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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속에 조선을 찾아서
석 도 익
다 알 수 없는 나라
삼면이 바다로 되어있는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에서 거대하면서도 알토란 땅인 중국대륙에 연결되어있어 긴 역사 속에서 숙명적으로 맥을 함께하며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져왔던 나라가 중국 이다.
국토로 보나 인구로 보나 우리가 약세이기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눌려 살았던 과거도 있었고 한때는 적이 되기도 하였으며 또는 우방이 되기도 하였으나 근대에 와서 사상을 달리하면서 한반도의 반쪽인 우리는 그들과 모든 것이 단절된 역사는 한 세대를 지나왔기에 가장 가깝고도 정말 먼 나라였다.
지상의 낙원을 건설한다던 공산주의가 생존경쟁의 기본인 경제에 실패하게 되자 철의장막을 고수하던 신봉자들도 이를 늦게나마 깨우치고 사상을 달리하는 국가들과 수교하기에 이르렀다.
양단되었던 사상의 벽을 넘어 다시 그들의 속을 보게 되고 그들 속에 뿌리내려진 우리민족의 강인한 삶의 질곡을 가슴 뭉클하게 느끼고 있는 시점이다.
“중국은 다 알 수 없다” 고 한다. 이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네 가지라고 하는데. 그 첫째가 그들이 쓰는 글이다.
우리나라도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에 쓰고 있던 상형문자인 한문이 중국 글인데 근자에 와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와는 상이하게 변형된 글자가 많다.
중국정부는 전 국민이 쉽게 배우기 위하여 한자의 많은 획을 약 자화 하여 사용하나 그래도 평생을 배워도 다 알 수 없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대륙이 넓고 볼 곳이 하도 많아 평생 여행을 다닌다 해도 거대한 중국을 다 알 수 없을 것이란다.
세 번째는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 빼고는 무엇이던지 음식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중국이니 일평생을 먹어도 음식을 다 먹어볼 수 없단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 현재 13억이라고는 하나 이 역시 정확한 것이 아니라니 인구가 얼마인지 잘 알 수 없단다.
더욱이 인구증가억제정책으로 한 가정 하나 낳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어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고 하니 더더욱 모를 일이란다.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긴 역사를 이끌어오며 13억이란 인구에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화교들이 그 나라의 경제력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공산주의의 경제모순점을 자본주의로 수정한 이른바 수정주의로 전환하고 개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무섭게 성장하여 아세아의 거대한 용으로 커가고 있다.
가깝고도 멀었던 나라
강원문인들이 박경리 작품 토지 속 지명 순례를 하기 위하여 북한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분단을 통탄하며 중국을 통해 답사하기로 한 문화 탐방 길에 함께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2006.6,27일 4박 5일 일정으로 떠나게 되었다.
여행, 그것도 과거에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중국을 통하여 간다는 설렘은 꼭 챙겨야할 소지품을 잊어버리고 나온 이들이 있어 되돌아 갔다가 와야 하는 등의 부산한 여행의 맛이 시작되었다.
공항에 도착하여 굴 콩나물 해장국으로 따끈하게 속을 덥히고 중국남방항공사 비행기에 탑승하여 12시 정각에 인천공항 상공을 이륙하여 중국 변방 대련공항으로 향발했다.
하늘에서 보는 중국 땅도 변방지방에는 산이 많았다. 기내에서의 점심은 정말 한심할 정도의 음식이 제공되었다. 가끔 타보던 대한항공이나 타 항공기의 것과는 너무 차이가 난다.
술은 맥주밖에 없어서 커피를 한잔 마셨다. 커피는 세계 공통 차이니까.
대련에 도착했다 공항은 초라한 듯 했으나 다행히 한글안내가 되어있어 무엇보다 반갑다. 건물에 전등을 다 켜지 않아 어둑했고 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2시간여를 공항에서 연길공항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서성일 수밖에 없는데 공항대합실이 어두운 것은 절약한다는 차원으로 이해되지만 앉아 있을만한 의자가 없었다. 2층 음식점이나 찻집에는 좋은 의자가 즐비하게 비어있건만 ... 서성이지 말고 와서 뭐든지 사먹으면 앉을 수 있다는 무언의 상술 같았다.
공항에서 다시 연길공항으로 오후 세시에 이륙했다.
기내에서 제공되는 커피를 주문하였는데 국제선의 커피는 원두였는데 국내선은 믹스커피로 차이가 났다.
북간도 아~ 조선인의 땅
조그맣게 뚫린 비행기 유리창으로 투영되는 하늘 저 아래에 바라보이는 산야 왜 처음 보는 생소함이 없고 언제나 보아오던 곳같이 느껴지는 것일까? 유년시절에 아버지께서 하시던 말씀이 새롭게 생각난다.
아버지께서는 일정 때 농사를 지어야 공출로 다 빼앗아가는 터라 이럴 바에는 차라리 순사나 하려고 시험을 보겠다고 할아버지께 허락을 청하자마자 “일본 놈 밑에서 순사질이나 하려거든 차라리 죽어라” 는 불호령과 함께 지게작대기에 맞아 죽을 뻔하고는 손바닥만한 땅뙈기 소작농에 매달렸으나 앞이 안 보이는 가난이 너무 싫어서 다시 넓은 땅 북간도로가서 농사나 원 없이 짓겠다고 할아버지께 말씀드렸으나 할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시면서 “나를 땅에 묻고 가라” 하시는 말에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는 아버지...
그 당시 일제의 횡포와 가난에 도피처로 남부여대하여 땅 넓은 만주 북간도를 향하여 북 으로 북으로 이주했던 우리민족은 이민이 아니라 개척이었다.
간도는 원래 초기국가였던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후에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초기에는 수렵과 유목에 종사하였던 여진족이 번호(藩胡)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조공을 바치며 거주하였다. 1677년 청나라는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창바이 산 지구를 포함한 500km까지를 청의 발상지로 삼고 봉금구로 정하여 기타 민족의 거주를 엄금한 봉금령(封禁令)을 200여 년간 지속하였다. 그러나 1864년을 전후한 철종 말에서 고종 초와 1869년 대흉년 때 세도정치의 수탈과 학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과 기민(飢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 잠입하였다. 이때의 조선인은 평안도 북부와 함경도 북부의 농민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은 주로 깊숙한 산간마을에서 밭농사를 했다. 1883년 조선서북경략사 어윤준이 북선 6진을 시찰할 때 월강봉금령이 폐지되어 조선인들은 압록강 중상류와 두만강 중하류에 합법적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논농사는 비로소 이 시기에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거주지는 점차 평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간도의 농경지는 대부분 조선인에 의해 개척되었으며, 당시의 농작물은 조·보리·밀·콩·수수·옥수수·감자 등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토지를 탈취당한 농민과 항일운동가 및 일제의 대륙침략과 만주건설을 위한 강제이주자 등으로 간도 이주민들이 대폭 증가하였다.
