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의 불교학자 49.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 / 이상민
망월대사전 편찬, 불교학 연구 기반 확립
1. 모치즈키 신코와 ‘학문적 현재성’
근대 학문으로서 불교학이라는 분과가 성립된 지도 어느덧 두 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 20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불교학계에는 이른바 ‘대가’로 불리는 학자들이 등장하였고, 그들이 구축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그러나 ‘학문적 토대’가 곧바로 ‘학문적 현재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전대의 연구 성과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현재의 연구 담론 속에서 살아 있는 문제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한다. 실제로 한 세기 이전의 논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구의 핵심 화두로 작동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정토종 승려이자 불교학자였던 모치즈키 신코(望月信亨, 1869~1948)의 학문적 업적은 매우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한 세기 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간결한 논평과 문제 제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검토와 비판, 혹은 극복의 대상으로서 연구 속에 호출되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망월불교대사전(望月佛敎大辭典)》(이하 《망월대사전》)은 이러한 ‘학문적 현재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작업이다. ‘사전’이라는 형식이 암시하듯, 이 저작에는 당대에 접근 가능했던 거의 모든 불교 문헌에 대한 기초 정보와 지식이 체계적으로 집적되어 있다. 특히 후대 연구에서도 충분히 해명되지 않은 둔황 사본의 일문(逸文)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당 분야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망월대사전》은 지금도 여전히 확인을 요하는 기준점으로 기능한다. 나 역시 둔황 문헌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는 과정에서, 이 저작을 통해 기존 연구의 축적을 점검하고, 나의 문제 제기가 단순한 반복에 머무는지 아니면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된다. 이처럼 모치즈키의 연구는 21세기의 연구자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비록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축적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입적 33주기를 맞아 간행된 추모집 《은사 모치즈키 신코 선생(恩師望月信亨先生)》을 통해 그의 학문 세계와 교육관, 그리고 승려이자 학자로서의 면모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모치즈키 신코의 생애와 연구 성과를 서술하고, 그 학문적 의의를 간략히 조명하고자 한다.
2. 근대 불교학자의 전형: 모치즈키 신코의 생애
모치즈키 신코는 1869년 10월 28일 지금의 후쿠이현(福井県) 에치젠시(越前市)의 농가에서 5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기의 이름은 마츠바라 카츠지로(松原勝次郎)였다. 양친은 독실한 정토종 신자였으며, 그 또한 생가 근처의 정토종 사찰 쇼우세이지(清誓寺)의 법사(法嗣)를 스승으로 모시고 한학(漢學)을 배웠다.
1889년에는 정토종 사찰 엔카이지(円海寺)에서 카노호센(加納法宣)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신코(信亨)라고 개명하였다. 1886년에는 교토의 지온인(知恩院) 산하의 정토종 서부 대학림(大學林)에 들어가 불교와 한문, 영어를 배웠고, 1888년에는 도쿄 시바의 조죠지(增上寺)의 정토종학본교(淨土宗学本校)로 옮겨 학업을 이어 나갔다. 본교에서는 종학(宗學) 이외에도 영어, 수학, 철학, 천문, 지리 등을 수학하였고 이때 오기와라 운라이(荻原雲来, 1869~1937), 와타나베 가이쿄쿠(渡辺海旭, 1872~1933) 등 그와 더불어 동시대 불교학을 견인한 학자들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본교의 본과에서는 구사부(俱舍部)에 들어가 아비달마 교학을 수학하였다.
