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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착정(耕田鑿井)
밭을 갈고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며 평화롭게 지낸다는 말이다.
耕 : 밭 갈 경
田 : 밭 전
鑿 : 뚫을 착
井 : 우물 정
유가(儒家)에서는 성군(聖君)의 표상(表象)으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꼽는다. 두 임금의 치세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신화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가상이나 전설의 인물을 그토록 받들고 거론했겠느냐는 반론이 많다.
천하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요(堯)임금이 천하를 통치한 지 50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으로 거리에 나섰다. 그가 어느 네거리를 지날 때였다. 어린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요편(帝堯篇)과 사기(士氣) 오제본기편(五帝本紀篇)에 나오는 내용이다.
立我烝民 莫匪爾極.
입아증민 막비이극.
不識不知 順帝之則.
불식부지 순제지즉.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어린이들의 순진한 노랫소리에 요(堯)임금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마음이 흐뭇해진 요(堯)임금은 어느 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머리가 하얀 한 노인이 우물우물 무언가를 씹으면서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鼓腹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편 격양(擊壤)을 나무로 말굽 모양으로 만든 양(壤)을 땅에 세워 두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양을 던져서 맞히는 놀이라는 설이 있다.
악부시집(樂府詩集) 격양가(擊壤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日出而作 日入而息.
일출이작 일입이식.
耕田而食 鑿井而飮,
경전이식 착정이음,
帝力何有于我哉.
제력하유우아재.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백발노인의 고복격양(鼓腹擊壤)에 요(堯)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 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 버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정치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노래의 내용은 요(堯)임금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정치였다. 다시 말해서 요(堯)임금은 백성들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고 먹고 쉬는,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바랐던 것이다.
요(堯)임금의 덕택이다, 좋은 정치다 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그 노인처럼 백성이 정치의 힘을 의식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堯)임금은 자신이 지금 정치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도교(道敎)의 창시자 노자(老子)도 이런 정치를 두고 무위(無爲)의 치(治; 다스림)라고 했으며 정치론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요임금처럼 지배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정도로 정치를 잘하는 지배자를 최고의 통치자로 꼽았다.
여기서 경전착정(耕田鑿井)은 노인의 노래인 경전이식 착정이음(耕田而食 鑿井而飮)에서 유래한 말로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여 평화롭게 삶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요(堯)임금 당시 평화의 노래인 격양가(擊壤歌)의 내용이 걸작이다.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편히 쉬며, 우물 파 물마시고, 밭 갈아 밥해 먹으니, 임금의 역할이 내게 무슨 소용 있으리오(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 何有哉)”
우물을 파는데 허가 받지 않고 농사를 짓는데 간섭 받지 않고 세금조차 없으니 편한 삶을 누렸다는 얘기다.
사마천(司馬遷)은 요임금의 행적을 이렇게 적었다. “임금은 백성들과 똑같은 초가집에 살면서 방안에 장식품도 없었다. 항상 백성들의 삶에 마음을 쏟아 굶는 자가 있으면 자기도 끼니를 걸렀고 추위에 떠는 자가 있으면 자기도 같이 떨었고 죄지은 자 있으면 자기도 죄인처럼 괴로워했다.”
말하자면 위정자(爲政者)가 백성들과 호흡을 일치한 셈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치자(治者)가 있다면 누군들 격양가(擊壤歌)를 부르지 않겠는가. 치자(治者)와 백성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다. 물고기는 물의 혜택을 벗어나 살 수 없지만 자유를 누리고 살면서도 정작 물의 고마움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이 공기를 마시고 살지만 누구도 공기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이상적인 정치가 바로 이런 것이다. 드러나지 않게 혜택을 주되 생색내지 않고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자 요(堯)임금 재위 50년간 감옥에 죄수가 없었고 이웃 간 다툼도 없었고 나라에 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 그는 민정을 살피려고 미복(微服)으로 갈아입고 미행(微行)에 나섰다.
