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없는 의 롬4:6~12절 2024.9.22. 말씀
* 말씀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
성도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 그 출발점은 '나는 십자가의 원수 된 자다'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을 통해서 나의 잘못을 지적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는 성경을 대할 때 그 출발점이 '나는 십자가 편에 서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말씀이 자신을 옹호하고 칭찬하고 높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스스로 십자가 편이라고 하나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지 않는 자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리고 끝까지 내가 십자가의 원수임을 모른 채 살다가 멸망으로 끝나버리는 마지막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십자가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행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착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무시하는 자에게는 공격성을 띄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같이 되고 싶은 욕망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기에 남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멋진 행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멋진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십자가 편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생각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데 그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반문은 하지 마십시오. 말씀은 그냥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내 앞에 말씀이 있다는 것은 곧 내 앞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행위가 있다고 해서 자신을 십자가 편에 서 있는 자로 판단하는 것은 결국 말씀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의의 기준에서 이미 행위라는 것은 삭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을 아니했다는 것은 행위를 말합니다.
즉 행위가 없어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경건이라는 것도 역시 사람들의 행위가 기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건치 않아도 의롭게 하신다는 것은 거룩하게 보이는 행위가 없다고 해도 의롭게 여김 받는데는 전혀 지장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의에 대해서 판단을 할 때 자신의 멋진 행위를 바라보고 판단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상관없는 잘못된 판단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 6~8절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다윗은 복을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움 받고 주께서 죄를 인정치 아니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가리움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6절에서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행복에 대한 다윗의 말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 또는 의를 보여라
즉 일한 것이 없이 죄를 사하심을 받고 가리움을 받고 인정치 아니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과연 이 행복을 아십니까? 복을 복으로 인정치 아니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자입니다. 엉뚱한 복을 찾아 헤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김 받는 것은 무한한 복이며 행복인데도 이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행위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믿음은 행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역시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9~12절의 말씀입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의 표시였습니다.
할례를 거룩의 흔적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거룩을 포기하는 것이고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는 행위로 여겼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할례를 구원과 직결되는 행위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 누구라도 '할례는 율법의 의식이고 율법의 의식은 끝났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는데 할례를 주장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평가를 내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할례를 고집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으로 바라볼 줄 아는 우리들이라면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행위는 의미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우리들은 기도하는 행위도 예배드리는 행위도 구제하고 선교하는 행위도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는 의미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물론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성도라면 인간의 행위가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지만 의롭게 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라고 하면서 결국에는 행위에 의미를 두는 쪽으로 나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의롭게 되는 표로서 할례를 고집하는 것이나 의롭게 된 자로서 행동이 있어야 함을 고집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긴 때가 할례시냐 무할례시냐를 말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할례를 행할 것을 말씀하는 것은 17장에 나오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김 받는 것은 15장에 나옵니다.
결국 할례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김 받는데 있어서 전혀 어떤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를 11절에서는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깐 할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할례란 육의 계통이 단절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육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난 민족이라는 의미가 할례입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은 자는 항상 '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살아간다'는 의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정신이 없으면 아무리 할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줘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말씀했던 것입니다. 즉 육체의 할례는 단순히 육체 위에 흔적을 남기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할례는 아담으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는 육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 십자가 피의 정신과 가치가 살아있을 때만 성도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으로 할례의 표를 받았다는 것은 의의 표가 할례라는 의미가 아니라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곧 할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흔적으로서의 할례가 아니라 육체를 부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로 여김 받은 자의 흔적임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무할례자든 할례자든 모든 자에게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로만 이루어집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있기에 성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 말고 이것이 없으면 성도가 아니고 교회가 아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저것 멋진 행위를 연출해서 성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자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행위가 있다 없다가 우리를 성도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성도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십자가만 자랑하면 됩니다. 그것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