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18
6월11일[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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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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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Ide1wPq7XeE
(이기범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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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열정과 사랑으로 성체성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 당신께서 담당하시던 교구 내 가장 오지 본당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워낙 시골인데다, 오랫동안 본당 사제도 없어 신자들의 어려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제 부족으로 인해 교구청에는 파견할 사제가 없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그 지역의 젊은 농부 한 사람을 뽑아 속성과정으로 사제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제로 서품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 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그러나 주교님의 마음이 영 껄끄러웠습니다. 괜한 짓을 했나 후회도 되었습니다. 속성으로 교육시킨데다, 실습조차 하지 않은 상태로 파견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은 평복 차림으로 그 본당을 찾아가 그 사제가 미사 드리는 모습을 몰래 지켜봤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교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교님은 그동안 수많은 사제들이 봉헌하는 미사를 봐왔지만, 그 사제처럼 세상 경건하고 진지하게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는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미사 드릴 때 그 사제의 눈은 별처럼 빛났고, 열정과 사랑이 가득 담긴 강론을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에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그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강복을 청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주교님이란 것을 알게 된 사제는 깜짝 놀라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강복해주셔야지, 어떻게 제가 주교님을 강복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교님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 나를 강복해주십시오. 저는 신부님처럼 열정과 사랑으로 미사를 드리는 사제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습니다.
“아니, 주교님, 한 사제가 어떻게 열정과 사랑 없이 미사성제를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저만해도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열정 없이, 사랑 없이, 미사를 집전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저 습관처럼 타성에 빠져 앵무새처럼 경문을 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성체성사에서 무슨 기적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겠지요. 사제가 열정이나 사랑 없이 미사를 집전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신자들도 열정과 사랑 없이 미사성제에 참여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벨의 정성스러운 제사는 기쁘게 받아 들이셨지만 건성으로 바친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봉헌인 성체성사에 온몸과 마음, 모든 에너지와 정성을 기울이는 성체 성혈 대축일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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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_OymVVUR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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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의 열매: “할 수 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가톨릭교회는 뭐니 뭐니 해도 성체 성사로 삽니다. 만약 냉담하게 되는 신자가 있다면 성체 성사의 의미와 효과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라고 하셨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먼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성체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할 수 있음을 믿게 만드는 힘입니다. 어떤 자매가 아기를 낳고는 불안증으로 한강에서 아기와 함께 뛰어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걸어 잠가도 친정 어머니를 찾아가도 그 불안증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고로 결국 어머니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아기를 키울 능력이 있다’라는 믿음이 없다면 이처럼 진짜 아기를 키울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어서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키우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애착 실험은 사랑의 실체를 증명하고 싶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어미와 떼어 놓고 어미 사랑을 받지 못하게 한 채 키웠습니다. 그리고 교배 시켜 또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새끼가 위험에 처하자 어미 원숭이는 새끼를 밀쳐냈습니다. 새끼 때 자신을 안아준 어미 원숭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먼저 어머니의 젖이라는 따듯한 양식으로 전해집니다. 그 양식을 먹은 새끼는 자신도 소중한 존재임을 믿게 되어 어미처럼 할 수 있는 존재라 믿게 됩니다.
옛날 일본의 한 천민 아이가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귀족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주가 새로운 성을 짓는데 그 성 기둥에 들어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일본엔 기둥에 사람을 넣고 성을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이를 그 성에서 사무라이로 교육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성주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약속대로 아이는 귀족 아이들과 함께 사무라이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해서 밤에 도망치기로 합니다. 몰래 성을 빠져나가던 중 어머니가 들어있다는 기둥을 만납니다. 그는 그 기둥을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결국 그 아이는 기둥을 지나쳐 도망갈 수 없었고 그래서 끝까지 참아내어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가 됩니다.
