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祈福)신앙과 구도(求道)신앙
갈라 3,1-5; 루카 11,5-13 /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2024.10.10.
“청하라, 찾으라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 하신 예수님의 요청은, “청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얻으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리리라.”(루카 11,9)는 약속 때문에 기복신앙(祈福信仰)의 관점에서는 만사형통의 주문처럼 보일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아주 오래된 우리 민족의 정신 전통의 맥락 속에 전해져 내려온 샤머니즘의 한 형태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 속에도 어김없이 들어와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래서 기복신앙의 뿌리를 추적해 봅니다.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그 자손들은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창세 10,32) 그 중 맏아들인 셈의 후손들 중 6대손 펠렉 일파는 아시아의 서쪽인 칼데아 우르를 거쳐 가나안으로 갔고(창세 11,28), 또 다른 6대손 욕탄 일파는 동부 산악 지대를 거쳐서 스파르까지 갔습니다.(창세 10,30) 아시아의 서쪽에 자리잡은 펠렉의 5대손 아브람은 자신들의 역사를 구약성경에 기록해 놓았는데, 아시아의 동쪽으로 간 욕탄 일파에 대해서는 기록해 놓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이 무렵이 대홍수로 모든 생명체들이 죽은 후였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첫 문명을 세웠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난 3일에 지낸 개천절은 바로 하늘이 열려서 동아시아에 첫 문명이 세워진 때를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상관관계를 미루어 짐작해 보자면, 동아시아에 정착한 노아의 장자인 셈계 욕탄과 그 후손들은 유훈을 받들어 하느님께서 이끄신 새로운 땅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높은 산의 정상을 찾아서 하느님께 감사와 속죄의 제사를 올렸고, 그로 인해 받은 계시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제세이화(濟世理化)’로서, ‘하느님의 뜻과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면서 인간만이 아니라 천지자연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널리 이로움을 주는 참된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이후 동아시아에 자리잡은 노아의 후손들은 해마다 모두가 모여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면서 천손의식(天孫意識) 공동체를 확인하였는데, 2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중원에서 침입하고 내분도 겹쳐서 왕조는 고조선에서 부여, 고구려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왕조 제17대 소수림왕 시절 서기 372년에 허약한 왕권을 강화해 보겠다고 중국을 거쳐온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을 숭상해 온 민족의 정신전통은 지하로 숨어 들었고 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의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은 물론 공동체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그저 잡신을 공경하는 강신무당(降神巫堂)들이 미래를 엿보는 점술과 역술 영업으로 전락했으며, 백성들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살고 싶은 마음, 자손들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비는 기복 신앙으로 기울어져 무속의 미신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잡신의 영험한 신통력에 기대는 이들 행태의 근거는 엄밀히 말하면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라 낮은 차원에서 활약하는 영의 작용일 뿐입니다.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민속 문화에 담긴 미풍양속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속화된 미신행사나 그 기복적 요소에 매몰되어서도 곤란합니다. 보통 무당이나 역술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꺼립니다. 왜냐하면 천주교 신자들은 영세할 때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으며 이때부터 성령의 이끄심이 작용하기 때문에, 굿이나 푸닥거리를 할 때에도 구경꾼 중에 천주교 신자가 끼어 있으면 소위 ‘영빨’이 듣지 않아서 쫓아내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천주교 신자임을 감추고 점집이나 철학관에 드나들어봐야 복채만 낭비할 뿐이고, 그들의 처방은 효험이 없으니 헛수고를 할 뿐이며, 천주교 신자들이 드나들었던 그 무속인들의 영업을 성령께서 쳐내시기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그이들도 먹고 살아야 할테니 그네들의 점술과 역술 영업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맡겨 두시고, 천주교 신자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인호를 받은 성령의 사람답게 자기 본분과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점술과 역술에 기대어 헛수고를 하기보다는 우리 앞에 놓인 모든 필요와 문제들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고 주어진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성실하게 짊어질 때, 부활의 은총으로 봄볕에 눈 녹듯이 덤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십시오. 청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얻으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릴 것입니다. 그야말로 홍익인간 문명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하시면, 사도 바오로의 편지 본문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율법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 선행하기를 잊어버린 고루한 유다교에 맞서 믿음에 의한 자유를 가르친 사도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길흉화복에 매달리지 마시고, 하느님께서 어떤 운명을 허락하시든지 간에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질 각오만 하면 그것이야말로 만사형통입니다. 짊어지지 못할 십자가는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자유야말로 신앙인이 나아가야 할 진리의 길입니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청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얻으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리리라.”
첫댓글 주어진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성실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 맡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