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의 생각을 대변한다는 산케이(産經)신문이 우리 영화 <명량>을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를, 종종 친일로 의심받을만한 기사를 올리곤 하는 조갑제닷컴이 전문 번역하여 올렸다. 코멘트하면서 기사 전문을 올린다. 조갑제닷컴 등 우익지들은 주로 반공-친일 성향을 보이고, 좌익지들은 반미-반일-친북 성향을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나중에 설명할 일이 있을 것이다. <소설 이순신> 작가로서 직접 코멘트한다. 내 코멘트는 초록색으로 표시한다. ----------------------------
<영화 '명량'(鳴梁) 空前의 히트.. 惡役 후손은 소송> * 전과 과도하다 ; 전혀 과도하지 않다. 자료에 따르면 일본이 동원한 전선은 약 200여 척으로 나온다. 이중 주요 전선인 세키부네는 약 130척이고, 나머지는 전선이 아닌 보급선, 연락선, 작전선 등이었을 것이다. 침몰된 일본 세키부네는 약 31척이고, 1백 척은 반파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 주장대로 침몰된 일본 군선은 약 31척 뿐이지만 당시 급한 썰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의 대승이 맞다. 조선 수군의 대승이란 말이 기분 나쁘면 '일본 수군의 전략적 실수에 따른 대패'라고 이해하기 바란다.
* SF식 병기 ; 거북선을 가리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거북선은 확실히 존재했다. 다만 명량해전에서는 없었다. 그리고 화포를 쏘면 포탄이 터지면서 크게 폭발하는 듯한 장면은 다 가짜다. 무쇠탄이 날아가 적선을 깨뜨렸을 뿐이다. 그외 신기전, 조란탄 등은 사실이다. 일본은 이런 무기가 전혀 없었다.
- 나는 최대한 팩트를 기초로 이 작품을 썼다. 사료를 해석하는 데서 차이가 있을 뿐 역사적 사실을 가공하거나 변형하지는 않는다.
監督은, <日本人은 ?史에 대해 잘 모른다. 이 作品은 日本의 ?
* 일본 수군 인원 8천명 안된다 : 일본 전선 세키부네는 1척 탑승 인원이 약 80명이다. 참전 세키부네를 130척으로 계산하면 8천명이 훨씬 넘는다.
* 조선 수군은 달아났는가 : 전략적 후퇴다. 당시 일본 군선 중 침몰, 대파 등으로 전력을 상실한 배는 약 130척이었다. 그러고도 일본 수군은 수백 척의 전선을 더 보유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오로지 판옥선 13척(1척 수리중) 뿐이었으므로 일단 후퇴를 하면서 일본 수군의 대응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이 단지 판옥선 13척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경기수군, 황해수군이 더 있기 때문이다.(실제 전력은 모름). 또 판옥선 뒤에서 전선으로 위장하여 늘어섰던 어선들이 있고, 보급 등을 맡은 협선이 수십 척 더 있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은 감히 보복에 나서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후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침몰된 일본 세키부네는 약 2백 척이고, 나포된 세키부네는 1백여 척이다.
* 일본측 피해는 선봉 몇 척이 침몰하고,....수십 명이 전사했다 ; 거짓말이다. 세키부네 중 침몰한 게 31척이다. 탑승인원을 80명으로 잡으면 2400명이고, 절반으로 줄여 잡아도 1200명이다. 침몰한 배에 타고 있던 노꾼도 다 죽었을 텐데, 노꾼만 1척 당 약 40명이 탑승한다. 산케이의 거짓말이다. 반파 전선의 희생자는 잡지 않아도 이처럼 많다.
* 상륙 후에도 '큐슈(九州)-釜山'間의 補給에 애로가 있었다는 記?은 없다 ;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는 동안 부산 쪽에 몇 차례 출전한 기록이 있다. 일본군이 우리 수군 측에 언제 보급선을 띄운다고 알려주지 않는 다음에야 무작정 기다렸다가 칠 수는 없다. 이순신 또한 아무 때나 부산 앞바다로 진격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육군 지원 없이 부산의 많은 일본군을 수군만으로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임무는 일본 수군이 일본군을 태워 남해-서해를 타고 보급하거나 군사를 수송하는 걸 막는 일이었다.