아이는 어머니가 들어 계신 그 기둥에서 힘을 얻어 사무라이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어머니는 죽었고 그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그를 새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아이가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어머니의 피를 통해 아이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매일의 양식을 먹으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용서가 안 되는 이유는 용서하고 싶지도 않고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다음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바로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배에 맞아 들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분은 물 위를 걸을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요한은 이처럼 성체 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이 생겨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장자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에사우를 피해 도망치다가 베텔(하느님의 집)이라는 동네에서 하룻밤을 묵습니다. 거기에서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를 봅니다.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처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사다리의 양 기둥은 바로 희망을 상징하고 각 계단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었고 그것을 나중에 에사우에게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 운명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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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추모예배를 다녀왔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주관하는 추모예배는 처음 다녀왔습니다. 성당의 장례미사와는 달리 ‘말씀’이 많았습니다. “찬송, 기도, 약력소개, 추모사, 말씀, 가족인사, 찬송, 축도”의 순서였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 고별사”에 익숙한 저는 조금 생소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확신에 찬 설교는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목사님은 부활에 대한 확신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비록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니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추모예배에 온 사람들에게도 꼭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고인의 아내께서 남편의 손에 묵주를 쥐어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되는지 물어서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고인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추모 예배 후 1997년 보좌신부였을 때 청년성가대를 하던 자매를 만났습니다. 당시에 혼인하여 곧 아이를 낳았으니 아이도 어느덧 대학을 졸업했다고 합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어느덧 50대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바람결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금 자리를 잡으려고 하면 새로운 도전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남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남편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자매는 힘든 시간들 속에서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주님께 의탁했다고 합니다. 쉬는 날이면 노숙자를 위한 급식봉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영적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세미나를 듣는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갈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어릴 때 성체에 대한 성가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늘에 별들을 누가 셀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강변에 모래알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바다에 물방울 누가 셀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논밭에 이삭 수 누가 알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나무에 잎사귀 헤아릴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영원과 무궁을 깨달을 수 있는가?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하세.”
매일 축성되는 성체의 수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32년 동안 제가 미사를 통하여 축성한 성체의 수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은 성체가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 모시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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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체성사에 대해서 그리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중요한 성체성사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일상적인 것으로 타성에 젖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믿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실현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신비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헤맬 때, 그들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살게 하실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신명 8,3)이었다. 이 말씀으로 만나와 차돌 바위에서 솟아난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선물들을 베풀어줄 것을 약속하고 또 약속대로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말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만나보다 더 신비스러운 음식으로 채워주신다. 이것은 말씀이신 아드님이 항상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새롭고 신비로운 음식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이다. 이 음식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살도록 한다.
복음: 요한 6,51-58: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
예수께서는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33.35.41.51절), “생명의 빵”(48절)으로 계시하셨다. 이 빵은 바로 세상을 구원하러 세상에 보내진(38-40절)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것을 먹음으로써 신화(神化)되어 다시 살아나게 하는 빵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 제물로 바쳐질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 희생 제물이 될 그 살을 먹도록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그 살은 그분의 큰사랑의 힘이 믿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도록 봉헌된 희생의 음식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따진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더 확실하게 표현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3-58절)
이 말씀에는 여러 가지 깊은 내용이 들어있음을 볼 수 있다. 말씀 중에 “참된 양식, 참된 음료”(55절)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신앙의 관점에서 성체성사의 가장 깊은 실체를 뜻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먹는다.(54.55.58절)는 말은 원래 잘게 부순다는 뜻으로 어떤 상징적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받았던 극심한 고통에 관한 내용도 의미한다. 여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온 피에 관한 내용도 있다. 유다인들은 피를 마시지 못하게 되어있다. 하느님만이 주인이신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참조: 레위 17,11) 바로 예수께서는 이 피를 바치신다. 당신의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즉 몸과 피는 형제들에게 선물로 봉헌되신 그분 전체를 뜻한다.
