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28. 큐티
마가복음 13:28 ~ 37
인자가 올 때에 깨어 있으라
관찰 :
1)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배울 교훈
- 28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 여름은 히브리어로 종말과 같은 의미이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는 말씀은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 이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라는 것이다. 종말이 다가옴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종말을 잊고 사는 인생은 그렇기 때문에 허망한 마지막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무화과나무를 무리하게 이스라엘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때에 대해서 분별하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를 언급하신 것이다.
- 29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주님은 분명히 이 말씀이 때에 대한 것임을 밝히시고 계시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독립이고, 1947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것이 말세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 때 언급하신 것에 대한 성취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러한 해석을 따르곤 한다.
- 3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 예수님은 말세에 대한 예언이 분명히 성취될 것임을 또한 강조하시고 계시다.
- 31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말씀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취되는 말씀이고 변함이 없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증명해 주시는 말씀이다.
- 32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날에 대해서 주님은 그 주권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는 것을 알리시고 계시다. 그 때는 천사도, 성육신 하신 예수님도 모르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다. 예수님은 이 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계시다. 그것은 성육신 상태에서의 자신의 한계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시대 말세의 때에 대한 징조를 통해서 그 즈음을 알 수는 있지만 정확한 시간을 언급하는 것이 예수님도 인정하신 한계를 넘어서는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33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최선이 된다.
2) 깨어 있으라
- 34절 ~ 36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 주인이 더디 올 것이라 생각하고 제 마음대로 주인의 소유를 다루는 악한 종은 반드시 징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멀다고만 생각하는 잘못된 지도자들의 최후를 말씀하신다. 이들은 외식하는 자,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받는 징계를 동일하게 받게 될 것이다. 주님이 바로 “화 있을진저”라고 하신 바로 그 저주이다.
- 37절.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 깨어 있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것은 몇몇에게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가르침 :
1) 말세의 징조에 대해서는 경종을 울리듯이 늘 경계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날짜가 정해졌고, 그 날을 준비해야 하는 차원의 종말론은 언제나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종말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차원의 신앙은 바른 신학이고, 바른 신앙이다.
2) 정확한 그 날과 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누구도 그 날과 시를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시기를 하나님이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대략적인 것을 통해 미리미리 준비하도록 하신다. 혹시 아직 멀리 남았을 것이라 생각하여 함부로 방탕하게 지내는 종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처하는 외식하는 자들의 저주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 시대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3) 마지막 날을 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항상 그래야 한다. 요한계시록 6:17에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예수님은 사도 요한을 통해 오늘의 이 말씀을 다시금 가르쳐주셨다. 그렇기에 오늘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기도하는 자, 항상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날마다의 도전이다.
4) 그렇다면 어떻게 항상 기도하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성령충만이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관계가 망가지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기도가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식, 상사와 하사, 주인과 종, 고용인과 고용주, 성도와 성도 등등. 모든 관계에 대해서 그런 것이다.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말세중의 말세임을 인식할 때 우리의 눈 앞에 보이는 이익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세속주의의 방탕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에 마음이 둔해지지 않을 수 있다. 오늘 주님의 은혜로 현 시대를 넓게 깨닫게 되고, 또 주님의 은혜로 주님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관계를 회복해 나감으로 성령충만을 회복하고,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 있게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적용 :
1) 말세의 때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착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 시기와 때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웠는데, 두려움 없이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충성된 종이 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2) 주님이 오시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기쁨이다. 이 날을 소망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나의 중심이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이 땅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깨어있기를 소망하며,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