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성을 떨던 무더위의 기세도 한풀 꺾였습니다. 벌써 아침저녁 서늘한 바람이 이는 가을의 문턱입니다. 올 8월은 유난히 고단했던, 그러나 모처럼 행복했던 달이었습니다.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런던 올림픽의 흥분은 아직까지 가시지 않습니다.
축구 동메달 주인을 가리는 한일전의 짜릿했던 순간들이 눈에 선합니다. 마치 한창때의 마라도나처럼 수비선수 4명을 이리저리 달고 뛰면서 멋진 선제골을 넣은 박주영, 던지듯 몸을 날려 통렬한 슛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은 구자철… 사실 우승후보로 꼽히던 스페인을 물리치고 승승장구 4강에 선착했던 일본의 기세는 대단했습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중요하다는 한일전이었지만 그들을 꺾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우리 올림픽 대표팀은 철저한 수비로 그들의 공격을 꽁꽁 묶어놓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베이징에선 죽기 살기로 싸워 졌기에 이번 런던에선 죽기로 싸워 이겼다는 김재범(유도 남자 -81kg), 은퇴 무대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따내고 경기장에서 손윗동서인 정훈 감독과 맞절의 진풍경을 연출한 송대남(유도 남자 -90kg), 자신의 이름이 붙은 신기술로 체조에서 첫 금메달을 따낸 양학선(남자 뜀틀), 날쌘 발과 거침없는 공격으로 세계의 강자들을 연거푸 무찌르고 정상에 오른 김지연(펜싱 여자 사브르 개인전)… 이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런던 하늘에는 쉴 새 없이 태극기가 오르고 애국가가 이어졌습니다. 금메달 13, 은메달 8, 동메달 7개, 64년 전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처음 태극기를 들고 올림픽 참가의 역사를 열었던 선배들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성과입니다.
어쩌면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의 분투가 더욱 감동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린 보이’ 박태환은 주종목인 자유형 400m 2연속 우승을 다짐했지만 예선부터 험난했습니다. 출발에서 실격 판정을 받았다가 뒤늦게야 복권되어 결승에 나서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역영 끝에 은메달을 따내기까지 심중의 혼란과 고생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200m에서도 은메달, 1천500m에서는 4위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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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던 역도의 장미란도 겹친 부상의 피로와 세월의 무게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장한 모습이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용상 마지막 시기에 실패한 후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곧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바벨에 다정한 키스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팬들의 성원에 두 손을 흔들어 감사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퇴장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이렇듯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많은 격려와 위로의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 아마도 이런 걸 성숙한 응원문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선수들의 경기 수준만 향상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성원하는 일반의 시민의식도 한 단계 확연히 올라선 느낌입니다. TV 중계에 비친 경기 현장이나 거리의 응원 모습은 철없는 인터넷 누리꾼들의 말장난과는 상관없이 열정적이면서도 의젓하기만 했습니다.
런던 올림픽은 우리에게 올림픽의 진정한 의미와 참다운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의 올림픽 2연속 3관왕 달성, 육상 남녀 단거리에서 보인 자메이카 인간 탄환들의 폭풍 같은 질주, 마라톤 왕국 케냐와 에티오피아 강자들을 제치고 우간다에 유일한 금메달을 안긴 스티븐 키프로티치, 흑인선수로는 처음 기계체조 여자 개인종합을 석권한 17세의 미국 요정 가브리엘 더글라스, 두 다리에 플라스틱 의족을 달고 세계의 스프린터들과 경쟁한 남아프리카의 장애인 선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흰색 후드를 쓰고 트랙을 조깅하듯 달린 사우디의 첫 여성 올림피언 사라 아타르… 그리고 결전이 끝난 직후 국적을 가리지 않고 얼싸안고 이들이 나눈 축하와 위로의 포옹은 승패나 순위와는 관계없이 세계인들에게 많은 영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번 올림픽 기간 우리는 스포츠가 주는 감동, 스포츠를 통한 교감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부 정신, 승자에 대한 예의와 패자에 대한 배려를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 나라의 소중함, 국기와 국가의 의미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올림픽이 준 큰 교훈은 인종과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는 세계인들의 친선과 평화의 소중함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100여 년 전 쿠베르탱이 구현하고자 했던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길이요, 근대올림픽을 창설한 참뜻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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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
방석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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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