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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껌좀십은호날두입니다. 근간 학업때문에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하다 방학을 이용해 겨우 근현대사를
쓰게되었네요. 매우 오랜만에 쓰는터라 약간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그전까지 제가 작성했던 유럽각국의 근현대사 편을 종합해 링크하겠습니다.
<껌날두의 근현대사 시리즈 영국,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편> 보러가기▼ (순서대로)
이번 작품(;;)에도 역시 다른 다라들 편과 마찬가지로 '대항해시대(16세기 이후)' 부터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덜란드를 선택한 이유는 지난번 최신작인 '이탈리아'편을 끝낸 이후 원래는 '독일'을 다룰려고 했으나
제가 작품을 완성하고 난뒤 다른분께서 독일에 대해 올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독일은 다루지 않을려고 합니다만
독일을 원하시는분이 많으면.......
아래 사진은 이탈리아편부터 추가된 유럽지역 구분입니다. 서+남유럽과 북+동유럽으로 매우 단순한 구분입니다.
(작업이 원할히 이루어질라면 애매하고 복잡한 유럽의 지역구분을 보다 단순화 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본편에서 다룰 '네덜란드'는 엄밀히 규정하면 '북유럽'이지만 위 지도와 같이 단순히 '서유럽'에 포함시키겠습니다.
국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네덜란드의 국가는 'Wilhelmus van Nassouwe' 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나소우의 빌헬무스
라고 합니다. 여기서 'Wilhelmus'란 그 유명한 네덜란드의 독립영웅 '오랑예 공(빌렘 판 오랑예 공작)'
을 가르킨다고 합니다. Nassouwe는 그가 다스리던 영지일대의 명칭입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명칭입니다.)
영어로는 'Nassau(낫소)'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론 이 국가國歌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얌전한 멜로디라 그리 즐겨듣진 않습니다만 나름 차분한 맛이 있어
들을 만한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북유럽)
하지만 듣기만 해도 전율이 이는 남유럽(프랑,이탈,스페인같은)국가들에 비해 조금 아쉬운 것은 어쩔수가 없군요.
위는 성악가가 부른 버젼이고 다음 버젼은 웅장한 오르간을 사용한 버젼입니다.
네덜란드 왕실인물 전부 검은 색 복장을 하고있는것으로 보아 축제같진 않군요.(종전기념일이나 장례식?)
국가도 들었으니 본격적으로 네덜란드의 근현대사를 탐구해보겠습니다. (편의상 일반체로 하겠습니다.)
네덜란드의 국기와 문장
네덜란드 국토 인공위성 지도
네덜란드란 국토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에는 이 지방은 연중 내내 북해의 강력한 해풍이 불어닥치고
육지에는 바다보다 낮은 고도로 인해 습지와 갯벌밖에 없는 사람이 살기힘든 땅이었다.
그러나 로마제국 멸망후 이곳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은 거친 자연과 맞서 싸워 가며 그들이 사는 대지를 풍요롭고
아름답게 재창조해낸 사람들이다.
제국주의에 광풍에 휩쓸려 한때 영국과 프랑스보다도 넓은 식민지를 운영해 제국주의의 선두격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그들 스스로의 힘만으로 유럽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네덜란드. 또한 우리에게도 익숙한
'하멜표류기'의 주인공인 '하멜과 또다른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으로 유명한 바로 그 네덜란드의 근현대적 역사를
살펴본다.
근 현대사 초기初期(합스부르크 치하의 15세기~16세기, 그리고 독립투쟁)
네덜란드의 역사는 다른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외세에 대한 저항과 독립투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원래 네덜란드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의 왕가로 귀속되면서
유럽 북쪽에 위치한 네덜란드가 동떨어진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수백년의 합스부르크 왕가 치하에서 살아
암묵적인 반 외세 분위기가 팽배해진 네덜란드인들이 또다른 외부세력인 스페인의 지배를 환영할리 없었다.
<당시 유럽지역내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영토, 연한 색부분이 네덜란드 지방>
그들은 점차 그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왕가의 재정을 뒷바침하는데 필요한 '자본'을 공급해주는
금고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스페인 왕들의 악정으로 인해 반反 스페인 분위기가 '북부 저지대 연안 17주'
에 퍼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오랜 전통인 영주들에 의한 지방분권화와 네덜란드인들의 주 업종이 상인활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카를 5세'는 그 자유를 보장해주고 있었던 반면, 그가 사망한뒤, 후계자로 즉위한 필립 2세는
네덜란드어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네덜란드의 정확한 실정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그들을 계속 지배하려했다.
그러한 무지를 바탕으로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세금을 더욱 올리자 자유로운 상업활동의 보장과 자주적 세금운영을
기치로 내걸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은 불만을 표출하게 된다.
이는 때마침 신교도가 득세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곱지 않게 바라보던 스페인의 국왕 필립 2세에게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네덜란드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필립 2세는 계속된 네덜란드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억압과
강권통치를 유지한다. 이같은 폭정이 계속되고 있던 네덜란드 지방에 불씨를 제공한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유명한 '성상파괴운동'이 그 요인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계속된 흉년과 빈곤, 사회적 불균형으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부풀어오를대로 커져있었는데,
때마침 스페인 카톨릭교회가 네덜란드에서도 규모가 큰 플랜더스 지방의 카톨릭교회들의 대규모 보수 공사를
네덜란드에 강압하자 이에 반발한 칼뱅파 신교도들이 플랜더스내 혼트슈테 교회를 습격. 교회 내 성상을 파괴하고
이는 그리스도가 엄명한 '우상숭배금지'를 어겼다면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살얼음판을 걷고있던 네덜란드 신교도 지역 전역에 파급되었으며 네덜란드 전역에서 수많은
카톨릭교회 의 성상들이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진행된 성상파괴운동에 인해 오래된 네덜란드 교회들의 내부장식이 화려한 다른 유럽국가들의 교회 장식에
비해 굉장히 수수하다는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스페인 중앙정부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 유명한 '알바 공'을 총 사령관으로 임명해
브뤼셀로 진격. 1만의 정규군과 보조병들로 구성된 치안유지군을 브뤼셀에 주둔시키고 네덜란드 전역에서 반란
(성상파괴운동)을 일으킨 주범들을 색출하여 공개 처형함으로써 대대적인 살육과 공포정치를 벌이게 된다.