1926년에는 간도 농토 약 52%를 한인이 차지하였고 가구 수도 중국인 가구 수의 5배가 넘는 5만 2,881가구에 이르게 되어 1944년에는 이주민 수가 63만 1,000명이 되었다.
1945년에 간도는 중공군에 점령되었고 1952년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임시정부가 성립되었다. 1955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1956년에 중공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1968년 연변조선족자치주혁명위원회, 1980년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0년 현재 지린 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옌지[延吉]·투먼[圖們]의 2개 시와 왕칭[汪淸]·훈춘[琿春]·룽징[龍井]·허룽[和龍]·안투[安圖]·둔화[敦化] 등의 6개 현(縣)을 관할하고 있으며, 이곳에 중국 거주 한인의 약 42%인 82만 1,459명이 살고 있다.
간도의 주요공업은 제지·방직·기계·전기·화학 공업 등이며, 1988년 조사에 의한 공업기업소는 1390개소에 종업원이 31만 9,000명, 공업총생산액이 30억 6,000만 원으로 생산된 제품 중 70여 종이 미국·캐나다·일본 등의 20여 개국에 수출되었다. 또한 자치주 내에는 창춘[長春]-투먼, 무단장[牡丹江]-투먼, 차오양촨[朝陽川]-카이산툰[開山屯], 차오양촨-허룽, 투먼-훈춘 노선의 철도가 있다. 이밖에 삼림철도가 있으며, 개혁과 개방 이후 관광업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옌지민 항이 개통되었다.
간도 거주 한인들은 2, 3세에 대한 교육열이 매우 높아 교육사업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는 한인의 민족적 색채를 보존하고 문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해나가고 있다. 1988년 조사에 의하면 유치원 1,445개소, 소학교 1,122개교, 중학교 215개교, 중등전문학교로 연변사범대학·연변위생학교·재정무역학교·인민경찰학교·임업학교·체육운동학교 등이 설립되었고, 정규대학으로 연변대학교·연변농학원·연변의학원·연변사범전과학교·지린 예술학원·연변분원 등이 있다. 고 한다.
우리 민족 조선족이 사는 곳이며 중국에 있는 조선족 자치구이다. 가슴 설레며 연길공항에 내렸다.
연길공항은 군용공항이나 민항과 함께 사용한단다. 10번 게이트밖에는 되지 않는 단조로운 공항이다. 이 공항 역시 어둡다. 전기를 절약하는 모양이다. 언제나 휘황찬란한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옛 서부영화에서 본 듯한 소도시 같은 연길은 황량해 보였다. 많은 주민들이 이주해버린 듯한 감마제 드는 곳이다. 다만 거리의 간판들은 머리글이 모두 한글로 되어있고 아래에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 전혀 다른 나라 같지 않은 착각을 하게한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벅차오르는 자랑스러운 민족임을 느끼며 차창을 밖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안 일이지만 황량한 도시를 돌아 여산화원이 라는 호텔에 투숙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청년시절 북간도에 가서 드넓은 평야지에서 농사를 짓고 싶어 하셨다던 만주벌판의 어느 모퉁이 쯤 되는 이곳의 밤은 짧았다.
만주 이 벌판은 고구려시대 광개토 대왕의 북진정책으로 요동까지 정벌하고 우리민족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곳 어느 곳에도 우리민족의 숨결과 따스함이 전해 내러오고 있어 전혀 타국 땅에 와 있다는 감이 전혀 들지 않고 잠들었으며 우리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빠른 이곳의 날이 밝았다.
우리 모두는 민족의 영산 백두산 등정 길에 마음 설레며 제발 백두산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날씨가 맑아줄 것을 기도하며 아침서부터 부산을 떨었다.
버스에 올라 백두산으로 가는 길 도로 옆 농가는 우리나라의 70년대를 연상하지만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벽돌에 기와를 얹은 방이 둘이나 셋이 됨직한 난민수용소같이 균일하게 지은 허름한 일자집이 옹기종기 있었고 그중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빈집이 많이 눈에 띄어 허허로움까지 든다.
백의민족이라는 피는 못 속여 힌색 페인트칠이 건물의 어느 곳이건 칠해져 있는 집은 우리교포의 집이란다.
어느 집이나 균일하게 집 앞이나 뒤로 붉은 벽돌로 담장을 했거나 나무 말뚝이나 가지로 울타리를 하고 텃밭까지 그런 울타리를 한 것이 아마 자기 집의 영역표시를 한 것이 조금은 이상하다.
산간지방이라 짐승 때문에 그런 가 했지만 포실한 마을도 모두 그러했으니 그것도 아닌 듯싶다.
우리나라 농촌에도 도시로 떠나간 빈집들이 어디를 가나 많이 있어 허허로운데 이곳은 무어라 꼭 집어 표현할 수없는 공동화 되어가는 마을풍경이다.
조국하늘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만족같이 살아온 사람들, 세계가 변하고 정치가 바뀌어도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말 우리글은 잊지 않고 사용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왔기에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내 조국을 자랑할 수 있을 때가 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공산주의가 태동하고 세계가 이념으로 갈라지는 와중에 대한민국은 막혀버리고 반쪽 북한이 그들의 조국이 되어버린 반백이 넘는 세월이 지난 현실에 적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잘사는 조국 대한민국, 그것이 그들이 기다려온 꿈이었다. 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든지 한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와야겠다는 것으로 집착되어 현재는 한집에 한사람정도는 한국에 가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할 수 있는 한국의 꾼들이 개입하여 많은 비극을 만들고 있다.
