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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장 18절)
오늘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행복 버튼 두대사'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살지만, 동시에 어느 시대보다 많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일에 대한 두려움, 건강의 두려움, 관계와 사람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심지어 신앙생활에서조차 하나님을 향한 오해에서 오는 두려움이 자리합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부정적 행동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면 그 밑에는 두려움이 있다." 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성경을 보면 두려움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생겨난 반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생겨난 감정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한 직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장 10절).
범죄하기 전에는 사람에게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순간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심판자, 감시자로 보게 되었고 벌받을 것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일서 4장 18절이 말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어떤 사람이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몇 년을 숨어 지내다가 마침내 자수했는데, 그 이유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 집 문을 두드릴 때마다 자기를 잡으러 오는 줄로 느끼고 가슴이 철렁했다고 합니다.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또 다른 원인은 자기 가치에 대한 불안정입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실패를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무서워하게 됩니다. 또한 대인 관계에서 거절당할까 봐 불안해하며 사소한 일에도 쉽게 위축됩니다.
현대인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할 때,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두려움은 더 크게 발생합니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 흔한 두려움이 있는데, 바로 상대가 카톡을 읽고 답장을 안 할 때의 불안입니다. 친구가 메시지를 읽고 답을 하지 않으면 '내가 뭘 잘못했나? 나를 싫어하나? 관계가 틀어진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관계 중심 문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거절 민감성(Rejection Sensitivity)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보면 상대는 바쁘거나 깜빡했을 뿐, 문제가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교인은 교회 봉사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혹시 내가 일을 잘못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실수라도 하면 교회에 폐가 되지 않을까?'라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실패의 결과보다 수치심을 더 두려워하는 문화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교우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그의 참여를 크게 격려해 주었습니다. 교우들의 사랑과 격려를 통해 그의 두려움은 사라졌고, 그는 나중에 누구보다 더 적극적으로 교회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의 감정은 심리적, 신체적, 관계적으로 많은 폐해를 가져옵니다.
심리적으로는 만성 스트레스, 우울, 불안 장애, 집중력 저하, 판단력 약화, 자기 비난 증가, 도전 회피 등의 폐해를 초래합니다. 두려움이 오래 지속되면 뇌 기능이 약화된다고 합니다.
또한 두려움과 스트레스는 심장 박동 문제, 면역력 저하, 두통, 불면, 위장 장애, 만성피로 같은 신체적 질환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대인 관계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두려움은 방어적 태도를 취하게 하고 상대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과민한 반응을 일으켜 상대의 말과 행동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회피 또는 통제 반응을 갖게 하여, 대인 관계를 피하거나 반대로 상대를 강하게 통제하려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크게 방해가 됩니다.
특히 두려움은 신앙생활에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을 심판자로 오해하게 만들어 기도와 예배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하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증가시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두려움을 해결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물리치는 행복 버튼을 알려 줍니다. 그것이 바로 '두대사'입니다. 이 말은 '두려움 대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4장 1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온전한 사랑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부어 주신 사랑을 의미합니다(요한일서 4장 19절). 이 사랑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깊고 능력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을 때 먼저 찾아온 사랑입니다(로마서 5장 8절). 이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내가 실수하면 하나님이 벌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사람의 사랑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브리서 13장 8절). 우리가 때때로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져 실패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확신이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채우게 되면 두려움은 조금씩 밀려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그 사랑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랑을 알고 믿었다고 말합니다(요한일서 4장 16절).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이고, 믿었다는 것은 신뢰이며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고백하고 말씀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할 때, 우리 안에는 두려움 대신 사랑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우들이 하나님을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으로 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엄격하고 벌주는 분, 엄한 재판장이나 인색한 고리대금업자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 벌하려고 항상 주목하는 분인 것처럼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오해를 걷어내고 하나님의 참모습을 보여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정로의 계단, 11쪽). 우리 하나님은 벌주는 분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누가복음 15장 20-22절).