그러한 알바공의 폭정으로 네덜란드의 반 스페인정서는 가라앉기는 커녕 암암리에 더 번져나가게 되었으며
결국 네덜란드의 영웅인 '오랑예-나사우 공公 빌렘'이 영주로 있던 Holland주를 중심으로한 네덜란드의 북부 7개주들이
(Friesland, Gelre, Holland, Overijssel, Stad en Lande (Groningen), Utrecht, Zeeland)
주축이 되는 길고긴 스페인과의 '80년전쟁'을 치르게 된다.
<오랑예 공 빌렘과 성상파괴운동때 파괴된 Utrecht 교회의 성상>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성상파괴운동 당시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내 장식들이 파괴되고 있는 모습을 그린 회화
뒤쪽에서 겁에질린채 신교도들의 파괴행위을 바라보고있는 카톨릭 사제가 인상적이다.>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전쟁)당시 벌어졌던 Nieuwpoort 전투를 그린 그림>
1600년 7월 2일 벌어진 이 Nieuwpoort 전투는 네덜란드의 승리로 끝났다.
공포정치를 일삼던 알바공에 대항해 북부 7개주의 네덜란드인들은 '오랑예 공 빌렘'을 앞세워 단결해 당시 최강이었던
스페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 현재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전역에 해당하는 영토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같은 승리도 잠시, 전열을 정비한 스페인군이 다시금 총공격을 감행하자 종합국력과 인력, 화력면에서
열세였던 네덜란드군은 현재의 벨기에 지역에 해당하는 왈롱 일대를 스페인에게 다시 내주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뜻밖에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스페인과 알바공 역시 전열을 추스리느라 북부로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왈롱지역을 확실하게 스페인령으로 되찾은 것으로밖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반란군의 이러한 밀고당기기가 계속되었고 결국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상대를 압도하지는 못하는
그런 상황이 지속되자 1573년 알바공이 반란 조기진압실패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그뒤를 이어 후임 총독들이 치안유지를 목적으로 몇년간격으로 계속 부임하게 된다. (알바 공->레퀴상스->파르네제)
결국 이러한 미묘한 상황은 전국적인 반란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여전히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네덜란드의 실질적 통치자인 대영주들과 교회의 주교들도 아직까진 네덜란드만의 독립국 보단
스페인 국왕의 통치를 원하고 있었다.
이는 네덜란드가 오랜세월 하나의 나라를 수립하지 못해 지방분권화가 깊이 뿌리내린 다른 지방의 영주들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이지만, 같은 언어를 쓴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라는 자주적인 독립국가건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다스리는 지방의 영지가 잘 다스려지고, 스페인이 자신들의 그러한 관심사를
이해하고 어느 정도의 자치와 다시금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장려해주기만 한다면, 스페인의 통치를 계속 받을
의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백년간 그들이 외세에 억눌려 자주의식이 사라졌다기 보다, 그들은 국가적인 가치보다 훗날 자본주의로
발전하게 되는 그들만의 특유한 상업활동에 더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었으며, 그렇기 위해선 강력한 통일 국가의 지배하에
통일된 체제아래 있는것이 그들의 상업적 활동이 더 잘 지속될 수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최초로 주식개념을 국가적으로 도입했을뿐 아니라 은본위경제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기초라 할 수 있는 화폐제로의 전환을 국가적으로 시행한 나라이기도 하며 최초의 근대적인 은행 시스템(암스테르담 중앙
은행)과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거래소인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 연합 동인도 회사)제도를 발전,
성공리에 정착시킨 나라이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초창기 근대 자본주의의 폐해이자 인류 역사 최초의 '주식폭락(버블)'이라고 기록된 해프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튤립버블' 사건보기
영국의 개입과 네덜란드 공화국 독립 (1570년대~1581년 독립선언과 오랑예 왕가 왕들의 활약)
이러한 상황(네덜란드 반란군 치하 스페인령 네덜란드)이 계속되자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이 반란군의
주축이 되었던 신교도를 지원하기위해 반란군측에 물자를 제공하자 분노한 필립2세는 막대한 아메리카의 금을 이용해
설립한 무적함대를 영국에 파견한다. 본때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세계 역사에 길이남은 칼레 해전에서 대패한 무적함대는 네덜란드인들에게 큰 충격과
새로운 결심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였다. '더이상 스페인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지켜주지 않을것이다' 라는것과
이제 그러한 무능하고 폭압적인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정한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라는것이 그것이다.
위키백과 인용
"1581년 펠리페 2세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프랑스의 앙리 2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앙주공 프랑소와를
네덜란드의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
네덜란드 의회는 이러한 필리페 2세의 결정에 반대하였으며 결국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이상 에스파냐의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임과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
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앙주공은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도시들에 대해 군사력을 행사하는 등 권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 점차 영향력
이 줄어들게 되자 1583년 네덜란드를 떠나고 만다.
