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첫 걸음, 기도
갈라 2,1-14; 루카 11,1-3 /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2024.10.9.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몸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그리고 혼까지도 건강해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혼은 하느님의 영과 소통해야 생기 있는 영혼이 되어, 혼이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이 몸을 움직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내용상 복음 전체의 요약이 담겨 있고 또 형식상 기도의 대상인 하느님을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기도의 기본자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명실상부하게 기도할 때에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기도에는 우선순위대로 따져서 찬양과 감사와 속죄와 청원의 네 가지 지향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역시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 데 대한 찬양과 감사의 지향이 전반부에 들어 있고, 이를 위해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는 속죄의 지향과 또한 물질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양식과 정신적으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하는 청원의 지향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관찰해 보면,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속죄의 기도를 십자가 위에서 바치셨고(루카 23,34),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응하기 위해서는 드러나지 않게 수도 없이 하느님께 청원하기도 하신 것 같이 보입니다만, 이럴 경우에도 항상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지향이 먼저이셨습니다. 죽은 절친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도 먼저 감사를 드리셨고(요한 11,41)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에도 즐거워하며 감사하셨습니다(루카 10,21). 십자가 죽음을 코 앞에 둔 전날 저녁에는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나서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시며 찬미가를 부르기도 하셨습니다.(마르 14,26)
하느님을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의 차이가 이 기도행위에 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떠한 하느님 체험도 없는 경우에는 기도를 하고 싶어도 할 줄 모릅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일반인에게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도 선교 행동입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이들을 대할 때에는 기도하는 사람답게 대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으면서도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주일 미사에 빠지지만 않으면 신자로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자기가 기도하지 않는데 가정에서 기도할 리가 없고,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지 않는데 그 자녀들이 자라서 냉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서 성가정이 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완고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도록 도와주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도 선교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완고한 신앙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하느님의 일로 협력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완고한 신앙인이 보이는 가장 흔한 특징은 봉사하기를 거부하는 경향입니다. 애덕은 기도에서 나오는데 기도하지 않는 신자의 경우에는 작은 선행을 실천할 기운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일반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존재를 영 인정하지 않는 이에게는 선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에는 너무 무리하지 말고 기다려주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기도를 대신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고, 기도하기 위한 마음을 갖추는 일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들으신 갈라디아서 편지의 독서는 형식상 논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고백성 기도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별안간 벼락을 맞고 박해자의 길에서 돌아서서 14 년 간 고뇌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바오로였기에, 이 고백을 처음으로 하는 그 심정은 매우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짧지 않은 기간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며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메시아이심을 깨달았기에 그는 갈라티아 지방에 있는 여러 공동체들에서도 가난한 이방인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복음을 전했으며, 천막 만드는 일로 노동의 모범을 보여가면서 도덕적 감화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을 지키는 데에나 필요한 유다교 할례를 베풀 필요가 없었고 갈라티아 교우들 역시 받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성숙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성 사도단의 수하들이 사전 동의도 구하지 않고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감옥에 갇혀 있는 틈을 타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았고 전력이 박해자인 터라 자기 마음대로 할례를 면제했던 것”이라고 깎아 내리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 누구라도 유다교식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동체 내부를 뒤흔들어 놓는 분탕질을 치고 갔기에, 이 소식을 감옥에서 듣고 분개하여 옥중에서라도 사태를 수습하고자 매우 격정적인 투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진솔한 편지가 갈라티아 지방 여러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다시금 신앙의 확신을 주었고 바오로 사도의 평소 가르침을 더욱 신뢰하며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일에도 열성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미 하느님과 통공을 이루고 있는 바오로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고백성 기도 편지로 인하여 갈라티아 신자들의 상처 받은 마음도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기도의 힘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도의 지향과 자세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배우시고, 기도로써 선교하는 첫 걸음을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또한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이래 한글은 중국의 한자문화를 유교의 본령으로 섬겨온 지식층들에 의해 부녀자들이나 상민들이나 쓰는 언문으로 취급 받아 온 역사도 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가장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원리로 이루어진 문자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로 자판을 입력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가장 효율적인 문자가 한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신앙의 선각자들은 언문(諺文)으로 천시되어 오던 한글의 대중적이고도 선교적인 효용성에 눈을 뜬 덕분으로 주요 교리를 4·4조의 한글가사로 된 ‘천주공경가’ 등을 짓기도 하고 한글로 쓰여진 교리서로 ‘주교요지’로 펴냈는가 하면 한글로 주요 성경을 번역한 ‘성경직해광익 (聖經直解廣益)’ 등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식층들이 한문을 고집하고 있을 무렵부터 행해 진 이러한 노력은 민중의 복음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글 보급을 통한 문화의 복음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식이요 신앙은 문화라는 토양에 뿌려지는 복음 진리의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문화에 처음 신앙의 씨앗을 뿌리셨고, 예수님께서도 유다인으로 태어나 그들의 율법 문화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중국을 거쳐 처음 들어올 무렵에는 한문으로 표현된 유럽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조상제사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빚어진 갈등은 박해까지 초래하게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상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의 표현으로 해석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 미술, 조각, 문학 등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도 신앙은 한국적으로 제한 없이 표현되고 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문화에 담긴 가치관에 있어서는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 전해지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기복신앙으로 나타나는 현세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한글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졌으나, 한국인의 문화에 깃들인 현세주의적 가치관의 도전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도 큰 숙제입니다.
한국 문화 속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신앙의 메시지를 심는 일이 문화의 복음화 사명이라면, 한국 교회는 한국의 민족에 대하여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처럼 진정한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의 영향력과 가치는 세계 언어학계에서 날로 커져 가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전망해 보자면, 장차 아시아인들을 서로 소통하게 만드는 언어로 한국어와 한글이 부각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일은 한글과 한국어로 표현되는 한류 문화에 하느님의 영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 몸과 마음과 혼이 하느님의 영으로 소통하듯이, 한민족이 살아 있게 되는 부활입니다. 한국 교회는 한민족을 살아 있게 함으로써 더불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