철이 없던 시절 탕자는 아버지를 엄격하고 가혹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화로 눈이 열린 아들은 아버지를 자비와 긍휼이 충만한 분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에는 탕자의 잘못을 견책하거나 조롱하는 장면이 전혀 없다. 탕자는 자기의 과거가 용서함을 받고 잊어버린 바 되었으며 영원히 그의 죄가 도말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실물교훈, 204쪽)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자비하신 아버지(로마서 8장 15절), 친절한 목자(시편 23편), 능력의 구원자, 보호자로 소개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오해하면 두려움이 커지지만, 그분을 바로 알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생각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의 일차적 원인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두려울 때 왜 두려운지 글로 적어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를 검증해 보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별것 아닌 것이 부풀려졌거나 왜곡된 요소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 때 호흡을 천천히 깊게 해 보십시오. 깊은 호흡은 편도체의 위협 반응을 낮추고 이성적 판단을 하는 전두엽의 힘을 강화시킨다고 합니다.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두려움의 대상을 마주해 보는 것입니다. 피하면 두려움이 더 커지지만, 조금씩 마주하면 두려움은 약해집니다. 이런 믿음의 작은 실천을 용기 내어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 성공을 경험하면 두려움 대신 자신감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사랑을 경험하면 두려움이 크게 줄어듭니다. 두려움을 해결하는 강력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공동체의 격려입니다. 교회 교우들의 지지를 경험할수록 내면의 불안은 줄어들고 정서적 안정감이 높아집니다.
이렇게 사랑을 경험하면 남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 불안, 원망, 상처를 풀어 주는 과정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할 때 그 상처가 치유되고 우리 내면이 자유로워지며,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생의 최고 목표를 사랑으로 삼고 살겠다고 다짐하며, 이 결단을 반복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감정이지만 사랑은 결단입니다. 불안한 상황에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확신이 없어 보일 때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선택하면 그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사랑의 능력이 두려움을 밀어냅니다. 이렇게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의술서로 널리 알려진 책이 허준의 《동의보감》입니다. 이것은 당시 모든 의학 지식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식 의학서입니다. 일본과 중국까지 전해져 지금도 한방 임상의학서 교본으로 쓰입니다. 이 책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2015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허준은 조선 중기의 의관이자 의학자였는데, 16년간의 노력 끝에 이 책을 완성했습니다.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경남 산청의 명의 유의태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하루는 그의 외아들 도지가 아버지 유의태에게 물었습니다.
"고금의 의서와 의술을 모두 통달하고도 의원으로서 더 갖출 것이 있습니까?"
유의태는 짧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사랑이다."
그리고 덧붙여 설명했습니다.
"병들어 앓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이다."
이 말에 도지는 현실적인 항변을 했습니다.
"위엄을 세우지 않고 다정하게만 대해 주면, 결국에는 약값을 깎으려 기어오르는 것이 병자들의 심성입니다."
남편의 말을 듣고 있던 아내 오씨도 아들을 거들었습니다.
"그럼 의원은 흙 파먹고 삽니까?"
그러자 유의태가 다시 대답합니다.
"의원도 의원 나름이다. 고을마다 의원을 자처하는 자가 별처럼 깔렸으나, 병자를 참으로 긍휼히 여기는 의원은 많지 않다."
유의태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허준에게 자기 몸을 해부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허준은 스승이 써 놓은 서신과 유서를 보게 됩니다.
"나의 문도 허준이가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나의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바로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라. 또 사람의 몸속에 퍼진 365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머리와 손끝과 발끝까지 퍼진 12경락과 요소를 살펴, 그것으로 정진의 계기를 삼기를 바라노라."
당시는 인체 해부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자신의 몸을 내준 스승 앞에 허준은 다음과 같이 맹세합니다.
"의원의 길에 게으르거나 이를 빙자해 돈이나 명예를 탐하지 않겠습니다."
