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에 대해 묻다/ 박철
밥을 먹다가 아내가 물었다 굴욕에 대해 아느냐고 나는 이러저러하게 대답하였다 아직 냉전 중이라서 조금 굴욕적이었다 밥을 먹다가 아내가 말했다 굴욕은 밥을 깨작깨작 먹는 것이라고
- 시집『불을 지펴야겠다』(문학동네, 2009) ..........................................................................
남북 양측이 합의한 내용을 자기 홈그라운드에 가서는 아전인수식으로 각각 발표하였다. 문재인 대표도 지적했듯이 김관진 실장이 지뢰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했다고 합의문에 없는 말을 첨언한 것은 분명히 자의적인 확대해석이었다. 북측도 마찬가지로 합의문 작성 배경을 말하면서 '남조선당국'이 근거 없는 사건을 만들어 일방적으로 상대를 자극한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양측 모두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가타부타 시비하진 않았다. 합의 내용은 그대로 발표하되, 합의 배경에 대해서는 양측이 각자 알아서 해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적어도 이 대목만은 피차 굴욕적인 상황을 피해가기 위한 고육지책의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별 수 없지 않은가.
원래 ‘굴욕’이란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뜻이고, 업신여김은 ‘없이 여긴다’ 즉 무시당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찌된 심판인지 머리가 옆 사람보다 조금 큰 것도 굴욕, 키가 작아도 다리가 짧은 것도 굴욕이라고 한다. 가슴이 납작해도 굴욕, 뱃살이 밖으로 조금만 삐져나와도 굴욕이라니, 이런 식이면 누구라도 이 굴욕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굴욕이란 굴욕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 감정 소관이지, 남이 간섭하고 규정지을 성질은 아니다. 누가 뭐라고 조롱하든 말든 나만 괜찮고 당당하면 굴욕이란 없다.
그럼에도 굴욕이 강요되어 이를 극복하지 못한 심지 약한 젊은이들의 의기소침이나 그들이 저지르는 돌출행동을 가끔 보게 된다. 굴욕이란 신체적인 콤플렉스 따위를 지칭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몰고 가는 세태는 분명 불편을 넘어 천박하기까지 하다. 사실 굴욕적 상황은 언제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누구라도 바깥에서 밥을 벌어먹어야하는 처지이고 보면, 벌이의 대가로 굴욕과 수치를 감수해야할 경우가 왜 없겠는가. 그럴 때 그 기분을 집에까지 갖고 와서 꽁해있으면 좋아할 아내는 없다.
자칫 부부간의 다툼이나 불화로 번지기도 한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내가, 내 마음 같지 않은 남편이 서운타. 게다가 희한하게도 부부간에 오히려 더 빳빳한 자존심을 내세우는 속성이 있다. 굴욕의 진앙은 다른 곳인데 애먼 곳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꼴이다. 아직 냉전중인데 아내는 남편의 밥알 헤아리며 깨작깨작 먹는 양을 탐탁하게 볼 리가 없다. 그래도 밥상머리를 걷어차고 떠나기보다야 백배 낫지만, 기왕 해주는 밥 먹을 거면 좀 시원시원하게 퍼먹어주면 어디 덧 나냐는 것이다. 바깥 일하는 남자의 천근만근인 어깨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밥을 깨작깨작 먹는 것’이 바로 굴욕임을 아내는 환기시키고 있다. 남편 입장에서는 멍든 자존심에 소금 뿌리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굴욕도 씩씩하게 씹어 삼키라는 영양가 있는 주문임을 어쩌랴.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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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