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 여정은 성지 8곳을 방문하고 250Km를 이동해야 하기에
곤지암 숙소에서 6시에 출발했다.
먼저 수원성지를 7시쯤 방문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서 철문앞에
차를 정차시키고 성지앞에 붙어있는 관리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난감해 하다가 철창사이로 손을 넣어
빗장을 옆으로 살살 움직이자 문이 열렸다.
중학교 다닐 때 셔터가 내려진 집에 조그만 틈만 있어도
신문을 밀어넣던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117. 수원성지 (북수동 성당)
수원지역 순교자들의 증거터
수원 화성은 현재까지 78명의 순교자 명단이 기록에 의해 전해지고,
이름 없이 죽어간 천주교 신자들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천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주님 나라 건설을 위해 박해를 당하고 처형된 곳이다.
수원 지방의 순교자들은 뮈델 주교의 《치명일기》에 의하면 33명 이상이고,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나오는 순교자만 해도 64명이다.
이들 중 중복되지 않고 순수하게 기록에 남은 병인박해 순교자가 77명,
그리고 1817년 샘골의 순교자 이용빈을 합쳐서 최대 78명이다.
순교 형태도 옥사, 장하치명, 백지사, 참수, 교수형 등 다양하다.
118. 손골성지
손골성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번지에 있다.
원래 손골성지에는 교우촌(敎友村)이 있었다.
손골 교우촌은 현재 ‘손골성지’라고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도리(Dorie, 金, 헨리코) 성인과 오매트르(Aumaitre, 吳, 베드로) 성인을 기념한다.
아울러 박해시대 손골 교우촌에서 살았던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성인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맷돌을 이용하여 돌십자가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도리 신부의 순교기념비 위에 얹었다.
손골성지에서 바오로 안젤라 부부에게 전화를 했다.
서울에서 같은 성당,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을 때 친하게 지냈다.
지금은 수지에서 살고 계시기에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손골성지에서 가까운 신봉동 성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봉동 성당이 스테인드 그라스가 아름답기에 둘러보고
차 한잔하면서 잠시 대화를 하기로 했다.
제주에 오셨을 때 우리집에 방문도 하셨지만 만난지 5년정도 된 것 같다.
이른 시간에 문을 연 곳이 없어 몇 군데를 거쳐 차를 마시며
1시간 반 정도 안부를 주고 받고 수리산 성지로 향했다.
119. 수리산 (修理山) 성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수리산 성지를 떠나 남한산성성지를 가기위해 남한산성입구에 도착하자
차가 밀리기 시작하여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50분 걸리는 길을 거의 2시간만에 도착했다.
시간도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라 점심식사하려는 관광객들로
주변 식당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성지주변에는 주차할 공간도 없었다.
아내는 몇 번 성지를 다녀갔기에 차를 가지고 주변을 돌고
나만 내려서 성지를 둘러보고 순례도장을 찍고는 전화해서
차를 가지고 내린 장소로 다시오라고 하여 승차하였다.
주말에 관광지 부근에 있는 성지를 순례할 때는 늘 있는 일이다.
불국사에서 그랬고, 언양줄림굴 갈 때도 석남사 주변과
통도사 주변에서 교통체증으로 고생한 일이 있다.
120. 남한산성순교성지
순교자의 피가 서린 동암문(시구문)
동문 근처에는 동암문이 자리하고 있다.
동암문 안은 어둡고 캄캄해 마치 짧은 터널을 지나는 듯하다.
약 200년 전, 순교자들은 포도청에서 사형 명을 받고 동암문 밖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박해기간 동안 이 동암문 앞에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만 300명이 넘는다.
남한산성순교성지
제대 위 십자고상에 달린 예수님은 순교자들처럼 목에 칼을 쓰고 있었다.
또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한덕운의 순교 장면과 남한산성의 모습이
초여름 햇빛에 색색으로 나타났다.
“한덕운 순교자는 교우의 시신을 수습하고 가족을 위로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로 연령회장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이제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서
더 많은 분이 이곳을 찾아올 겁니다.
그럴수록 한덕운 순교자를 비롯해 35위 순교자와
무명 순교자 300여 명의 순교정신을
함께 본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121. 구산성지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해 순교자들의 숨결이
150여 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성인 중 71번째 성인인 김성우 안토니오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치명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1월경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 포청으로 압송됐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돼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122. 마재성지
마재는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학자인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한 다산 정약용, 정약전(1777년 주어사 강학회 참석)등
4형제가 태어나고 자란곳이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3. 천진암성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놓여 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바로 이곳 천진암에서는 이미 자랑스러운 교회사가 시작됐다.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鹿菴)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광암(曠菴)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학회가 끝날 무렵 이벽이 지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정약종이 지은 "십계명가"(十誡命歌)는
이러한 강학회의 결실을 잘 드러내 준다.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가장 먼저 이벽은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전교한다.
또 그 해 가을에는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키고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다.
124. 양근성지
‘양근 (楊根) ’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예로부터 남한강 변에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었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한 때 강상면 대석리라고 하는 설이 있었으나
후손들과 교회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현재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양근 성지는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그리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 성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양근 성지는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조숙은 훗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종손자(從孫子)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 순교부부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양근 성지의 중요성을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첫째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전국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모태이다.
둘째로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난 곳이다.
셋째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진 곳이다.
양근성지를 끝으로 순례 3일차 여정도 끝났다.
양평부근 숙소는 가격도 비쌌지만 거의 만실로 숙소를 잡을 수 없어
내일 장시간 운전하여 갈 겟세마니 피정의 집 가는 길에 있는
향촌민박을 예약했다. 양평에서 24.6킬로 떨어진 곳이다.
숙소에 가기전에 늘 소문만 듣던 양평갈비에서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여주에 살 때 지나가면서 자주 보았던 집으로 맛집으로 소문이 난 곳이다.
5시경 도착하니 영업준비 중이었고 우리가 첫 손님이었다.
LA갈비가 유명하다고 하여 2인 분을 시키자 종업원이 와서 구워주었다.
손님이 없다보니 갈비 1대를 덤으로 받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가 제주에서 왔다고 하자 자기도 제주에 살고 싶다며
일자리 등 여러가지를 물어보았다. 지금은 이모님을 도와주고 있다며~
제주에 대한 정보를 나누다보니 친한 지인같이 여겨졌고
손님도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갈비 2인분을 더 시켜서 먹고 숙소로 향했다.
민박집이라 방공기가 약간 추워 이불 1채를 더 요구했다.
내일 첫 순례지는 74.3킬로 1시간 20분 걸리는 곳이라
6시경 출발하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