이때 한 늙은이가 멍석에 비스듬히 누워 지팡이로 땅을 쳐 박자를 맞추며 부른 노래가 바로 격양가(擊壤歌)다. “임금의 역할이 내게 무슨 소용 있으리오.”
이 구절은 배은망덕(背恩忘德)이요 비방(誹謗)의 말이 아닌가. 수행(隨行)한 신하가 괘씸하게 여겼지만 요(堯)임금은 매우 기뻐했다. 여기서 요(堯)임금이 성군(聖君)의 자질을 지닌 위대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위대성은 또 있다. 아들 단주(丹朱)가 임금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순(舜)이라는 현자(賢者)를 발탁해 살아 있으면서 양위(讓位)했다는 사실이다. 권좌에 오르면 죽을 때까지 자리를 내놓지 않고 반드시 못난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것이 치자(治者)들의 통례였다.
요순시대엔 문화도 크게 융성했다. 창힐(倉頡)이 문자를 창안한 것이 그 시대의 일이었고 오늘날 신선놀음으로 즐기는 바둑을 발명해 낸 것도 요임금 시대의 일이었다.
요(堯)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순(舜)도 엄청난 성군이었다. 순(舜)은 제위에 오르고 난 뒤에도 새벽부터 밭에 나가 농사를 지었고 물에 가서 물고기를 잡았다. 평소에 게으름을 피우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본받아 부지런하게 변해갔다.
당시 수도(首都)는 산서성(山西省) 평양(平陽)이었다. 한편 중원(中原)의 큰 골칫거리가 장마 때 황하(黃河)가 범람하는 것이었다. 황하의 물길이 매번 바뀌므로 백성들의 피해와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마침내 순제(順帝)가 현신(賢臣) 우(禹)와 함께 대대적인 치수공사를 단행하여 인류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으니 4000여년 전 일이다.
요(堯)임금 통치시대의 격양가(擊壤歌), 그러니까 땅을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선정이 베풀어지는 사회에서는 백성이 임금의 존재조차 알 필요도 없이 태평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말할 때 늘 인용되는 것이 바로 이 격양가입니다.
요즘 우리는 정반대로 통치자의 존재를 알리려 광분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덮어서 비틀고 잘한 것은 뻥 튀겨서 마치 통치자 한 사람을 위해 온 백성이 존재하는 것인 양 날뛰는 무리들 때문에 잔잔할 겨를이 없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정당하지 않은 권력을 지키고 그 권력에 깃들어 제 곳간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저들의 전방위적 준동 그 모든 것이 거대한 토건(土建)입니다. 젖먹이 아기에서 죽음 앞의 노인까지 백성의 사소한 일상 깊숙하게 권력의 갑질이 들쑤시고 들어가 돈 바람을 일으키도록 몰아치는 것입니다.
백성은 결마다 겹마다 몸서리치도록 권력을 느낍니다. 백성은 결마다 겹마다 몸서리치도록 돈의 힘을 느낍니다. 느낄수록 부질없는 소유욕망이 몸부림치기 때문에 삶은 아프고 아픕니다. 국민 멘토가 넘쳐나고 개나 소나 힐링을 떠들지만 번지는 것은 공포와 우울입니다.
우리가 이 판국에 요(堯)까지야 바랄 리 있겠습니까. 임금 힘이 미치더라도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는 삶에 자조(自嘲) 없는 나날이면 좋겠습니다. 임금 힘이 미치더라도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 먹는 삶에 자조(自嘲) 없는 나날이면 좋겠습니다. 애쓰며 사는 동안 눈물 흘릴 수야 있겠지만 스스로 비웃고야 어찌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를 비웃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 삶을 돌아보고 느껴지는 바를 추상같이 알아 차려야만 합니다. 병든 몸이 각 장기(臟器)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듯 고난에 찬 백성은 통치자의 권력을 강하게 느끼는 법입니다. 장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 이미 그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듯 통치자가 그 권력을 강하게 드러내면 이미 그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입니다.