두 번째로는 당신을 먹는 사람들이 얻게 될 생명에 대해 계속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1.54.58절) 주님의 몸과 피를 통해 얻게 되는 생명은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의 영광중에 계신 그 생명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활한 이들의 생명이다. 그분이 부활의 생명을 받은 아버지의 힘으로 사시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 것이다. 성체성사는 바로 하느님의 생명을 자신 안에 간직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성체성사의 의미를 친교, 즉 그리스도 안에 형제들과의 일치와 결합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성체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에게 결합할 뿐만 아니라, 우리 서로도 결합하여 비록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을 이루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취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성체는 우리가 “그분처럼”(1요한 3,2) 되도록 하는 성사이다.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켜 우리 자신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성사이다. 이제 올바른 마음의 준비로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항상 우리에게 오시어 구원의 선물을 베푸시는 성체이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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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론이 아니라 삶>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이 말씀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나를 먹어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빵, 나의 살, 내 피’ 라는 말들은 모두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나타낸 말씀이라고 믿고 있고, 성체성사도(영성체도) 상징적인 예식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미사 중에 축성하는 빵이 실제로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게 되고, 동시에 우리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곧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입니다. 이 말은, 지상에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들은 일시적인 양식일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으로 무슨 거창한 극기고행이나, 평생 걸리는 수행과 수련 같은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고, 성체를 받아먹으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성체를 받아먹는 일은 누구나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성체성사를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 두 가지 조건입니다. 믿음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성체는 먹는 사람에게 무조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마법의 약이 아닙니다.> 또 믿고서 받아먹긴 하는데, 그것으로 그치면서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어버립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만찬’과 관련된 문제로 코린토 신자들을 크게 꾸짖은 일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1코린 11,33)
그 당시에는 주일 저녁에 신자들이 모두 모여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미사를 드렸는데, 각자 자기 집에서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봉헌한 다음에 성체성사를 겸한 만찬을 행했습니다. 부자들은 먹고 마실 것을 많이 가지고 왔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적게 가지고 오거나 빈손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들끼리만 모여서 자기들이 가지고 온 것을 먹어치우고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배고픈 것도 서러웠을 것이고, 따돌림 당하고 소외당하는 것은 더욱 서러웠을 것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교회에서.>
그런 일이 코린토만의 문제는 아니었는지, ‘주님의 만찬’, 또는 ‘아가페 식사’는 초대 교회 때 잠깐 시행되다가 폐지되었고, 지금과 같은 성체성사만 남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부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난해져라.” 가 아니라 “함께 먹어라.”입니다. 함께 먹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쉬운 일도 안 하는 것은 ‘사랑 없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앞에서 ‘믿음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된다는 말을 했는데,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을 합하면, ‘사랑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도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가지고 있는 재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일은, ‘벗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과 같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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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냅니다. 미사 때마다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의 예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놀라운 신비를 기억하고, 그것을 먹고 마시며 주님을 실제로 우리 안에 모실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을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 생활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손수 ‘하늘에서 내려 주신 빵’, 곧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다른 먹을거리가 풍족하였다면, 하늘에서 어떠한 음식이 내려올지라도 그 가치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오로지 당신께만 의지하기를 바라셨기에, 메마른 광야에 머물게 하시어 먹을 것 없이 허덕이는 그들에게 생명과 같은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오로지 당신께 의지하는 길이 살길임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참된 양식이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예형이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이 단순히 당신의 말씀이나 가르침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십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우리가 미사 안에서 모시는 성체와 성혈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새로운 만나가 되시어 그것을 먹는 이에게 당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신앙인들은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을 지니신 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몸소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과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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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은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특별히 박사 과정 동안 제가 받았던 느낌은 지식이 쌓여간다기보다 하루하루 제 자신이 소진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온종일 쓴 논문의 양이 성에 차지 않거나 어떻게 논리를 전개해야 환지 막혀버리면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막혔답니다. 무엇보다 저를 험들게 한 것은 이 과정이 언제까지나 게속될 것 같다는 막막함이었어요. 한 마디로 그 시기의 저는 하루하루 불행하고 불안했지요.
그 과정을 거쳐 공부를 마치게 됐을 때 저는 알 수 있었어요. 저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저 자신이 보잘것없어 보일 때. 주저앉고 싶을 때 저를 지탱해 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어머니의 기도와 신자분들의 응원, 함께 공부한 동료들의 마음까지 수많은 도움이 있었답니다. 만약 이리한 사랑이 없었다면 지는 결코 공부를 마칠 수 없었을 거예요.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어요.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살까요? 당연히 우리는 밥을 먹고 살죠. 하지만 그 밥은 단순히 쌀로 지은 음식물이 아니에요. 거기에는 농부들의 땀과 정성이 깃들어 있고, 벼가 자라도록 햇빛을 비추시고 때맞추어 비를 내려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어 있답니다. 더구나 그 쌀을 매만지며 깨끗이 씻고 불에 앉힌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이 스며들어 있지요. 우리는 한 그릇의 밥으로 나날이 생명을 이어 가고 있지만 그것은 한 그릇의 밥이 아니라. 한 그릇의 사랑과 정성이예요.
