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어제 잠시 쨍 하고 맑더니 다시 비가 옵니다.
코로나 때처럼 무거운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자격없는 자,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의 보혈을 힘입어 나아가오니
정결케 하여 주셔서
이버지 품속에 거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본문 주해)
1~4절 : 본문의 헤롯은 아기 예수를 살해하라고 명령한 헤롯대왕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이다.. 그는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권을 받아 다스리는데,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독교인을 탄압하였는데 그 중에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하였다.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로 사도 중의 첫 순교자가 된다.
유대인들이 이를 기뻐하자 헤롯은 더욱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자 베드로를 잡아들여 처형하고자 한다.
그런데 베드로를 잡을 때는 무교절일, 즉 유월절 절기였다. 유대인들은 이 절기에는 재판을 하거나 처형하는 일을 금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즉시 죽임을 당하지 않은 것이다.
베드로에게는 이번이 세 번째 투옥이었다.
첫 번째 투옥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쳐준 후 투옥되었고(행4:1~22), 두 번째 투옥은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해서 잡아들였었다.(행5:17 이하) 그때는 심한 매질을 당하고 풀려났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투옥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 보여준다.
더구나 이번에는 야고보가 먼저 죽임을 당했으니 아마 베드로의 마음에 이번에는 진짜 죽겠구나 생각했겠다.
5절 :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6~10절 :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얼마나 철통같은 감시를 받았는지, 저자인 누가가 자세히 말하고 있는 이유는 베드로가 도저히 구출될 가능성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경비병들은 4명씩 4개조로 구성되어 죄수들을 감시했다.
중죄인의 경우 4명 중 2명은 묶인 죄수 옆에서, 두 명을 옥문 밖에서 지켰다고 한다.
다음날이면 처형될 베드로는 야고보가 죽었으니 자기도 죽을 줄 알았을 것인데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울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것을 혹자는 자포자기로, 혹자는 그에게 임한 내적평안으로 해석한다.
천사에 의해 군인들의 철통 감시를 무사히 통과하여 베드로를 바깥으로 구출한 후 천사가 사라진다.
11~12절 : 베드로는 완전히 감옥에서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난 다음에야 정신이 들었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자신을 구출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급히 평상시 늘 함께 모여서 기도하던 곳을 찾아간다.
(나의 묵상)
두 가지에 대해 묵상한다.
첫째, 베드로의 잠에 대한 해석이다.
내일이면 처형될 베드로는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잠을 잤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신을 벗고, 띠를 풀고, 겉옷도 벗고.....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울 만큼 깊이 잠들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나는 베드로의 내적 평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어떤 해석에는 이것이 미화된 해석이라고 한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했던 것과는 달리 베드로는 자포자기 되어 잠을 잤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그 의견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수제자니까 베드로를 무조건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 외의 다른 인물 연구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인물들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일하심에 주목할 뿐이다.
어쨌든 내일이면 처형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깊은 잠을 잤다는 것은 자신의 생을 주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래서 주님께 맡겼기에 될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바로 얼마 전에 야고보가 처형된 마당이니, 그의 내적 평안이 아닐 수 없다.
바울과 실라는 찬양했는데, 베드로는 왜 찬양하지 않았는가로 그를 판단한다면 나는 말하고 싶다.
‘어떤 이는 찬양할 것이요,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잠을 잘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이들의 ‘찬양과 잠’은 겉으로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나, 한 줄기요 한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 주신 내적 평안과 평강이라는 사실이다.
말씀으로 채워지는 내 삶의 여정에도 때로는 상황을 개의치 않고 찬양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잠’을 자기도 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를 소원한다.
둘째, 왜 하나님은 야고보는 목 베임을 당하여 죽게 놓아두고, 베드로는 천사를 동원해서 구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시는가?
이것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영생의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창세전 하나님의 약속을 안다면,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이란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찍 죽는 것이 불행이고,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사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영생을 얻었는가 아닌가가 문제인 것이다.
베드로는 오늘 천사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후에는 역시 순교를 당한다. 몇십 년을 더 살았다고 그것 때문에 더 영광스러운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면 하루를 더 살면 하루를 더 죄 짓는 일에 밝을 뿐인 인간인 것을.....
그러니 주님 곁에 일찍 데려가셔서 주님과 함께 거할 자는 거하게 하시고, 좀더 일하거나 다듬어갈 필요가 있는 자는 그렇게 남겨두시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성도의 삶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존귀한 그리스도를 드러낼 뿐이다.
야고보는 죽으면서 주님을 증거 하였고, 베드로는 구출됨으로 주님을 증거 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를 당하든 기적적으로 구출이 되든 중요한 것은, 성도의 인생을 쓰시는 주님께서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실패하지 않는 주님께서 내 인생도 주님의 뜻대로 쓰시고, 때가 되었을 때 주님 품으로 부르실 것을 기대한다.
(묵상 기도)
주님,
위기와 암흑의 상황 속에서
때로는 찬양하고
때로는 잠을 자기도 하는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야고보는 이미 주님 곁에 안식을 누리는데
베드로는 이 땅에서 좀더 수고를 하라고 하시네요.
구출된 베드로가 극적으로 구출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한결같이 복음만을 증거 할 것을 생각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만을 증거 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