한국으로 갈수 있는 방법이 한국의 노총각들과 결혼 하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기는 하나 결혼적령기 여자가 어디 그리 많겠는가? 그러니 가정주부가 위장결혼하고 입국한다,
돈을 위해 아내를 떠나보내고 어머니와 헤어져야하는 눈물이 지금도 송화강을 불어나게 한다, 눈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내가 없는 가정 홀로 남은 남편은 술로 외로움을 달래고 어미 품이 그리운 자식들은 방황을 하며 올곧게 자라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리 피땀 흘려 돈벌어 보낸들 그들에게 내일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남아있기 어렵다. 또한 위장결혼에 속아 장가가서 가정을 꾸린 한국의 청년은 아내가 집을 나가버린 후에야 풍지 박살난 현실에 살아갈 의욕마저 상실하게 하고 있는 현실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어렵게 만난 조국이 먼 이국땅에서 열심히 살아온 그들에게 가정과 희망과 용기를 송두리째 망가트리고 있어 연길은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 가슴이 아려온다.
툭하면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였다느니 북간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느니 하기 이전에 만주벌판에 살고 있는 우리민족을 보살피자는 이야기가 먼저 있어야 했고 정부차원에서 내 민족 끌어안기를 하루빨리 시작했어야 했다.
학교를 세워주고 교육에 투자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조국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어렵고 외롭게 살아온 그들을 위하여 무언가는 해야 했다. 땅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않은가? 어디건 우리만족이 우리글 우리말을 사용하고 살고 있다면 그곳이 우리 땅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내 집이 없으면 임대나 전세 월세방에서도 사는 것이다.
정부에서는 하루속히 전 세계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조국으로서 그들을 보호하고 교육하는 일에 힘을 쓰는 일이야 말로 세계열강 속에서 살아남는 최우선의 방법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
민족의 영산으로 자랑하는 백두산의 절반을 동족상잔에 지원군을 내주어 고맙다는 사레로 중국에 주어버려 그들의 땅이 되어버린 백두산 뒤쪽 산허리의 한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백두산으로 가고 있다. 도로포장은 되어있으나 깔끔하지 않은 신작로 길목에는 곳곳에서 도로통과료를 징수하고 있었는데 현지 가이드는 이것을 호랑이 새끼라고도 했다.
관광버스는 그들이 말하는 장백산 입구에서 통제하고 일차관문에서부터 표를 사고 중국정부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타고 들어가서 다시 표를 또 사고 칠 인승 지프차에 갈아타고 빽빽하게 우거진 원시림 숲 사이를 지나 구름을 뚫고 숨 가쁘게 백두산으로 오른다.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걸쳐있는 해발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중국 지린 성 안투 현[安圖縣] 얼다오바이허진[二道白河鎭]과의 국경을 이룬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백두산의 범위는 천지 중심의 마그마 활동에 따른 화산암의 분포지로 한정해보면 현재 북한측의 면적은 8,000㎢로 전라북도의 면적(8,052㎢)과 비슷하고 개마고원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중국측의 백두산은 화산암의 분포지 까지 합하면 3만㎢에 이른다. 또한 해발고도 1,800m까지는 완만한 경사(8~12°)를 나타내어 방패 모양의 순상화산이나, 1,800~2,500m는 급경사로 종 모양의 화산을 이룬다. 백두산의 중앙부에는 천지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2중화산의 외륜산에 해당하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봉우리 16개가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데 모두 회백색의 부석으로 덮여 있다. 이 가운데 6개 봉우리는 북한에 속하며(최고봉 2,750m의 장군봉), 7개는 중국에 속하고(최고봉 2,741m의 백암봉), 3개의 봉우리는 국경에 걸쳐 있다. 따라서 천지 수면에서 장군봉 꼭대기까지는 600m의 비고로, 백두산 중앙부는 넓고 파란 호수 주변에 비고 약500m의 회백색 산봉우리들이 둥그렇게 둘러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백두산에 천지가 있어 암산이라...
백두산 정상에 있는 자연호로 수면 해발 2,190m, 면적 9.165㎢, 둘레 14.4㎞, 평균너비 1.975㎞, 최대너비 3.550㎞,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이다.
화산활동에 의해 백두산 화구가 함몰된 후 융설수·우수 등이 고여 생긴 칼데라 호로, 분화구의 전체면적 가운데 천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40.6%에 이른다.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을 비롯해 망천후(2,712m)·백운봉(2,691m) ·청석봉(2,662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예로부터 대택·대지·달문지라고도 했으며,99명의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가 560m에 이르는 절벽으로 된 화구벽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호수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하여 흘러내려 비룡폭포(68m), 창바이 폭포[長白瀑布:70m]를 이루면서 쑹화 강[松花江]의 상류인 만주의 얼다오바이허 강[二道白河]으로 흘러간다.
달문을 통해 유출되는 양은1일 약 36만㎥(7월)에 이른다. 표면수온은 7월에 9.4℃, 내부수온은 연중 4℃이다. 물은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중순까지 약 3m의 두께로 어는데 그 위에 쌓이는 눈의 두께까지 합하면 6m 이상 된다. 천지 일대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주 끼며,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온다. 연강수량은 1,500㎜이며,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수면 위로 최대 1~1.5m의 파고가 일기도 한다. 물이 맑고 푸른빛을 띠므로 가을에는 물 속을 14m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한다.
호수는 수온이 낮아 어류가 서식하지 않고, 식물성 부유생물 5종(種), 작은 동물 및 곤충류 4종, 이끼류 등이 서식하고 있다.
호수 주변에는 만병초·좀참꽃을 비롯한 12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북쪽 기슭에는 지름이 50㎝ 이상 되는 온천이 3개 있으며, 그보다 규모가 작은 것도 수십 개 있는데 황화수소, 탄산가스 등이 함유되어 있다. 사계절 경관이 뛰어나며, 백두산 관광의 핵심이 되고 있다.
김일성이 6.25돌발을 하고 유엔군에 패할 위기에 놓이자 중국 모택동에게 파병을 요청하여 중공군의 덕택으로 다시 한반도 반쪽을 되찾을 수 있었기에 생명의 은인이라 고마움의 표시로 백두산의 절반을 중국에 떼어준 것이 이제는 영영 중국 땅이 되어버린 지금 엄청난 돈을 주고서야 백두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움을 더하는 데 내가 탄 지프차는 원시림을 가르고 트여놓은 길을 올라갈수록 구름위의 고원평야에 울창하게 우거진 원시림은 마치 바다를 연상케 한다.
원시림을 지나고 다시 자작나무 숲을 지나 나무가 살지 못하고 고산 철쭉과 민들레 산양귀비가 군락을 이룬 능선에서 다시 고산 이끼식물이 있고 그다음은 화산의 돌 자갈과 검붉은 화산재로 만들어진 식물이 전혀 살지 않는 곳까지 차에 앉아 힘 안들이고 올라왔다.