결정적으로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특별히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랍니다. 하느님은 죄로 죽어 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어요. 그렇게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의 밥이 되고자 하셨어요. 그래서 미사 안에서 주님의 몸을 모시는 사람은 다시 살게 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세요.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회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바로 이것이랍니다. 한 조각의 밀떡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지. 한 잔의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되는지 우리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사랑을 먹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간직하면서 산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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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주보⟫ 말씀의 향기
[대전교구 정성용 세례자요한 신부님]
<성체의 삶은 다른 이에게 먹힐 밥이되는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자들의 치유를 원했던 군중에게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 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신명기의 말씀을 역설적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만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 므리바의 샘물을 마신 야곱의 후손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믿음을 키웠습니다.
부활 제2주간의 독서에서 성 가우덴시우스 주교는 말합니다. "빵은 많은 밀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밀알은 바수어져 가루가 되고 가루는 물로 반죽된 다음 불로 구워져 빵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피인 포도주는 많은 포도를 모아서 십자가라는 포도 압축기로 만드신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하는 생명의 땅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 도인들은 성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중국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일행 14명은 40여 일의 항해 끝에 금강의 강경 땅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들 중 4명은 한국 교회의 자랑스러운 순교 성인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다블뤼 주교님은 20여 년의 고달픈 여정을 마치고 4명의 동료들과 함께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고 시골에 묻히셨습니다.
뜻하지 않게 일본 나가사키로 유해가 옮겨지는 과정에서 다블뤼 주교님은 조선에 첫발을 내녔던 강경에 유해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오셨고(1882년 3월 23일) 이곳에서 블랑 주교님의 유해 확인과 봉인 절자를 받으신 후 나가사키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강경성당 마당에 전시된 「탄생」 영화 제작에 쓰였던 라파엘호가 새롭게 느껴졌고, 우리 신앙 선조들이 살았던 성체의 삶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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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박상진 요셉 신부님]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여러분은 누군가와 친해질 때 어떻게 하시나요? 또는 친한 누군가와는 어떻게 지내고 있으신가요? 자신도 알게 모르게 '나눔'을 실천하고 있지 않나요? 음식을 나눕니다. 마음을 나눕니다. 그렇게 나누는 시간 속에서 가까워지는 관계 또는 상대를 향한 가까운 내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 맞이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이 우리 주 예수님의 몸과 피의 나눔을 소중히 새겨보는 날이 되길 빕니다.
오늘 복음은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살인 참된 양식과 피인 참된 음료로 인간을 구원하실 사랑을 건네십니다. 그렇게 제1독서에서도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만나를 먹었던 역사를 기억시켜 주십니다. 구약에서의 만나가, 이제는 신약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새로운 만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만나'가 되시기 위해, 곧 인간을 구원시키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 스스로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겨봅니다. 그 너머에, 스스로 제물이 되신 그 사랑이. 지금 우리와 닿아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지금의 우리에게도 닿아 있는 '살아 있는 사건'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와 비슷한 말씀이 한 구절 떠오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5.5)
라틴어로 'communio'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영성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더불어 '친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 또한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친교. 그 사랑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으로 친교를 나누는 우리가 되길, 그렇게 하느님의 하나 된 사랑에 가까워지고 동참할 수 있기를 빕니다. 그렇게 제2독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자 증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깃들길 빕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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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두윤 안토니오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날 누군가에게 축하를 할 때, “영육간의 건강을 빕니다.”라는 기도의 말로 인사를 합니다. 이는 건강한 몸이 되는 것, 그 이상의 깊은 뜻을 품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영적인 건강에 대한 갈망보다는, 육신의 건강에 더 예민하고 집중된 관심을 가집니다. 