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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세한도
보정산방 - 보배로운 정약용이 거처하는 방 이란 뜻
죽기 3일전에 쓴 보은사 판전 - 추사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현판
보물 1677-2호 원교법첩 - 원교 이광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추사 김정희》- 유홍준
책머리에 “세상에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만 해도 내가 아는 추사는 정조시대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나 세한도와 추사체를 완성한 서예가, 역사와 금석문에도 조예가 깊어 북한산비를 발견하고 해독했다는 것 정도. 또 완당 등 여러 개의 호를 사용했고 제주도로 귀양 갔으며 장약용과 친했던 초의선사와도 친했으며 차를 좋아했다는 정도.
*우리나라 서예가로 신라시대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과 더불어 秋史 金正喜를 4대 명필로 꼽음
추사체는 서체를 개성 있는 글씨체로 보기도 하지만 글자 모양이 독특하고 크기가 제각각인데다 얼핏 보면 어지럽기까지 하다는 평가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변화 때문에 개성적이고 멋지다는 느낌을 받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 대해 추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최진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하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추사는 양반가 자제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도 가보고 나름대로 세상은 풍미하며 살았지만 세도에 밀려 9년간 제주도로 귀양 가 지내기도 했다. 풍토가 낯선 당시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겠지만 작년에 집사람과 딸아이랑 같이 답사 갔을 때는 여기도 사람이 살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8월의 폭염에 책 읽기도 쉽진 않지만 앞으로 몇 번이나 이 같은 더위를 맛볼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서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추사의 일대기를 망라하고 있지만 그것을 독후감으로 다 적을 수는 없을 것이므로 나름대로 음미해 본 부분들을 옮겨보려고 한다.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가게 된 경위와 과정, 거기서 교류한 문인들과의 인연 그리고 추사연구는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등은 여기서는 생략하고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과정에 대해서 보자.
1816년 7월 30세의 추사는 동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 무학대사가 한양에 도읍 터를 물색하기 위해 북한산에 올랐더니 한 비석에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오르다’라고 쓰여 있어 깜짝 놀랐다는 전설이 전해지던 그곳으로 무학대사를 놀라게 한 비석의 글자는 비바람에 깎여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추사는 이 전설의 비를 탁본하여 돌아와 읽어보고는 정밀하게 탁본할 필요를 느껴 이듬해 6월 벗 조인영과 함께 탁본 기술자까지 데리고 가서 탁본하고는 68자를 읽어냈다. 거듭 조사한 추사는 이 비가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자신이 검토한 내용을 조인영에게 편지로 써 보냈다.
그리고 비의 측면에다 ‘이것은 진흥왕순수비다. 병자년 7월 김정희·김경연이 오다. 정축년 6월 8일 김정희·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 있는 글자 68개를 면밀히 살펴보았다.’고 적었다. 현재 이 비는 마모가 심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그 자리에는 복제비가 세워져 있다.
다음은 초의선사와의 인연을 보자. 1815년 서른 살의 추사는 서울 북쪽 수락산 학림암에서 해붕대사(海鵬大師)와 공空에 대해 논하며 묵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두 선지식이 벌인 공의 본질에 대한 불꽃 튀는 논쟁은 추사가 훗날 해붕대사 영정에 바친 「해붕대사 화상찬」에 잘 나타나 있고 이때 해붕대사를 모시고 있던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을 만나게 된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이때부터 떨어질 수 없는 벗이 되었으며 『완당선생전집』에는 초의에게 보낸 편지가 38통이나 실려 있다.
초의선사는 추사는 물론 추사의 동생 김명희, 다산 정약용과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 해거 홍현주, 자하 신위, 위당 신헌 등 추사와 다산의 주변 인사들과 학연 묵연 시연을 맺었지만 당시 스님의 사회적 지위는 천민인지라 한양에 와서도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대문 밖에서 추사를 만나거나 편지로 연락하곤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추사는 자신의 재주를 믿고 방자했던 모양이다. 자신이 태어나기 9년 전에 이미 죽은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를 비판하기도 했는데 이광사는 서예 명문가 출신으로 영조시대 나주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회령으로 유배를 갔다. 그런데 많은 제자들이 유배지로 몰려들자 이를 문제 삼아 전라도 신지도로 이배했다. 원교는 거기서 22년간 귀양살이를 하다 끝내 풀려나지 못하고 죽었다. 대흥사·천은사 등 전라도의 절간의 현판은 대부분 원교가 귀양살이 중에 쓴 것이다. 원교체 혹은 수어체로 불리는 원교의 글씨는 물 흐르는 듯 부드럽고 유려하다.