그 높은 곳까지 영산의 맥을 짓누르고 길을 트고 포장을 하여 정상 200여 미터 앞까지 올라가 작은 능선위에 하차하니 하늘은 가을처럼 구름한점 안개 한줌 없이 맑은데 찬바람이 휭휭 분다.
저 아래 고원평야 원시림은 바다같이 고요하게 잠들어 있고 분화구에 천지를 담고 있는 백두봉은 하늘을 향해 둘러쳐져있는데 우리들은 큰 환호성을 지르며 처음으로 내 다리를 이용해 경주하듯이 마지막 정상을 뛰어올랐다.
오르자마자 내려다보이는 천지, 아 이곳이 천지란 말인가? 좀해서는 그 비밀을 다 보여주지 않는 다는 백두산 천지 우리나라의 백두산은 암산(여자)이고 한라산은 숫산(남자)이라하는데 암산인 백두산은 그 신비한 모습을 다 노출을 하지 않으려 해서 그 전체를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오늘은 우리 문우들의 좋은 글을 위해서 아낌없이 모두를 드러내고 영롱한 got살을 받으며 활짝 미소 짓고 있었다.
천길 벼랑 밑에 웅장한 병풍 속에 산수화같이 펼쳐진 이 신비의 비경을 내 짧은 문필로서 다 표현 못함이 한스럽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반시간 이 시간에 우리들은 기록을 남겨야한다는 급박함에 뛰어다니며 사진 찍기에 바빠 서로 흩어지는 바람에 백두산에 올라 애국가를 부르자던 것마저 못하고 그 비경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두지도 못하고 허둥지둥한 것이 하산하면서 바로 후회로 남았다.
백두산 등정길이 처음이 아니라는 어느 문우는 이렇게 맑은 날씨에 백두산 천지를 본 것이 처음인데 왠지 허전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백두산 천지는 마음속에 담아둔 신비감이 오늘 실올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을 본 듯하여 평생 신비감으로 사는 것이 오히려 좋을 듯싶었다고 한다,
몸의 어느 한부분이라도 살짝 감추는 듯한 신비의 비경이 없어져 오히려 허전하다고 한 말에 동감을 느끼면서 다시 나를 생각해보니 멍청하게 허둥대다 백두산과 천지의 모습을 구석구석 마음에 새겨 놓지 못함이 왜 이리 후회스러운지 모르겠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것인가? 온다 한들 오늘같이 이렇게 좋은 날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두고두고 가슴에 여운으로 새겨지는 일인 것인데 왜 그토록 몰랐을까? 그까짓 사진 찍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후회해본들 무엇하랴 하나의 교훈으로 삼자하고 마음 접고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웅장한 장백폭포를 올려다보는 것으로 달래며 흐르는 물에 손은 담가보니 따듯한 온천수다.
비룡폭포라 불리 우는 68미터의 장백폭포 밑의 바위에서는 틈마다 더운 유황온천이 샘솟는다.
이곳의 계란장수에서 온천물에 익힌 알을 벗기니 힌 자위는 덜 익었고 안의 노른자는 딱딱하게 익었다. 유황성분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입장료를 내야하고 가는 곳마다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는 장사를 못하게 하는지 상인들은 중국 사람들인데 그들은 우리말을 잘 알아듣기도 하며 간단한 말들도 하며 사라고 귀찮을 만치 쫓아다닌다.
백두산 자락 완만한 하부능선에는 틈틈이 인삼밭이어서 관광객에게 판매하는 주류가 산삼이며 장뇌 그리고 인삼이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헌 종이상자에 바위이끼를 깔고 못생긴 인삼을 몇 뿌리 얹어놓고 산삼이라고 사란다.
산삼 다섯 여섯 뿌리에 처음에는 오십 만원에서 이십 만원 차가 떠날라 치면 십 만원 마지막에는 단돈 만원에도 판다. 무슨 산삼이? 산삼이나 장뇌도 아주 못생긴 인삼을 가지고 요도를 조작해서 붙여 만든단다. 그 실례로 “사장님 이것은 붙인 게 아니야 잡아당겨봐” 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그들이 장뇌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잎까지 달린 인삼이라고 하는 것도 마지막에는 한 뿌리에 천원에 사란다,
처음에 산삼이라고 산분은 집에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준다고 부풀어 있다가 쓴웃음 짓고 여러 문우들과 나누어 먹고 만다.
산삼 다음으로 신통치 않게 만든 관광기념품으로 손수건 또는 열쇠고리 등 인데 이것역시 부르는 값에서 절반을 깎아서 살수 있으니 먼저 산분은 두고두고 배 아파한다.
몰락하는 공산주의를 수정하면서 개인의 재산을 인정하고 개인의 상업행위를 제재하지 않으니 너도나도 상행위를 하니 무질서한 상거래와 덜 익혀진 상도덕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영악한 자본주의 관광객들이 잘못 길들여놓은 상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되었건 모두 영악해지고 거짓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씁쓸해진다.
어찌되었건 한참을 숨 가쁘게 오르고 뛰어다니고 다시 장백폭포에 오르는 동안 지친 몸을 백두산 노천온천에 담그니 마음과 몸이 다시 충전됨을 느껴진다.
이곳이 우리나라 영토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백두산을 북한으로 해서 오를 수 있다면 더 좋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다시해해본들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중국정부는 자연을 훼손한 백두산 주변의 잡다한 건물들을 올해 안에 모두 철거하고 원상회복한다고 한다.
중국 정부에서도 관광사업에 신경을 쓰며 많은 공을 들이고 투자하는 있다는 것을 역력히 읽을 수 있었고 백두산 밑에까지 철도를 가설하고 아름드리 원시림을 벌채하여 수송하느라 바쁜 모습도 보인다.
하산하여 내려오는 길 이곳이 그 옛날 백두산 원시림 속에 은둔하며 여기를 무대로 신출귀몰하던 마적들의 산채가 있었던 이도백화라는 곳이며 미인송이 있는 마을이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마적들이 나타날 것만 같은데 지금은 관광객들을 상대로 년 중 6개월 영업을 위해 들어선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과 상가가 밀집해 있다.
