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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http://blog.naver.com/lcw437/99629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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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에서 잉카문명전을 개최한다는 소식을 작년 말에 접하고서부터 갈 날이 무척 기다려졌다. 2008년 페르시아문명전을 시작으로, 작년 이집트문명전에 이어 이번이 외국문명 특별전으로서는 벌써 3번째다. 이렇듯 다양한 외국문명들을 전시하는 것도 매우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잉카제국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페인 침략기까지의 역대 문명들에 대해 총체적으로 다루는 전시회라고 하니 기대가 무척 컸다. 주로 유라시아 구대륙의 역사만을 보아왔기에 남미(안데스 문명)의 역사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것이 없었던 필자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개인 일정 때문에 관람일자를 미루다가 1월 31일에 비로소 친구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외국문명에 대한 특별전이라 그런지 지난번 이집트전처럼 이번에도 관람객들이 붐비는 까닭에 유물 설명들을 찬찬이 읽기가 좀 어려웠다. 그래도 대체적인 파악을 위해 되도록 꼼꼼히 읽어보았다.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후 1572년까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데스 문명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1. 차빈(Chavin), 쿠피스니케(Cupisnique), 파라카스(Paracas) 문화로 대표되는 고대 문명 시대
2. 모체(Moche), 리마(Lima), 나스카(Nasca), 티아우아나코(Tiahuanaco) 문화 등 기원전 100년을 전후하여 국가 단계로 발전한 시대 - 대략 한국의 삼국시대와 동시대
3. 안데스 최초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와리 제국(Wari Empire, AD 600~900) 시대 - 한국의 남북국시대와 동시대
4. 와리 제국의 붕괴 이후 치무(Chimu, 1300~1470) 제국 등 각지에 국가 성립, 이후 잉카(Inca, 1430~1532) 제국에 의해 통일
수 천 년이나 되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개별 문명들이 세워졌기에 필자가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고 본 글에서도 장황하게 나열할 수 없는 관계로,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점들을 중심으로 써본다.
가장 먼저 언급할 만한 것은 아무래도 모체 문명의 시판 왕 무덤이 아닌가 싶다. 관람 전에 이미 보도자료를 통해서 ‘20세기 세계 고고학 상의 중요한 발굴’이라는 말을 접했기 때문에 내심 기대되기도 했다. 거대한 시판(Sipan) 피라미드에서 왕의 무덤을 비롯한 여러 무덤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시판 왕 무덤 관련 전시 코너에 들어서면 그 앞에 왕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복원되어있다. 왕의 복장이 황금으로 치장되어있어 당시 그의 권위가 높았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또한 놀라운 것으로 치무 제국 시대의 장례 모형 유물이 기억난다. 달의 신전에서 출토되었다는 2점의 모형은 당시의 장례 풍습을 인형으로써 그 세세한 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자체가 역사 기록인 셈이다.
기록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 언급하자면, 안데스 문명에는 오랫동안 문자가 없었다. 문자가 없는 사회에 대해 신기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세계에서 문자 없이 살았던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잉카 시대에 접어들면서는 드넓은 제국의 통치를 위해 키푸(Quipu)라고 불린 결승(結繩)문자를 사용했다고 한다. 책에서만 간혹 봐왔던 매듭문자를 직접 유물로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관련 설명에 키푸에 대한 사용은 전문가만이 가능했다고 하니, 지배층들이 제한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문자가 없었던 까닭에 나중에 스페인군이 침략했을 때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無)문자 사회가 유(有)문자 사회에 비해 덜 진보되었다고 할 것인지는 아직 필자의 공부가 부족한 관계로 판단을 유보하고자 한다. 통상적인 문명 진보론에 반대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어서, 그 책을 읽은 뒤에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키푸(Quipu)
필자가 오래전에 『신의 지문』이란 책에서 잉카인들이 쌓은 벽돌을 보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는데, 바로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Cusco)의 12각 돌이었다. 실제로 관련 사진을 보면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2각 돌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각을 가진 벽돌들(그것도 굉장히 큰)이 전부 전혀 빈틈없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잉카인들의 굉장한 건축술을 다시금 느꼈다.
안데스 문명을 포함한 미주 대륙에서는 청동기와 철기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재료로 한 물건들도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들은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것들이 많았다.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토기들의 겉면에는 그들이 믿었던 신들이나 포로에 대한 희생의례 등 당대인들의 생활,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역시도 장례 모형처럼 귀중한 기록인 셈이다. 정교한 유물로는 특히 매우 정교한 장식이 있는 노가 인상적이었다.
청동이나 철제는 없었지만, 금으로 만든 유물들도 적잖이 있었다. 잉카 제국 시대의 자그마한 금제 인물상들을 유심히 살펴본 친구가 인물상의 한쪽 볼이 약간 튀어나온 것을 발견하였는데, 코카 잎을 씹는 풍습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가 아니었으면 무심코 지나칠 뻔했던 대목.
그리고 미라라고 하면 흔히 이집트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을 통해서 안데스 문명에서도 시신을 미라 처리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작년 이집트전의 미라 유물과 비교해보면 양자의 문화적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이집트 미라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누워있는 형태이지만, 이 지역의 미라들은 전부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관람 이후 잉카전 보도자료를 통해서 이것이 다시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계세(繼世)사상이 담긴 것임을 알았다(해당 기사에는 ‘개세’라고 되어 있는데 오타인 듯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지난번 이집트전에서도 있었던 것처럼 동물도 미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전시된 것은 개와 원숭이 미라였는데, 특정 동물을 종교적으로 신성하게 여겼던 것은 역시 세계적인 공통 현상인가보다.
