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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묵상글 (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 주님의 벗.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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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벗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12,4)
주님 곁에 있으니
주님의 벗
주님과 함께하니
주님의 벗
주님을 따르니
주님의 벗
주님을 닮으니
주님의 벗
주님처럼 사니
주님의 벗
주님처럼 죽으니
주님의 벗
주님과 영원히
주님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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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는, 나는, 귀한 존재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귀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도 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귀하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어찌 제자들 곧 우리가 귀한지 생각해봅니다.
귀하다는 의미를 생각해보니 대략 세 가지였습니다.
고귀하다. 그러니까 미천하지 않다.
가치 있다. 그러니까 하찮지 않다.
희귀하다. 그러니까 흔하지 않고 희소가치가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참 미천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부르듯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지극히 높으신 데 비해 우리는
땅에 살고 미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밤새도록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지요.
‘당신은 누구시오며 벌레만도 못한 저는 누구이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자신을 느끼게 되고 또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고 고귀하게 여기시며,
그래서 하늘에서 이 땅에까지 내려오셔서 눈높이를 맞추는 사랑을 해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당신 신성에 참여케 하십니다.
신적인 사랑을 하면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자기를 비하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감도 느끼며 자기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가 고귀하지 않기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에 고귀한 줄 모르고 비하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고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은
또 우리를 무가치하게, 하찮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가치란 값어치의 뜻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무가치란 값어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참새는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릴 만큼 값어치가 없지만
사람은 그렇게 값어치 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값을 매겨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나
참새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께 우리 인간은 흔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리 인간이 많아도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유하고,
그러기에 우리는 흔하거나 도매금으로 팔릴 수 없는 존재로
하느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 제자들을 당신의 벗이라고 하시며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 인간아’하고 부르시기도 하지만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시고 부르시며
당신 사랑의 파트너요 벗으로 말을 건네십니다.
우리는, 나는,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요 대화의 파트너입니다.
그러니 귀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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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너희는 그 참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루카 12,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전도여행 중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위하여 교육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 입니다. 곧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루가 12,1)는 것과 그들로부터 장차 어떤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한 분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12,2-7)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내용만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5)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신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죽은 뒤의 권한까지 가지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당신께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나 정치지도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만을 진정 사랑으로 두려워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두려움을 <히브리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느님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 대한 두려움은 순결하고 영원히 남는다.”(시편 18,10)
그래서 <집회서>와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편 111,10)
이처럼, 성경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루카 12,5)고 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7)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그 참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루카 12,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목숨을 바쳐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핍박이 닥친다 하더라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하되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되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두려워하지 말라.”(루카 12,7)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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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요?
무엇인지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하고,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면 조바심이 나고,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고요를 찾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하소연도 감사도 침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기도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서운함 없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루카12,7)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주님은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그들의 내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떤 것을 아는 체, 가지고 있는 체하기 때문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만져놓고서는 향내가 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변하지 않고 겉꾸민다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들은 바를 가슴에 새기고 또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본당 생활을 하다 보면 피정이나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겸손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더 교만해지고 뻣뻣해지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됩니다. 받은 은총을 말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총을 받았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삶의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21,2).“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만큼 삶의 모범을 드러내야 합니다. 은총을 증거 하지 못한다면 바리사이의 위선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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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약하냐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큰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두려움이 적습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장면들이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와 어부들입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때의 두려움은 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있는 쥐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풍랑을 마주한 제자들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우리의 삶에는 시련과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기 마련입니다.
세 번째는 물위를 걷던 베드로입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의 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근심과 걱정’입니다. ‘미득선수실(未得先愁失) 당환이작비(當歡已作悲)’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근심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쁨이 먼저 떠나간다는 뜻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네 번째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입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허망하게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4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셨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죄가 커서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편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창에 찔리시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제도를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을 걸었던 분들을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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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어제 ‘그동안의 예언자들이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셔서인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위로하십니다. 매우 미안하셨나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어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주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바리사이들이 범하는 악행을 조심하고 그들을 닮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악행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스승으로 불리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많은 교만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그들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길을 막고서는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 즉 선함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까지도 막아섰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시고 또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면 차분한 시간에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십시오. 혹은 노트에 그간의 일들을 써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셨던 발자국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어놓으신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오늘 하루 잘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개성주악
개성주악이라고 들어보셨을까요?
찹쌀가루에 멥쌀가루나 밀가루를 섞은 뒤 막걸리나 소주를 넣고 반죽하여 둥글게 빚은 것을 기름에 지진 뒤 조청, 꿀등을 이용해 약과처럼 집청해서 만든 한과의 일종입니다.〔나무위키〕
재료나 조리법은 딱 현대의 도넛을 생각나게합니다. 물론 생긴 모양도 도넛과 비슷합니다. 집청까지 해 놓으면 마치 도넛에 시럽으로 글레이즈 입힌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아직 못먹어봤습니다.
