습니다. 하늘이 맑아서인지 도라지꽃은 더욱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살랑살랑 춤을 추곤 하였습니다. 도라지꽃 옆에는 또 다른 꽃도 피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 꽃은 작은 종처럼 생겼는데, 층층이 매달려 있어요.” “아, 그거? 잔대꽃이라고 해. 산나물을 하는 사람들은 이른 봄 이 꽃줄기와 잎을 뜯지. 뿌리를 캐서 약으로 쓸 때에는 ‘사삼(沙蔘)’이라고 부르지.” “야아! 약이라고요?” “그럼 이 산에 약으로 쓰이지 않는 게 어디에 있니? 모두가 약이지. 옛날에 말이야. 어떤 사람이 아주 심각한 병에 걸려서 어떤 약을 써도 듣지 않았대. 그때 한 친구가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산으로 가서 열매란 열매는 보이는 대로 다 따 모았지. 그리고는 병에 걸린 친구에게 와서 펴 보이며 말했어. ‘여보게, 친구. 이 열매들 중에는 자네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있고, 독이 되는 것도 있을 것일세. 하지만 이 열매들 모두가 식물들이 이 세상에 와서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생명의 정수가 아닌가? 식물들은 오직 자신의 열매를 위해 비바람을 이기고 벌레와 싸우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그러니 열매 속에는 모든 생명의 신비가 담겨있지. 그러니 이것들을 한번 달여 약으로 써 보세.’ 이렇게 하여 병에 걸린 친구는 그것을 달여 먹게 되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어떻게 되었을 것 같니?”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병이 나았을 것 같아요.” “그래. 그 친구는 그 열매를 달여 먹고 병이 나았다고 하는구나.” “야, 정말 이 산에 보이는 것 모두가 다 약이 될 수 있다니!” 웅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만병통치약으로 전 세계에 널리 쓰이고 있는 아스피린도 버드나무에서 뽑아낸 약이지.” 아버지가 계곡에 서 있는 버드나무를 가리켰습니다. “야!” 웅이는 입을 벌리며 버드나무에서 눈을 뗄 줄 몰랐습니다. 식구들은 한참을 더 올라갔습니다.
“우와, 아버지. 이 꽃도 좀 봐요. 아까 잔대꽃보다는 두어 배 더 커요. 꽃도 더 주렁주렁 달렸고요.” “그래. 그 꽃 모양을 잘 살펴보거라.” “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종보다는 모자를 닮았어요. 끝이 말려 올라간 털모자!” “그래, 털모자처럼 생겼지.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이 꽃을 보고 옛날 무사들이 쓰는 그 무엇이냐? 이렇게 쓰고 전쟁터에 나가는 모자 있지? 그 모자처럼 생겼다고 여겼나 봐.” 아버지가 머리에 무엇인가 쓰는 흉내를 내었습니다. “아, 투구요. 투구!” 웅이는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투구꽃 : 사진 늘뫼 님>
“그래! 그래서 이 꽃을 ‘투구꽃’이라고 한단다. 모양을 보고 지은 이름이지. 독이 있어서 함부로 먹으면 안 돼. 하지만 약으로는 쓰이지. 색깔은 어떠니?” “네, 아까 잔대꽃보다 좀 더 진한 보라색인데요.” “그래, 도라지꽃도 그렇고, 잔대꽃과 투구꽃도 그렇고…….” 아버지가 말끝을 흐렸습니다. 웅이는 아버지가 왜 말끝을 흐리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왜 그러실까? 여쭈어 볼까? 아니야. 더 생각해 보라고 그러시는 걸 거야. 그래, 더 기다려 보자.’ 웅이는 아버지 뒤를 따라가면서 산길 이곳 저곳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가을 산에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산비탈 축축한 곳에는 콩알만한 붉은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풀도 있었습니다. “얘, 웅아! 이 풀잎의 냄새를 한번 맡아보아라.” 앞서가던 아버지가 붉은 열매를 달고있는 풀 잎사귀 하나를 뜯어 내밀었습니다. “글쎄요? 