몸에 좋은 음식뿐 아니라 소위 건강식품이라고 하는 것들까지 추가로 먹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맛집을 검색하고, 또 찾아다니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맛집 순례를 취미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는 분명 예전과는 달라진 식생활 문화의 한 모습이며, 찾아다니며 먹는 즐거움의 내용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 영의 음식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영혼의 음식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생명을 살리는 음식으로써 영혼의 청춘, 영혼의 생기를 되찾아 주시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빈 상자에 보석을 넣으면 보석함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내 안에 무엇을 채우는가에 따라 내 모습이 형성됩니다. 정성을 다해 미사참례를 하고 성체를 받아 모시면 내 안에는 주님으로 가득 차서 주님 닮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특혜를 받는 일이기에 그에 합당한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찬미와 감사로 응답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 방법은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신 주님처럼,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일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면 그늘진 곳에서 풍요 속의 빈곤을 살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은 힘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때 비로소 나를 통해서도 성체성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단 한 순간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아니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통 크게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은 인간들을 향한 확고하고도 거룩한 메시지입니다. 맛있고 좋은 음식으로 육신의 건강을 달래는 그 이상으로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들의 실천적인 사랑의 삶은 주님의 허기를 채워 드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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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먹힘으로써 살리시는 주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은 마침이 없으십니다. 이 시간 영원히 지속되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첫영성체를 하는 어린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행되고 있는 최상의 방식이 성체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를 통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 가까이에 있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시며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은 빵과 포도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그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으시고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 지체입니다.(1코린12,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예, 그렇습니다)이라고 대답하고 그 동의가 진실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는 보고서라도 믿을 수 있게 기회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1896년 설립된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은 1914년 성체성혈대축일에 지방에서는 최초로 성체거동(성체현양대회)을 하였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성체께 흠숭을 드리고 성체께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며 영성체를 통해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많이 생기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100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2013년 4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미사를 마치면서 성체현시를 하고 오후 4시까지 기도를 이어가며 성체강복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2013년 5월 30일을 시작으로 2014년 6월19일 현재까지 제가 확인한 것만, 21차례, 그 후에도 10월 성체거동을 하는 날까지 12차례. 당신 현존의 모습을 성체안의 예수님 이미지로 보여 주셨습니다. 교회의 공식 인준을 받지 않았으나 교구에 보고는 하였고, 함께 기도하던 많은 사람이 그때마다 목격하였으며 은혜로움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 강조하였고, 체험을 말하려면 삶의 변화를 통해 말하라! 고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성체는 “살아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주기 위해 보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체를 흠숭하고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이 더 커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시고 주십니다. 우리는 그저 황송하게 은총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영양을 취해야 합니까? 육적인 건강은 음식을 통해 보충하지만, 영적인 양식은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채워집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6,56-57)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성체를 영함으로써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1절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 14절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렇다면 성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원천인 말씀에로 가야하고 말씀을 듣다 보면 성체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체와 말씀은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9개월의 감옥살이 동안 “가장 큰 고통은 미사를 드릴 수 없고, 성체를 모실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회상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동료들에게 “ ‘내가 더 이상 미사를 거행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거든,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시오.” 하였고, 성 필립보 네리는 “성체는 나의 보약입니다.” 하고 영성체의 중요성을 말하였습니다.
