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삶,해학의 노래로 푼 ‘달관’ 구비 전승 시조 5백80수 모아 중인 가객 시조창 곡조별 분류 ‘만횡청류’ 1백여수 웃음의 미학
세련되고 정제된 아름다움은 예술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다.그러나 그것은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예술적 욕구와 발상을 억압하기도 한다.지배층이 추구하는 전아함과 세련성이 고착화할 때 피지배층은 거기에 맞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고 그들 나름의 미학을 정립하게 된다.
판소리,판소리계 소설,민화,장승 등 조선 후기 서민예술의 새로운 부상이 그 대표적 예다. ‘청구영언(靑丘永言)’ 등의 가집 편찬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달라진 사회문화적 지형도 속에서 이뤄졌다.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시조의 주요 담당층은 사대부 계층이었다.한시로 표현할 수 없는 가창(歌唱)에 대한 욕구를 시조라는 형식에 담아내어 유가의 이념과 규범을 노래하거나,강호 자연 속에서 심성을 수양하고 유유자적하는 고고한 삶을 노래하였다.
그런데 17세기 후반 이후 중인 가객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시조창이 보편화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전아한 창법을 구사하던 가곡창보다 평이하며 대중적 창법인 시조창으로 바뀌고,세속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욕망과 행태를 다채롭게 노래하는 사설시조가 활발하게 창작되기에 이르렀다.시조는 눈으로 읽지 않고 노래로 불렸다.이른바 가창의 방식으로 향유된 연행예술의 하나다.
연행 공간에서 노래를 전문적으로 부르는 이들을 가객이라고 하는데,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들 가객이 새로운 예술 담당층으로 부상하게 된다.‘청구영언’을 엮은 김천택(金天澤) 또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가객의 한 사람으로,여러 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다.그의 가계와 신분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서리·아전층에 속한 중인 출신이었다.가집 편찬자로서 뿐만 아니라 시조 작가로서도 이름을 얻었던 그는 중세적 사회질서 속에서 감내해야 하는 신분적 갈등과 고뇌를 노래하였다.
‘청구영언’은 ‘해동가요’‘가곡원류’와 함께 조선 후기 3대 가집의 하나다. ‘청구’는 우리나라를 뜻하고 ‘영언’은 노래를 뜻하는 바,구비전승되던 시조들을 모아 놓은 노래책이다.여러 이본이 있는데 그 중 1728년에 편찬된 진본 ‘청구영언’이 현전하는 최초의 가집이다.책의 전체적인 짜임새가 잘 갖춰져 있어 이후 가집 편찬의 모범적 선례를 남겼다.
여기에는 총 5백80수의 시조 작품이 곡조별로 수록되어 있다.18세기 초반 이전까지 창작·연행·유통되던 시조들을 처음 체계적으로 모아 놓았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특히 ‘만횡청류’라는 곡목 아래 사설시조를 1백여수 넘게 수록해 놓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들 작품을 일별해 보면 남녀간의 애정과 그리움,성의 외설적인 표출,도시 시정의 자유분방한 삶의 단면,하층민의 고달픈 생활과 애환 등 나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군상들의 온갖 욕망과 행태를 다채롭게 포착하고 있다.
전아한 기품과 세련미를 추구하던 사대부들의 시조와 달리 거칠고 활력 넘치는 삶의 역동성을 사설시조 특유의 해학적 연출과 생동감 있는 표현을 통해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젊은 서방을 유혹하기 위해 백발을 검게 칠하고 산을 넘어가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본모습이 들통나게 된 노파를 등장시키기도 하고,‘곰비님비 님비곰비 천방지방 지방천방’ 사랑하는 님을 찾아 온갖 시련을 넘어서려고도 하며,삼밭에 들어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아낙네를 묘사하기도 하고,‘키 크고 얼굴 곱고 글 잘하고 말 잘하는’ 젊은 남자를 이상적 남성형이라고 주저없이 말하기도 하며,전쟁에 지친 병졸의 고달픈 신세를 노래하기도 하고,때로는 남녀간의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 중 한 예를 들어보자.
‘창 내고자 창을 내고자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고모장지 세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돌쩌귀 숫돌쩌귀 배목걸새 크나큰 장도리로 뚝딱 박아 이 내 가슴에 창 내고자/이따금 하 답답할 때면 여닫아 볼까 하노라’.
이 작품은 마음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답답한 심정을 가슴에 창문이라도 내 시원스럽게 풀어버리고 싶다는 재미있는 착상이 돋보인다.둘째 줄에서 ‘고모장지’‘세살장지’‘들장지’ 등 생활용구들을 다소 수다스럽게 열거함으로써 자신이 겪는 괴로운 마음을 강조하는 수법은 다분히 해학적이다.사랑하는 님을 여읜 처지를 ‘숨을 곳 없는 곳에서 매에게 쫓기는 까투리의 처지’와 ‘바다 한 가운데에서 온갖 시련을 한꺼번에 겪게 된 뱃사공의 처지’에 대비시킨 다른 작품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처럼 일상 어휘를 거침없이 나열하여 진솔하고 구체적인 생동감을 불어넣는 수법은 사설시조의 독특한 표현방법이다.애타게 그리워하는 님을 만나지 못하는 답답함,누구에겐가 하소연하여도 풀릴 길 없는 괴로움. 그 답답함과 괴로움을 어둡게만 그리지 않고 웃음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데 작품의 매력이 있다.이러한 점에서 사설시조의 기본적 창작원리는 ‘웃음의 미학’이다.판소리,판소리계 소설,장승,민화 등의 서민예술이 보여주는 건강한 낙천성 또는 해학미와 공유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IMF체제 이후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힘겹고 고달프다.답답하고 암담한 현실의 무게 앞에 자포자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이런 때일수록 주어진 현실을 어두운 색조로만 물들이지 않고 해학과 풍자의 묘미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조선 후기 사설시조에 담긴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