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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발해 대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왜 왕호는 고왕인가요? 2.발해 건국시 이름이 진이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 및 왜 이름을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3.무왕때 보낸 사신의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는 것이 사실입니까? 국서의 실체를 알고 싶습니다. 4.727년 일본과 발해외교관계가 시작된 후에733년에 나,당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의 안정이었을까요? 5.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6.발해 3대 문왕이 쓴 연호가 대흥이라고 하는데,연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7.발해 통치 조직 중 6부와 왕권 강화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8.발해는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설명해 주세요. 9.발해는 황제국가였나요? 10.발해 1대부터 15대까지의 왕15명이 매우 궁금합니다. |
1.발해 대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왜 왕호는 고왕인가요?
조영의 성은 대씨입니다.하지만,대조영의 왕호가 高王 이라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즉,대조영의 원래 성씨가 고씨인데,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성씨를 바꾸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아마도 대조영은 옛 고구려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물론,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왕호를 보고 추측한 것이지요.
2.발해 건국시 이름이 진이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 및 왜 이름을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발해가 건국할 당시에는 진국이라는 국명을 썼습니다.진(振)은 진(震)이라고도 합니다.
진은 주역에 황제가 동방에서 나왔다는 진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稱葉岩吉) 구당서
권 199 발해말갈전을 보면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이 되었다.." (自立爲振國王)에
진국이 나옵니다.발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713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한 이후,국명을 바꾸었다고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어 당에
통보한 식으로 생각합니다.
즉,국력이 강성함에 따라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죠.이런 경우가 바로 후대의 조선인데,
국명을 미리 정한 후 명나라에 선택권을 줍니다.당연히 명나라는 조선이 선택한 국명을
따르겠죠.중국 학계는 책봉으로 인해서 국명 변경을,북한 학계는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었다고 보고 있습니다.한국 학계는 아직 명확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에 따라서 시각이 다릅니다.
3.무왕때 보낸 사신의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는 것이 사실입니까? 국서의 실체를 알고 싶습니다.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 권10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부문이죠.
무왕이 727년에 보낸 국서 내용인데,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요구하는 국서입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정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무왕은 일본을 선택했고 그렇기에
국서의 내용은 일본과의 좋은 관계를 수립하고자 무왕이 바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발해의 건국도 알리고 있는데 발해가 여러 번국들을 주관하고 부여-고구려를 잇는
정통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국서의 자세한 내용은 발해 서적을 참조하세요.
4.727년 일본과 발해외교관계가 시작된 후에733년에 나,당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의 안정이었을까요?
발해의 등주 공격으로 인해서 당-신라의 관계는 자연스레 복원 되었습니다.나.당 전쟁 이후
양국은 최악의 상황까지 갔지만 발해로 인해서 연합군을 형성했습니다.733년 신라군이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합니다.물론 실패로 끝나죠.이후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역을
신라 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줍니다.
5.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발해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스스로 천손이라고 했습니다.일본 정부에서는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문왕은 나아가 발해-일본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설정
하였습니다.한편으로 국서 없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전달하는 등 국력에 따른 자신감을
표출했습니다.
1988년 북한의 오메리 절터에서 고구려 금동판이 발견되기 전까지 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
당나라 또는 일본의 천제,천황을 모방했다고 생각했으나 이 금동판에서 천손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루 묘지나
광개토대왕비문 등에 고구려 왕실을 하늘의 자손이라고 표현하였죠.결국,발해 왕실도
스스로 천손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6.발해 3대 문왕이 쓴 연호가 대흥이라고 하는데,연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문왕의 대흥이라는 연호는,정효 공주 묘지문에서 다시 확인 되었습니다.
大興은 '크게 흥하다' 라는 뜻처럼 문왕은 5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발해라는 국가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정효 공주 묘지문에 보면 "...부왕 때에 와서는 국세가 강성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장구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문왕의 연호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리고 대흥 이외에 묘지문에서 확인된 것이,보력이라는 또다른 연호입니다.언제부터
썼는지 모르겠지만,중간에 보력이라는 연호를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7.발해 통치 조직 중 6부와 왕권 강화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6부의 중앙 관청은 현재 행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문.무 관리를 등용하고,조세 및,군사,법률 등 왕권과 결부되는 곳입니다.중앙 관청의
힘은 곧 왕권의 힘입니다.중앙 정부가 힘이 없다면,왕권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죠.
8.발해는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설명해 주세요.
문왕대에 대부분 수도를 옮겼습니다.742년 문왕은 구국에서 수도를 중경현덕부로 옮겼
습니다.해란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도 새롭게
시작할려고 했습니다.
755년 문왕은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깁니다.이 시기에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수도 방위
의 중요성 때문에 상경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됩니다.다시 30년 뒤 문왕은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기는데 아마도 문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일본과의 관계
를 중요시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돌아옵니다.794년에 성왕에 의해서 다시 수도를
천도하여 상경용천부가 발해 멸망 시까지 중심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9.발해는 황제국가였나요?
국제적으로는 당의 질서에 편입 되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 체제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독자적 연호 사용과 더불어 정혜,정효 공주 묘지문에 나오는 황상 같은 경우에는 문왕을
황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함화 4년명에 나오는 허왕부라는 존재와 발해 3성 중에 하나인
선조성을 보면 詔 의 경우 황제의 명령을 의미합니다.敎는 한 단계 아래인 왕이 사용하는
용어이죠.자세한 것은 송기호 교수님의 '황제 칭호와 관련된 발해 사료들' 글을 참조하세요.
10.발해 1대부터 15대까지의 왕15명이 매우 궁금합니다.
발해왕이 몇 명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위해왕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 김육
불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사실상 13대왕 대현석 이후 인선왕까지 그 사이에 몇 명의 왕이
더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당이 멸망하면서 중국측에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발해가
남긴 사료도 없기 때문입니다.
- 발해 왕조 연호표 - | ||||
연 호 | 기 간 | 왕대 | 왕호 | |
? | 698-719 | 1 | 고왕 | |
인안 | 719-737 | 2 | 무왕 | |
대흥;보력 | 737-793 | 3 | 문왕 | |
? | 793.3-793.? | 4 | ? 원의왕 | |
중흥 | 793-794 | 5 | 성왕 | |
정력 | 794-809 | 6 | 강왕 | |
영덕 | 809-812 | 7 | 정왕 | |
주작 | 812-817 | 8 | 희왕 | |
태시 | 817-818 | 9 | 간왕 | |
건흥 | 818-830 | 10 | 선왕 | |
함화 | 831-857 | 11 | ? 이진왕 | |
? | 857-871 | 12 | ? 건황왕 | |
? | 871-894? | 13 | ? 현석왕 | |
? | 894?-906 | 14 | ? 위해왕 | |
? | 906?-926 | 15 | ? 인선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