네덜란드가 독립선언을 선포하자 에스파냐는 새로운 군대를 네덜란드에 파견하였다.
반 스페인 연합으로부터 지배력을 되찾기 위해 파견된 에스파냐의 군대는 몇 년에 걸쳐 네덜란드 북부 지역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플란더스와 브라반트를 탈환하기에 이른다.
1585년, 당시 저지대 지방의 가장 큰 도시였던 엔트워프가 에스파냐 군대에게 함락되었으며 절반에 가까운 시민들은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하였다.
이러한 스페인의 군사적 행동에 성공회 신자였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명백하게 네덜란드 개신교 신자들의
독립전쟁을 후원하는 것으로 쪽으로 기울었다.
초기에 그녀는 프랑스와 위그노 즉,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 사이에 개입하여 헴프턴 코트 협약을 맺었다가 위그노들로부터
배반당하였던 경험 때문에 네덜란드와 에스파냐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나,
1585년 엘리자베스 1세는 처음의 선언을 철회하고 네덜란드와 논서치 협약을 맺어 반군을 지원하였다.
논서치 협약은 네덜란드 반군이 앤트워프를 공격할 때 영국이 말과 군사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에스파냐의 이러한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어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는 영국 해군과 전쟁을 치르기
에 이른다. 이 전쟁에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위키인용 끝
<1581년 선포된 네덜란드 최초의 독립국,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기>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토를 구성했던 7개주와 지도>
Friesland (프리즐란트 주)
Gelderland (헬데를란트 주)
Groningen (흐로닝언 주)
Holland (홀란트 주)
Overijssel (오버레이설 주)
Utrecht (위트레흐트 주)
Zeeland (젤란트 주)
※주들의 갯수(색)가 7개가 아닌것은 후에 추가설립된 주가 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네덜란드 공화국은 힘센 각 주들이 실권을 잡고 있는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했고, 오랑예 공이
필립2세가 사주한 암살자에게 암살되자 구심점을 잃은 네덜란드 공화국 의회는 분열하여 다시금 필립2세 에게
호의적인 제스쳐를 취하게 된다.
이에 힘을 얻은 필립2세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되어있는 상태의 네덜란드 공화국을 용납할 리 없었고,
1585년 다시 네덜란드 지방으로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하지만 3년뒤에 무적함대 대패)
결국 네덜란드 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은 남부 왈롱 지역은 완전히 스페인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고,
이에 암살된 오랑예공의 뒤를 이은 차남 마우리츠(Maurits van Nassau, 1567 – 1625)가 네덜란드 공화국의 두번째
원수가 되어 (명칭은 원수元首였으나 사실은 왕이었다.) 불완전한 독립을 이룬 네덜란드 공화국을 총 지휘하게 되었다.
독립영웅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오랑예 공의 뜻을 받든 마우리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속적으로 반 스페인 투쟁을
선언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두 부자父子의 노력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이 현재의 '네덜란드 왕국
(Koninkrijk der Nederlanden)'으로 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랑예-나사우 왕가(House of Orang-Nassau)의 탄생과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
<오랑예-나사우의 마우리츠 공의 전신화>
침묵왕(William the Silent, 빌렘 1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아버지 오랑예 공 빌렘 1세의 후계를 이어
제 2대 네덜란드 공화국 총독으로 선출된 (사실상 제위세습) 마우리츠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네덜란드의 독립을 확고히
굳힌 인물로 역사에 명군으로 남아있다.
당시 마우리츠를 보좌하고 있던 총리격이라 할 수 있는 실무자인 올덴 바르네벨트 (Johan van Oldenbarnevelt,
1547~1619)
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마우리츠가 스페인에 대항해 군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거둔데 비해 올덴바르네벨트는 내정을 담당하며
둘은 한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올덴이 점차 마우리츠가 독재를 휘두르고 있다며 비판하고 심지어 왕이 되려한다며 적극적으로 대결구도를 펴자
마우리츠는 그가 스페인으로부터 거둔 성과를 무시하고 스페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없애버리려 한다는 의심마저 품게되자 마우리츠는 마침내 1618년 올덴이 머무르고 있던 홀란트 주의 브릴로 진격해 올덴을 사로잡은 후 처형해버린다.
이에 사실상 전권을 쥐게되어 왕이나 다름없게 된 마우리츠는 온건지향적인 성향을 띄게되어 군사적인 면에서도
눈에 띄는 혁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올덴이 성립한 스페인과의 12년동안의 휴전을 단번에 파기해버린다.
이에 기회를 잡은 스페인이 다시금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미 노쇠하고 재능이 떨어져버린 마우리츠를
격파하는것은 식은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결국 1625년 그가 사망하기전 그의 거점이자 스페인으로부터 첫 승리를
거두었던 브레다를 스페인에게 다시 빼앗기게 된다.
그가 사망하자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프레데릭 헨리크(Frederik Hendrik, 1584~1647년)로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던
네덜란드 공화국을 1647년 그가 사망할때까지 통치하게 된다.
이때 그가 물려받은 네덜란드는 이미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가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때부터 꾸준히 확장시켜온 해외 식민지
들이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더욱 활발하게 상업활동을 벌여 전 세계에서 막대한 부를 쌓아 훗날 네덜란드의
'황금시기(Dutch Golden Age)'로 불리게 되는 시기였다.
