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알퐁소 로드리게스
스페인의 세고비아 태생으로 마요르카에서 운명한 알퐁소 로드리게스는 성공한 양모업자의 아들로서, 그가 23세 때 아버지의 가업을 상속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가업이 기울고,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죽자, 평소에 늘 염원해오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그의 나이 40세 때 발렌시아의 예수회에 평신도 조력자로서 받아 달라는 청원을 드렸다.
얼마간을 망설이던 수도회는 그를 받아들여, 마요르카의 몬떼시온 대학에 보냈다.
알퐁소는 마요르카 섬의 팔마라는 곳에 파견되어 그곳 수도원에서 40년간 문지기 수사로 지냈다
따라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로드리게스수사와 접하게 되자, 점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의 충고를 유익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1531년 7월 25일, 스페인의 세고비아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을 아버지로 가진 그는 소년 시기를 보내고 이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이에는 수명의 귀여운 자녀도 있어 오붓하고 단란한 생활을 계속 했는데,
이와 같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들에게도 오래지 않아 하느님께서 안배하신 혹독한 시련의 손이 미쳤다.
우선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불운은 시작되고, 연달아 귀여운 자녀들이 죽어갔다.
사업도 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로만 돌아가니, 실로 아득한 절망만이 그에게 남아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악마는 사람을 유인하려 날뛰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유혹을 물리치고 과감하게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었다.
"주여!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렵니까? 그러시다면 내 몸까지도 당신께 바치겠나이다."
이리하여 알퐁소는 즉시 발렌시아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을 찾아가 원장을 만나 입회의 승낙을 받았다.
이미 나이 40이요, 라틴어에 소양도 없는 그는 사제는 바랄 수 없고, 평수사밖에 될 수가 없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가혹한 시련 중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겸손의 마음이 더욱 깊어졌으므로
원장의 그러한 결정에도 역시 아무 불만없이 감사하게 따랐다.
반년 후 알퐁소는 마로루카 섬의 팔마라는 곳에 파견되어 그곳 수도원에서 40년간 문지기 수사로 지냈다.
전에는 손꼽히는 큰 상인으로 뭇사람들의 선망을 샀던 그가 이제는 현관을 드나드는 사제와 일반 수사들 앞에서 무릎을 끓어 강복을 청하며, 방문객에게 몸을 굽혀 공소히 안내하며, 거지에게도 공손히 친절을 베풀며, 때로는 은혜를 망각하고 무례한 언사를 퍼붓는 자의 모욕에도 개의치 않고 공손한 마음에서 기쁘게 참고, 그 모욕을 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와 희생으로 바쳤다.
실상 그런 태도는 각별한 인내심에서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어느덧 그의 성덕은 세상에 널리 떨치게 되었다.
즉 그를 접해 본 사람들은 웅변을 토하는 사제보다 오히려 그의 꾸밈없는 태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짤막한 말들은 놀라운 하느님의 예지가 빛난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의 교훈을 청하고 기도를 간청했다.
그들 중에는 국가의 원수(元首)로부터 고관과, 거상이며, 심지어는 대주교, 주교같은 고위 성직자까지도 끼어 있었다.
특히 학생으로 있던 성 베드로 클라베르는 자주 그와 이야기했고 많은 충고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팔마 수도원의 원장까지도, 신학의 소양은 없으나
성령의 비추임으로 탁월한 초자연적 지식을 간직한 알퐁소를 존경하며 열심히 권유해 책을 저술하라고 했다.
’수덕지남’과 그의 자서전은 그때 쓴 것이다.
이런 서적에서 그의 겸손된 마음속에 간직된 위대한 예지의 빛을 엿볼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알퐁소는 백발노인이 되어 위장병을 얻었고 그 고통을 달갑게 참았으나, 마침내 1617년 10월 31일에 세상을 하직했다.
제랄드 멘리 홉킨스의 시(1930년) 속에는 성 알퐁소 로드리게스를 찬양하는 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