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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어머니가 왜 그날 나에게 그리 하라고 시키셨는 지 생각해보니,
아마도 불과 4년 전에 두메산골 고향인 고흥 점암에서 여수로 나가 살겠다고
기세 좋게 여수로 이사를 왔는데 막상 여수로 이사 와서는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한 꼴을 고향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기 때문.
버스표 살 돈이 없어 4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일부는 앞세우고 나머지는
뒤 따르게하고 교동에서 만성리 해수욕장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먼 행군.
오랜 시간을 걸어 만성리 해수욕장에 도착하기 전 커다란 터널이 있어 들어가니
밖은 오뉴월 태양이 맹위를 떨치는 데도 터널 안은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시원했다. 터널 천정의 바위틈에서 간혹 내 이마 위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슴을 섬뜩하게 해 아마도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지옥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덜커덩 소리를 내며 달리는 버스가 터널 안으로 들어서면 나는 동생들에게
터널 벽으로 바싹 붙으라고 소리를 쳤다. 버스가 지나간 후 보니 터널 바닥에
고였던 흙탕물을 버스바퀴가 내 종아리에다 흠뻑 튀겨놓았다.
끝없이 긴 터널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저 멀리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만성리 해수욕장이 보였다.
해수욕장은 이미 인산인해. 모래밭 가운데 좋은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했고
우리는 해수욕장 가장자리 자갈이 많이 섞여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여덟살짜리 손아래 누이동생에게 동생들을 맡기고 파란 바닷믈로 풍덩 뛰어들었다.
매끄러운 미역잎처럼 나의 온몸믈 부드럽게 애무해주는 시퍼런 바닷물.
영영 뭍으로 나가지 않고 바닷물에 이대로 잠겨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러면 날이면 날마다 참고 견뎌야하는 배고픔도 모르고 엄마 아빠가 노상 돈 때문에 매일
다투는 것 보지 않아도 되고...
몇시간 동안 물에서 나가지 않고 헤엄을 치노라니 물가에서 6살 짜리 둘째 누이동생이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수영을 그만두고 가서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배가 너무 고파 운다는 것.
해수욕장에서 족히 대여섯시간을 보냈는데도 해는 기울 생각을 않는다. 나를 포함해 다섯 아이가
누더기 옷을 다시 걸치고 만성리를 떠나는 모습은 마치 아프리카 난민 행렬 같았을 것이다.
만성리 해수욕장 한 쪽 끝에서 만성리 중간 쯤 지날 때 왠 커다란 개가 골목에서 나오더니
내가 무척이나 큰 개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내가 피할 겨를도 주지않고 나에게 쏜살같이
달려들어 내 허벅지를 마치 두꺼운 쏘세지를 베어먹듯 한입에 덥썩 물었다.
황급히 개를 뒤따라나온 중년 부인이 개를 강제로 떼어놓을 때까지 개는 커다란 송곳니를
내 허벅지에 박고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개가 보기에 두살짜리 막내동생을 등에 업은 내모습이 특이했을 것 같고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는 적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순식간에 개에 물린 나는 너무 놀라고 무서워 개에 물린 상처에서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고
동생들도 울면서 내뒤를 따라왔다. 개에 물린 상처에서 연신 피가 흐르는데도 나는 막내동생이
개에
물리는 것만 두려워 막내동생을 등에 업은 채 정신없이 도망쳤고 한참 도망치다보니 동생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내 뒤를 따라와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또 터널을 지났는데 터널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런 귀가길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대경실색. 엄마는 개에 물린 내 상처에다 뜨겁게 달군 놋숟가락을
여러번 갖다 대었고 나의 비명소리에 지친 엄마가 덧나지 말라고 거기에다 된장를 발라주셨다.
그로부터 5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4명의 동생들 모두 장성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고 그때 내등에 업혀있던 막내 남동생이
마지막으로 작년에 손녀를 얻어 할아버지가 되었다.
요즘도 샤워를 하면 내 허벅지에 희끄므레하게 드러나는 그때 개한테 물린 상처.
만성리 해수욕장에 갔다가 입은 상처. 아무런 잘못도 없이 등에 얘를 업었다는 이유만으로
입은 상처.
내가 죽는 날까지 내게 머물다가 내가 죽은 후 내몸이 불에 활활 탈 때에나 없어질 상처.
만성리 해수욕장에서 입은 상처...
the conclusion that she did so for she did not want to show her guests from
our homevillage that she was failing to properly feed and clothe her children
after 4 years since she dashingly moved to Yosu from the backwoods of
Jeomam, Goheung.
upon entering it, I felt such a cool air as to get goose bumps when the summer sun
was burning hot outside. The waterdrops oozing through the rock crack on the tunnel
ceiling fell intermittently on my forehead to frighten me, making me think that perhaps
man must walk through such a long dark tunnel to reach hell after his death.
after the bus passed by, I found my calf covered with muddy water that the bus tire spattered.
After walking endlessly in the tunnel, I finally saw the Mansungri Beach in the distance that looked like an oasis in a desert.
A big crowd was already gathered in the beach.
Good spots in the middle of the beach were already occupied by others;
we took our place at the edge of the beach where the sand was mixed
with a lot of gravels.
seawater. The livid seawater as sleek as the leaves of sea mustard caressed my whole body
so gently as to make me wish to stay in the water forever without having to endure hunger
day after day, avoidning seeing Mother and Father always quarrel over money problem.
After swimming in the sea for hours, I saw my 6-year old sister crying near water, stopped
swimming and came to her, asking why she cried, to which she replied that it was because
she was so much hungry.
We spent nearly 5 to 6 hours in the beach, but the sun still stood tall in the sky.
5 children including me wore rags again to leave the beach, which must have looked
like a group of African refugees marching in procession.
no sooner had I seen a dog and thought it a big one than it sprang out at me so swiftly
as for me to fail to avoid its attack; it bit my thigh at a gulp as if it were a big chunk
of sausages and wouldn't break away from me with its canine stuck deep in my thigh
until a middle-aged woman who followed it hurriedly broke it away from me by force.
Now I think the dog perhaps thought it queer seeing me carry my youngest brother
on my back and judged me as its potential enemy.
The dog bit me in an instant and I ran away from it bleeding from my wound, my siblings following me crying; I kept bleeding; fearing any possible attack on my youngest brother on my back,
I ran frantically while my siblings ran after me neck and neck. On my way back I passed the tunnel
again, after which I felt safe.
My way back home that day was the most painful one in my life.
On arrival at home, Mother was shocked to see my wound. She placed the brass spoon
heated hot on my wound several times and after getting tired of my screaming, she put
bean paste on it to prevent infection.
As many as 55 years passed since that day.
All of my younger siblings became grandfathers and granmothers, the youngest brother
I had been carrying on my back that day lastly becoming a grandfather by having
granddaugher last year.
These days as always I look at the pale scar on my thigh; the scar from the wound the dog inflicted; the scar I got to have when I went to Mansungri Beach; the scar I got to have just because I was carrying a baby on my back; the scar that will vanish only when my body burns in flames after my death; the scar I got to have at Mansungri Be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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