Dutch Golden Age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미 종교&정치 그리고 경제적으로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는 안정적인
국내상황을 바탕으로 앞선 기술력, 그리고 신생국가로의 자부심으로 세계로 향해 활발히 뻗어나가 영국보다 앞선
오리지날 '동인도 회사'와 같은 식민경영회사를 당시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자카르타)를 비롯, 전세계 곳곳에 설치하여
동방으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낳는 향신료와 값비싼 동양산 사치품들을 독점하다시피 전 유럽에 팔아 점차 그 부와 힘이
식민통치국이었던 스페인을 위협하고 강대국 영국(잉글랜드)과 프랑스를 위협할 만큼 국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미 강력한 경쟁자이자 대항해시대 초기를 주름잡던 선두국가인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의 막강한 공세에 이미 식민지의
대부분을 상실해 가고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안정적인 상황과 더불어 이미 북해와 발틱해의 상권을 장악하고 지중해까지 그 영향력이 막강했던
네덜란드인 특유의 상업능력과 해운기술, 유럽 최고의 조선기술로 말미암은 네덜란드의 융성은 예술과 문학적인
부분에서도 나타나게 되어 네덜란드가 17세기를 주름잡는 강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황금시기라고 불리는 17세기에 활동한 네덜란드의 화가 램브란트와 그의 대표작품, 'Nachtwacht(야경)'
'북유럽의 미켈란젤로'라 불린 그는 명암의 효과를 어느 화가보다도 잘 조화시켜 수많은 명화들을 남겼다.>
<당시 네덜란드 황금기가 선물한 위대한 철학자인 '에라스무스'와 '스피노자',
이중 에라스무스는 그의 업적과 명성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딴 범 EU지역내 대학생교류 프로젝트인
'에라스무스 프로젝트'는 유럽인만을 위한 제도지만 전세계적인 인재 양성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네덜란드는 또한 네덜란드 본국으로부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인도네시아를 성공적으로 흡수하여 국토면에서도 본국은
협소하지만 세계적으로는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메리카로의 진출(침략)도 활발하여 오늘날의
뉴욕이 되는 '뉴 암스테르담'의 성공적인 건설, 수리남의 식민화를 토대로 아메리카 전역에 많은 식민지도 보유하게 된다.
<1600년경 전세계에 설립된 네덜란드의 식민지>
연한 녹색은 동인도회사로 알려져있는 '주식회사'의 소유로 되어있는 네덜란드 식민지이고,
짙은 녹색은 동인도회사와는 다른 '서인도회사(West Indian Company)'이다.
노란색은 네덜란드가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했지만 네덜란드의 영향권 아래있던 곳이다.
<네덜란드의 북아메리카 식민지중 하나였던 '뉴 암스테르담' 광경, 이 한적해 보이는곳은 훗날 세계의 중심으로 발전했다,
윗부분에 Nieuw Amsterdam이라는 네덜란드어가 선명하다. 뉴암스테르담은 1614년 세워졌다.>
다음은 네덜란드의 직,간접적 통치를 받았던 식민지들과 네덜란드인에 의해 상업거래소가 세워져 사실상의 식민지로
계승되거나 네덜란드인이 무역을 독점한 지역,국가들을 나열한 표이다.
네덜란드령 실론 (스리랑카)
1630년대에 도착한 네덜란드는 이미 스리랑카에 식민지를 건설해놓고있던 포르투갈을 내쫒고 스리랑카를 식민화한다.
포르모사 (대만)
1624 부터 1662까지 시행된 포르모사섬 식민화로 포르모사섬 상당부분이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네덜란드 세력을 쫒아낸것은 유명한 정성공이다.
뉴 홀랜드 (호주)
호주는 영국의 식민지였긴 하지만 그것은 동부일대에나 국한된 얘기였고 서부와 그밖에 광대한 대지는 사실상 방치되거나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그중에서도 서부는 네덜란드인들이 많이 정착해 이름도 '뉴 홀랜드'라는 별칭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사실상 네덜란드의 해외식민지나 다름없었다. (1640년대부터 네덜란드인이 많이 정착했다고 한다.)
중동지역은 전역이 식민지화 되지는 않았지만 페르시아만 일대의 많은 해안도시들에 네덜란드 무역상인들이 많이 진출해
있어 사실상 이 도시들은 네덜란드의 세력권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식민지가 된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동남아시아
전역에 네덜란드 상인에 의한 무역거래소가 설치되어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네덜란드는 점차 동아시아까지 세력을
뻗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남만무역'이 성행하게 된 배경이다. 화란인和蘭人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인들이 이때 동아시아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하는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중점적인 무역 컨텐츠로 자리잡아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심지어 일본의 '나가사키'는 아예 네덜란드인 전용 무역소가 구현되어있을 정도이다. (특이한 형식을 띄는
'데시마'라는 곳이 그것이다.)
()안의 숫자는 네덜란드인에 의한 무역소가 설치되고 철거되기까지의 기간이다.
이란 Band-e Kong (1690년), Bandar-e Abbas (1623–1758), Bushehr (1738–1753), Esfahan (1623–1747), Kerman (1659–1744), Khark (1753–1766), Lar (1631,) Qeshm (1685), Shiraz (???)
Al Basrah (이라크, 1651)
파키스탄
네덜란드 상인은 파키스탄 신드지방의 타타Thatta 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652-1660)
예멘 Aden (1620), Al Mukha (1621–1623, 1639–1739) Ash Shihr (1614–1616)
방글라데시 Dhaka(1664–1704)*
오만 Muscat(1674)*
미얀마 Bandel (1608–1631, 1634), Syriam (1635–1679), Ava (1635–1679), Mandalay (1625–1665), Martaban (1660),
Pegu (???),
태국 Ayutthaya, Bangkok, Nakon Si Thammarat, Pattani, Phuket, Songkhla
말레이시아
Telak Gedung에 네덜란드인이 지은 요새의 폐허가 남아있다.
