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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sper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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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peration Downfall >
1944년 7월 11일, 미 합동 참모본부는 일본 본토에 대한 침공까지 예정에 넣은 대일 작전계획의 입안을 시작했습니다. 근데 지금까지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을 하나의 선택사항으로는 넣고 있었지만 반드시 그것이 최종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왜냐? 그때까진 미국도 일본 근해의 해상권을 탈취해 일본 본토를 봉쇄하는 정도로 일본을 항복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전국이 연합군에 유리하게 돌아선 1944년 중반 이후로도 변함없는 일본 육해군의 철저 항전과 일본 군부의 일본 국내에서의 정치적 지위의 연구가 진행된 결과, 해상 봉쇄만으로는 일본을 굴복시키지 못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본토까지 침공해 일본군의 항전 능력을 완전하게 분쇄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러 1944년 9월 제 2 차 퀘벡 회담에서 일본 본토를 침공한다는 작전계획은 연합군 수뇌부에 의해 공식 승인되었습니다.
이때의 작전계획은 일본 본토침공을 1945년 가을경으로 예정하고 있었지만, 그 후의 전국 추이에 의해 작전의 일정은 변경되게 됩니다.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벌어진 몰타 회담과 그 다음의 얄타 회담의 결정을 받아들인 미 합동 참모본부는 1945년 3월 29일에「 대 일본 본토 공격작전 최종계획」을 작성하게 됩니다.
다운폴 작전이라 명명된 이 작전은 다음의 2개의 작전(올림픽작전, 코로넷작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양 작전에서는 기본적으로 최초 수발의 원폭 투하 및 대규모 독가스의 살포, 농지에 대한 약제 살포에 의한 식료 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작전까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OP. 다운폴
< 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 >
올림픽 작전은 큐슈 남부에 대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그 주목적은 당초 간토(관동) 상륙작전인 코로넷(Operation Coronet)작전을 위한 전초기지 및 비행장의 확보였습니다. 작전 예정일인 X-Day는 1945년 11월 1일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 작전에 투입되는 수상함대의 규모는 진정한 미국답게 과연 공전의 규모였습니다.
항공모함 42척(정규항모+경항모+호위항모)을 시작으로 전함 24척, 순양함 40척, 400척 이상의 구축함이 투입될 예정으로, 이 함대에 의해 지원받는 상륙부대는 16개 사단의 참가가 예정되어 있었고 이러한 각 상륙부대는 이미 점령된 오키나와를 경유해 투입될 예정이었습니다.
참고로 이것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작전 또한 파스텔(Operation Pastel) 작전이라고 따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여담이지만 이 파스텔 작전은 기만 작전이라고 해도 총 8만의 대병력을 시코쿠에 상륙시키는 대규모 작전이었습니다.
사전 공격으로는 타네가시마, 야쿠시마, 시류 열도 등의 크고 작은 섬들을 작전발령(즉 상륙) 5일 전에 점령하는 일이 검토되었는데 이것은 오키나와전때와 같이 상륙해안 근방에 양호한 정박지를 확보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요.
이 정박지는 수송함이나 데미지를 입은 함의 퇴피장소로 사용되며 마지막으로 큐슈의 주요 전략목표 지역에 대해서는 가스(주로 머스터드 가스)를 주체로 하는 독가스 공격도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었습니다.
규슈 방면을 담당한 주 상륙부대는 미 제 6 군이었는데, 예하의 3개 군단이 각각 미야자키, 오오스미 반도, 사쓰마 반도에 상륙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병력은 일견 상륙군의 규모치고는 적어 보이지만 그래도 큐슈 주둔 일본군의 최소 3배 이상의 병력이 될 것이라고 미 합참은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오오스미 반도에는 일본 육군의 방어시설이 있지만 미야자키나 사츠마 반도는 상대적으로 허술했다는 점도 이 병력 책정의 판단 근거가 되었습니다.
