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산(魯城山 348.9m)’엔 ‘노성산성(사적 제393호)’이 있다.
노성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테뫼식 석성으로 대부분 붕괴되었지만 일부 남은 구역에서 부분 보수가 이루어져 있다.
노성산 정상부 장대지(將臺址)에서 동남쪽 60m 떨어진 곳에는 ‘논산 노성산 봉수 유적(論山 魯城山 峰燧 遺蹟,사적)’이 있다.
조선시대 제5로 직봉의 37번째 봉수로서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운영된 봉수이다.
봉수대는 석축 방호벽을 따라 둘러싸여 있는 평면 사다리꼴 형태이지만 현재는 일부 흔적만 남아있다.
‘봉우재산(204.5m)’의 이름을 낳게한 ‘봉우재’는 이 봉수대와 관련이 있었겠지만 나는 감히 ‘逢遇岾山(봉우재산)’으로 명명을 하였다.
봉수대를 만나는 고개가 우리네 민초들이 넘어다니며 만난다는 ‘만날재’로 바꿔 부른 것.
노성산과 봉우재산을 지나는 산줄기는 도상거리 약 32km의 '노성지맥'이다.
‘옥리봉(玉尼峰 252m)’의 원래 이름은 ‘옥녀봉(玉女峰)’이었다.
북서쪽 상월면 지경리에 있는 ‘무동산(舞童山 113.1m)’과 남매봉으로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는 봉우리다.
거기다 논산시 노성면 일대의 옛 지명인 ‘이산(尼山)’과 결합 ‘옥리봉’이 된 듯하다.
‘옥재봉(玉齋峰 256.8m)’은 목욕재계를 하고 옥녀봉을 배알하는 이름의 산이다.
‘이산(尼山)’은 본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이었는데, 신라(경덕왕) 때 ‘이산현’, 1414년(태종 14) 석성(石城)과 합쳐 ‘이성(尼城)’이라 불렀다.
1646년(인조 24)엔 ‘은산현(恩山縣)’이라 하였고, 1776년(영조 52) 다시 ‘이성’으로 부르다가 정조 초에 ‘노성(魯城)’이라 고쳤다.
‘이산’은 ‘언덕’ 또는 ‘성(城)’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태종 때 이산의 명칭이 공자(孔子)가 탄생한 중국 노나라의 ‘이구산(尼丘山)’의 지형과 비슷하다 하여 ‘노(魯)’자를 따고, ‘이산’이 ‘성’을 상징한다 하여 ‘노성’으로 고쳤다.
산행코스: 노성산 애향공원-노성향교-열녀비각-명재고택-궐리사-옥리봉-옥재봉-노성산(노성산성)-봉우재산-임도-애향공원(3h)
* 차량 이동: 봉황산 산행, 관찰사 답사
<확대한 지형도> 옥리봉-옥재봉-노성산-봉우재산-애향공원
궤적. 노성산과 호암산까지.
7km가 채 되지 않고, 또 수월한 임도걷기로 3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도표.
1)노성향교, 2)열녀 공주이씨 정려각, 3)명재고택, 4)노성 궐리사.
미리 준비한 표지기.
'봉우재산'은 '봉우재' 위에 있는 산으로 봉수대와 관련있어 보이나 만난다는 뜻의 '봉우재(逢遇岾)'로 옮겨 적으니 '만날재'가 되었다.
* '岾'자는 '땅 이름 점'이기도 하지만 '고개 재' 이기도 하다.
'노성산 애향공원'이 원점회귀 지점이다.
애향공원은 주차장이 여럿이고 널찍.
노성 애향탑.
노성산 애향공원 종합안내도.
애향공원 표석.
노성산성과 노성면의 역사.
노성산 등산 안내도가 1~3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전교 아무개 기공비. * 전교(典校)는 지방향교를 관리하는 직원.
노성향교는...
홍살문 안으로 들어간다.
노성향교 솟을삼문인 외삼문.
문은 잠겨있어 담넘어 카메라만 들이 밀었더니 '명륜당'이 높다랗게 앉아있다.