더더욱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예를 들면 나무를 접목할 때 두 나무가 비슷할수록 접목이 더 잘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고해성사는 영혼과 예수님과의 유사성을 회복해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공산정권에 의해 1975년 투옥되어 1988년 석방되신 구엔반 투안 주교님께서는 감옥살이 중에서도 남몰래 손바닥에 세 방울의 포도주와 한 방울의 물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미사를 거행하셨습니다. 그는 그 미사에 대해 “이것이 불사불멸의 약이었고 죽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해독제였다...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손을 펼치고 십자가에 저를 못박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그분과 함께 가장 쓴잔을 마셨습니다. 날마다 축성 말씀을 암송하며 제 피에 섞인 그분의 피를 통해 온 마음과 영혼으로 예수님과 저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 영원한 계약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미사는 삶의 모두였고 주님과의 하나 됨을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오늘 부속가를 보면 선인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 달라 삶과 죽음 갈라진다.(17) 악인 죽고 선인 사니, 함께 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18) 천상의 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 음식, 개에게는 주지 마라.(21) 하며 합당한 준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디 성체성사를 통하여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여 영혼을 풍요롭게 하시고 위로와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떼어 나누어진 빵으로 오십니다. 밥이 되어 오십니다. 당신이 스스로 먹힘으로써 영양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상대를 밥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이십니다. 우리도 상대를 위한 영양밥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은 말합니다. “성체를 단순한 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그분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으로 확신이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맛에 의해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사랑의 신비’를 의심 없이 믿으십시오.”(성 치릴로) 그리고 “성체를 모시기 전에 잠시 동안 당신이 받아 모시는 성체가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파시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따라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깊은 믿음을 가지고 모셔야 합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영세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었는데 반모임 미사참례를 하셨는데 성체를 모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 ‘혹 죄를 짓거나 잘못한 것이 있으시면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하십시오. 잔칫집에 오셨으면 기쁘게 음식을 나눠야 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신부님, 실은 저희 부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담당 선생님께서 밀가루 음식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성체를 단순히 밀가루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설사 큰 은총으로 역사하신다 해도 어찌 하느님의 손길로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빵을 쪼개는 순간 눈이 열렸던 제자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회복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을 의미하며, 사랑을 생산합니다.”(토마스 데 아퀴노)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은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의 연장입니다. 성찬에 걸맞은 내어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께서는 쪼개지고, 나눠지며, 먹히는 빵의 단순함 안에 계십니다. 영성체를 통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분의 모습으로 나를 변화시키도록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 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이기 때문 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 토마스 모어는 총리를 하면서 매일 미사참례를 하여 영성체를 하였다.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 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 회들을 멀리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스승이십니다.”(성 토마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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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복음을 읽다 보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뒤에 군중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도 합니다(요한 6,15 참조). 놀라운 빵의 기적을 통해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군중이 예수님을 쫓아다녔을까요? 그러나 돈 많은 부자같이 먹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쫓아다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냈던 놀라운 장면에서는 쫓아다녔다는 말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육신의 배고픔이 채워지면 구원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육신의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예수님은 구원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배고픔보다 더 큰 문제인 영적 배고픔과 갈증을 보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빵과 물고기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영적 배고픔과 갈증을 채워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100%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언젠가 내려올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즉,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나의 행복 전체가 될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이것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계속된 굶주림과 갈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즉 주님의 뜻을 다르며 함께할 때 진정한 포만감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계속된 굶주림과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상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성체 성혈을 통해 진정한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성체와 성혈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지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을 보지 못하면 성체와 성혈의 은총을 얻기가 힘들어집니다. 세상의 것만을 얻으려는 마음만으로는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미사성제를 통해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우리 삶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사제가 나눠 주니까 당연히 받는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 삶이 변화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는 참 구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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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이 먹히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그분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땅 깊숙이 온전히 스미시려고
살점 하나 피 한 방울
남기지 않으시고
송두리째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악악되는
모질고 차가운 사람 세상을
찰진 밥으로 뜨거운 피로
새로 살맛나게 이루시려고
아낌없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먹히기만 한 작은이에게는
고마움과 북돋움의 밥으로
먹기만 한 큰이에게는
뉘우침과 돌아섬의 밥으로
똑같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당신의 살을 먹는 이를
당신의 살로 만드시고
당신의 피를 마시는 이를
당신의 피로 만드시려고
기꺼이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당신의 살과 피가 된 이가
당신처럼 먹힘으로써
죽임에 게걸들린 사라질 세상 안에
살림의 영원한 나라 이루시려고
늘 그렇게 먹히신다
그분이 먹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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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조금이라도, 동참이라도>
하느님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계실 뿐 아니라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다면 하늘뿐 아니라 땅에도 계시고, 성당에 뿐 아니라 술집에도 계신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것도 믿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불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능성 또는 인간의 가능성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가능성을 자기 또는 인간의 가능성 안에 가두는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가능성을 넘는 것은 하느님도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Nothing is impossible to God!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
이것은 마리아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만 믿으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나쁜 가능성은 믿지 않지만 마리아처럼 좋은 가능성은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다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오셨다고, 이천 년 전에 한번이 아니라 지금도 오신다고, 마리아에게뿐 아니라 사제와 우리에게도 오신다고, 베틀레헴의 구유뿐 아니라 미사 때 제대 위에도 오신다고 믿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려고 오시는 그 첫 번째 오심이 믿기 어렵지, 그렇게 오신 주님께서 매일 제대 위에 내려오시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고, 최후 만찬과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내어주신 그 천 번째 희생이 놀랍지 매일 당신 살과 피를 나눠주시는 것은 그 재현일 뿐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의 애송이가 아닌 우리에게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사는 것이 어렵지, 믿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나를 다 내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최후 만찬 때 우리가 읽는 복음은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서 ‘끝까지’는 당신의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의 뜻도 있고, 제자들의 배반을 아시고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당신을 전부 다 주시는 사랑을 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을 다 내어주시는 주님의 겸손과 사랑에 감탄하면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가자는 뜻으로 이렇게 권고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남겨두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낼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알고 주님도 아십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다 살아내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라실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 살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은 살기를. 다 못살 바엔 아예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살기를.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린 주님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그대로 다 살지 못하더라도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조금이라도 살고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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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 사랑의 성체성사의 은총 -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인 오늘 대축일입니다. 24절까지 이르는 긴 성체송가가 생명의 빵으로 오시는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인 주님의 성체에 얼마나 감격해 있는지 절절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아름다운 마지막 23-24절을 인용합니다.
