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말발이 예전만 못하다
[ 시민언론민들레 | 박병환 칼럼 mindle@mindlenews.com ] 2023.04.07 15:48
2001년 미국 본토를 겨냥한 사상 초유의 9‧11 테러가 발생한 직후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미국에 협조하지 않으면 테러분자 편으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미 10년 전인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하자 국제정치에서 양극 체제는 사라지고 미국의 일극 체제가 들어섰다. 그랬던 미국의 모습이 달라졌다. 2023년 현재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도전에 응전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를 규탄하는 유엔 총회의 결의 채택에 회원국(193개국)의 절대다수가 찬성하였으나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시아 제재 캠페인에 동조한 나라 수이다. 미국에 동조한 나라는 49개국으로서 국제사회의 1/4 수준이다. 대부분은 소위 서방 진영 국가들인데 그나마도 나토 회원국인 튀르키예와 미국의 맹방인 이스라엘은 국익을 이유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최근 일본은 러시아산 원유 상한가 제재에 대한 예외 인정을 관철하였다. 또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마당에 중국과의 협력은 어떻게 하든지 유지하려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국가 정상들의 베이징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도 러시아의 침공 자체는 비난한다. 하지만 러시아에 실질적 고통을 주는 조치를 취하는 데는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들은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있으나 사실은 우크라이나를 희생하여 러시아의 약화 나아가 붕괴를 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독립하여 역사적 유산으로 반서방 노선을 취한 결과 1960~70년대 냉전 시절 소련과 가까운 사이였던 국가들의 경우, 러시아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국제회의에 러시아의 참석을 막는 것도 미국 뜻대로 되고 있지 않다. 지난해 11월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인 인도네시아는 서방의 보이콧 압력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을 초청하였다. 푸틴 대통령이 참석하진 않았지만 푸틴 대통령의 참석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는 쉽지 않음이 드러났다. 지난 2월 말 인도에서 개최한 G20 재무장관회의에서는 미국의 옐런 장관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비서방권 장관들이 이를 거부하였음은 물론 우크라이나 사태를 ‘전쟁’으로 규정하는 것조차 반대하였다. 의장인 인도 재무장관은 옐런 장관에게 이 자리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를 논의하는 자리라고 점잖게 논박하였다. 물론 인도는 냉전 시기 소련의 맹방이었던 관계로 러시아에 경도된 입장을 갖고 있는데 지난 수십 년간 나라가 크게 성장한 만큼 미국의 말을 순순히 따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인도는 나름대로 중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어 미국이 주도하는 대중국 견제 협의체인 쿼드(QUAD)에 참여하고 있지만 쿼드는 대중국 정책의 일환일 뿐이고 대러시아 정책은 별 개인 것이다.
미국 영향력의 상대적 쇠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브릭스(BRICS)이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등으로 구성된 BRICS는 경제력에 있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주요 7개국(G7)과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머지않아 G7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미국의 일방주의에 제동을 거는 모습이다. 미국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이용하여 달러를 무기화하자 이에 대응하여 BRICS 국가들은 회원국들(러시아-중국, 러시아-인도 및 중국-브라질) 사이 교역에 자국 통화의 사용 비중을 늘리고 있으며, 동시에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와 같은 서방의 국제결제 네트워크 대신에 독자적으로 구축한 시스템의 활용을 확대하고 있다. 나아가서 자체 암호화폐를 이용한 결제 시스템 구축을 논의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유 수출 대금 결제에 위안화 비중을 높이고 있으며, 브라질을 중심으로 남미국가들은 공동 통화 창설을 논의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미국이 러시아의 해외자산을 동결하여 러시아에 타격을 주기는 하였으나 그 여파로 외국 투자자들의 달러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달러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달러 의존을 줄이고 달러의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확산함에 따라 미국의 정책적 지렛대가 약화하고 있다.
한편 분쟁과 갈등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중동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 3월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중국의 중재로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단교 7년 만에 외교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오는 5월 수도 리야드에서 개최되는 아랍연맹 정상회의에 시리아 대통령을 초청할 계획이다. 이란과 시리아는 미국이 극도로 적대시하는 나라들이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런 행보에 미국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실제로는 이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원유 증산 요구를 지난해에 이어 최근에도 거절하고 반대로 감산 조치를 하였다. 2010년대 중반 미국이 셰일 가스와 석유를 양산하면서 중동에 대한 전략적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객관적인 사실은 그간 미국이 중동 국가들 사이 반목과 갈등을 이용하거나 조장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2023년 현재 미국은 분명 20여 년 전 미국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들의 취약점과 미국의 강점을 고려할 때 머지않아 미국의 위상이 추락할 것이라는 전망 또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미·중 간 대립 격화를 두고 요즘 학계와 언론에서 ‘신냉전’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중국에게서 과거 냉전 시절 소련과 같은 권위와 영향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의 상대적인 우위 속에 느슨한 다극 체제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불확실성 가운데 한국의 외교는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명분과 선명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위험을 분산하는 정교한 외교가 요구된다. 국제사회 판도의 전환기에서 진정으로 고차원적인 한국 외교를 보고 싶다. 그러려면 한국의 국가이익에 대해 우리 사회 내부적으로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당파적 이익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우려를 떨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