삼자경(三字經)에서 보면 족한상심(足寒傷心)이요 민원상국(民怨傷國)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속담에 발이 따듯해야 잠이 잘 온다는 말의 뜻과 상통한다. 발은 심장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추위를 많이 타게 되고 겨울철에 동상에 걸리기도 쉽다. 그러므로 발이 시리면 잠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발이 시리면 마음이 불안해지기 때문에 족한상심(足寒傷心)이라 한다.
백성은 나라의 손발과도 같다. 백성이 살기 어렵다고 원망한다면, 이는 마치 발이 시려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프듯이 나라의 형편이 어려워 진다하여 그런 현상을 일컬어 민원상국(民怨傷國)이라 한다.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편안하게 잠잘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치세(治世)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졸면(眠)자는 눈목(目)변에 백성민(民)자를 쓴다. 요(堯)임금 시대에 불리었다는 격양가(擊壤歌)는 그 뜻을 잘 전해주고 있다.
임금 된 사람이 자신이 임금임을 내세워 백성 앞에 분별없이 나타나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은 졸군(拙君)에 해당한다.
그러나 백성이 견디기 어려워하는 현장에 동사섭법(同事攝法)하는 자세로 몸을 들어내어 애환(哀歡)을 함께하는 임금은 백성의 어버이 같다 하여 친군(親君)이라 하며, 백성의 생활실정을 미리 파악하여 믿음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는 임금을 현군(賢君) 또는 명군(明君)이라 한다.
역사는 현재를 위해서 과거사를 거울처럼 비추어 주고 있다. 졸군(拙君)치하에서 민원(民怨)이 깊어간다는 것은 마치 동상에 걸려서 잠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고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누누이 귀띔해 주고 있다.
백성이 굶주려 있고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아사상태에 놓여 있는데도 위대한 지도자 놀이나 일삼는 나라가 있다면 그런 나라를 내버려뒀던 역사는 거의 없었다.
고대(古代) 국가 중에서 하은주(夏殷周)는 훌륭하게 치세(治世)를 연 나라들이다. 하(夏)나라의 우왕(禹王)은 9년간 장마로 말미암아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었을 때 황하(黃河)를 창의적인 치수법(治水法)으로 관리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禹)의 아버지 곤(鯤)은 처음으로 순(舜)임금으로 부터 황하치수(黃河治水)의 명을 받았었다. 10년간 답사를 통하여 얻어낸 결론은 산맥 하나를 끊어서 유로(流路)를 마련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끊어야 할 산줄기에는 그의 조상 묘(墓)가 있었다. 그 묘는 왕손을 얻을 수 있는 명당으로 알려졌었다. 곤(鯤)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명을 따르자니 왕손을 버려야 하고 왕손을 얻자니 왕명을 어겨야 한다는 기로(岐路)에 서게 되었다.
곤(鯤)은 왕손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왕명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왕명을 어긴 죄로 그는 처형됐다. 순(舜)임금은 사형수의 아들인 우(禹)에게 황하치수를 다시 맡겼다.
우(禹)가 12년간 답사했던 결과 치수방략(治水方略)의 결론은 그의 아버지 곤(鯤)과의 결론과 같았다. 우(禹)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아버지 곤(鯤)의 처형 이유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 중요한 깨달음은 나랏일을 수행함에는 공과 사가 충돌하게 되었을 때에는 서슴없이 선공후사(先公後私)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는 그 순간 두 가지의 판단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겹눈동자(目有重瞳)의 혜안을 지닌 순(舜)임금은 우씨(禹氏) 문중의 명당묘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하치수 성공자에게 왕권을 넘긴다(治黃河者 制天下)는 언약을 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당묘지는 영원히 명당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치수성공을 하게 되었고 동시에 순(舜)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禹)는 공적인 일을 위해서 사심(私心)을 버렸다는 이른바 봉공기사(奉公棄私)의 표본을 후세의 교훈으로 남겼다. 이것이 곧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실천이다.