풋내가 나는 것 같은데요.” “채소 중에 그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이 있을 텐데…….” 아버지 말씀에 웅이는 다시 코를 킁킁거렸습니다. “아, 오이 냄새가 나요. 오이!” 웅이가 신이 난다는 듯이 외쳤습니다. “그래, 그래서 그 풀을 ‘오이풀’이라고 한단다. 그 풀을 자세히 보아라. 오이와는 전혀 닮지 않았지. 그렇지만 냄새 때문에 ‘오이풀’이라는 이름을 얻었지. 냄새로 이름을 얻은 식물에는 이것말고도 생강나무가 있어. 줄기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고 해서 ‘생강나무’라고 하는데, 실제 생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아버지는 바로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습니다. “바로 이 나무란다.” 아버지가 가리킨 나무는 손바닥만한 잎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나무의 냄새를 맡아보거라.” 아버지는 작은 가지를 꺾어 내밀었습니다. “아프겠다.” 웅이가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공부하는 데 쓰기 위해 조금만 꺾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웅이는 아버지가 내미는 가지를 받아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아, 정말이에요. 정말 생강 냄새가 나요.” 웅이는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그 나무 가지를 삶아 차를 만들기도 한단다. 모두 약이 되지.” “네에.” 웅이가 고개를 끄덕일 때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오이풀을 가리켰습니다. “이 풀도 꽃은 보라색에 가깝지. 약간 붉기는 하지만…….” “네에.” 이번에는 아버지보다 앞장서게 된 웅이가 외쳤습니다. “아! 여기에도 꽃이 있어요. 아까 잔대꽃과 투구꽃은 잎을 아래로 벌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 꽃은 도라지꽃처럼 위로 입을 벌리고 있어요.” “어디 보자. 그래, 이 꽃은 용담이라고 하지. 뿌리를 말려 가루로 만들어 먹으면 위장이 튼튼해진다고 알려져 있어. 이 꽃도 역시…….” “…….” “어떤 색?” “아, 보라색이에요.” “그렇지!” 웅이네 식구들은 모두 산소에 도착했습니다.
식구들은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절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우리 식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도록 해주세요.’ 웅이는 엎드려 절을 하면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윽고 성묘가 모두 끝났습니다. 모두 산소 앞에 둘러앉아서 음복을 하였습니다. 웅이가 술을 부어 집안 어른들에게 순서대로 잔을 돌렸습니다. 음복이 끝나자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저기 산자락 끝 냇가 벌판에는 쑥부쟁이꽃이 많이 피어 있구나. 또 이 산소 옆 도랑둑에도 닭의장풀, 맥문동, 개미취 등 여러 가지 꽃이 많이 피어 있다. 모두 가을에 피는 꽃이지. 또 아까 우리가 올라오면서도 보았던 도라지꽃, 투구꽃, 잔대꽃, 용담꽃 등도 모두 이 가을에 피는 꽃이다. 이 꽃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으음?” 웅이와 사촌형제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모두 산에서 피는 것 같은데요?” 재용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하지만 닭의장풀은 밭둑이나 들판에도 많아. 저기 쑥부쟁이꽃도 그렇고…….” “모두 줄기가 가는 것 같은데요.” 누군가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나무가 아닌 풀줄기이니 대개 가늘지. 봄에는 짧지만 가을 풀은 대개 가늘고 길지.” “…….”
그때였습니다.