김일성이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당하자 시중들던 여성부하가 김일성을 도망치게 하고 자신이 총탄에 맞아 죽으니 피 흘린 자리에 소나무가 나서 자라니 후에 김일성이 이곳에 와서 보고 여인을 추모하며 소나무 이름을 미인송이라 명명하였다는데 이 미인송이 일천여 그루가 서식하는 미인 송 마을이 기도 하다. 미인 송은 보통의 소나무와는 다르게 아름다운 여인의 쭉 뻗은 다리를 닮듯이 밑가지가 없이 미끈하게 솟은 소나무는 가히 미인송이라 할만했다.
이도백하의 밤은 미인송이 군락을 이룬 곳 신달호텔에서 깊어 가는데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마적들의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상으로 뒤척여야만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기를...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다시 일어서려는 힘으로 축척하며 조국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었을 선구자의 배경무대인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북한에서 직영하는 묘향산전시장에 들렸다.
길옆에 외따로이 지어진 회색건물 문 앞에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북한여성들이 도열하여 우리들을 맞이한다. 여성들이 열명정도 되고 남자들은 다섯 명 정도 도열하여 “반갑습니다. 어서오세요”라며 허리를 굽힌다.
묘한 심정으로 건물 안에 들어서니 북한의 산수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악수하는 그림 등을 실제사진과 똑같이 수놓은 상품들이 벽면을 장식한 방에 인도되어 앉으니 책임자라는 중년의 남자가 상품소개를 한다.
김일성 주석궁에서만 사용 되였다는 사향을 넣은 청심환을 설명하고 시음까지 하게하고 북조선에 경제사정 때문에 외화벌이일환으로 직접 판매하니 남쪽 선생님들이 많이 사가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 높던 자존심도 버리고 국제 세일즈맨으로서 변모하고 있었다.
가격이 비싸지 않다면 많이 사주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같은 동포로서 그들의 처지가 불쌍하게 보였다. 그들은 삼 개월마다 새로운 인원으로 교대된다고 했다.
용정으로 가는 길가에는 중국농촌에는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을 배워가 “내 집은 우리 손으로 짓자”는 구호아래 똑같은 모양의 신형 농촌주택을 마을마다 짓기 시작하고 있는 곳이 자주 보였다.
고구려시대 만주벌판을 개척하고 우리민족이 대거 이주하여 살기시작하면서 우리 땅이던 곳이 신라가 통일을 위해 당나라의 원군을 청함으로 고구려 멸망 후 자연히 중국 땅이 되어버렸으나 조선족들은 그래도 그 땅을 터 삼아 조국을 노래하며 말과 글을 잃지 않고 서로위로하며 살아 왔으며. 부농의 꿈을 안고 남부여대 찾아오는 이민동포들을 포용하여 살아온 세월들이 고스란히 지금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해진다.
일본강점기 독립을 위하여 울분을 터트리며 모여든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용정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대성중학교 (용정중학교) 구청사에는 운동주 시인의 서시 시비가 우리들 가슴을 파고든다.
하늘을 우러러 한줌의 부끄러움 없기를....
한국의 독지가들의 손길에 의하여 많은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는 용정 중 고등학교에는 수업을 종료한 늦은 시간인데도 운동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남아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정부가 빨리 밖으로 눈을 돌려 자라나는 우리민족의 후세들에게 힘을 주는 일을 했어야 하는 데 그들 스스로 이렇게 조국의 모든 것을 간직하고자 피 눈물 나는 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고 반면 그들의 민족정신에 머리가 숙여진다.
일본이나 미국에 가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말과 글을 잊어버리고 외국인이 되어가는 것도 다 우리 정부의 국민 싸안기의 부족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해외동포들을 위하여 그들의 후세 교육을 우리나라에서 책임진다면 그들은 영원히 우리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해본다.
선구자에 나오는 혜란 강물은 오늘도 도도히 흘러가고 있고 차창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독립군들과 애국지사들의 마음에 힘을 주던 일송정이 보인다. 소나무는 일본군에 의해 잘려나갔고 지금은 애기소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버스는 혜란강을 뒤로하고 도문으로 향했다. 북한의 회령시가 보이는 두만강 에 다다르니 주중국경지역이며 이곳의 강폭이 작아 탈북자들이 많아 경계가 심해졌다고 한다.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북동부에 위치하여 중국 및 러시아와의 국경을 이루며, 한국에서 2번째로 긴 강길이 610㎞, 국경하천으로서의 길이 547㎞, 유역면적 3만 3,269.5㎢(북한 1만 743.5㎢, 중국 2만 2,526㎢). 양강도 삼지연군 2,088m 지점 북동계곡에서 발원하여 양강도 대홍단군, 함경북도 연사군·무산군·회령시·온성군·새별군·은덕군을 지나 선봉군 우암리 동남쪽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상류로부터 석을수(石乙水)·연면수(延面水)·성천수(城川水)·보을천(甫乙川)·회령천(會寧川)·오룡천(五龍川)·아오지천(阿吾地川)과 하이란 강[海蘭江], 훈춘 강[琿春江] 등의 지류가 곳곳에서 합류된다. 두만강 지류 중 그 길이가 5㎞ 이상 되는 것은 약 150여 개이며, 그 가운데 50~100㎞ 되는 하천은 6개이다.
상류에서는 서두수(西頭水)라고 불리며 대홍단군과 무산군의 경계에서 지류인 석을수와 합류한 뒤에는 두만강이라 불린다. 두만강의 명칭은 고려강(高麗江)을 비롯해서 도문강(圖門江 또는 徒們江)·토문강(土們江)·통문강(統們江)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중국측의 문헌이고, 한국의 문헌에는 거의 두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주인들이 두만강을 고려강이라 부르는 것은 이 강이 고려와 만주의 국경을 이루는 강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도문강이란 말은 '새가 많이 사는 골짜기'라는 뜻의 여진어 '圖們色禽'에서 비롯되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또 '두만'이란 말은 중국 원나라의 지방관직 만호(萬戶)를 여진어 발음으로 '두맨'이라 하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두만'이 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도문·토문·동문의 호칭에서 '문'(們)자 표기는 백두산정계비 부근에 '문(門) 모양의 토벽'의 유무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지질은 상류에서는 신생대 제3기에 분출한 현무암과 조면암, 중상류는 화강편마암, 중·하류는 화강편마암 위에 상부고생충과 제3계(第三系)가 퇴적되었고, 하구연안은 화강암지대이다. 상류의 용암대지에서는 지표수가 지하로 복류하기도 하며, 원시림이 발달한 곳은 하곡이 뚜렷하지 않은 경향도 있으나 곳곳에 습원이 분포하기도 한다. 상류의 하계는 대체로 수지상 하계망을 이루며, 중류의 무산에서 회령까지는 감입곡류하천을 이룬다. 온성을 지나 하류의 평지로 접어들면 하천경사가 완만해져 주운(舟運)이 용이하다. 온성에서 강 하구 사이에는 유로변동이 심하고 퇴적작용이 활발하여 곳곳에 하중도와 우각호가 형성되어 있으며, 강 하구에는 삼각주가 발달하였다.