Melaka (당시는 말라카라고 불린 국제교역의 중심지였는데 말라카 왕국이라는 무역강국도 있었으나 서양세력에 의해 멸망)
Kuala Kedah, Kuala Linggi, Kuala Selangor, Tanjung Putus, Ilha das Naus
Kota Belanda (1670–1743, 1745–1748)
캄보디아 Phnom Penh, Laauweck (1620–1622, 1667)
베트남 Hanoi (1636–1699) Hoi An
중국
Fuzhou (????-1681), Huangpu (황푸는 오늘날에도 중국 상해의 중심 거리이다. 1728), Canton (1749–1803
일본
Firando (1609–1641) Deshima (나가사키, 1641–1853)
한국
역사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우리 한국인들조차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당시 동인도회사령 인도네시아의 수도
바타비아에서 한국(조선)과의 교역을 추진하기 위해 'Coree'호를 건조했다고 한다.
이는 조선이 당시 네덜란드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에따른 지식도 미비했기 때문에 돈이되는 시장이라면
어디든 진출하고자 했던 네덜란드인들의 호기심과 금전적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선을 사전탐사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코레호는 몇개월의 시찰과 일본거주 네덜란드인들의 건의서를 받고 당시 동양시장을 총괄하고 있던 바타비아와
네덜란드 본국의회에 서신을 보내
조선이 매력이없는 시장이라고 판단되어 철수한다라는 입장을 밝히고 그 뒤 코레호는 대만과 일본만을 오가는
무역선으로 쓰여버렸고, 결국 하멜이 네덜란드로 귀환하기까지 조선은 네덜란드와 전혀 교류가 없는 상태로 남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정보력에 한계가 있던 상황으로보아 조선은 충분히 교류할 만한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독점적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일본과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인지하고 있던 중국상인들의 견제에 의해
조선과의 무역이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어찌됐든 이는 불행중 다행으로 우리가 서양세력의 침투를 미연에 피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이것이 부정적인 요인도 되어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채 결국 서양의 우수한 기술문화를 습득하지 못했다는 불우한
점도 가지고있다. 이때 받아들인 서양의 앞선 기술을 네덜란드로부터 수입한 일본은 그뒤 근대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이다. (明治維新)
아무튼 이와같은 목록이 보여주듯 네덜란드인의 국제적인 상업감각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이전까진
그저 식민지의 물산을 수탈해 유럽본국으로 운반하는 단순한 약탈에 불과했던 유럽제국들의 식민경영이 점차
조직화되고 지능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승한 것이 대영제국이다.)
또한 그들은 앞선 대항해시대 식민 제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과는 달리, 원주민들과의 무력충돌도 불사하는
강제적 '카톨릭교 포교'를 앞세우기 보단 철저히 상업위주의 '시장확장정책'을 주로해 비교적 성공리에 그들의 사업을
확장시킬수 있었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바타비아(Batavia)'에 건설된 네덜란드 요새와
동인도 회사(East Indian Company)의 전경>
<일본 나가사키 시에 설치되었던 에도막부 시대의 유일한 일본국의 서양인 무역 거래소인
'데지마출항소(出島出港所)' 전경, 이 특이한 구조를 가진 섬은 오직 네덜란드인만을 위한 통상,교역의 창구였다.>
네덜란드의 앞선 조선기술로 건조된 세계 최초의 증기선,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의 삼색기가 위엄차다.
이같은 기술의 혁신이 네덜란드가 세계를 지배하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이상의 모든 사진들은 위키백과 영문판 http://nl.wikipedia.org/wiki/Dejima에서 가져왔습니다.--
<황금시기의 쇠퇴와 영국,프랑스와의 경쟁, 그리고 몰락>
16세기 독립을 이룬 직후 17세기까지의 해양 상업, 무역업의 발전으로 인한 네덜란드의 부흥에 가장 신경이 곤두선것은
영국과 프랑스였다. 이미 스페인은 영국과의 해전에서의 패배로 유럽내에서 그 지위를 상당히 잃어버린 상태이므로,
영국과 프랑스는 앞다투어 네덜란드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간섭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먼저 강대국이된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인것은 스페인으로, 당시 네덜란드는 아직도 스페인과 전쟁중인
상태였으므로, 강대국이된 네덜란드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었던 스페인과 다시 전쟁을 재개하게 된다. (30년 전쟁)
16세기부터 시작된 독립전쟁이 80년동안이나 지속되고 마침내 베스트팔렌조약(1684년)에서 최종독립이 승인된 것이다.
<1607년 스페인과 네덜란드사이에 벌어진 Gibraltar 해전, 이 해전에서 네덜란드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1635년 반 스페인 타도라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프랑스-네덜란드가 동맹을 맺고 스페인이 지배하고있던 왈롱
지방과 신교도가 다수이긴 했지만 아직 북부연합(네덜란드 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플랑드르지방에 대규모 공세를
퍼붓자 궁지에 몰린 스페인은 결국 네덜란드와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독립을 확인하는 베스트팔렌조약을 독일 뮌스터에서 비준하는 개신교동맹과 구카톨릭동맹 대표자들>
이제 비로소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는 그러나 곧이어 들이닥친 프랑스와 영국의 압박으로 차츰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상공업으로 일찌감치 막대한 부를 쌓고 광대한 식민지를 보유한 네덜란드를 탐낸 프랑스가 루이 14세가 독립전쟁의 후원을
이유로 먼저 네덜란드에 대해 간섭을 시작한 것이다.
이부분은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전부 인용합니다.
<프랑스-네덜란드 계승전쟁>
1672~78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일으킨 두차례의 침략전쟁
프랑스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분할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672~74)도 이 전쟁의 일부였다.
