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02]수주 변영로의 『酩酊四十年명정40년』 재독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8~1961)의 『酩酊四十年명정40년-無類失態記무류실태기』을 어렵게 구해 다시 읽었다(범우문고 20, 2021년 5판4쇄. 범우문고 초판1쇄가 77년 6월이니 여전히 팔리는 고전인 모양이다). 재독한 까닭은 순전히 『빨치산의 딸』을 쓴 정지아 작가의 『마실 수밖에 없는 밤이니까요』라는 에세이집을 읽은 때문이다. 더불어 양주동梁柱東(1903~1977) 박사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도 읽게 됐다. 까마득히 잊혀진 글들을 새로이 읽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신기한 것은 처음 읽을 때와 느낌이 상당히 남다르다. 하기야 ‘불멸의 고전’이자 인생독본서인 공자의 어록집 『論語논어』는 10년 단위나 세대를 두고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다르다지 않던가.
아무튼, 수주 선생은 글담처럼 입담까지 좋았을까? 나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다. 포복절도(허리가 꺾어지거나 배꼽이 빠지는)할 일화투성이(그것을 무류실태無類失態라 했다)의 책. 새삼 술이란 무엇일까?를 생각나게 했다. ‘수주의 술’과 ‘우천(필자의 호)의 술’은 어느 게 같고 어느 게 다른 것일까? 한 천재문인이 일제강점기를 살아오며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면서 어찌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었겠는가? 취생몽사醉生夢死가 그 방편이었을까? 그가 26살에 『朝鮮조선의 마음』이라는 시집을 펴냈다. 몇 년 전 방영된 「TV진품명품」에서 예상경매가 3000만원을 호가했다. 그만큼 국문학사적 가치가 큰 작품으로 희귀본이다.
명정酩酊은 정신 못차리게 취한 상태를 말한다. 요즘 세상엔 거개가 믿기지 않는, 그런 명정의 실태가 용납되는 사회분위기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5,6세 아이가 술냄새에 도취돼 술항아리를 기어오르다 실족했다니, 또 그런 아이에게 아버지는 곧바로 술을 마시게 했다니, 연신 혀를 내두르게 하는 이야기뿐이다. 숱한 한문투의 단어들은 고졸한 문장의 맛을 한껏 풍긴다. 수주는 타고난 ‘주태백’이었던 모양,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술을 들고 갔으니 원도 한도 없는 인생을 살았다할 것인가. 저 세상에서 가가대소呵呵大笑, 껄껄껄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금세 취해 해롱해롱 정신을 잃고 마는 나같은 주졸酒卒은 오직 부러울 뿐. 조지훈 선생의 <주도유단酒道有段>에 나는 몇 급이나 될까? 한심한 일이다.
그의 장형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1889~1954)과 중형 변영태卞榮泰(1892~1969) 선생은 동생인 수주보다 몇 배 더 천재였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3변卞>이라 불렸을까? 변영만 선생은 구한말 법학자이자 한문학자로 어마무시하게 박학다식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그가 위당 정인보鄭寅普(1892~?) 선생을 평가하며 “면무식했다”고 했을까? 위당의 “나나 되니까 면무식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는 대답도 걸작이다. <중국의 3소蘇>에 걸맞는 <한국의 3변卞>. 경기도 부천이 낳은 최고의 위인들이어서, 지금도 3형제가 의좋게 나란히 누워 있다. <중국의 3소>는 당송8대가인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형제 소싞蘇軾(호 동파東坡, 중식 동파육의 유래가 됐다)과 소철蘇轍을 일컫는다.
수주 선생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기자로도 활동했다. 또한 1936년 손기정 선생의 마라톤 금메달 소식에 아래 다리만 트리밍하여 ‘위대한 건각’이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실었다고 한다. 또한 선생은 해방이후 성균관대 영문학과 교수도 역임했다. 한 세대만 빨리 태어났다면 선생을 뵐 수 있었을까? 필자는 영문도 모르고 영문학과를 졸업했지만, 1회 대선배의 증언을 듣는 행운이 있었다. 강의를 하다가도 목이 마르다며 교문 밖에서 술을 마시고 와 ‘주강酒講’을 했다던가. 아아- 선생이 일제강점기 내내 찾았던 <조선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를 가야 찾을 수 있을까? 그 시와 선생의 대표작이라 할 <논개>를 전재한다. 부천시는 지난해 <수주문학관>을 개관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고 한다.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조선의 마음을 어디 가서 찾을까
굴 속을 엿볼까 바다 밑을 뒤져볼까
빽빽한 버들가지 틈을 헤쳐볼까
아득한 하늘가다 바라다볼까
아, 조선의 마음을 어디가서 찾아볼까
조선의 마음은 지향할 수 없는 마음, 설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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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참고로 논개論介( ?~1593)는 관기官妓가 아니다. 성은 주씨朱氏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에서 양반집(훈장 주달문) 딸로 태어났다. 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於于野談』에 ‘진주 관기’라 되어있는데 엄청난 오류임이 밝혀졌다. 1593년 6월 19일 벌어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장군과 고종후부자, 황진 등과 함께 숨진 무장 최경회(경상도 우병사)의 첩(첩이 된 사연은 가히 드라마틱하다)으로, 남편과 고락을 같이 하다, 패전 직후 푸른 남강의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나이 스무살. 몸을 던진 바위에 의암義庵이라고 새겨 그녀의 넋을 기리고 있다.
첫댓글 '한국의 3卞, 중국의 3蘇' 등의 얘기를 듣고 생각나는 일화가 있어 올립니다.
명필 왕희지의 아들 일곱명 중에 막내 왕헌지가 그 재주를 물려받아 후세에 왕희지는 大王, 왕헌지는 小王, 혹은 二王으로 불렸다고 한다. (여기서 王字는 姓도 되고 歌王처럼 王도 된다.)
종이가 부족한 옛날에는 처음에 글을 배울 때 고운 모래를 구해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거나 물을 잘 머금는 돌을 편평하게 연마하여 붓에 물을 묻혀 글씨 연습을 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서예에 매진하던 아들 왕헌지가 여느 때와 같이 마당에서 글씨 연습을 하다가 하루는 큰 大자를 써놓고 드디어 스스로도 뭔가 터득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에 어머니에게 자랑하기 위해 부르러 간 사이에 친구와 한 잔하며 술에 취한 아버지 왕희지가 소변을 보러 나왔다가 大자 다리 사이가 넓어 보였는지 무심히 점 하나를 찍고는 들어갔다.(太)
아들 손에 이끌려 나온 어머니가 太자를 보고는 '점 하나는 잘 찍었구나' 라고 하더란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