“23.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24.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얼마나 고마운 사랑의 참된음식 성체성사인지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그대로 성체성사 미사의 은총입니다. 아침성무일도때 흥겹게 부른 후렴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신백성을 천사들의 음식으로 배불리셨고, 하늘의 빵을 그들에게 주셨도다. 알렐루야.”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로다. 이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리라.”
하늘의 빵, 살아있는 빵, 천사들의 양식인 성체를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빵대신 밥으로 표현하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와닿는 기분입니다. “밥으로 오시는 하느님” 제가 사제서품 받던 해, 그러니까 34년전 41세 부제때 오늘 지금 여기서 1989년 5월28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시 강론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앞부분만 다시 그대로 인용합니다.
-속담에서 말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사흘 굶어 담 아니 넘을 놈 없다”, 밥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나게 하는 말들입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낼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아주 현실적인 적나라한 고백이지만 마음 한구석 허전해 짐은 어쩔수 없습니다. 과연 먹고 마시며 즐김으로 나의 영적 갈망을 채울 수 있을까요? 불교의 스님들은 식사전 오관게(五觀偈) 음식공양 기도문입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도업道業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공양이란 명칭으로 그 품격이 한결 높아지지만 그래도 미진한 느낌입니다. 삶의 감격과 기쁨이 미미하게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지하 시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 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이보다 성체성사의 핵심을 꿰뚫코 있는 글은 없다며 한국의 세계적 민중신학자 고故 안병무 박사가 극찬極讚했던 시입니다. 밥이 하늘이라는 폭탄과 같은 선언으로 기존 종교관념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립니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숙명적인 인간한계를 드러내는 동물적 행위도, 육신을 지탱하는 약도 아닌 바로 하늘을, 하늘이신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행위, 성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이 34년전 성체성혈 대축일 강론 서두 내용입니다. 그래서 농사農事와 더불어 식사食事요 성사聖事입니다. 성사중의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저는 성체성사를 네 측면에 걸쳐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사랑의 성체성사의 은총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합니다.
첫째, 광야 여정중의 성사입니다.
신명기 모세의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여라.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특히 강조되는 것이 기억하는 것이요 잊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광야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하느님 말씀으로 격퇴하셨습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성체와 말씀의 만나로 우리를 살리시고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게 하십니다. 광야 여정중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 날로 예수님을 닮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할 때 마다 구원의 기억을 새롭게 하는 우리들이요 광야여정의 인도자이신 주님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 옛 탈출기의 백성들처럼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내용을 다시 나눕니다. 광야 인생 여정의 치열한 영적전쟁중 우리는 세 부류의 인생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 셋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정말 심신이, 영육이 온전한 사람 드문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너무 아프고 병든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정신 건강, 영혼 건강, 마음 건강입니다. 참으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는 누구나 건강한 정신의 성인이지만 주님을 떠나 세상 우상들에 종되어 살 때, 또 세상 맛에 중독되어 살 때는 여지없이 괴물이요 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혼 건강의 성인이, 참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답은 단 하나 평생의 광야 여정중 성체성사를 선택하여 훈련하듯 자주 성체와 말씀의 만나를 모시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구원에 이르는 거룩한 선택, 거룩한 훈련, 거룩한 습관이 거룩한 미사참례입니다. 비록 미사를 못하더라도 날마다 기도와 말씀의 생명의 빵, 참 만나인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이래야 영혼 건강의 성인이 되고 영적전쟁의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일치의 성사입니다.