그다음 그는 스승의 시신을 칼로 가릅니다. 이 이야기는 소설가가 그려낸 허구이지만, 사실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의원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자질은 바로 사랑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자질 역시 사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방법 중 하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됩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사랑을 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나 보호자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사람이 성장해서도 사랑을 주고받기가 훨씬 수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자랐다 해도 예수님의 사랑을 품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사람으로 자라나고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단, 그렇게 되려면 우리 내면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영적 지도자가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당신의 죄 가운데 앉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세요.“
이 말은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계속 죄를 지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짓거든 하나님께 숨기지 말고, 그 죄를 하나님 앞으로 그대로 가져가라는 뜻입니다. 변명도, 책임 전가도, 부정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경험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점차 변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읽는 기도'입니다. 정해진 기도문이나 찬양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말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삶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와 탄식, 간구와 중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듣는 기도'입니다. 조용히 성령의 음성을 듣거나 거룩한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보는 기도'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그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3장 18절).
우리는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즉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보실 때 이러한 내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단순한 활동은 우리 내면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가장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많은 성경 공부나 교회 출석, 심지어 심리 치료로도 불가능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영성훈련 지도자인 마조리 톰슨은 18세기 조용한 교회 안에서 몇 시간 내내 혼자 앉아 있곤 하던 나이 많은 농부와 어느 신부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신부가 노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려면 이 네 가지 유형의 기도가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읽는 기도와 말하는 기도 차원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듣는 기도와 보는 기도의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심리학자이자 영성 지도자인 데이비드 베너는 보는 기도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한 것이 더 많은 사랑을 품기 위한 수십 년간의 노력보다도 내 사랑을 키우는 데 더 효과적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기 위한 시간을 냈다. 그 사랑에 흠뻑 젖고 그 사랑이 흘러들어오기 위한 시간을 냈다. 그랬더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포기했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의 품에 온몸을 던지며,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면 남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참으로 귀한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날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이런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시대의 소망》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인간으로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인성이 신성과 인성을 연결시킬 하늘의 전류로 충전되기까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탄원하셨다. 그분께서는 끊임없는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으셨는데 이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시대의 소망, 363쪽)
또한 《실물교훈》은 예수님의 기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매일 아침 여러 시간 동안 아버지와 교통하심으로 하늘의 빛을 사람에게 나누어 줄 준비를 하셨다. 그는 날마다 성령의 새로운 침례를 받으셨다." (실물교훈, 139쪽)
우리도 날마다 이런 시간을 가진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는 기도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해서 곧바로 온전히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결심하지만 뜻대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에는 훈련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기도의 자리에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핀란드의 정교회 작가인 티토 콜리안더가 한 수도사에게 "수도원에서는 무엇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수도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넘어졌다가 일어서고, 넘어졌다가 일어서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섭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의 여정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평생 반복하는 과정입니다. 매일 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에는 시간마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넘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계속 성장하기를 거부할 때 죄를 짓게 된다"고 말하며, 완전함이란 헬라 철학처럼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끝없는 성장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주부 중에는 하루에 단 5분조차 기도 시간을 내기 어렵지만,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사랑이 풍성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데 기도 훈련은 필수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실천해 나갈 때, 당장은 할 수 없던 일들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예수님처럼 살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일서 4장 18절은 단순한 교리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영적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두대사', 두려움 대신 사랑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관계의 두려움, 실패의 두려움, 건강의 두려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확신하지 못하는 영적 두려움 등 수많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흘려보내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움 대신 사랑',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삶에 두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두대사', 곧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여 능히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귀한 말씀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는 '두대사'의 진리를 늘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은 더 많은 정보나 강한 의지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믿고 경험하는 삶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단순한 용기가 아니라 사랑임을 알게 하셨사오니, 그 사랑이 우리를 안정시키고, 자존감을 회복시키며,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두려움을 무너뜨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함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몸이 아픈 분들과 마음이 상한 분들에게 하늘의 치유와 위로의 은총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축복해 주시고, 이 나라를 지켜 주옵소서. 위정자들에게 하늘의 지혜와 분별력을 더하셔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도와주옵소서.
한국 교회에 약속하신 늦은 비 성령의 부흥을 허락하여 주시고, 우리 각자가 그 거룩한 사명에 온전히 헌신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크신 은혜가 다가오는 한 주의 삶도 선하게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ttps://youtu.be/ZsGmoL_GO18?list=RDZsGmoL_GO18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