1672년 5월 프랑스 및 독일의 뮌스터·쾰른 공국들이 합세한 이 침략전은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 공화국의 7개주
가운데 3개주를 재빨리 점령했다.
오라녜 공(公) 빌렘 3세가 지휘하는 네덜란드 군대는 암스테르담 주위의 둑을 허물어 물을 넘치게 한 다음, 이 '홍수전선'(Water Line) 너머에 집결했다. 가을이 되자 빌렘은 침략자들에 대한 작전을 시작했다. M. A. 드 로이테르 제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은 1672년 솔 만(灣)에서 영국 해군을 격퇴, 1673년 오스탕드와 케이크도인 앞바다에서 또다시 적군을 격퇴함으로써 매번 침략을 좌절시켰다.
<솔 만에서 벌어진 전투>
영국은 1674년 2월 네덜란드와 웨스트민스터 평화조약을 맺었고, 원래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던 브란덴부르크는 1673년 7
월 프랑스와 강화했다(그러나 브란덴부르크는 다음해 프랑스와 다시 싸웠음). 한편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로렌 공국(公國)
은 네덜란드 편에 섰다. 1673년말 프랑스는 네덜란드에서 물러갔으며, 뮌스터와 쾰른 제후도 전쟁에서 손을 뗐다.
1674~78년 프랑스는 사실상 유일한 동맹국인 스웨덴과 함께 네덜란드 남부와 라인 강 유역을 집요하게 공격해 보조가 맞지
않는 대동맹(Grand Alliance) 군대를 패배시켰다. 전쟁은 네이메헨 조약(1678~79)으로 끝났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영토상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았으나 프랑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인용 끝
또한 네덜란드는 이 전쟁기간 중 프랑스편에서 네덜란드가 식민강국으로써 위상을 떨치는것을 참지못하고 침략을 감행,
네덜란드는 유럽의 강대국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불운을 겪게된다. 이것은 곧 황금시기의 종말을 뜻하고 네덜란드가 점차
강력한 경쟁자들이었던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버리고 있다는것을 뜻한다.
<영국-네덜란드 전쟁> 브리태니커를 다시 인용합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졌던 4차례의 해전.
처음 3번의 전쟁은 세계 무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으로 이를 통해 영국의 해군력이 확고하게 다져졌다.
마지막 4번째 전쟁은 미국 독립에 대한 네덜란드의 개입으로 야기되었는데 이로 인해 네덜란드는 세계 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했다.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52~54)은 영국의 해상무역에 대한 네덜란드의 간섭을 막기 위해 영국이 1651년 항해조례를
제정한 데 따른 긴장기에 시작되었다.
1652년 5월의 한 우발적인 사건이 영국으로 하여금 7월 8일 전쟁을 선포하게 했으며 마르텐 트롬프 제독이 이끈 네덜란드군
이 패배했다. 트롬프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은 12월 던지네스 앞바다에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듬해에 벌어진 대부분의
주요전투에서는 더 규모가 크고 우수한 무기를 지닌 영국 군함들이 승리했다.
1653년 여름 테셀(테르헤이데) 앞바다에서 벌어진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은 패배하고 트롬프는 전사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은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1654. 4).
<테르헤이데 전투>
두 나라의 무역경쟁은 1665년 다시 전쟁을 불러일으켰다(1665~67년의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양국의 적대행위는 그 전년도부터 시작되었고, 영국은 이미 뉴암스테르담(뉴욕)을 점령하고 있었다.
영국은 1665년 3월 전쟁을 선포하고 6월 로스토프트 앞바다에서 네덜란드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는 네덜란드가 승리했다.
영국의 동맹국인 뮌스터 공국은 1665년 네덜란드 영토로 군대를 출정시켰으나 이듬해인 1666년 1월 네덜란드 편을 들어 전쟁
에 개입한 프랑스군에 패했다. 1665년의 전염병과 1666년의 런던 대화재는 영국의 곤경을 가중시켰고 1667년 6월 채텀에 정
박중이던 영국 함대가 네덜란드군의 공격으로 파괴됨으로써 영국은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이 전쟁은 그해 7월 브레다 조약으
로 종결되었다.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72~74)은 1672~78년의 전(全)유럽 전쟁의 일부였다.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전쟁 상태에 재돌입하기 전 100년 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했지만, 네덜란드가 당시 영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아메리카 식민지들과 비밀리에 교역 활동을 하고 협상을 체결한 것이 발단이 되어 전쟁이 일어났다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 1780~84)
영국은 1780년 12월 20일 전쟁을 선포하고 이듬해 네덜란드 해안을 철통같이 봉쇄한 가운데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에 있는 네덜란드 속령(屬領)들을 재빨리 점령했다. 이 전쟁중 유일하게 전투다운 전투였던 1781년
8월 도거뱅크 앞바다 전투에서 네덜란드의 소규모 함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후 네덜란드는 전투에 나설 만한 함대를
조직할 수 없었다. 1784년 5월 전쟁이 끝나자 네덜란드의 세력과 위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용 끝
이러한 잇다른 강대국들과의 전쟁에다 내부 불만도 가중되어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결국 1795년 네덜란드
의회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후에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바타비아 공화국' 성립
됨으로써 네덜란드 공화국은 붕괴하고 프랑스의 보호령이나 다름없는 신세에 놓이게 되었다.