<사진 늘뫼 님, 잔대꽃>
‘아, 그것이었구나. 아까 아버지께서 말끝을 흐리신 까닭이…….’ 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보라색 꽃입니다.” “와!” 모두가 웅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도 씩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보라색 꽃이다. 어째서 가을에 피는 꽃은 대부분 보라색일까? 그게 궁금하지 않니?” “네에?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모두들 생각이 잠겼습니다. “그러니까 봄에는 붉은 꽃, 노란 꽃이 많은데, 가을에는 왜 보라색 꽃이 더 많으냐 이것이지요?” 사촌동생 재민이가 다시 한 번 다졌습니다. “그래. 가을에도 물론 붉은 꽃, 노란 꽃이 있기는 있어. 하지만 봄꽃보다는 보라색을 더 많이 띠고 있지. 어째서일까?” 아버지가 다시 쑥부쟁이꽃을 가리켰습니다. 쑥부쟁이꽃도 역시 보라색이었습니다. “그것 참!” “왜 그럴까?” 웅이와 사촌형제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아, 저기 소나무 위의 칡덩굴 꽃도 보라색인데요?” “그래! 칡꽃도 보라색이지. 그것 참 이상하지 않니? 왜 가을에는 보라색 꽃이 더 많을까?” 아버지가 다잡았습니다. “…….” 모두들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렸습니다. “가을에는 봄보다 나비가 더 많니, 적니?” “아! 벌이나 나비가 적어서 그렇군요!” “맞아요. 노랑나비도 없는데 노랑꽃을 많이 피울 일이 없지요.” “그렇단다. 가을에 피는 꽃은 대개 암꽃과 수꽃이 한몸에 있어서 나비가 없어도 열매를 맺을 수 있지. 나비들을 불러올 일이 줄어드니까 꽃들도 노랑 빨강 요란하지 않아도 되지.” “그렇구나!” “그래. 꽃들도 다 생각이 있지.” “…….” 모두들 멍하니 보라색 가을꽃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지가 한마디 더 하셨습니다. “하지만 연구를 많이 해서 더 분명한 이유를 알아내어야 한단다.” “네에.” 웅이와 사촌들은 힘차게 대답하였습니다. 가을 하늘은 여전히 맑았고, 산소 옆 바위틈에서는 역시 보라색 배초향꽃이 웅이네 식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진 늘뫼 님, 산구절초>
♧ 나무도 생각하며 살아간다
산과 들에 나가서 살펴봅시다. 그리고 연구해 봅시다.
왜 가을에는 보라색 꽃이 더 많을까요? 산과 들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집니다. 봄에 피는 꽃, 여름에 피는 꽃, 또 가을에 피는 꽃은 각각 그 모양과 빛깔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리고 어떤 꽃은 한겨울 쌓여있는 눈을 뚫고 꽃봉오리를 내밀기도 합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에 가면 뿌리에 꽃을 매달고 있다가 아침저녁으로 잠시 꽃봉오리를 밖으로 내미는 거꾸로꽃나무(upsidedown flower)도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낮에 꽃을 밖에서 꽃을 피우면 너무 뜨거워 꽃잎이 말라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나무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
첫댓글 아~ 그랬군요. 제가 보라색을 참 좋아하는데 ㅎㅎㅎ 특히 남보라색의 도라지꽃을 좋아해요. 지난 추석 때 뒷산에 올랐다가 더덕꽃을 봤는데 연보라색 계열로 초롱처럼 생긴 모습이 참 귀여웠어요. 심후섭 장학관님의 글을 읽고 보니 자연의 섭리는 참 아름답습니다.
더덕꽃 모양이 사진에 있는 잔대꽃과도 비슷했어요.
아름다운 생각을 하며 사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빛도 표정도 편안하신 분으로 다가오고요. 그리고 온갖 잡풀들을 모아 만드는 그 '백초액'이 생각납니다. 맛도 참 좋았습니다. 또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구분을 얼마 전부터 할 줄 알게 되었는데, 새삼 웃음도 나옵니다. 제가 '자 봐! 쑥부쟁이는 연한 보라빛이 나잖아.'하
며 잘난 체 하며 설명해준 생각이 나서요. 카페에서 종종 뵙기를 바랍니다. 늘 편안하시고 좋은 일 많으시길 바랍니다.
모두모두 반갑습니다. 이 가을에 더욱 강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