먹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꼭 개성주악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도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까요?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작더라도 혹은 크더라도 꼭 도전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늘 도전이라는 신선한 바람이 우리 즐거움을 선물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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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올해 11월 16일이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접고 대신 주님 안에서 평화와 위로의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수능을 생각하다 보니, 요즘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때 이런 말을 선생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사당오락’ 네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불합격한다는 말입니다. 참, 이런 말도 있었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남편) 얼굴이 바뀐다.’, ‘공부 안 하면 거지 된다.’, ‘이 교실에 앉은 애 중 태반은 남의 들러리로 살 게다.’
실제로 많은 학생이 잠을 줄여가면서 또 하고 싶은 것도 꾹 참으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는 취업 공부에 진입하게 됩니다. 취업에 성공한 뒤에도 끝이 아니지요. 이제 직장에 들어가 승진 시험 속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행복의 실체 안에서 행복과는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고 말하는 많은 젊은이를 봅니다. 행복은 언제 올까요?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행복은 체험이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행복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더 자주, 더 쉽게 행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스펙을 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종잣돈을 모으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적금을 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재테크에 뛰어들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불합리한 일과 고된 노동을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복을 찾기 위해 지금 전혀 노력하지 않고, 또 지금 행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과연 그런 준비를 했다고 미래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막연한 미래가 아닌 확실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살펴볼 수 있어야 지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육신이 죽은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시지요.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대상은 하느님보다 결코 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뛰어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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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낙관적인 사람은 고난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에서 고난을 본다(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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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0.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오늘 복음중 다음 말씀은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 믿는 모든 이를 주님은 벗이라 합니다. 공관복음을 통틀어 여기서만 제자들을 벗이라 말합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벗이란 말마디가 너무 고맙습니다. 그러니 벗인 예수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벗인 주님과 우정의 여정중 우정이 날로 깊어지면서 두려움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말마디인지요! 여기 요셉 수도원의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 성심상은 수도원을 찾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예수 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나다”, 바로 주님인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추호도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23장 1절,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는 첫 구절입니다. 일부 말마디를 바꿔도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불안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그러니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목자이자 벗이기도 하니 이런 주님과의 우정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요! 마태복음 마지막 구절도 은혜로이 기억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포위되어 사는 지요. 두려움과 불안은 우리 인간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두려워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눈덩이처럼 커지는, 증폭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성서에도 무려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가 365회 나옵니다.
주님은 일년내내 하루하루 날마다 우리를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십니다. 제가 고백상담시 보속으로 자주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 여섯째 숙부께서 임종전 1주일 동안 꼭 붙잡고 지냈던 성구이기도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도와 준다. 정의의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준다.”(시편41,10)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언젠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사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도 옛 성현(聖賢)들처럼 늘 신독(愼獨)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행을 삼감”이란 신독(愼獨)의 뜻이 참 좋습니다. 이어 거침없이 쏟아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정말 두려워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최악의 적이 아니라 조만간 맞이할 자연스런 삶의 결과일 뿐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옥에 던지시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시키기로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옥은 하느님 탓이 아닌 스스로 선택함으로 자초한 재앙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니 사람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건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敬畏)의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런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괴물같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말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하느님을 경외할 때, 두려워할 때 비로소 주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새삼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 성심상 배경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산, 불암산이 흡사 우리의 영원한 배경이신 하느님을 연상케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그대로 주님의 육성을 듣는 듯 합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입증하는 말씀입니다. 몰라서 우연이지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아이들에게 많이 선물했던 책중 하나가 “눈속에서의 삼개월”인데 거기 나오는, “나뭇잎 하나도 하느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한구절이 지금도 생각나는 데 오늘 복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눈속에서의 삼개월”과 더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참 많이 아이들 생일때 선물했던 책입니다.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신망애(信望愛)의 하느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두려워하느냐?” 질책후 예외없이 이어지는 말씀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여정에 항구할수록 무지의 어둠도, 무지에 의한 두려움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바로 그 좋은 본보기가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의 찬사를 받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셨습니다. 하느님께 의로움으로 인정받는 믿음을 지닐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해방입니다. 하느님께서 행위와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다윗은 시편(32,1-2)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이런 의로움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도록 도와 주시어 우리 모두 의로운 삶, 두려움 없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이 즉 신망애(信望愛) 하느님을 경외함이 두려움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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