올림픽 작전에 동원되는 총병력은 약 252,000명의 보병과 87,000명의 해병대로 구성되는 총 16 개 사단 규모이며, 유럽 전선의 부대이동은 예정되지 않았었습니다. 또한 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미 해군은 니미츠 제독에게 제 3 함대와 제 7 함대를 통합 배속시켰고 이것은 태평양에서 전개 가능한 미 해군의 모든 함대와 동일했습니다.(참고로 지금까지 태평양에서 제 3 함대와 제 7 함대가 같은 작전에 투입된 적은 없었음)
이 니미츠 제독 주력본대 외에 미 제 5 함대(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 지휘)가 10척의 정규 항공모함, 16척의 지원 항공모함(경항모, 호위항모 모두 포함)으로 상륙작전의 근접 지원을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고 상륙정이나 수송선을 포함한 함선의 수만도 약 3,000척에 육박했습니다.
또한 니미츠 휘하의 제 3 함대(윌리엄 F 할제이 제독)는 총 17척의 항공모함과 8척의 고속전함에 의한 기동 공격을 담당했는데, 1945년 중반까지 미 해군은 해상 항공병력만으로도 전술한 40척 이상의 항공모함과 24척 이상의 전함, 약 1,200기의 전투기가 투입 가능했고 그 숫자는 매월 증가하고 있었다는 말씀.
결산하자면 최종적으로 올림픽 작전이 개시될 때까지 미 해군은 40척 이상의 항모 외에도 영국해군이 지원하는 10척의 정규 항공모함 외 20척 이상의 함대형 경항모(이 함대형 경항모의 구분은 영국해군과 미 해군이 미묘하게 다릅니다만 기본적으로 영국의 함대형 경항모는 미 해군의 정규항모와 비등한 능력을 보유)를 준비할 예정이었으며 함상전투기만도 합계 2,900기 이상이 운용 가능했습니다. (이외 연합군 함대의 해군항공대가 운용 가능한 함폭과 함공은 단연 별도)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만 이 작전이 실제 발동되었을시 영미 연합함대 해군항공대의
전/폭/뇌 총계는 7500기 이상이라는 자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에 예상되는 연합군의 손실 또한 타와라,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의 강력한 일본군 저항으로부터 유추해 약 25만명 이상이라고 파악되었는데 이것은 추측한 부서에 따라 약간 다릅니다. 하지만...뭐 어쨌든 올림픽 작전이 실시되었을 경우 미 함참도 그들 자신의 판단으로도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손실을 감안하고 이 작전을 발동할 예정이었다는 얘기죠.
참고로 올림픽 작전은 전술한대로 항공기지의 확보가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큐슈 남부의 점령만으로 작전은 종료, 기타큐슈(큐수 북부)로의 침공작전은 검토하지 않았단 것이 특징입니다. 왜냐면 이때 제압된 큐슈 남부에는 주로 항공기지를 전개시킬 예정이었고 이것은 종국적으로 이듬해(1946년) 3월의 코로넷 작전(간토 공략작전)을 위한 전진기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엔 약 720,000명의 병력과 3,000기의 항공기가 전개될 예정이었고 이렇게 전개된 기지에서는 이제 장거리 폭격기 뿐만 아니라 중거리 폭격기도 간토평야를 폭격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습니다.
이 두개 작전의 총 참가병력은 육해공 아울러 1, 074, 600명이란 대병력이었으며 그것을 미 태평양 함대가 전력으로 지원한다는게 그 골자, 각군 지휘관은 지상부대는 맥아더 원수, 해군은 니미츠 제독이 선택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 본토 침공작전은 결정되었지만, 문제는 이 직후 바로 육군 항공군과 해군으로부터 반대 의견이 나왔습니다. 반대를 표명한 것은 전략 폭격론자 아놀드 육군 항공군 총사령관과 해상봉쇄의 신봉자인 해군의 킹 작전부장 등으로, 그들은 일본인의 저항은 점점 격화의 일로를 걸어가고 있으며 또한 그 전술도 세련되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주요 논거는 특히 이오지마에서의 공전의 손해를 주목했는데, 그렇다면 만약 그들의 조국에 침공하면 그 손해는 이오지마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맥아더 원수는 해상봉쇄와 전략폭격으로는 전쟁을 장기화시킬 뿐이지만 일본 본토에 침공하면 그 손해는 5만 정도로 끝난다고 반론했습니다.