<바타비아 공화국과 홀란드 왕국, 그리고 현대의 네덜란드 왕국으로>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린 네덜란드는 결국 찬란한 영광은 금세 끝이나버리고 약소국의 근대사가 그렇듯이 강대국들의
세력각축장이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영국은 전세계에 흩어진 네덜란드령 식민지들을 야금야금 합병하기 시작했고
본국은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해 네덜란드는 유럽의 3류국가로 전락해버린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러한 상태를 용납할 수 없었다. 네덜란드인은 이미 자신들의 나라를 세워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경험과 자긍심이 있었던 만큼 스페인치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집권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전락시켜
버린 이후 나폴레옹은 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국왕으로 임명한 뒤 '홀란드 왕국'으로 대체시켜 버린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1세와 그의 동생 바타비아 공화국을 대체한 홀란드 왕국의 국왕 루이 보나파르트>
그러나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인 홀란드 왕국은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일어난 반란운동으로 인해 독립을 우려한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 1제국에 완전히 편입시킴으로서 결국 프랑스의 직접지배를 받게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프랑스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독립운동은 더욱 활발히 일어나 결국 나폴레옹이 1815년 실각하자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성립된 임시정부는 오랑에 공 빌렘 6세에게 네덜란드 공화국의 수장이 되어줄 것을 의뢰했다.
그 후 공화국의 수장이 된 빌렘 6세는 오랑예 가家의 복위를 선언하고 빌렘 1세로 즉위한 뒤 네덜란드 전역과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병합한 형식의 '네덜란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the Netherlands)'를 선언하여
완전한 주권국가를 선포하게 된다.
<벨기에의 독립, 연합 왕국의 해산> 위키백과를 인용합니다.
1579년부터 그의 선조 네덜란드 공화국의 빌렘 1세가 꿈꿔왔던 통일은 마침내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빌렘 1세의
대에 와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통합 당시 북부 네덜란드의 7주가 지고 있던 대외부채는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한편 인구는 남부 네덜란드의 10주보다 더 적
었다. 그럼에도 북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부채가 그대로 연합왕국에 떠넘겨져 인구가 많은 남부 네덜란드가 북부 네덜란
드의 빚을 갚아주는 형국이 되었다. 한편 인구가 적은 북부 네덜란드는 인구가 많은 남부 네덜란드와 통합의회에서 동등한 대
표권을 행사했다.
남부 네덜란드에서 로마 가톨릭의 교세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전통이 뿌리깊은 북부 네덜란드의 종교 정책은 연합
왕국 전역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행정에 있어서는 남부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인구가 많음에도, 연합왕국의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단일로 결정되었다. 통상정책에 있어서는 남부 네덜란드가 보호무역 정책을 필요로 했음에도 북부 네덜란드가 필
요로 하는 자유무역 정책이 연합왕국의 정책으로 고집되었다.
분리흡사 식민지를 통치하는듯한 빌렘 1세의 통치에 반감이 깊어진 남부 네덜란드인들은 1830년 혁명에 자극받아 브뤼셀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빌렘 1세는 반란이 장기화되면 반드시 열강이 개입하리라 생각하여, 반도 전쟁에서의 종군 경험으
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이어서 남부 네덜란드에서 인기가 있던 왕세자 빌렘 2세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설득
하려 했다.
빌렘 2세가 반란군에게 많은 양보를 제안했음에도 반란을 가라앉히는데는 실패했다. 1831년 1월, 유럽의 열강들은 남부 네덜
란드가 벨기에로 독립하는 것을 승인했다.
1831년 8월, 빌렘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로 침입하여 신생 벨기에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추대된 레오폴 1세의 군대를 무
찔렀으나 프랑스의 개입 위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있던 네덜란드의 빌렘 1
세는 다시 벨기에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이려 했으나 네덜란드 국민들조차 이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840년 10월 퇴위했다. 벨기에의 독립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고, 네덜란드 연합 왕국은 종언을 고했다.
인용 끝. (이후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1890년 네덜란드에서 빌렘 6세가 즉위하자 독립하였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초대 국왕이었던 '빌렘 1세'의 전신화>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국기와 문장>
벨기에가 연합에서 이탈함으로써 네덜란드 연합왕국은 존재이유가 사라졌지만 북부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만의 나라를
계속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홀란드 주를 중심으로한 '네덜란드 왕국'이 계속 존속하게 되었지만 그같은 평화도 역시 잠시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때 중립을 지켜 국토가 전란에 또다시 휘말리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곧 제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치 점령하의 네덜란드 왕국>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제 2차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몇개월뒤, 히틀러는 서유럽으로 시선을 돌려
중립을 선언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룩셈부르크등의 약소국을 무차별 침공하게 된다.
<네덜란드 왕국을 무차별 침공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
네덜란드는 압도적인 군사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계속하게 되나 결국 나치 독일에 굴복하게 되고 만다.
네덜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오래동안 네덜란드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역활을 해왔던 오랑예 왕가를 폐지해버리고
나치에 봉사할 친위대를 적극적으로 모집하게 된다. 이에 Waffen-SS(나치 친위대)에 가담한 네덜란드인이 무려
2만에서 2만 5천에 이른다고 추정된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군의 침공로와 공습으로 폐허가 된 로테르담 시가지>
그러나 그 뒤 연합국의 미국 참전으로 인한 전세 역전에 힘입은 네덜란드내의 레지스탕스와 연합군의 암스테르담 입성으로
네덜란드는 자유를 되찾게 된다.
독일군이 네덜란드에서 저지른 만행은 '안네프랑크'라는 소녀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게 되었으며 이같은 전쟁범죄 행위가
훗날 많은 네덜란드 인과 세계인들에게 전쟁은 절대 다시 일어나선 안된다는 것을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군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대인계 네덜란드 소녀 안네 프랑크>
<미국 101 공중강습사단 U.S 101 Airborne Division과 아인트호벤에서 해방기념사진을 찍는 레지스탕스들>
<1944년 해방된 것을 기뻐하는 아인트호벤의 시민들>
그 뒤 네덜란드는 전후의 폐허를 딛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해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국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현재 총리는
Stef Blok으로 2010년 유력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후보로 나와 승리한 인물이다.
