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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충렬사비
정렬비
박정희 대통령 기념 식수(1978년 11월 23일)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忠州 林忠愍公 忠烈祠.사적 제189호. 충북 충주시 충열1길 6 (단월동))
충민공 임경업(1594∼1646)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숙종 23년(1679)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에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영조 3년(1727)에는 사당 이름을 충렬사라 했다.
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 충주에서 태어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다시 쌓아 국방을 강화하는 등 나라에 이바지한 바가 컸다. 명나라를 숭상하던 장군은 인조 30년(1642)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위협을 받게되자 명군과 협력해 청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계획이 탄로나 청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청나라는 장군에게 여러 제의를 하면서 포섭하려 했으나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후 1646년 국내의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억울하게 연관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피살되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했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가 있다.(출처:문화재청)
임경업 초상(林慶業 肖像.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충북 충주시 살미면 구향골길 16-5 (세성리))
조선 중기의 무신인 충민공 임경업(1594∼1646) 장군의 초상화이다.
임경업은 광해군 10년(1618)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인조 대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초상화는 시선이 정면을 향하고, 구름무늬 바탕의 관복을 입고 앉은 전신좌상으로, 가로 90㎝, 세로 160㎝의 크기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는데, 공이 47세 때에 명나라 황제에게 모습을 보이기 위하여 명나라 화공이 그렸다고 전한다. 얼굴의 선을 짙게 그려 안정적인 인상을 주며 옷 주름은 붓으로 죽죽 그어내려 도안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있는 흉배의 모양은 인조 때에 나라에 공이 컸던 무신에게 내렸던 독특한 문양이다. 그림의 배경에 보이는 탁자 위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및 매화가 꽂혀있는 백자 화병이 있고, 금빛 연꽃받침에는 해태모양의 향로가 놓여 있는데 향로의 연기가 실타래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특히 주인공의 뒤에 배치한 탁자는 매우 독특한 발상인데, 그 위로는 용을, 아래로는 인물산수를 그려놓았다.
초상화가 보존되고 있는 장군의 별묘 앞쪽에는 쌍성각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는 정조 12년(1788) 임경업 장군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각으로, 이씨부인의 지순함과 충열을 현판에 기록하여 함께 전하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임경업 초상(林慶業 肖像.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충청북도 충주시 충열1길 6 (단월동, 충렬사))
忠愍公 林慶業(1594∼1646년)은 親明排淸波 武將이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고, 1624년(인조 2) 鄭忠信 휘하에서 李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振武原從功臣 1등에 오른 인물이다.
1640년(인조 18)에 명나라 장수가 畵師를 보내 林慶業 肖像 2폭을 그린 다음, 1폭은 명 황제에게 보내고 나머지 1폭은 임경업 장군에게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忠愍公 林慶業 肖像」의 우측상단에 ‘忠愍公 林將軍遺像’이라는 화제가 있고, ‘忠愍’이란 시호가 1706년(숙종 32)에 내려졌으며, 복식의 전반적 모습은 17∼18세기의 특징을 띄고 있다.
이 초상화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초상화풍과는 달리 정면상이며 초상 우측으로 집기류가 표현되었는데 이 또한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忠愍公 林慶業 肖像」과 동일한 형식의 초상화 한 점이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 150-11 충민공 별묘에 보관되어 있다. 각기 다른 장소에 소재하고 있는 관계로 두 점을 함께 놓고 비교ㆍ분석할 필요성이 있다. 초상화 전체 틀은 동일하나 세부 묘사의 기법과 수준은 별묘본이 다소 높게 평가된다.
충민공 임경업 초상은 정면(正面) 진신좌상(全身坐像)이다. 전체적인 형식이나 표현 기법이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특색인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 대(1661∼1720년)에 그려진 정면상(正面像)과의 연관성은 있다.
사모(紗帽), 단령(團領), 흉배(胸背), 대(帶), 흑피화(黑皮靴)를 착용하는 등 조선시대 관료 상복(常服)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 중기의 초상화(肖像畵) 제작 양식, 복식사(服飾史)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출처:문화재청)
임경업 추련도(林慶業 秋蓮刀.크기 : 총길이 101.4cm/ 폭 6cm/ 칼날길이 86.7cm.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충북 충주시 단월동 385-1)
추련도는 임경업 장군의 보검으로 용천검과 추련도가 있었는데 용천검은 전쟁 시 직접 쓰던 검이었으나 6.25때 분실되었고 한다. 추련도가 남아 있는 단검이 유일한 유물로 평상시 보호용으로 애용한 보검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된 문헌은 남아있지 않다.
현재 충렬사 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칼과 칼집 모두 양호한 상태이다. 도신은 철, 손잡이와 칼집은 목재, 목재를 고정시키는 장식은 황동과 동으로 되어 있다.
또한 칼 코 등을 얇은 철판으로 제작도어 있으며, 그 위에 주석·납으로 합금하여 도금하였다. 도신 좌우측면에 명문이 남아 있다. 보관함은 후대에 제작한 것이다.
秋蓮刀라는 칼의 이름은 이 검에 새겨진 싯귀에서 따온 것이다. 秋蓮 즉 가을 연꽃은 다른 연꽃이 피지 않을 때 의연하게 핀 꽃 즉 지조가 있는 대장부를 상징한다고 본다.
2005년 7월 15일부터 동년 9월 9일까지 보존처리를 실시하여 보존상태가 양호한 장시도이다.
이 秋蓮刀 양날에는 다음과 같은
검명시(劒銘詩) 28자가 새겨져 있다.
時呼 時來 否在來
시절이여 때는 다시 오지 않나니
一生一死 都在筵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는 것이 모두 여기 있도다.
平生 丈夫 報國心
대장부 한평생 조국을 위한 마음뿐이니
三尺 秋蓮 磨十年
석자 추련검을 십년동안 갈고 갈았도다.
이 추련도는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이 애용하였다고 전해지는 보검으로 역사적, 기술사적으로 가치가 매우 큰 유품이며 보검의 상태 또한 양호하여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도신에는 명문이 있어 문화재로서 지정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출처: 문화재청)
X-ray 사진
秋蓮刀 양날에는 검명시(劒銘詩) 28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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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렬사 사진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좋은사진 글 잘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한석기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