은(殷)나라는 7년간의 가뭄으로 말미암아 백성이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 기우제를 지내야 하는 사회적 소동이 일곤 했던 시대였지만 희생정신으로 백성을 구해낸 제왕(帝王)으로서 탕왕(湯王)은 아주 유명하다.
그 당시 기우제의 의식(儀式)에는 동자(童子) 혹은 동녀(童女)를 화염(火焰)속의 제물로 바치는 절차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높이 쌓아올린 장작더미 위에 동녀를 올려놓고 밑에서 불을 지르는 순간이었다. 탕왕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탕왕은 기우제를 중단시키고 그곳에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해서 말했다. “나는 백성을 편히 살게 해줄 것을 약속하고 임금이 되었다. 임금 된 내가 어린 동녀를 불에 타죽게 하면서까지 임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백성을 위해서 내가 저 기우제 불에 몸을 받친다. 그대들은 어서 불을 지르라”고 호령했다.
왕명에 따라 불을 붙였다. 화염이 치솟는 순간, 천둥이 치며 장대비가 내렸다. 비가 내려서 가뭄이 사라지고 임금도 살아나는 기적이 발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탕왕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그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정치를 펴 가고자 다음의 반명구(盤銘句)를 되뇌곤 했다.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지반명왈;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탕임금의 반명(盤銘)에 가로되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할 수 있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겠다.”고 했다.
진실로 오늘의 몸가짐은 어제보다 새롭고, 내일의 몸가짐은 오늘보다 새롭게 수양에 마음을 써야 한다. 은(殷) 나라 탕왕(湯王)은 이것을 세숫물 그릇에다 새겨서 매일 자계(自誡)의 구(句)로 했다.
주(周)나라는 문왕(文王)의 문치(文治)와 무왕(武王)의 무치(武治)가 조화롭게 승계되어 문무겸치(文武兼治)의 대성세(大聖世)를 이루었다.
기산(岐山) 남쪽 대나무 숲에서 봉황이 날아든 것으로도 유명하거니와 은(殷)의 말왕(末王)인 폭군 주왕(紂王) 치하에서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천하(天下) 인심(人心)의 2/3를 점유하는 덕망 높은 군주였다. 주왕(紂王)의 요구에 의하여 주토(周土)의 상당부분을 봉납(奉納)하고 석방되었다.
당시 천하의 인심(人心)을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은 주망설(周亡說)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문왕은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백성을 구출해낼 수 있는 상황이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천하 인심을 읽을 줄 아는 이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국토라는 것은 권력의 범주(範疇)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 인심의 향방과 더불어 그 속성을 달리하는 것임을 깨우쳐 주었다. 즉 주토를 주왕(紂王)에게 다 바친다 해도 천하의 인심이 주왕을 버리고 문왕에게로 돌아오면 그 백성이 사는 향토는 자연스럽게 주토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주(周)나라의 천하통일의 배경은 이렇게 전개됐다. 문왕(文王)의 인덕정치(仁德政治) 이념을 하늘도 감응했다는 듯이 그에게 성왕을 상징하는 봉황(鳳凰)이 날아들게 되었다고 한다. 최고지도자 의자에 봉황 그림이 그려지게 된 전통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졌다.