그가 오늘날 전해지는 모치즈키 신코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본과 재학 중 고베시에 위치한 후지노데라(藤之寺)의 주지였던 모치즈키 유세이(望月有成)의 양자가 된 이후부터이다. 모치즈키(望月)의 성을 계승한 이후 그는 정토종의 승려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895년 본교를 졸업한 이후 1896년부터는 종단의 지시로 천태종의 총본산인 교토 히에이산(比叡山)에서 4년간 천태 교학을 수학하였다. 이 시기 동학으로는 천태종 승려인 후쿠다 교준(福田堯頴, 1867~1954), 스에히로 쇼케이(末広照啓, 1874~1925), 일연종 승려인 시미즈 류잔(清水龍山, 1870~1943), 조동종의 오모리 젠카이(大森禪戒, 1871~1947) 등이 있다. 또한 교토에서는 같은 정토종의 승려인 츠치카와 요시유키(土川善澂, 1864~1930), 우루마 도쿠죠(漆間徳成, 1867~1944)와 의기투합하여 잡지 《종수(宗粋)》를 발간하고 〈정토교와 염세교(淨土敎と厭世敎)〉 〈무착의 법화경론(無著の法華經論)〉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899년에는 정토종 고등학원(高等学院) 교수에 취임하여 도쿄로 근거지를 옮겼고, 정토종의 교학 외에도 삼론, 화엄, 기신론 등을 강의하였다. 이 시기 승려이자 >교육자였던 오오시마 텟스이(大島徹水, 1871~1945), 둔황 사본 연구의 선구자인 야부키 케이키(矢吹慶輝, 1879~1939) 등 근대 시기 일본 불교학계를 수놓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1905년 4월, 그는 자신이 주재하던 잡지 《종수》에서 종무 당국과 종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종수》를 폐간하고 교수직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와시오 슌케이(鷲尾順敬, 1868~1941) 등과 일본종교협회를 설립하며 《종교계(宗敎界)》 창간을 기획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모치즈키를 단순한 불교학자가 아닌 자신이 몸담은 종단에도 적극적으로 비판을 가했던 지식인으로서 이해할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실제로는 이 사건 이후 그가 불전의 자료 집성과 용어 정비, 문헌 기반을 구축하는 순수한 학문 활동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인 1906년에 《호넨상인전집(法然上人全集)》을 출간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 문학에 나타난 불교 술어 사전의 기획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 《망월대사전》 편찬의 계기가 되었다.
3. 정토교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연구: 승려이자 불교학자로서의 정체성
모치즈키가 정토종의 종교대학(宗敎大学, 1907년 고등학원에서 개명)에 복직한 것은 3년 후인 1908년이었다. 이후 1911년에는 정토종의 집강(執綱, 오늘날 종무총장의 직위)이 되었고 양부로부터 후지노데라(藤之寺)를 물려받았다. 이 시기부터 모치즈키의 학술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는 《망월대사전》의 자료 수집과 자금 확보의 일환으로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의 간행을 시작하였고, 대사전의 부록인 《불교대연표(佛敎大年表)》를 먼저 출간하였다. 1914년에는 종교대학 학장에 취임하였고 《정토교의 연구(淨土敎之硏究)》를 발표하였다.
그의 연구 분야는 불교학 전체를 망라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정토교 연구와 《대승기신론》 연구가 두드러지기에 아래 특기한다.
1) 정토교의 연구
그가 가장 정력을 기울인 연구 분야는 정토종 승려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정토교, 즉 정토사상의 연구였다. 정토교의 초기 연구서로는 전술한 《정토교의 연구》가 있다. 이 책은 정토교 연구자로서 모치즈키의 문제의식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정토교의 연구》는 정토교를 단순한 교학 내부에서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학의 바탕이 되는 경론을 중국 및 일본의 전승 속에서 검토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1921년의 《약술정토교리사(略述淨土敎理史)》는 제목 그대로 정토종 교리사의 전개를 간명하게 서술하려는 목적을 지닌 저술이다. 이 책은 1930년의 《정토교의 기원과 발달》과 1942년의 《지나정토교리사(支那淨土敎理史)》로 이어지는 정토교 연구의 중간 단계에 놓인다. 즉 정토교를 인도, 중국, 일본을 관통하는 장기 전승의 흐름 속에서 파악하려는 연구 방향이 이 시기에 이미 정리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24년 모치즈키는 《정토교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연구》로 도쿄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 논문은 1930년 《정토교의 기원과 발달》이라는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정토교의 기원과 발달》은 약 9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로, 아미타불 신앙과 정토교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원시 대승불교 사상, 경전 성립사, 불타관, 본원 사상, 정토관, 실천론을 함께 검토하고 있다. 이 책의 의의는 정토교를 일본 정토종 내부의 교리 설명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정토교를 인도, 중국, 일본을 관통하는 사상사적 전개로 파악하려 한다. 특히 정토교의 기원 문제를 다루기 위해 경전 성립사와 원시 대승의 문제를 함께 검토한 점은 중요하다. 후대 연구에서는 개별 학설에 대한 수정과 비판이 가능하지만,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정토교의 기원과 발전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는 여전히 연구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 중에서도 제1편인 〈경전론(經典論)〉은 크게 증보되어 1946년 《불교경전성립사론》으로 간행되었다.