마지막으로 하나 기억나는 것이 펭귄 장식이 있는 토기(펭귄과 관련된 것은 확실한데, 토기인지는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도록에서도 찾지 못했음) 유물이었는데, 친구가 이 지역에 펭귄이 있었냐고 물어왔다. 남미의 맨 밑, 남극과 가까운 곳에도 서식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과거 페루 지역까지 펭귄이 서식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 지역 사람들이 남쪽 지역과 교류한 흔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잉카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제는 스페인의 침략이다. 당시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시대였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를 위시한 스페인군이 1532년 잉카 제국을 침략하였고, 이후 잉카 제국이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아마 현대인들에게도 남겨진 숙제일 것이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손꼽히는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왜 아타우알파(잉카 13대 왕)가 스페인으로 쳐들어가서 카를 5세를 생포하지 못하고,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났을까?” 언뜻 들으면 우스꽝스런 질문 같지만, 굉장히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전시 설명을 통해 아타우알파가 서자로서, 적자인 우아스카르(잉카 12대 왕)와 내분을 겪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잉카의 멸망에 대해서 보다 본질적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잉카 제국을 침공한 스페인군은 전시에서도 보다시피 철제 무기인 창, 검과 심지어 화승총까지 지니고 있었고, 반면 스페인군보다 수적으로 월등했던 잉카인들은 (역시 전시에서 보다시피) 곤봉으로 무장해 있었다. 게다가 스페인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머나먼 유럽에서부터 대서양을 거쳐 온 세력이었다.
그동안 이를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우월함 때문으로 여겨온 기존의 지배적 내지 암묵적인 견해에 대해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지리, 환경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유라시아대륙에 비해 신대륙은 가축의 종류가 매우 적었고, 지리적으로도 신대륙은 남북 간의 교류가 용이하지 않았다(실제로 안데스 문명과 멕시코 지역의 문명들 간의 교류가 거의 없었거나 미미했던 듯하다). 이렇듯 환경적인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기에 양 대륙의 역사 전개가 매우 달랐고, 15세기 동방에 관심을 갖게 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바다로 뻗어나가면서 초기에 만난 상대 중의 하나가 잉카 제국이었던 것이다.
잉카전 학습지에 “피사로 때문에 아름다운 금속 유물이 많이 없다”는 내용이 있는데, 맞는 말이다. 필자도 스페인의 잉카 문명 파괴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듯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시작된 유럽인들의 세계 항해와 지배가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타 세계를 접하던 유럽인들에 의한 원주민과 문명, 동물에 대한 학살 내지 파괴는 어찌 보면 필연적인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냉정한 국제 사회의 현실 속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행위만을 놓고 절대 악이라고 규정지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또한 오늘날 페루인들 가운데 스페인인들과 원주민인 잉카인들의 혼혈인 메스티소인들이 적지 않은 것을 보더라도 스페인 점령 이래의 역사도 그들에게는 무시될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인 것이다.
문명의 몰락이라는 다소 심각한 주제에 대해 장황하게 쓰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다. 잉카문명전이 단순히 과거 문명의 찬란함을 한 번 관람하고 마는 행사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잉카 문명을 포함한 수 천 년 안데스 문명의 융성과 몰락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는 오늘날 새로운 역사를 전개하고 있는 페루인들, 그리고 이 문명을 관람하는 우리 한국인들도 지속적으로 고민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p.s 박물관 내에서 촬영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찍은 사진은 없지만, 관련 사진 몇 개를 첨부합니다. 특히 잉카 건축술은 사진을 직접 보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아서...^^
(사진들 출처 - 태양의 아들 잉카전 블로그 http://blog.naver.com/tlqroddl)
첫댓글 잉카의 미라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게 아닙니다. 이말은 이집트의 미이라처럼 사람이 방부처리에 관여한게 아닙니다. 그곳의 기후에 의해 미라가 만들어진게 대부분입니다. 시체의 부패는 여려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요. 한가지만 작용하지 않더라도, 미이라는 만들어집니다. 저곳은 기후가 건조합니다. 그러므로 시체가 썩지않고 미이라로 남게 된겁니다. 이에반해 한국에서 출토되는 미이라는 공기와의 차단, 즉 회곽묘라는 독특한 묘제에서만 발견됩니다. 물론 회곽묘도 부패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특히 한국의 토양이 산성토라 시체가 부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회곽묘라는 묘제를 쓰면, 일단 산성토양의 영향은 줄어들며, 아울러 석회의 성질이 알칼리인탓에 산성토의 영향은 거의 사라집니다. 그리고 회곽묘 ...... 이거 발굴해본 경험에 의하면, 웬만해서 피장자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한기의 회곽묘 발굴로 하루를 보낸적도 있습니다. 그정도로 단단합니다. 즉 회곽에 의해 공기가 차단되기에 부패가 적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나라에서는 안보입니다. 그렇기에 미이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국형 미이라(?)라고 본다고 합니다.
안데스 지역의 미라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것은 이번 박물관 전시 설명에도 있고, 실제 미라 유물 몇 구도 전시 중입니다. 물론 안데스 지역의 기후 조건상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글을 보니 역시 한 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다간다 하면서도 이래저래 핑계만 대고 못 가게 되는군요.
쉬는 날에 한 번 관람해보세요. 관심 있는 분들이 가시면 전혀 후회하지 않을 전시입니다.
약간 뻘질문이라 할수도 있겠습니다만 티벳같은 곳에선 시신이 잘 부패되지 않아 풍장을 지내지 않나요? 안데스도 약간 비슷한 기후가 아닐까 하는데 저런곳에선 풍장을 지내진 않았나요?
티벳에서 풍장을 지내는 것은 티벳 불교(라마교)의 관념이 있기 때문이죠. 기후가 비슷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교적 차이 때문에 안데스 지역에는 풍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잘봤습니다.^^신농님. 블로그에 남긴 덧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블로그 하시는 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