탕왕(湯王)이 이끄는 은(殷)나라의 초기 왕도는 호(毫)라는 지역이었다. 호(毫)는 갈국(葛國)과 이웃하고 있었다(與葛爲隣). 그런데 갈국의 왕은 방종하여 선조(先祖)에게 제례를 올리지 안 했다(放而不祀). 탕왕이 사신을 보내서 제례 올리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제물용으로 쓰일 희생(牛羊豚)이 없어서라는 것이다. 탕왕은 제수용(祭需用) 희생을 보내주었다. 그런데도 갈왕(葛王)은 또 제례를 올리지 안 했다. 그 연유를 물으니 제삿밥과 제주(祭酒)를 장만할만한 곡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탕왕은 농경인력을 보내서 경작에 힘써 곡식생산을 도와주고 술을 빚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술 맛을 본 갈왕은 백성이 빚은 술까지 빼앗아갔다. 불응하는 자는 다 죽였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자, 탕왕은 갈왕을 정벌했다.
그랬더니 그곳 백성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환영했다. 동쪽 지역을 향해서 진격하면 서쪽 주민들이 원망하고, 남쪽지역을 향해서 진격하면 북쪽 주민들이 원망했다. 어째서 우리 지역으로 먼저 진격해주지 않느냐는 원망이었다. 마치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듯이 말이다.
東面而征 西夷怨; 南面而征 北狄怨;
동면이정 서이원; 남면이정 북적원;
奚爲後我 民之望之. 若大旱之望雨也.
해위후아 민지망지. 약대한지망우야.
다산(茶山) 선생이 그의 이담록(耳談錄)에 남긴 구절 중에 천인소지 무병이사(千人所指 無病而死)라는 글귀가 있다. 이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면 병들지 않아도 죽게 된다는 뜻이다.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 耕(경)은 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가래 뢰(耒; 쟁기, 경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井(정, 경)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井(정)은 가로와 세로로 테를 짜는 일이고, 가래 뢰(耒)部는 쟁기를, 耕(경)은 논밭을 가로세로 가지런히 갈다의 뜻이다. 회의문자로 보면 뢰(耒)와 井(정)의 합자(合字)이다. 그래서 耕(경)은 밭을 갈다, 농사에 힘쓰다, 농사짓다, 노력하다, 생계를 꾸리다, 경적(耕籍;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적전을 갈던 일), 농사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밭 갈 전(佃)이다. 용례로는 땅을 갈아 농사를 짓는 데 쓰는 기구를 경구(耕具), 경작하는 과수원이나 뽕나무 밭 따위를 경원(耕園), 토지를 갈아서 농작물을 심음을 경작(耕作), 갈아 놓은 땅 또는 농지로 삼는 땅을 경지(耕地), 논이나 밭을 개간하여 갊을 경간(耕墾), 땅을 일구어 농작물을 심어 가꿈을 경식(耕植), 논밭을 갈 때의 그 깊이를 경심(耕深), 농사 짓는 직업을 경업(耕業), 논밭을 갊을 경전(耕田), 논밭을 갈고 씨를 뿌려 가꿈을 경종(耕種), 농사 짓는 일과 거두어 일을 경확(耕穫), 곡식을 심기 위하여 땅을 파 일으킴을 경기(耕起), 농사를 지음을 경농(耕農), 밭 갈고 김을 맴을 경운(耕耘),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짓는 사람을 경자(耕者), 농사 짓기와 글읽기 논밭을 갈고 글을 읽는다는 경독(耕讀), 농사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한다는 경당문노(耕當問奴), 산에는 밭을 갈고 물에서는 물고기를 잡는 생활을 한다는 경산조수(耕山釣水), 남편은 앞에서 밭을 갈고 아내는 뒤에서 김을 맨다는 경전서후(耕前鋤後), 밭을 갈고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백성이 생업을 즐기면서 평화로이 지냄을 이르는 경전착정(耕田鑿井) 등에 쓰인다.