참고로 맥아더 원수가 말하는 손해 5만은 나중에 그 자신도 인정했듯 침공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적 기대로부터 나온 것으로 근거로 신빙성있는 데이터로부터 도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뭐 어쨌든, 쌍방의 주장은 서로 양보하는 일 없이 평행선을 달렸지만 최종적으로는 마셜 전쟁성 장관의 중재로 전쟁의 장기화를 피한다는 대명제 아래 결국 본토 침공은 결정되었습니다. 사실로도 봉쇄와 폭격만으로는 일본이 항복한다는 보증이 없었던 것과, 만약 여기서 전쟁이 더 장기화되면 소련이 일본에 침공해 홋카이도나 혼슈 동북부까지 점령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생긴 것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또한 전쟁 장기화에 의한 사기의 저하나 군 규율이완에 의한 포로 학대나 주민 학살이 염려된 것도 일본 본토침공을 결정하게 한 주요 요인입니다. 이 일본 본토침공의 예정일은 전술한대로 12월과 이듬해 4월이었지만 당초 이 시점에서의 작전계획은 독일의 항복을 7월 1일 이후로 하고 있었는데 예정보다 독일이 빨리 항복했으므로 예정은 앞당겨져 각각 1개월씩 앞당겨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모든 결정사항은 트루먼 대통령의 GO싸인을 받는 것만 남았던 것이죠.
큐슈 남부의 일본군 배치와 미군의 상륙 예정지
루즈벨트 대통령의 급서로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루먼은 1945년 6월 29일, 올림픽 작전을 공식 승인했습니다. 전술한 것처럼 올림픽 작전은 큐슈의 제압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럼 왜 굳이 첫 작전목표가 큐슈일까요? 이당시 미군의 전력이면 사실 꼭 큐슈를 거쳐갈 것 없이 곧바로 간토에 상륙해 도쿄를 포위하는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유는 역시 전술한 대로입니다. 이곳을 간토 침공의 사전 지원 기지로 만들기 때문이었지요. 이것은 루손을 공략하기 위해 우선 레이테 섬을 점령한 것과 같은 전략으로, 미군의 전통적인 태평양 방면 작전계획이었습니다. 작전에 참가하는 부대는 루손 방면의 작전을 완료한 클루거 대장의 제 6 군을 선봉으로 이 작전의 목적은 간토 침공을 위한 해공군 기지의 건설이 주목적이므로 제압지역은 큐슈 남부로 한정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주 목표는 가고시마 만과 비행장 건설에 용이한 미야자키 평야 일대가 주 지점으로 그것을 신속히 제압하기 위해선 미야자키 해안에 미 제 1 군단(육군 제 25 / 33 / 41 보병사단)을 필두로 제 11 군단 (제 43 보병사단, 제 1 기병사단, 아메리칼 사단), 그리고 일본육군의 강한 반격이 예상되는 큐수 동부엔 최정예 제 5 수륙양용 군단휘하 2개 해병사단이 (제 3/4 또는 제 2/5 해병사단)의 동시 상륙이 예정되었습니다. 그리고......이것을 지원하는 것은 전술한 최소 60척 이상의 항모와 30척 이상의 전함, 350척 이상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대함대였습니다.
