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들어가는말.......(본 내용은 FNK자유북한 방송에서 퍼온 탈북자 증언수기 입니다.
제가 퍼온 기사글에대해 신빙성이 없어 삭제요구가 들어왔고 그리고 게시글에도 신빙성 / 사실
성을 의심하는 리플들이 많이 올라와서 이젠 출처를 밝힙니다.
오늘 내용은 위처럼 FNK자유북한 방송에서 퍼온 것이며 그외 기사글은 북한 전문 체널인
NK조선 / 중앙일보사 그리고 기타 북한전문 에서 퍼온(복사)한 것입니다.
오늘로써 저의 가사글은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불분명의 추측성......불분명 기사가 아님을 명확
히 합니다. 100%사실을 바탕으로한 기사글 혹은 증언임을 알리는바 입니다.)
제목 : 2000년 신양 열차 참사는 보도되지 않았다.
(탈북자 이름 생략)
2000년 2월 1일 평안남도 신양에서 온성-평양간 열차가 멈춰있었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1월 23일에 차를 탔지만 28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평양을 10일이 되도록 도착하지 못했다. 신양에서 평양까지 정규속도로 간다면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추위가 심해 싸온 밥이 얼어서 언 밥을 녹여 먹으면서 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열차가 끊겨 신양에서 10시간 정도 머물고 있었다. 그 순간 무엇인가 부딪치는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깜깜한 밤, 불한점 보이지 않는 밤, 무서운 정적만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웬일인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고 몸 위로 어떤 물체가 짓누르고 있었다.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인기척이 들렸다.
본능적으로 “살려주세요”하고 힘없이 말을 했다. 순간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어 여기 사람있네”하면서 나를 들어 홈(플랫폼)에 앉혀 놓았다. 혼미한 의식속에서도 나는 “아저씨 살려주세요. 살려 주세요”하니까 그 남자가 “아주머니 나도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하면서 “이제 구조대가 올거요. 그때까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요”하면서 사고 현장에서 큰 짐 2개를 양손에 들고서 “미안하다”며 떠나갔다. 정신이 혼미해서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는 모르지만 한참 후에 또 인기척이 들렸다. 군인이었다.
그 군인에게 무슨 정신으로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오직 살겠다는 본능으로 사정사정을 했다. 그 군인이 2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서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조금있다 어떤 사람 한 명이랑 같이 왔다. 그 사람을 시켜 나를 업었고 나는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 그때서야 알았다. 나를 들쳐업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팔은 부러져 있었고 다리는 뒤틀려 있는 상태였다. 순간 비명을 질렀다. 차를 잡으려고 했지만 차를 잡을 수 없었다.
중간에 있는 개인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집에 환자가 5명이나 있어요, 자리가 없어요” 하면서. 한 40분쯤을 걸어 기업소로 들어갔다. 거기서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병원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사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온몸에 붕대를 칭칭감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붕대가 온통 피에 젖어 붉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며 신음소리가 가득찼다. “물, 물"을 외치는 환자들, 피냄새, 땀내새, 오물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병원 관계자 한 사람이 평양에서 연구원들이 30명이 급파됐으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병원에 왔지만 기본적인 처방외엔 별다른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맥박을 체크하고, 포도당을 맞고, 부러진 팔에 부목을 대고, 지열을 하는 등의 1차적인 처치외엔 다른 치료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온다는 의사들은 새벽 4시경에 도착해 약품을 풀고 치료를 시작했다. 아침 11시경 사람들이 명단을 꾸리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지방 병원으로 보내고 평양에서 온 사람들은 평양으로 후송한다고 했다. 그리고 빈 열차가 도착했다. 어디서 그렇게 모였는지 신양 사람들이 역 주변에 가득하였다. 신양 사람들 전부가 나오는 것 같았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환자들이 있는지 들것에 들려 환자들을 기차에 싣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차 문이 좁아 들어가지 못해 기차 창문을 통해 환자를 싣기 시작했다. 숱한 중환자들을 그렇게 옮기다 보니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비명을 질러냈고 아라곳 없이 환자를 싣는 데만 집중했다. 주위에 모인 사람들은 “기차다, 기차다(기막히다), 어떻게 하냐”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숱한 환자를 실었지만 치료를 해 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서 정신이 없었다. 우리 사고 당시 그대로 옷과 피도 딱지 못한 채였다. 대소변을 가리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태반이었지만 누운 채로 일을 보아야 했다. 오물냄새, 피냄새, 땀냄새, 신음소리 등으로 기차는 생지옥이었다.
평양으로 가는 길에 평성을 지나친다. 평성역에 도착했는데 한 100여 명의 의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평성쪽으로 이송되는 환자들은 역시 기차 창문으로 넘기면서 차에 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쏟아졌다. 마중나온 보호자들의 울음소리고 온 역전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환자를 내리고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역에도 100여 명의 의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기차 창문으로 환자를 내력 구급차에 실었다. 평양에도 병원별로 사람을 지정에 쪽지를 주고 거기에 따라 환자를 배치하였다. 평양 병원에 도착해서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자리가 없어 한 침대에 여러 명씩 배치를 하였다. 그 사고로 1년동안 후유증으로 고생을 했다.
신양 병원에서, 그리고 철도청 관계자들, 의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과학자대회가 끝나 간부들이 많이 탄 1열차가 신양역에서 7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전기가 끊겨 멈춰버렸다. 3시간 정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다가 갑자기 정기가 들어오면서 제동장치가 작동을 하지 못했다. 서 있던 것이 가파른 비탈길이었고 무서운 속도로 뒤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 구간이 평소에는 30분 정도 걸리는데 7분 정도의 속도로 밀려 나갔다고 한다. 1열차에서는 그 순간에 방송이 나왔는데 사고 안내를 하면서 어딘가를 꼭 잡고 있으라고 했단다.
사람들은 다급해져 무작정 뛰어 내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뛰어 내리면서 전봇대에 부딪쳐 즉사했다. 제1열차가 역시 전기 때문에 멈춰있던 9열차를 들이받았다. 9열차에는 군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충격으로 9열차가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근처에 멈춰있던 온성-평양행 열차를 들이받았다. 내가 남편과 탔던 것이 온성-평양행(15,16열차)였다. 충격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으면 거리가 있는 직매점 앞에까지 튀어나가서 물건을 받았다는 소리도 들렸다.
열차가 매섭게 충돌해 납작하게 눌려서 즉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시체를 꺼낼 때 기차를 분해하여 꺼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사고를 당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구조작업은 없었다. 나를 구해주었던 군관도 지나가던 중이였다. 밤은 어둡고, 날씨는 춥고, 사고정도가 너무나 크고 참혹해서 대책을 세우지 못하나가 나중에 군인들이 투입되었다고 하는데 김정일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시체를 구하지 못하면 몸을 못 찾더라도 머리나, 팔 다리라도 찾아라고. 군인들이 너무 처참한 시신들을 처리하다 보니 술을 먹이고 투입을 시켰다고 한다.
날씨가 추워서 구조가 지체되는 동안 20-30% 정도는 얼어죽었다고 했고 사람들을 치료할 공간이 없어 근처 학교, 기업소, 개인집까지 환자들이 들어갔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2천명 사망에, 3-4천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이 사실은 방송에서 보도되지 않았다. 나중에 사망자의 집에 한해서 보상이 이루어졌다. 우리집 같은 경우 죽은 남편에게는 양복지 1단, 부인에게는 첫날 옷감1단(결혼식 때 입는 옷, 중국산으로 커텐천이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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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심각하군여.. 사고를 머리속으로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