그런 원교에 대해 추사는 “요사이 우리나라에 서예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이르는 진체(왕휘지체)나 촉체(조맹부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런 것이 있다고 여겨 표준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니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새를 오르려고 하는 것 같아 가소롭다.”고 혹평을 했는데 이는 다른 면에서 보면 원교가 그만큼 영향력이 컸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추사 역시 그 전에 태어났다면 그렇게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고 추사는 원교에게 잘못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방자함의 극치다.
추사가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형을 받은 것은 1840년 9월 4일. 유배지로 가는 길은 전주,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진에 내려 다시 80리 떨어진 대정으로 가는 것으로 쉬지 않고 간다 해도 한 달이 걸리는 일정이다. 국문을 받은 뒤라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스산한 가을바람은 더욱 쓸쓸했다. 이때의 심정을 벗 권돈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행실치고 조상에게 욕이 미치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다음은 몸에 형틀이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을 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경험했습니다. 40일 동안에 이와 같은 참혹한 독을 만났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9년(정확히 8년 3개월)동안 제주도에 귀양 가 위리안치 되어 있었는데 위리안치란 형벌은 어떤 형벌이었을까? 유배형은 죄인을 격리하는 형벌로 배 적 찬 방 천 사 등 이름도 형식도 다양했다. 그 중 가장 많이 시행된 것이 천사, 부처, 안치 세 가지였다. 천사란 죄인의 고향에서 천리 밖으로 이주시키는 것으로 고향에서 내쫓는 것을 말하고, 부처는 유배에 처하되 정상을 참작하여 귀양지로 가는 도중 어느 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으로 대개 고관에게 가해졌다. 안치에는 본향안치, 주군안치, 사장안치, 자원처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등으로 나누는데 모두 주거를 제한하는 연금을 말한다. 본향안치는 고향에, 사장안치는 개인별장에, 자원처안치는 스스로 유배지를 택하는 것이고, 주군안치는 일정 지방을 지정하여 그 안에서만 머물도록 한 것으로 고을 안에서는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된 경우다.
절도안치는 외딴섬에, 위리안치는 집주변을 가시울타리로 막아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것인데 남해나 제주도에는 탱자울타리가 많아 이 형벌을 받으면 주로 거기로 보냈으며 정쟁으로 인한 정치범에게 이 형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다산은 귀양살이를 통해 현실을 재발견한 반면, 추사는 그러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두 분의 성격과 성향 차이 탓도 있지만 귀양살이에 있어 다산은 주군안치였던데 비해 추사는 위리안치였던 차이도 없지 않다. 추사는 위리안치를 통해 자아를 재발견했던 것이다.
추사의 대표작으로 치는 《세한도》는 어떤 이유로 그리게 된 것일까? 추사 나이 59세이던 1844년 제주도로 유배 온 지 5년이 되었을 때 세한도를 제작해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다. 이상적은 추사가 귀양살이 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 준 인물이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1843년 이상적이 계복의 『만학집』과 운경의 『대운산방문고』를 연경에서 구해 제주도로 보내 주고 이듬해에는 하우경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이라는 책도 보내주었다. 이 책은 120권 79책이나 되는 것으로 양이 방대했다. 이상적의 이런 정성에 추사는 감격하고 변함없는 정에 감사하여 《세한도》를 그리고 발문을 적었다.
“지난해에는 『만학』『대운』두 문집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도다.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도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으로부터 사와야 하며,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단번에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흐르는 물살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歲寒)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松柏)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하셨는데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전이라고 더한 것이 아니요 후라고 줄어든 것도 아니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노인 쓰다.”
《세한도》는 구도와 묘사 따위의 화법에서 뿐만이 아니라 필법과 묵법, 서법까지를 보아야 맛과 멋의 가치를 알 수 있다. ‘세한도’라는 세 글자와 ‘우선시상 완당’이라는 낙관까지 그림의 구도에 무게와 안정감을 주면서 격을 끌어 올리고 있다. 또 《세한도》는 그 제작과정에 서린 추사의 처연한 심경이 생생이 살아 있는데,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향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베어 있다는 것이 그림의 본질이다.
추사는 여러 개의 호와 도인(인장)을 사용했는데 필장 박혜백이 엮은 『완당인보』에는 추사의 도인이 무려 180개나 있다고 했다. 그전에 위창 오세창이 『근역인수』에 추사의 도인 70개를 수록했는데 오세창은 서문에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180개인데 완당의 도인은 청나라 유식과 우리나라 소산 오규일과 소정 한응기가 새긴 것이었다.”고 했다.
소치 허련(小痴 許鍊)은 추사의 수제자로서 제주도를 여러 차례 찾아가 문안하기도 했으며 그림을 인정받아 헌종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서 헌종이 추사에 대해 물었다.