기후는 우리나라의 최한랭지대로서 한서의 차가 매우 큰 대륙성기후지역이다. 1월평균기온 -20℃ 내외, 8월평균기온 18~20℃ 내외, 연평균기온 4~6℃ 내외이다. 연강수량은 500~700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가 적은 곳이다. 강 유역은 대부분 임산자원이 풍부한 임야지역으로서 두만강 재(材)라 불리는 뗏목이 특히 유명하다. 강의 결빙기(11월 하순에서 3월 상순까지)를 피하여 서두수와 석을수의 합류점에서 하류인 회령까지 목재를 유송(流送)하였으나 무산선과 백무선 등 삼림철도의 개통으로 육지로의 목재운송이 편리해졌다.
예로부터 두만강은 대륙교류의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중국·소련의 세력 각축장인 동시에 완충지대로서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17세기 중엽 강북 쪽의 40~80㎞에 이르는 지역이 조선과 청나라 간의 완충지대로 설정되었으며, 1860년(철종 11) 러시아·청나라 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에 의해 청나라로부터 연해주를 할양받음에 따라 두만강 하류 16.5㎞에 달하는 지역이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게 되었다. 19세기말에는 청나라와의 국경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이때 청나라는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東爲土門 : 정계비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국경을 정함)이라는 백두산경계비를 토대로,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측은 정계비의 동쪽 계곡의 물인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흘러들지 않고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을 통해 흑룡강으로 유입한다는 사실을 들어 감계담판(勘界談判)을 하였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때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에 따라 '석을수(石乙水)로서 양국의 경계로 함'에 우리 민족의 합의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성명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경북도 부령(富寧)에 두만강 물을 수성천(輸城川) 유역으로 흐르게 하는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소가 건설되어 2만 8,000kW의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이 강에는 모샘치와 비슷한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두만모재[豆滿砂魚]를 비롯, 산천어·연어·송어·열목어·황어·잉어·빙어 등 40여 종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유역 내에서는 쌀·보리의 재배가 거의 불가능하고, 감자·귀리·아마 등의 특수작물을 많이 재배한다. 두만강 중·상류 지역은 한대 침엽수림대의 원시림이 풍부한데 대체로 침엽수가 76%, 활엽수가 24%를 차지한다. 이 강은 중국·소련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국경하천으로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이 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하였으며 민족수난의 역사를 안고 있는 강이기도 하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짓는 뱃사공은 없고 강을 따라 중국의 제지공장과 각종 오염유발 공장들이 세워져 폐기물로 오염된 강물은 고기조차 실지 않는 탁류가 흐르는 물위에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지 하는 중국정부에서 뗏목처럼 만든 모터보드 몇 대가 관광객들을 태워주고 있다.
강가의 상점에서 틀어놓은 두만강 뱃사공 노래음악을 들으며 우리들은 막걸리 한잔으로 회한에 젖는데 강 건너 북한에는 옥수수 밭을 매는 농부들이 가끔 허리를 펴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달래는 듯 하다.
두만강이 국경이 되어진 북한 땅 50미터도 채 안되는 상류에는 아이들도 건너와서 조선족들이 그들을 위해 밥을 지어 밖에 내다 놓으면 먹고 간다고 한다. 이토록 우리조선족은 그래도 내 민족이라고 북한동포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도와주려고 여러 방면으로 애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너다보이는 북한의 혜령땅은 높은 산이 많은데 산에는 나무가 전혀 없는 민둥산이었다. 이 산을 모두 개간하여 곡식을 심었으나 너무 황패한 땅인지라 산등성이에는 풀조차 자라지 않는 황무지고 구릉진 습지나 산자락 밑에만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지 파란색으로 보인다.
저 넓고 경사진 산을 개간하고 농사짓느라 얼마나 피땀을 흘렸을 것이며 그나마 곡식이나 잘 자라 주었으면 좋으련만 힘만 들었지 소득이 없으니 그들의 기아를 물어보지 않더라도 알 일이다.
그나마 우리의 70년대 같지만 중국 땅에는 기름져 보이는 땅에 녹색으로 펼쳐있는 들판에서 북한의 민둥산을 바라보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찹찹한 마음으로 멀어져가는 북한을 뒤로하고 연길공항으로 향했다,
중국 대륙이 꿈틀거리고 있다.
대륙의 만만디 기질 때문에 한 시간이나 연착된 후에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심양으로 향해 하늘을 날아 저녁노을을 가까이서 받으며 우리 민족이 둥지를 튼 연길을 떠났다.
늦은 시간 심양공항에 내려 우리일행은 바로 북한에서 운영하는 칠보산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예전 같으면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던 곳일 터인데도 이젠 오히려 친근감마저 든다. 종업원들의 가슴에 달은 인공기가 새겨진 뱃지를 보면서도. 역시 우리들은 한 민족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라 그런 걸까?
심양의 밤은 깊어가고 피곤을 느끼는 데도 독한 중국의 곡주를 마시며 애써 조국이란 단어들을 곰씹어 본다.
버스를 타고 본계로 이동한다. 차창을 여름비가 적시고 있다. 넓은 평야와 작은 야산을 지나며 차창밖에 끝없이 이어지는 밭에는 옥수수가 한참 자라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보이는 작물은 옥수수 밭이고 간혹 논의 벼가 자라고 있는 것도 보이나 농작물은 옥수수가 전부였다.
비가 내려 사람들이 밭에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농가나 마을이 얼마 없는데도 밭은 온통 드넓고 땅이 기름져 보였으며 옥수수도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왜 하필 옥수수만 심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 많은 옥수수 밭에는 풀 한포기 보이지 않게 말끔히 김매져 있다는데 더운 의아했다. 우리는 조그만 텃밭을 아무리 부지런히 잡초를 뽑아도 무성하게 자라는 풀이 있어 힘들 지경인데 이 넓은 밭을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옥수수를 재배할 수 있는지 정말모를 일이었다.