올림픽 작전은 사전에 X -75일 전부터 일본 본토 전역에 걸친 대규모 전략폭격, 항모 기동부대에 의한 전략요충지 핀포인트 폭격 외 여기에 기동함대의 대규모 연안 함포사격으로 개시될 예정이었습니다. 이에 의한 간토(혼슈)와의 연락선 차단, 잔존한 일본해군 함정의 격멸, 철도와 도로의 수습점이나 중요한 교각이나 터널 등 교통 요충시설 파괴, 상륙지점의 일본군의 손실를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대륙에 전개한 일본육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중국본토 연안부나 시코쿠에서의 견제작전도 아울러 실시하게 되어 있었는데 최종적으로 X-4일엔 선견대로 정예 제 158 연대 전투단에 의한 타네가시마 강습상륙과 제 40 보병사단의 고시키지마 열도 상륙도 힘께 실행될 예정이었습니다. X-1일에는 항공폭격 및 초노급전함 최소 20척을 동원한 전함의 대 지상함포 사격은 - 개인적으론 이게 젤 ㅎㄷㄷ - 상륙지점의 포대와 발화점에 집중되어 상륙지역 인근 해상과 육상의 모든 장애물을 배제... 그리고 X - day 오전 6시에 맥아더 원수의 진두지휘아래 지상 주력본대에 의한 대규모 상륙이 개시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륙후 각 부대는 X+3일까지 해안 교두보를 확보, X+5일에는 미 제 9 군단( 제 77 / 81 / 98 보병사단)이 전략 예비대로 가고시마 만에 추가 상륙해 상륙부대의 손실보충과 부대 교환을 마치며 이후 상륙군은 큐슈 약 1/3을 가르는 선을 북진의 한계로 카와치 북부의 산맥을 방어라인으로 설정해 일본 육군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한다는 2단계 작전이 계획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작전의 종료는 X+30일로 판단되고 있었지만 상정 외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연장될 때는 코로넷 작전에 투입될 부대의 전용이나 원자폭탄, 독개스의 사용도 적극 계획되고 있었지요.
< 코로넷 작전(Operation Coronet) >
간토 침공작전시 미군 상륙 예상지점과 일본군의 배치
하지만 이 올림픽 작전조차 다운폴 작전의 제 1 단계에 지나지 않았었습니다. 혼슈를 최종공세 완료점으로 상정한 일본 본토침공의 최종 국면은 일본의 심장부, 역시 전술한 간토 제압을 목적으로 한 코로넷 작전이었거든요. 이 코로넷 작전은 올림픽 작전의 준비 명령이 발령된 시점에선 그 세부까지 계획되고 있던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개요는 미 합참의「참모연구 Op. 코로넷」에 그 대강이 이미 잡혀있던 상태였습니다.
이 코로넷 작전에서는 상륙 예정지역에 대한 대규모 항공공격/함상포격이 Y-15일부터로 올림픽 작전(X-1일)보다 길게 잡혀있었는데 이것은 큐슈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기에 일본군도 그만큼 방비를 굳힐 수 있고 있다고 판단한 것에서 도출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소해와 수상 장애물의 제거에 투입될 시간도 Y-4일부터로 올림픽 작전보다 길었는데 뭐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이후에도 간토 각지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더 밀도높게 실시될 예정이었지요.