“김완당의 귀양살이는 어떠하던가?”이에 소치는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안에, 벽에는 도배도 하지 않은 방에서 북창을 향해 꿇어앉아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좌장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밤낮 마음 놓고 편히 자지도 못하여 밤에도 늘 등잔불을 끄지 않습니다. 숨이 경각에 달려 얼마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고 답한다. 그러자 헌종은
“먹는 것은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생선 등속이 없지 아니하나 비린내가 위를 상하게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혹 멀리 본가에서 반찬을 보내옵니다마는 모두가 너무 짜서 오래 두고 비위를 맞출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며 날을 보내는가?”
“마을 아이들 서넛이 와서 배우므로 글씨도 가르쳐줍니다. 만일 이런 것도 없으면 너무 적막하여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소치실록)
추사의 유배생활이 이처럼 생생이 증언된 경우는 없다고 한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용산 강상으로 돌아 온 해가 1849년. 헌종15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헌종이 이해 스물셋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불과 여덟 살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 순원왕후의 섭정을 통해 통치수업을 받다가 비로소 홀로 서게 되면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헌종의 급서는 추사와 벗 권돈인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 갈 당시 정국은 안동김씨인 순원왕후(순조의 비)를 등에 업고 김홍근 김좌근 등 김조순 가문으로 대표되는 안동김씨가 주도했다. 그러다 헌종의 친정체제로 전환되면서 신정왕후(헌종 어머니)쪽 풍양조씨 조인영 조만영 그리고 권돈인 이학수 등 안동김씨 반대 세력에 힘이 실렸다. 이때는 권돈인이 영의정이었고 추사도 그런 정치상황으로 해배되었다. 그런데 헌종이 갑자기 서거한 것이었다.
안동김씨의 반격으로 대통을 이은 은언군(사도세자의 작은아들)의 손자 19살의 원범(元範-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통에 혼선이 생기게 되었다. 헌종의 3년상이 끝나면서 신정왕후가 ‘제왕가는 승통(承統)을 중히 여김이 고금의 통례’라고 하면서 결국 안동김씨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로 인해 권돈인을 밀어내는 여론몰이가 시작되고 결국 권돈인은 중도부처에, 추사는 주군안치를 당하고, 동생들은 향리로 추방되었다.
유홍준의 이 책은 추사의 일대기를 축약해 정리하고 추사의 뛰어남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추사는 공부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라며 놀기도 좋아했다고 했다. 다만 노는 방법이 달랐을 뿐... 추사가 벗에게 보낸 글 중에 자적(自適)하는 이런 글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천성이 노는 것을 즐거워하여 좋은 놀이를 만나거나 좋은 반려를 만나면 낮 놀이가 부족하여 밤까지 계속했으며 근심과 걱정을 하도 많이 겪어서 삶과 죽음까지 깨우쳐 통했으니 처자나 집안일 따위는 마음에 걸릴 것도 없이 오직 대나무 한 포기, 돌 한 덩이,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라도 진실로 마음 붙일 만한 곳이 있다면 거기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가졌지요.”
끝으로 저자 유홍준의 추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추사는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과 예술을 함께할 수많은 벗과 제자들로 ‘추사일파’와 ‘완당바람’을 일으켰다. 그런 열정으로 학문과 예술에 임했던 사람은 조선 천지 상하 삼천 년에 다시없었고 종횡 십만 리 중국에도 드물었다.
한편, 추사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관용의 미덕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매사의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다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불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관용의 미덕을 곁들이지 못했다면 추사의 뜨거운 열정과 개성도 한낱 기(奇)와 괴(怪)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끝 모르고 치솟던 기개도 어느 정도 높이에서 허리 째 부러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추사는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서 배웠으며 그것이 비로소 과천에 살던 만년에 예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 추사연보
- 1786년 정조10년 건륭51년 6월3일 예산에서 출생
- 1793년 정조17년 건륭58년 백부 김노영(개성유슈)의 양자로 들어감
- 1809년 순조9년 가경14년 부 김노경이 호조참판에 이어, 동지부사로서 연경에 감. 추사 자제군관 자격으로 따라감
- 1819년 순조19년 가경24년 추사 문과에 급제함. 부 김노경 예조판서
- 순조23년 추사 규장각 대교가 됨
- 순조26년 추사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됨
- 순조30년 추사45세 동부승지가 됨
- 헌종5년 추사54세 형조참판이 됨
- 헌종6년, 헌종 친정을 시작. 조인영 상소를 목숨을 건지고 제주도대정으로 귀양가 위리안치 됨
- 1844년 헌종10년 도광24년 세한도를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줌
- 1848년 헌종14년 도광28년 추사63세 제주도에서 해배됨. 용산(강상)에 정착
- 1851년 철종2년 함풍원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감. 1년 뒤에 풀려남
- 1856년 철종7년 함풍6년 71세 10월7일 봉은사 「판전」현판을 씀
- 1856년 철종7년 함풍6년 10월10일 죽음
(2019.8.9.∼8.20 화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