명륜당 뒷편으로 가려진 건물이 '대성전'인 듯하니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또는 전당(堂)후묘의 형태다.
구릉지의 향교는 대체로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두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을 두어 전학후묘(前堂後廟)다.
이는 문묘의 신위에 대한 예를 중시하기 위한 것.
그 옆으로 부속 시설물들.
노성햑교 안내판.
살짝 비켜선 곳에 비각이 있어 가까이 다가 갔더니...
'열녀공주이씨정려각(烈女公州李氏旌閭閣)'이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소론파의 거두였던 윤증(尹拯 1629~1714)의 모친인 공주이씨(1607~1637)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각으로 윤증선생고택(중요민속자료 제190호)과 노성향교(충청남도기념물 제118호) 가까이에 있다.
솟을대문과 담장으로 둘러쳐진 정려각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막돌쌓기로 만든 기단 위에 팔각형의 주초석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운 뒤 창방을 짜 돌렸으며, 사면에 홍살을 설치하였다.
1681년(숙종 7) 윤증의 모친은 정경부인에 봉해지며 정려를 받았는데 정려각 내부 후면 중앙에 명정현판이 걸려 있다.
병자호란 때 남편 윤선거를 따라 시어머니와 함께 강화도로 피난 간 공주이씨는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자 오랑캐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명정현판엔 <ㅇㅇㅇㅇ세자사시문경공윤선거지처 증정경부인공주이씨지려>.
문경공 시호를 받은 윤선거는 윤증의 아버지이고, 열녀 공주이씨는 윤선거의 처이자 윤증의 어머니.
노성 선비길 안내판. '노성 선비길'은 가곡1·2리 넘어 호암산(185m)까지이다.
‘명재고택(明齋古宅)’은 숙종 때 소론의 지도자였던 윤증(尹拯)의 고택이다.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의 명당으로, 노성산을 배산으로 노성향교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명재고택은 후손이 살고 있어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다만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사랑채만 올려다 보았다.
중앙에 전퇴를 둔 2칸의 사랑방과 그 오른쪽에 대청이 있고, 사랑방 좌측에는 1칸 마루방과 하부에 아궁이가 있는 작은사랑방이 있다.
사랑방 뒤퇴에는 드나드는 입시에 작은마루방이 배설되어 사랑방과 연결되며 작은사랑방의 뒷방과도 통하도록 되어 있다.
좌측 누마루 정면에는 명재의 9대손 윤하중이 걸었다는 ‘이은시사(離隱時舍)’편액이 걸려있다.
‘떠나고 은거할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뜻.
대청에는 ‘靈閑高臥(영한고와)’라는 액자가 걸려 있어 학자의 인품이 잘 나타나 보인다. 이는 ‘혼이 한가롭게 높이 누웠다’라는 뜻.
한옥과 담장과 장독대.
그리고 초가까지 운치를 더한다.
햇살바른 곳에서 장익는 미생물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도서관은 초연당(超然堂). 휴관 중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궐리사 방향.
산자락 솟을삼문 뒤로 맞배지붕 기와집.
안내판이 가리키는 곳에...
공적비들.
홍살문을 들어서야...
궐리사 '외삼문'을 올려다 볼 수 있다.
‘노성 궐리사(魯城 闕里祠)’는 조선후기 공자의 유상을 봉안한 영당으로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궐리사는 공자가 생장한 ‘궐리촌’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된 것으로, 국내에는 수원(華城)과 노성(尼城)의 두 곳뿐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발의,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俊)·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 등이 창건하였다. 1717년(숙종 43) 재상 이경억(李慶億)을 따라 중국에 간 공징노(孔徵魯)·공은중(孔恩中) 등이 공부자유상(孔夫子遺像) 일체(一體)를 얻어 와 봉안하였다.
1791년(정조 15)에는 송조오현(宋朝五賢)의 영상을 봉안하였고, 1805년(순조 5)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물은 사우·강당 현송당(絃誦堂), 내·외삼문, 모성재(慕聖齋) 등 7동이 있으며,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담넘어 현송당(絃誦堂).
석주 형식으로 쭈뼛한 궐리탑.