하느님이 원하는바 일치요 사탄이 원하는바 분열입니다. 죄중의 죄가 분열입니다. 참으로 분열의 치유도, 영적 건강도 주님과의 일치에서 가능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갈 때 공동체의 일치요 내 자신의 내적일치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사는 우리들이 아니라 바라보는 방향, 바라보는 중심, 주님이 같아야 일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게, 행복하게, 자유롭게, 풍요롭게 하는 주님과 일치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일치의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옛 만나를 먹은 백성들은 모두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 온 이 성체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성체의 힘, 예수님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살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일치, 참나의 내적일치의 비결도 단 하나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의 살아 있는 중심인 주님을 떠난 일치의 삶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정화하시고 성화하시며, 날로 주님과 일치를 깊게하는, 주님을 닮아가게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셋째, 나눔의 성사입니다.
바로 성체성사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정신 번쩍나게 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빵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아, 모두가 한몸의 지체들인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예수님이요 살아있는 성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상에서 서로 나누며 섬길 때 깊어지는 주님과의 일치, 공동체의 일치, 참나와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일상에서의 사랑의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완성되는 성체성사임을 깨닫습니다.
넷째, 천상 영광을 앞당겨 사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옛 기도문에서 성찬의 신비에 대해 이렇게 환호합니다. “오 거룩한 잔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며, 그분의 수난을 기념하고, 은총으로 가득 차며, 다가올 영광의 보증을 받는도다.” 그러니 성찬례 미사시간은 “주님 파스카의 기념이고, 우리가 제대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를 통하여 하늘의 온갖 은총과 축복을 가득히 받으므로 천상의 영광을, 천상의 맛을 미리 맛보는 시간”입니다(가톨릭교리서1402).
참으로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 큰 희망에 대하여 성찬례보다 더 확실한 보증과 분명한 징표는 없습니다. 안티오키아 이냐시오는 “실로 이 파스카 신비인 미사가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영생을 위한 약이요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다.”말합니다(가톨릭 교리서1405).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가 177장도 이런 천상의 기쁨을 앞당겨 노래합니다. 만나를 먹은 백성들은 다 죽었을지라도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이들을 영원히 살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내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곳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177장 2절)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성체성사,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성체성사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고 참나의 성인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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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6,55)
<먹고 마시고 내어주자!>
오늘 복음(요한6,51-58)은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
그러자 육적인 것 안에만 갇혀 있었던 유다인들 사이에서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6,54-55)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예수님 친히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오늘 많은 성당에서 어린아이들이 '첫 영성체'를 합니다. 교리공부를 잘 마치고, 드디어 첫 영성체를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와 성혈'은 '이제와 영원히 우리를 살리는 참된 생명의 양식이며 음료'입니다.
'이것을 참되게 믿고 있는가?'
'정말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가?'
이에 대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성체를 받아모시려고, 말하지 않아도 자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엘 나올 것입니다. 성당에 나와 이 참된 양식을 받아모실 것이고, 받아모시기에 합당한 자가 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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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1dW9dEcdr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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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5)
사랑은
함께하는
식사로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로
채워주십니다.
뜨거운 사랑
뜨거운
식사입니다.
모호한
하느님이
아니라
식사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하느님이십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체와 성혈이
지극한 사랑을
대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배고프거나
목마르길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목마르거나
허기지는 것은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살아있음의
시간이
하느님의 생명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양식은
하느님을 향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살과 피는
그런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삶 안에
우리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 사랑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살과 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식탁의
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사랑 가득한
오늘이
펼쳐집니다.
주님의 식탁을
통해
사랑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사랑의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가장 좋으신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은
함께하는
식사로
살과 피가
됩니다.
한 몸이
됩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게하는
성체 성혈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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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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