1940년 간행된 《정토교개론(淨土敎概論)》은 《정토교의 기원과 발달》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전론, 불타론, 본원론, 정토론, 실천론이라는 구조를 답습하지만, 전작과 같이 방대한 문헌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정토교의 기본 구조와 사상적 전개를 개론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정토교개론》은 전문 연구서의 성과를 교학적 개설서로 재정리한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42년에 간행된 《지나정토교리사》는 중국 정토교의 교리 전개를 중심으로 한 연구이다. 이 책은 훗날 1962년 호쇼칸(法藏館)에서 《중국정토교리사》라는 제목으로 재판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도 정토 교학에 대한 그의 이해가 드러난다. 그는 중국의 정토교를 단순한 신앙 전통이 아니라 불교 교리사적 전개의 한 양상으로 해석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의 중국 수용과 담란(曇鸞), 도작(道綽), 선도(善導)와 같은 중국 정토승의 활동, 그리고 선종, 천태종, 화엄종과의 관계를 고찰하여 중국에서 정토교가 하나의 독립된 사상 전통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역설했다. 오늘날까지도 정토교 사상의 연구는 일본의 정토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정토교를 일본 정토종의 전사(前史)로만 보지 않고 중국불교 내부의 논리와 역사 속에서 설명하려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2) 《대승기신론》의 연구
정토교학에 대한 연구가 승려로서의 정체성과 관련된 작업이었다면, 《대승기신론》에 대한 연구는 근대 불교학의 담론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대승기신론》은 마명(馬鳴, A큦vaghoṣa)이 짓고 진제(眞諦, Paramārtha)가 번역한 논서로 전해지며, 동아시아불교에서 국가를 막론하고 사상적 영향력을 강하게 발휘해 온 문헌이다. 그러나 동시에 전근대 시기부터 《대승기신론》의 저자와 성립 지역, 찬술 시기를 둘러싼 의문이 제기되어 왔고, 이는 근대 이후 불교학의 주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모치즈키의 1922년작 《대승기신론 연구(大乘起信論之硏究)》는 이 문제에 대한 선구적 연구서로서 위상을 가진다. 그는 《중경목록(衆經目錄)》과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에서 《대승기신론》에 대한 기술이 다른 점에 착안하였고, 두 경록을 세밀하게 검토하여 《대승기신론》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모두 부정한 뒤, 결론으로 563~592년 사이에 중국인이 지은 위서(僞書)라는 소위 ‘지나(支那, 중국) 찬술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대승기신론》의 저자 문제를 둘러싼 학계의 논의가 격발되어 교토대학의 하타니 료타이(羽溪了諦, 1883~1974), 도쿄대학의 토키와 다이죠(常盤大定, 1870~1945),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1882~1963) 등 동시대의 불교학자들이 해당 논의에 참여했고, 당시의 중국 지성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대승기신론고증(大乘起信論考證)》이라는 글에서 모치즈키의 지나 찬술설을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전에는 모두 이를 2천 년 전 인도의 대철학자가 지은 것으로 여겼으나, 하루아침에 우리 선민의 저작임이 밝혀졌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논이 불교의 참뜻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논외로 하고, 우주의 유일한 진리를 밝히는지 여부도 논외로 하더라도, 여러 불교 학파의 정수를 취하여 조화시키고 교리 발전의 최고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 그리고 인류 종교·철학사 속에서 독자적 지위를 확립했다는 점은 만인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선민의 창작이라니,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상계의 가치를 크게 높여 준다(《大乘起信論考證》 序).
《대승기신론 연구》의 중요성은 단순히 중국 찬술설을 제기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그는 《대승기신론》이 중국에 전해진 직후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검토하고 주석서의 계보를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대승기신론》 구역·신역의 관계, 진제의 역출 전승과 지론종(地論宗) 계통 문헌의 관련성을 망라하여 다루었다. 이후에도 《대승기신론》의 찬술 문제는 불교학계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어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 가시와기 히로오(柏木弘雄, 1933~2008), 다케무라 마키오(竹村牧男, 1948~ ) 등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오오타케 스스무(大竹晉)가 《대승기신론성립문제의 연구》(2017)를 발표하여 중국 찬술설을 문헌적으로 설득력 있게 논증하여 마츠모토 시로의 견해를 보강하였다.