중간에 음각으로 쓴 궐리(闕里)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글씨이다.
노성 궐리사 궐리탑(1716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20호) 안내판.
이제 산길을 오른다. 궐리사 솟을삼문 우측 임도.
임도를 따르다 산길 삼거리에서 차량 앞으로 고갯마루가 가까이 보인다.
산길의 제비꽃.
올라설 고갯마루.
안부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면...
이정표.
노성산이 1.27km.
곧 옥리봉에 올라서고...
다시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미수(米壽)를 맞으신 권형님을 따르다 보니...
어느새 옥재봉.
표지기를 걸고...
편안한 산길에서...
"에구~ 산불이 났나보다."
애향탑 갈림길을 지나자...
거꾸로 오른 일행들과 교차한다.
목계단을 오르자...
성곽의 흔적.
꼭대기 아래 널따란 터는...
헬기장.
허물어진 흔적은 수구(水口)인 듯.
정상의 팔각정자에서는...
멀리 조망이 터진다.
정자 현판엔 '이산정'.
정자에서 간단요기를 한 뒤 다시금 바라보는 풍광.
당겨보는 계룡산.
노성산 찍고...
표지기를 걸었다.
노성산의 시설물은 태양광.
뒷쪽으로 돌았더니 성곽이 있어...
살짝 내려가 보았다. 일부 보수한 노성산성이다.
절집으로 보이는 건물은 '금강대도 노성본원'.
줄쳐진 곳으로...
노성산성.
쭈뼛쭈뼛 사형제바위에 삼산암(三神岩) 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 봉수지(烽燧址)에 관한 비석.
금강대도(金剛大道)는 이승여(李承如)가 창시한 신종교이다.
이승여는 1874년(고종 11) 이색(李穡 1328~1396)의 18세 손으로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금강대도에서는 태어난 이 해를 개도 원년으로 삼고 있다.
금강대도의 사상은 ‘의성(義誠)’이며, 유·불·선 삼종일합의 진리를 연마하여 심성신(心性身)이 합일된 이상적 인간상을 정립하고
천지인이 도덕적으로 화합하는 이상 낙원을 건설하고자 한다.
'금강도덕문' 아래에 좌우로 금강대도노성본원, 연화대도노성본원.
안내문.
삼종대성전.
산길을 내려서는 곳에...
일월당은 굿당인 듯.
비포장 임도에 내려서면 '봉우재'다.
임도를 건너 오르면 봉우재산.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서다...
길가의 예쁜 야생화. 예쁘면 됐지 "까잇 이름따윈 몰라도 좋다."
우측 임도 아래의 가옥 옆에 특이한 바위가 보여 당겨 보았더니...
마치 입벌린 돌고개를 닮았다.
노성 선비길 이정표.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소." 포토존이다.
- 봄이 오면 -
꽃피는 봄이오면/ 고향엘 가보리라
괜시리 눈물 나오던/ 소나무밭 오솔길
산모탱이를 돌면/ 들판가득 출렁이는 자운영 꽃밭
멀리
독사풀 무성한 논두렁길엔
햇빛받은 사금파리 한 조각/ 앞 질러 가고
색색의 실타래 풀리는 / 자운영 꽃밭에
네활개를 펴고 누우면/ 파아란 하늘의 끝 어디선가
벌떼처럼 잉잉거리며 들려오는/ 내 유년의 함성
물안개처럼 스쳐간 추억속에/ 잃어버린 유년의 꿈은
영롱한 무지개로 일어서고/ 눈부신 순금 햇살의 바다엔
건질 수 없는 그리움의 조각들이/ 무수히 떠오른다
이세상
어디에도 둘 곳 없어서
가슴에 깊이 묻어두었던/ 보석보다 붉은 첫사랑이다
<백 규 현>
정자 좌측으로 내려서자...
원점회귀를 이루는...
주차장.
출렁다리가 있는 곳에...
우리 버스가 대기 중이다.
두부김치로 허기를 메운 뒤 반야산에 있는 ☞ 반야산 관촉사,대바우마을로 차량이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