작전상륙일의 명칭인 Y-day는 1946년 3월 1일으로 주 상륙지점은 2개 장소로 그것은 쿠쥬쿠리 해안과 사가미만이었습니다. 쿠쥬쿠리 해안에 상륙하는 부대는 호지스 대장의 미 제 1 군으로 작전투입 병력은 Y-day에 미 제 24 군단( 제 7 , 제 27 보병사단)과 제 3 해병 상륙작전 군단( 제 1 , 제 4 해병사단)이 선봉으로, Y+5일엔 제 96 보병사단과 제 6 해병사단이, 그리고 Y+30일에는 가칭 B 군단( 제 5, 제 44, 제 86 보병사단)이 상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사가미만에는 아이켈버거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 8 군이 상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Y-day에 미 제 10 군단( 제 2, 제 4, 제 31 보병사단)과 미 제 14 군단( 제 6, 제 32 보병사단)이, Y+5일에 제 37 , 38 보병사단이, Y+10일에 미 제 13 군단( 제 13, 제 20 기갑사단)이, Y+30일에는 가칭 D군단( 제 4 , 제 8, 제 87 보병사단)이 상륙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밖에 미 제 8 군은 예비로 제 97 보병사단을 편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외에도 태평양 방면 육군부대의 예비로(이것은 전략예비대도 포함) 가칭 C 군단( 제 28 , 제 35 보병사단, 제 2 공수사단)과 가칭 E군단( 제 91, 95, 104 보병사단)이 또 있었습니다. 하튼 이상대로 사가미만에 상륙하는 미 제 8 군의 병력은 제 1 군보다 많았는데 이것은 제 8 군이 담당하는 사가미만이 코로넷 작전의 주공방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상륙작전에 적합한 지형으로는 쿠쥬쿠리 해안쪽이 용이했는데 그곳은 해안가의 면적도 넓고 근처에 여러 항만도 존재했으므로 상륙 이후의 교두보 확보에도 좋았지만 문제는 그곳에서 간토 내륙으로 향하려면 에도가와나 아라카와 등의 하천하구가 존재했으므로 이후 진격에는 꽤 어려움이 있을것이라 에상되었지요.
때문에 미 합참은 주력을 사가미만에 상륙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 코로넷 작전의 목적은 잔존한 일본육군 야전 전력의 섬멸과 제국의 수도 도쿄의 점령으로 결국 오퍼레이션 다운폴은 문자 그대로 일본제국의 멸망을 목적으로 한 사상 최대의 장거리 원정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출처 - 디씨인사이드 - B군님(제가 아주 약간 수정)
요약 - 다운폴 작전이란 미국이 원폭 십수발을 일본의 주요 도시에 떨어뜨린 뒤 독가스와 고엽제로 일본의 생태계를 쓸어버리고(특히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강제함) 100만명 이상의 미육군과 미해병대를 상륙시켜 일본 본토를 점차 초토화 시켜나가며 궁극적으로 당시 일본 본토인구의 상당수를 밀어버린다는 개념의 작전으로 실제로 실행 되었다면 일본이란 국가의 존망을 떠나 일본민족과 일본 열도 자체가 작전명 그대로 ... 몰락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미국이 진정 빡쳐서 상대국을 밀어버리려고 들면 이렇게까지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돌아가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특히 죄없이 끌려가신 우리 조상님들ㅜㅜ) 이 작전이 실제로 실행되기 전에 핵 두방 맞고 항복한 게 일본민족으로써는 천만다행. 참고로 이 작전이 실제 실행 되었으면 전투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 되었을 가능성이 큼 ...
당시 일본이 레알 미쳤다는 게 핵에 놀라서 항복하기 전까지 일본은 본토 사수를 외치면서 준비랍시고 일반인들에게 쥐어준게 기껏 죽창과 조총 ... 이러면서 최후의 일인까지 전원 옥쇄를 외침(레알 미친놈들)
그리고 지금쯤 우리는 위대한 장군님 드립치고 있을 확률이 아주 높아짐 실제로도 생각보다 빠른 소련의 진군에 미국이 놀라서 겨우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한것을 생각하면 실제로 다운폴작전이 실행되었다면 미국이 일본에 발목잡혀서 싸우고 있을 동안 소련이 죽 밀고 들어와서 한반도 점령했을 가능성이 매우큼 ...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짓은 한국인으로써 밉고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했지만 이 작전으로 죽어나갔을 일본인과 연합군을 생각하면 실제 실행 안되고 작전으로만 남은게 다행인 듯
첫댓글 이게 실행됬어야 되는 건데
이때 싹쓸어버렸어야되는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