▶ 田(전)은 상형문자로 경작지의 주의의 경계와 속에 있는 논두렁 길을 본떴다. 본디 농경지나 사냥터를 나타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논은 답(沓), 밭은 전(田)으로 구별한다. 田(전)은 밭, 경작지, 봉토(封土), 사냥, 농사일을 맡아보는 관리, 면적의 단위, 큰 북, 단전(丹田), 밭을 갈다, 농사짓다, 사냥하다, 많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논 답(沓)이다. 용례로는 밭 문서를 전권(田券), 논밭과 동산이나 시골을 전원(田園), 밭농사 또는 밭곡식을 전작(田作), 논밭에 관한 제도를 전제(田制), 논밭의 주인을 전주(田主), 농부의 집을 전가(田家), 논밭과 집터를 전도(田堵), 논과 밭을 전지(田地) 또는 전답(田畓), 논밭을 재는 데 쓰던 자를 전척(田尺), 전답의 소작인을 전호(田戶), 사냥할 때 쓰는 화살을 전시(田矢), 논밭의 넓이를 전적(田積), 위임을 받아 자기의 뜻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을 전결사항(田結事項), 전원을 무대로 하여 쓰여진 소설을 전원소설(田園小說), 논밭과 동산이 황무지가 됨을 전원장무(田園將蕪), 엉뚱한 제삼자가 힘들이지 않고 이득 보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전부지공(田夫之功) 등에 쓰인다.
▶ 鑿(착)은 형성문자로 凿(착)은 통자(通字), 凿(착)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쇠 금(金; 광물, 금속, 날붙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𣫞(착)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鑿(착)은 뚫다, 파다, 깎다, 쌀을 쓿다, 집요하게 파헤치다, 요란하게 두드리다, 자세히 따지다, 뚜렷하다, 명확하다, 확실하다, 끌(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겉면을 깎고 다듬는 데 쓰는 연장), 정, 마음 등의 뜻과 구멍(조), 새기다(촉), 상감하다(촉)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뚫을 천(穿),뚫을 찬(鑽)이다 용례로는 파서 뚫음을 착개(鑿開), 구멍을 뚫음 또는 새로 길을 들어 냄을 착공(鑿空), 구멍이나 굴을 파 들어감을 착굴(鑿掘), 장애물을 파헤쳐 길을 냄을 착로(鑿路), 벽을 뚫음을 착벽(鑿壁), 산을 뚫음을 착산(鑿山), 바위를 뚫음을 착암(鑿巖), 우물을 팜을 착정(鑿井), 샘을 팜을 착천(鑿泉), 구멍을 뚫음을 착혈(鑿穴),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는다는 뜻으로 천하가 태평하고 생활이 안락함을 착음경식(鑿飮耕食) 등에 쓰인다.
▶ 井(정)은 상형문자로 丼(정)은 본자(本字)이다. 우물의 난간을 나타낸다. 옛 글자의 가운데 점은 두레박을 말한다. 井(정)은 정성(井星), 정괘(井卦), 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우물, 우물 난간, 정자꼴, 저자, 마을, 정전(井田), 조리(條理), 법도(法度), 왕후의 무덤, 64괘의 하나, 별의 이름, 반듯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싸움터의 적당한 곳에 세워 사람이 올라가서 적진을 정찰하도록 만든 망루를 정루(井樓), 우물물을 정수(井水), 우물을 관장하는 신을 정신(井神), 짜임새와 조리가 있음을 정연(井然), 우물의 밑바닥을 정저(井底), 질서와 조리가 정연한 모양을 정정(井井), 바둑판처럼 종횡으로 된 간살이나 건물의 중앙에 있는 간을 정간(井間), 염분이 녹아 있는 지하수를 퍼 올려서 채취한 소금을 정염(井鹽), 우물에 지내는 제사를 정제(井祭), 첫 새벽에 길은 깨끗한 우물물을 정화수(井華水), 물을 긷고 절구질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살림살이의 수고로움을 정구지역(井臼之役), 우물 속에 앉아서 좁은 하늘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정중관천(井中觀天), 우물 속에서 불을 구한다는 뜻으로 어리석어 사리에 밝지 못함을 정중구화(井中求火), 우물안 개구리라는 뜻으로 세상 물정을 너무 모름을 정중지와(井中之蛙)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