제초제를 썼더라도 이 드넓은 평야를 한꺼번에 다 뿌릴 수 없는 노릇이고 약을 뿌린 흔적이 남게 마련이며 이 곳 땅이 좋아 곡식만 자라고 풀이 안난다고 보기에는 이치가 맞지 않는다.
또한 이야기하기를 중국 사람들은 성품이 만만디로 게으르다 했는데 이 드넓은 땅을 김을 매서 이렇게 가꾼다고 보기도 어려워서 현지 가이드에게 물으니 농민들이 다 뽑아서 깨끗하단다.
중국은 공산주의 경제를 자본주의 경제로 수정하면서 땅만은 국가소유로 하고 있다고 했다.
땅이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필요하거나 지방에서 필요로 하는 건설사업 등은 언제라도 시행할 수 있어 거침없이 시행한다고 했다. 인민들이 필요 한만큼의 땅은 국가로부터 임대하여 사용한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 합당한 임대료는 지불하여야하며 국가는 인민들의 땅을 개인재산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관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만큼을 관리할 수 있도록 권리를 주고 있어 이렇게 많은 농사를 지을 수 있단다.
농사를 지어 수확하면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연변의 조선족자지구역에는 오히려 빈집과 버려진 밭이 많이 보여 불투명한 미래를 보았으나 이곳농촌은 희망이 움트고 있는듯하게 낌이 있다.
야산의 자락마다 아주적은 땅도 개간하여 옥수수가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것은 농민들이 국가로부터 임대받은 농토 외에 인근의 산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것을 자연과 도로에 피해가 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정부에서도 묵인해 주기 때문이란다.
앞으로 머지않아 세계는 식량이 무기화 될 수도 있으니 생명의 기본인 농사야말로 무기를 생산하고 저장하는 것과 같아 농업을 진흥시킨 나라가 세계를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본계에서 동양에서 가장 큰 물이 흐르는 동굴인 본계수 동굴을 갔다.
그곳에도 수천의 각국 관광객이 들끓는다. 경제를 활성화 시키고자 관광사업을 개발하여 정부와 국민모두가 돈벌기에 중국대륙 어디를 가나 혈안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
늦은 봄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우중 관광이란 그다지 내키지 않고 청승맞은 일이지만 비대신 거대한 석회암 동굴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석수를 맞으며 모터보드를 타고 동굴 안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동굴 안에는 다른 세상으로 이어진다.
수천 년을 흘러내진 석수가 기기묘묘한 모형의 조각품을 만들어낸 석회암의 군대를 사열하며 수 십대의 모터보드는 수천 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2시간을 돌아 나오는 행렬 속에서 감탄의 환호성이 동굴 속 굉음이 되어 메아리친다.
늦은 시간 압록강으로 가기위해 단동으로 출발했다.
압록강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면서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 925.502㎞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이다. 국경하천으로서의 길이는 806.503㎞이며, 유역면적은 6만 3,160㎢인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 속하는 유역면적은 3만 1,226㎢, 중국에 속하는 유역면적은 3만 1,934㎢이다. 양강도 김형권군의 남쪽에 솟은 명당봉(明堂峰:1,800m) 북동계곡에서 발원해 지경천(地境川)·웅이강(熊耳江)을 합치면서 북류한다. 혜산시 강구동에 이르러 백두산 장군봉 남서계곡(지금까지 알려진 압록강의 발원지)에서 발원한 보혜천(普惠川)과 합류해 서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감입곡류하며, 삼수천·장진강·후주천·후창강을 합류한다. 다시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부근에서 유로를 남서쪽으로 바꾸어 중강천·호내강·자성강·삼풍천·장자강·위원강·초산천·충만강·동천·남천·영주천·구곡천·합수천·당목천·삼교천을 차례로 합한 뒤 평안북도 용천군 진흥노동자구 남쪽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의 명칭은 〈신당서 新唐書〉에 "물빛이 오리 머리색과 같다 해 압록수(鴨綠水)로 불린다"는 기록에서 유래하며, 〈삼국사기〉에는 압록수(鴨 水)로, 〈삼국유사〉에는 압록(鴨綠)·안민강(安民江)으로, 〈고려사〉에는 압록강(鴨綠江)·마자수(馬 水)·청하(淸河)로, 광개토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당서 唐書〉에는 염난수(鹽難水)로,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는 대총강(大摠江), 〈대동수경〉에는 대총강(大總江)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야루[鴨綠]로 불리며, 중국 쪽의 주요지류는 훈장 강[渾江], 아이허 강[ 河] 등이 있다. 그리고 지류의 호칭은 하(河:7개소)·강(江:3개소)·강(溝:66개소)·자(子:5개소)·수(水:1개소)로 표기하고 있다.
압록강 우리의 영산 백두산에서 발원한 세 물줄기 그 하나는 송화강이 되어 중국으로 흐르고 하나는 동으로 흘러 두만강을 만들고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을 이루어 지금은 중국과의 국경을 만들고 신의주에서 황해에다 몸을 합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압록강철교가 보인다. 6.25침략을 마무리하기위해 유엔군이 난공불락의 철교를 여러 번의 시도로 폭파시킨 철교의 반절부분과 교각 다섯 개가 서있는 윗자리에 다시 중국과 북한이 합작하여 놓여진 중조우호교가 같은 모양으로 건설되어 중국과 북한의 국경교량으로 이용되고 있고 끊어진 다리는 그대로 두고 역사의 흔적을 관광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다리는 배들이 다닐 수 있게 가운데 부분을 부산의 영도다리처럼 들어올릴 수 있게 되어있음을 기계설비로 볼 수 있으며. 조금 위쪽에 강물이 양 갈래로 갈라진 가운데 섬인 위화도가 보인다.
강물은 때마침 내린 비로 흙탕물이 불어나 넓은 강폭을 거대한 기세로 흐르고 있는데 강물 속에는 가끔 사람들의 머리가 불쑥 불쑥 나오는 나왔다 잠기어 놀랐는데 이곳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즐긴다고 한다.
강 건너 땅은 북한의 신의주이며 조선소가 보이고 강가 갈대숲 근처에는 압록각이 쓸쓸히 버티고 있는데 비가그치고 물안개 피어오른 강가에는 북한 아이들 수십 명이 고기를 잡는 듯 강가 갈대숲을 혜지여 열심히 움직인다.
문우들은 긴장하며 유람선에 올라 누구라 할 것 없이 북한 쪽만을 바라보며 아무 말들이 없다.
유람선은 미끄러지듯이 황토 물을 가르며 중국 쪽 나루터를 빠져나가 북한 쪽 강가로 접근한다.