<현 네덜란드 왕국의 국왕인 베아트리스여왕과 총리, Stef Blok>
-The End-
네덜란드편을 마치며...
네덜란드는 그 좁은 국토에서도 꾸준한 노력과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전세계를 누비며 거대한 상업적 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의 후예입니다. 그들은 전세계를 제집마냥 드나들며 현대의 금융시스템에 대한 기본적인 모든것을 이룩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현대에 자주 접하는 '주식거래', '주식회사', '기업화되고 전문화된 은행'등 현대 자본주의의
기틀을 거의 다 만들어낸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네덜란드인들의 뛰어난 상업정신은 현대에서도 빛을 발하여 2차세계대전이 끝난이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여
독일과 프랑스도 해내지 못한 유럽통합의 기초를 이룬 국가가 바로 네덜란드 입니다. 1957년의 EEC (유럽경제공동체,
European Economic Community)의 결성을 벨기에,룩셈부르크와 추진하여 베네룩스(Benelux)라고 하는 명실상부한
중소형 강국의 대열에 올랐으며 1993년 EEC가 EU로 개칭된 이후 현재까지도 유럽역내에서 강국으로서 번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숱한 외세의 침략못지않게 자연에 대한 도전정신도 강해서 거대한 바다를 간척지로 메워 세계최대의 간척지를 만들어
냈고, 비록 나라는 작지만 사람이 살기엔 결코 좁게 느껴지지않는 국토를 만들어낸것도 바로 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겐 너무도 익숙한 2002년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의 나라이기도 하며, 그러한 히딩크는 바로
'인맥'과 '학연'에 좌우되지 않는 철저한 실리위주의 네덜란드인을 잘 대표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우리 한국인처럼, '일에 모든것을 바쳐가며' 그런 부를 이룩한 것일까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4&sid2=233&oid=001&aid=0002652947
다음 기사를 보시면 아니란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정말 부러운 나라임엔 틀림없습니다.
한마디로 네덜란드는, 능력과 실무로썬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또 그러한 능력으로 대항해시대 못지않게
과거의 동인도회사처럼 세계곳곳에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네덜란드인들. 과연 그들은 세계 최장의 평균키를
자랑하지만 그것 뿐일까요. 네덜란드인은 그들의 평균 키만큼 알면 알수록 그들의 능력은 그들의 키만큼 세계 최고인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네덜란드 편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다음엔 어느 나라로 할지....... 감이 안잡히네요. 폴란드나 스위스가 좋을것 같기도 하고.....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7개국(잉글랜드,포르투갈,에스파냐,프랑스,베네치아-이탈리아,네덜란드,오스만제국-터키)
은 다 할 계획이었는데 이제 포르투갈과 터키만 남았네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터키는 유럽으로 인정하지 않는지라....
포르투갈은 하면 꽤나 신선하겠습니다만 왠지..... 여튼 고민좀 해봐야겠네요.
또한 2학기대비도 해야하는지라 다시 당분간 쉴 예정입니다.
첫댓글 Wilhelmus van Nassouwe ben ik van Duitsen bloed~
유익한 글 잘 보았습니다. 단편적으로만 알고있던 유럽사를 보충할수 있었네요
다음 나라로는 룩셈부르크가 어떨지ㅋㅋㅋ
뤽성부르..ㄷㄷ 제 개인적 기준을 세운게 있는데 유럽에서 작은 나라들은
나중에 한꺼번에 10개씩 편성해서 역사를 간략하고 짧게 소개시켜드릴까합니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포르투갈이 유력합니다만 동유럽도 생각하고 있지요.
천천히 정독했습니다.잘 읽었고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ps: 네덜란드의 잔인한 식민통치 방식도 언급하시면 더 재미있어 지겠군요.
다른 국가들과 거의 비슷했지만 몇몇 사건은 그들을 능가했죠...
우크라이나 어떠신지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다시 수복할려고 했는데 걍 UN이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해줘서 데굴데굴 꿀꿀멍멍
유럽을 둘로 나눌 거면 북유럽은 서유럽에 포함시켜야죠. 그리스도 포함시키면 좋고요.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북유럽"인 지역은 노르딕 국가+핀란드입니다. 네덜란드를 북유럽에 포함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죠.
북유럽구분 알고있습니다만 그 구분요소 다 차치하고 아무런 근거없이
그은 선입니다. 앞으로 유럽나라들을쓸때 북유럽국가들과 동유럽
국가들을 같이 다루겠다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는 제 실수이니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어처구니님도 유럽에대해 관심이 많으신가보군요
지금껏 제가 쓴 글의 오류들 매번잡아 주시니까요.
모르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지적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리스까지는 남유럽 아닌가요?
본의아니게 제가 저위에 올린 지도를 보시고
오해를 하신분들께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올린 저 지도의 참뜻은 실제 유럽의 지리
구분이 저렇다고 '주장'할려는게아니라 단지
제가 쓸 나라들의 카테고리를 만들려고 부정확하지만 임의대로 만든것뿐입니다 오해없으
시길바랍니다.
우왕 잘 봤습니다. 정말 자세하네요 ㅎㅎ
잘봤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1차 2차 3개국 분할도 플랑드르 지방이 어느정도 관련되있고 100년 전쟁원인도 플랑드르 지방이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죠.
옛날부터 부유한 지역이었다구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등의 해상 교통중심지인 알토란 지대였다고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