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야고보서 1:1
성경에 야고보가 가진 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 잡던 베드로와 함께 부름 받은 야고보 입니다(눅5:10).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함께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랐던 모친은 예수님에게 두 아들을 왼편과 오른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성장할 때 박해로 인해 헤롯 왕에 의해 야고보는 순교를 당했습니다(행12:2).
두 번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소개 될 때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고 기록된 것 외에는 달리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알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네 명의 남동생이 있고 그리고 여동생들(마13:55,56)이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막내 동생 유다가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이들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습니다(요7:5). 그러면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때 형제들이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내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7:3,4)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갈릴리보다는 명절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예루살렘에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행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겠느냐고 말했던 것입니다. 동생들은 형 예수가 이적을 베푸는 것을 보고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형을 통해서 덕이나 보고 출세나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행하시는 그 자리에 야고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이것은 내 살이니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시라”고 하시며 떡과 잔을 나눌 때 야고보는 못마땅히 여기고 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비로소 동생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다’(고전15:5,6)고 기록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야고보와 단 둘이서 만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로부터 야고보는 예수를 믿었고 주를 위해 평생을 받쳤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최고로 높임을 받고 권세있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의 존경받는 초대 감독으로 알고 있지만 예루살렘교회의 초대감독은 베드로가 아니고 야고보였습니다.
당시 바울이 가지고 온 안디옥교회의 문제를 예루살렘교회가 총회로 모여 찬반 토론하고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행15:13)고 하며 결론을 내리고 공포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지도자(총회장)는 야고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찍 예수님을 따르는 수제자였지만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베드로보다는 야고보가 더 높임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30년 동안을 예루살렘교회의 존경받는 지도자였으며, 초대 기독교로 이끄는 지도자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으로 인해 교인들은 다 흩어졌지만 야고보를 비롯한 사도들은 떠나지 않고 끝까지 예루살렘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러다보니 가혹한 핍박을 엄청나게 받아야만 했습니다.
박해자들은 야고보를 성전 꼭데기에 세워놓고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노라’고 하지만 야고보는 오히려 하늘을 쳐다보며 ‘저기를 보라,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때 박해자들은 화가 나서 성전 꼭데기에서 떠밀어 땅으로 떨어졌지만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야고보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라고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은 어느 책이나 다 귀중한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도 저 마다 좋아하는 성경이 따로 있습니다. 칼빈은 에베소서를 좋아했고, 루터는 시편과 갈라디아서를 특별히 좋아 했다고 합니다. 외로울 때는 시편을 읽는 것이 좋겠고, 답답할 때는 잠언이 좋을 것이며, 고난당했을 때는 빌립보서를 읽고, 절망과 실의에 빠졌을 때면 베드로서를 읽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거나 회의가 생길 때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고, 시험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야고보서를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복음서 입니다. 시련을 당하거나 시험 중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한 사람도 읽어야 합니다. 일이 잘되어나갈 때에, 다소라도 교만이 생길 수 있을 때에, 그리고 내 믿음에 게으름이 스며들 때에 야고보서를 읽으면 내 믿음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고, 시련을 통하여 주시는 축복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첫머리에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고 말했습니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모든 사람들에게 문안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그 편지를 잃고 예수를 믿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자는 물론이고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되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는 명령형이 많습니다. 야고보서 전체가 설명조가 아니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명령조 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목회자적인 권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을 길게 하지 않고 직선적이고 명령적으로 말씀을 하였습니다.
야고보서의 특징은 복음서와 유사 한 것 입니다. 바울서신은 많은 교리를 말씀하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닐 뿐 아니라 예수님에게 직접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말리엘에게서 배우고 알고 있던 율법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등을 풀어 기독교교리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년을 따라 다녔기 때문에 요한서신이나 베드로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제자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듣고 본 것을 많이 인용할 수가 있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사람으로 당연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며 인용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말씀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야고보서 전체의 4분의 1가량이 복음서를 인용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과 산상보훈과 같은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야고보서에 ‘예수’란 이름이 두 군데(1:1, 2:1) 밖에 없다고 비난 합니다. 그러나 벵겔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동생이기 때문에 ‘예수’라고 하면 ‘형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아서 될 수 있는 대로 예수란 이름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지푸라기란 금이나 은에 비하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많이 읽지 않고 등한시 했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깊이 상고해 보면 등한시 할 복음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했습니다. ‘종’이라는 말은 다윗이나 모세도 많이 쓴 바가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도 ‘예수의 종’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나는 예수의 종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가 예수님을 ‘당신은 주인이요 나는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먼 사람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그분의 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쉬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간에 ‘당신은 주인이요 나는 종입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사의 부모가 아들 목사에게 ‘목사님’하고 부르고 섬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그림과 사람은 멀리서 봐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참 훌륭한 그림인데 가까이서 보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오래 사귈수록 그 사람의 흠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성도는 오래 사귈수록 은혜가 됩니다. 그와 같이 야고보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과는 불과 두 세살 정도의 차이의 동생입니다. 어려서부터 한솥밥을 먹고 함께 딩굴며 자랐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새삼 예수님을 그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고 싶고 말씀을 듣고 싶었을 때마다 야고보에게 ‘예수님은 어렸을 때에 어떠하셨느냐?’고 묻기도 하고 ‘이런 때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겠느냐?’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중요한 것은 믿음과 행함을 하나로 묶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2:21,22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하며,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곧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몸이듯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2:26). 지식적으로 아는 믿음은 구원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거나 교리를 잘 알고 남에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라야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을 현실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희락의 복음이라고 하며, 갈라디아서를 은혜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서는 ‘행위의 복음’, ‘생활의 복음’, ‘실천의 복음’, ‘살아있는 믿음에 대한 복음’이요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복음’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야고보의 신앙고백입니다. 때로 우리는 인간적으로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신령상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신령한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은 주인이신 예수님의 것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내 삶의 목적도, 내 능력도, 내 지혜도, 내 생명도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순종을 거듭 맹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고백하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그 신앙을 깊이 상고하면서, 우리도 야고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가졌던 신앙 간증과 믿음을 이해하고 우리도 야고보와 같은 수준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구원받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비 없는 구름처럼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와 같이 믿음으로 행하여 구원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