고기 잡던 아이들이 우리들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고기잡기에 열중이다. 어구도 벌로 보이지 않는데 갈대숲을 휘젓는 모습이 안쓰럽고 벌거벗은 몸이 왜소하여 가여워 보인다.
조선소가 있는 입구 강둑에는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옹기종기 서있고 그중에는 우산 같은 모형의 어망을 물에 집어넣었다 올리기를 반복한다. 물고기가 별로 없는지 빈 그물만 올려지는데 그들이 우리들을 보자 손을 흔든다.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갑습니다.” 를 외쳐댔다. 마침 출항준비를 하던 허름한 어선 같은 군함 갑판에 오른 북한 여군과 남자군인이 뒤섞여 있다가 우리들을 지척에서 마주보게 되자 군인들이 손을 흔들며 반갑습니다. 라고 하니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 같은 기분으로 들뜨게 하는데 더 좀 가까이 갔으면 했지만 유람선은 벌써 뱃머리를 돌려 회항하고 있다.
처음에 는 모두들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사진이라도 찍어 남기려고 했으나 누구하나 카메라 셔터도 못 누르고 가슴 뛰는 것만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배위에서 여인의 통곡소리가 난다. 여류한분이 선상에 쓰러져 몸부림치며 오열을 토한다. 무슨 영문인지는 곧 알게 되었다. 그의 친정아버지가 북한에 있단다. 그러니 피토하는 아픔의 절규를 어찌 막을 수 있었겠는가....
뒤돌아 오는 우리들을 따라 북한 군함이 따라오며 누리끼리한 군복에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여군들이 마지막 작별의 손을 흔들며 그들은 위화도 로 방향을 잡고 올라가 버린다.
위화도
압록강 하구에 퇴적작용으로 생긴 산각주로 총면적이 11.2㎢가되며 여의도(8.5㎢)보다 큰 섬으로 강물이 양 갈래로 갈라진 가운데 있는 섬이 위화도 또는 회군도 라는 그 유명한 이성계가 북벌을 목표로 출병하여 군사들의 진지를 구축했던 곳으로 이성계가 정권을 탈취하기위하여 군사를 다시 남으로 돌려 도성을 함락하고 태조가 된 역사의 전환기를 만든 곳이기도 하다.
14세기 중반 이후 원나라가 쇠하고, 명나라가 세워지는 등 대륙정세가 변화했는데, 고려는 공민왕의 반원정책(反元政策) 시행 이후 친명외교를 표방하면서도 북원(北元)과 외교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명나라는 요동지방에서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점차 고려에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명은 1388년 3월에 이르러 철령 이북의 땅은 원래 원의 영토였으므로 명에 속해야 한다며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역참(驛站)을 설치하고자 관리를 파견했다. 이에 고려는 최영과 우왕이 중심이 되어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4월에 최영을 8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전국에서 좌우군 3만 8,830명, 수송대 1만 1,634명, 말 2만 1,682필을 동원하고, 우왕이 몸소 평양까지 나아가 군대를 격려했다
북방정벌군의 최종 집결지인 위화도에서 전진기지의 진을 치고 진격명령만을 남기고 있을 당시 이성계가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위화도에서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 최영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이것으로 요동정벌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 당시 회군을 하지 않고 변방을 수비하고 북진정책에 호응했다면 우리나라 지도를 너 넓게 그릴수도 있었으련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지금 이 섬은 북한소유로 되어있는데 북한과 중국의 합작으로 대단위 관광사업을 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져 추진 중이라는 말도 있다.
아픈 가슴의 여한을 담고 다시 심양으로 돌아와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잠을 청한다,
중국은 속은 넓으나 밖은 좁다
이곳 심양은 누루하찌가 창건한 청나라 도성으로 중국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인데 이곳역시 우리 조선족이 뿌리내려지고 우리의 거리가 있고 우리글이 통하고 있다. 평양식당도 있고 우리 민족이 운영하는 식당도 상점도 즐비하니 우리들의 어깨는 대륙에 와서도 처질 필요가 없으니 가슴 벅찬 일이다.
북경으로 이주하기전의 찬란했던 고궁을 둘러보며 그들의 긴 역사를 음미해 본다.
갑자기 비가 흩뿌려 고궁을 관람하기위해 건물사이를 뛰어 다니면서 중국의 건축양식에서 그들의 심성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건물 천체의 색체 미와 대륙적 기질의 웅장함에는 찬사를 보낼 수 있으나 단순하고 획일적이어서 일자 눈썹 같은 지붕의 선과 꼬리 깃 빠진 봉황처럼 짧은 처마 끝은 집주인의 후덕함이 모자람을 보여주는 듯 하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나라 고궁을 설명한 가이드의 말과 같이
“우리나라 고궁건축양식은 중국에 영향을 받아 중국의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그러나 전혀 같지 않았다. 우리나라 고궁건축물의 지붕 선을 보라! 하늘로 비상하려는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편 듯 하지 않은가, 그리고 처마 끝은 비가 내리면 지나가던 나그네도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긴 처마 끝이 보호하는 댓돌에서 또는 툇마루에서 비를 피하가 가도록 배려한 후덕함을 볼 수 있다.
집 주인만을 위한 집이 아니라 지나가던 길손이라 할지라도 모두 공유할 수 있도록 배려한 건축양식이 동서양 어디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미덕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선의 미학과 안을 좀 좁게 쓰더라도 밖을 배려함은 더불어 사는 모두를 위한 넓은 처마 끝의 포옹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홍익인간을 표방하여 마땅한 민족이기에 거대한 중국대륙에서 조국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끝.
첫댓글 아 내 조국이여! 글이 길어 그냥 돌아서려다 읽기 시작했는데 송화강이 불어나는 이유며 풍비박살난 한국의 노총각들의 고심을 읽고 결심했습니다. 내일은 꼭 민족의 영산 백두산부터 읽겠습니다.
용정 제가 자라난 곳입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제 살던 곳 큰 길건너 우물까지 연상이 됩니다. 다음엔 두만강은 푸른 물이 아니다. 를 읽을 것입니다.
돌박사님, 자상하게 올려주신 긴 기행수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직접 다니면서 구경을 했다한들 저는 절반고 기억하지 못했을 것을. 더우기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역사까지 겻들여 주신 부분 부분에선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습니다. 돌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뜻밖에 내용도 알게돼서 기쁨니다. 잘읽었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