《대승기신론 연구》가 성립 문제와 주석 전통을 다루는 문헌 비판적 연구라면 1924년에 출간된 《강술대승기신론(講述大乗起信論)》은 《대승기신론》에 대한 해설서적 성격을 가진다. 모치즈키는 여기에서 《대승기신론》의 구조와 주요 개념을 설명하는 한편 신앙 및 수행을 여래장(如来蔵) 사상과 연결시켜 정리하였다. 특히 《대승기신론》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 나타난 정토왕생 관련 대목을 주목하여 《대승기신론》을 정토사상의 문제의식과 연결해 읽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모치즈키의 문헌 비판이 정토교의 연구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이 책은 연구서와 교재의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어 《대승기신론》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한 주요 참고자료로 여전히 활용되고 있다. 그의 학문적 현재성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4. 편찬이 학문이 되는 방식: 《대일본불교전서》와 《망월불교대사전》
모치즈키 개인의 연구 성과와는 별개로, 그의 학술 활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업은 《대일본불교전서》와 《망월불교대사전》의 편찬이다. 그리고 이 두 작업은 모두 일본 불교학을 넘어 근대 학문적 방법론을 정립한 금자탑이라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 《대일본불교전서》의 편찬
《대일본불교전서》는 1912년부터 1922년까지 간행되었으며, 일본에서 찬술된 불교 문헌 953부 3,396권을 수록한 대규모 총서이다. 전체 규모는 본편 150책과 별권 《십권초(十巻抄)》 10책, 목록 1책을 포함해 161책이며, 수록 범위는 교리서와 주석서는 물론, 사전류와 사찰 기록과 전기와 일기와 문예 자료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전서는 일본불교를 교리 체계만이 아니라 일본 불교문화 전체로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망월대사전》의 편찬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전 편찬에는 방대한 원문 확인이 필요했고 원문 확인에는 접근 가능한 텍스트 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총서는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던 불교 문헌, 특히 사찰에 소장된 필사본과 희귀 간본을 체계적으로 수집·정리하여 간행함으로써 그동안 접근이 어려웠던 자료들을 학계에 공개하고 소실의 위험에 놓여 있던 문헌들을 안정적으로 보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단순한 출판 사업을 넘어 불교학 연구를 위한 1차 자료 기반을 확립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대일본불교전서》는 기존의 중국 경전 중심 불교학에서 벗어나 일본불교 자체를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이 총서는 일본불교의 주석서와 의례서, 종파 문헌을 망라하여 일본불교의 사상적 전개와 교학적 특성을 독립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불교를 독자적인 전통으로서 학문적 분석의 중심에 자리매김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총서는 우리나라 《한국불교전서》의 선구적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사업은 교감과 이본 비교, 체계적 분류 등 근대적 문헌학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불교학을 실증적이고 학문적인 연구 분야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적 전환은 이후 일본 불교학이 문헌학적 엄밀성을 갖춘 학문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종파별 교리 전개나 사상사적 계보를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처럼 《대일본불교전서》는 이후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을 비롯한 각종 불교 문헌 총서 편찬 사업에 선례를 제공함으로써 근대 불교 문헌학 프로젝트의 모델로 기능하였다. 동시에 이 사업에는 당대의 학승과 학자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공동 연구 체제를 형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불교학이 개인 중심의 연구를 넘어 제도적·집단적 학문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 《망월대사전》 편찬
《망월대사전》은 불교 용어와 인명과 문헌과 지명을 하나의 참조 체계 안에 배열한 최초의 대규모 불교학 사전 출판 작업이었다. 사전 편집에 착수한 것은 1906년부터였지만 실제로는 1931년 제1권을 출판, 1936년에야 완료되었다. 이 사전은 본권 5권, 색인 1권, 불교대연표 1권 총 6,500페이지로 이루어진 대규모 사전이며, 전후에는 츠카모토 젠류(塚本善隆, 1898~1980) 등의 증보를 거쳐 전 10권 체제로 확장되었다. 이 증보판은 전후 일본 불교학에서 표준적 참조 도구로 활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전문 연구자가 고전적 용례와 인명과 문헌 정보를 확인할 때 여전히 참고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기획부터 출판까지 걸린 기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전 편집 작업은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모든 작업은 모치즈키 신코의 자택에서 이루어졌으며 수많은 원고가 그의 판단을 거쳐야 수록될 수 있었기에 작업 기간은 수십 년이 필요했다. 출판 사정도 녹록지 않아 외부에서는 “‘불교대사전’을 출판하면, 편집자나 발행자나 제작 면의 인쇄소, 제본소 중 어느 하나에 화재가 난다” 혹은 “망월 사전이 사람을 죽인다.”라는 등의 좋지 않은 소문도 돌았고, 전후에는 어떤 제삼자가 불교학계나 교계의 권위 있는 인맥을 통해 ‘불교대사전’ 출판권의 양도를 집요하게 요구하기도 하였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이처럼 지난한 작업에 대한 소회는 《망월대사전》 제5권의 서두에 잘 드러난다.