* 약 7년간 제해권(制海?)이 朝鮮軍의 수중으로 넘어 간 적은 한번도 없었다 ; 거짓말이다. 일본 수군이 일본과 부산을 오가는데 애로가 없었을 뿐 일본 수군은 수로를 이용해 서해안으로 들어가본 적이 없다. 예를 들어 명량대첩이 일어날 때도 일본군은 그곳에서 지척인 해남 어란포에 과도직무(鍋島直茂 ;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이끄는 일본군 좌군 별동대 2만 5천 명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일본 수군이 만일 서해까지 장악했다면 전라, 충청을 침입했을 때 일본군이 도적질한 물건이나 포로로 잡은 백성을 군산, 목포, 당진 등에서 얼마든지 수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하고 남해까지 육로를 통해 내려간 다음에야 수송선을 이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는 동안은 울산, 부산, 김해, 진해 등 주로 경상좌도 해안만 이용할 수 있었을 뿐이다.
■ 일부 韓?人도 싫어하는 '헬(Hell)朝鮮' 文?.慶長의 役(임진왜란) 당시 朝鮮은, 일부 韓?人들도 '헬 (Hell)朝鮮'(지옥같은 朝鮮)이라고 싫어할 정도로 最?(최악)의 時代다. 일부의 귀족(양반)이 대부분의 부(富)를 독점했고, 이들은 권력투쟁에 세월을 다 보냈다. 많은 백성들은 거의 家畜(가축)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奴隷(노예)였다.
* 조선 백성들은 가축에 가까운 취급을 받는 노예였다 ; 그때는 신분제 사회라서 조선만 그런 게 아니고, 중국, 미국 등 모든 나라가 그러했다. 일본은 더 심했다. 조선은 비록 노비라도 3심제로 처벌이 되지만 일본은 영주의 말 한 마디로 할복할만큼 사법체계가 독재적이었다. 임란 때 들어온 일본군은 성주를 따라온 백성들이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성주의 노예들이나 다름없었다. 성주는 자신의 백성들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도관찰사라도 백성들의 목을 벨 수 없었다. 오로지 왕만이 사형 여부를 결정했다.
* 이런 이유로 일본군 중에 조선에 항복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이들만으로 구성된 부대도 있었다. 이를 근거로 일본의 당시 사회 체제를 이제 와서 비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무작정 자국 역사를 비호하는 일본인이 아니라 우리역사라도 시시비를 가리는 한국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文?.慶長의 役(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러한 일반민중들이,
* 경복궁 장예원을 불태운 것은, 선조 이균이 한양성 방어전조차 치러보지도 않고 무작정 달아났기 때문에 백성들이 화가 나서 저지른 사건이다. 기타 일본군에 부역한 사람은 실제로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을 도운 일본인처럼 이 정도는 어느 전쟁에나 있다. 거꾸로 부산진, 동래성, 진주성에서 기생, 노비까지 결사항전한 것은 왜 안보는가. 또 의병 구성원 중 상당수가 노비들이었다. 천민이던 승려들도 수천 명이 참전했다. 일본 같으면 조선처럼 민간인이 정규군에 맞서 싸운 사례가 없다.
* 朝鮮王朝의 奴隷制度에 反旗를 든 민중들 ; 일본 노비들은 겁이 많아 감히 반역을 못일으켰을 뿐이다. 조선의 노비들은 전쟁이 안일어나도 종종 반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이 잘 모르는 것같다.
* 文化도 황폐(退?)한 상태였다 ; 천만의 말씀이다. 일본은 그때 조선에서 무수한 서책, 도자기, 종자, 불구 등을 훔쳐갔다. 일본 같으면 영주나 가지고 있을 법한 물건을 조선에서는 양반가마다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조선 문화에 일본군들이 충격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면이 들어간 방한구 정도 ; 병사들의 복장이라면 인정한다. 단지 색깔로 구분했을 뿐이다. 다만 장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병졸들이 그러했지 장수들은 제대로 된 장수복을 입었다. 도리어 일본군이 훈도시만 입고 왔다가 겨울에 무수하게 얼어죽은 사실이 있다.
*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일시적으로 사용했을 뿐, 그의 전사 후 대규모 해전이 일어나거나 날 가능성이 적이 없기 때문에 건조된 바가 없다. 거북선은 무게 때문에 더 많은 노꾼이 필요하여 접근전말고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 배설에 대한 왜곡 등 몇 가지 사실이 거짓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명량>의 영화적 가치마저 폄훼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내 소설만 읽어도 된다. 그러나 내 소설은 영화 <명량>에서 보여준 최민식의 그 묵직한 연기와 명량의 급물살을 따라가지 못한다. |
출처: 알타이하우스 원문보기 글쓴이: 알타이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