불교대사전 드디어 이루어지다. 메이지 40년 처음으로 편찬에 착수하여 이에 30년, 그 사이 허다한 난관을 물리치고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며 밤낮으로 정진하여, 이제 고희(古稀)에 이르러서야 점차 그 업을 이룰 수 있었다. 어제저녁 전편의 기고를 마치고 붓을 던지니, 기쁨이 끝이 없음과 동시에 또한 극락왕생을 바라는 감개무량함이 있다.
《망월대사전》의 편찬은 모치즈키 개인의 성취를 넘어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되었다. 1936년 7월 16일 자 〈도쿄아사히신문〉은 〈지옥의 방에서 30년, 태어난 극락의 책 불교대사전. 모치즈키 신코 박사의 고심성취〉라는 제목의 기사로 사전의 출간을 축하하였고, 이후 각종 지역신문과 종교계의 언론도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었다.
《망월대사전》의 의의는 항목 수나 분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불교학은 산스끄리뜨어와 빨리어, 한문과 일본어를 함께 다루는 다언어적 학문이다. 하나의 개념은 번역어와 주석 전통과 종파적 해석을 통과하면서 의미가 변한다. 사전은 이 복수의 층위를 한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모치즈키의 사전은 단순히 문헌 정보를 나열한 목록이 아니라 연구자가 질문을 시작하는 순서와 범위를 구성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항목의 배열과 상호 참조는 불교학의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며, 이러한 조직 방식 자체가 모치즈키의 학문적 판단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연구자가 모치즈키의 목소리를 항상 의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는 《망월대사전》 간행 후 6년이 지난 1942년에 교수직에서 물러났고, 1945년 정토종 관장에 취임하여 종교계에서의 활동을 이어 나갔다. 이 시기에 《망월대사전》의 보유(補遺) 작업을 개시하였고, 대승 경전의 성립 문제와 의경 및 위경에 대한 논의를 담은 《불교경전성립사론》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6년 12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마침내 1948년 7월 13일, 정토종 총본산인 지온인(知恩院)에서 생을 마감했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왔지만, 그야말로 학자이자 승려의 담백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 향훈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5. 기준이자 극복의 대상: 모치즈키 신코의 의의
모치즈키 신코는 승려와 불교학자, 그중에서도 학계의 주도적 인물이자 종단 지도자라는 두 가지 정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종단 내부의 교육을 받았고 대학 제도 안에서 불교학을 가르쳤으며, 대규모 편찬 사업을 조직하였다. 또한 종단 정치와 사찰 운영에도 관여하였다. 이러한 복합성은 근대 일본불교가 신앙 공동체와 학문 제도, 출판 시장과 종단 행정을 병행하는 가운데 재구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그가 지니고 있던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는 종무 당국과 종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물러났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종단 내부에서 제도적 역할을 이어갔다. 그의 생애를 오직 근대 불교학자로만 이해하기에는 종단에 대한 그의 헌신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오히려 그는 신앙과 학문을 별개의 길이 아닌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보고 있었던 듯하다.
《호넨상인전집》을 간행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호넨(法然, 1133~1212)은 정토종의 종조이다. 호넨의 문헌을 집성하는 일은 종단의 정체성을 정리하는 작업인 동시에 그것은 종조의 언설을 문헌학적 자료로 확보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사업은 신앙적 기념과 학술적 편찬이 결합된 사례였다. 모치즈키에게 종단 전통은 보존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검토해야 할 문헌 자료였다. 이 책은 호넨의 저작뿐 아니라 그 문하의 여러 유파를 망라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정토종의 종조 이해를 교단 내부의 신앙 차원을 넘어 사상사와 문헌사 속에서 검토하려는 객관적인 학문적 방법론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치즈키 신코가 불교학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근대 불교학의 방법론과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료의 집성과 개인의 연구 모두에서 엄밀한 문헌의 검토를 기반으로 한 학술적 성과를 제시하였다. 자료의 집적과 분류와 비교를 중시하여 하나의 교리를 독립된 명제로 취급하기보다 경전과 주석과 종파 전승과 역사적 수용의 관계 속에서 검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집성된 《망월대사전》이나 《대일본불교전서》는 여전히 검토하고 극복해야 할 방대한 데이터를 제공한다.
물론 이러한 선구적인 작업은 동시에 근대 일본 불교학의 한계 내지는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 사전과 전서는 학문 공동체의 기준을 세우지만 그 기준은 편찬자의 시대와 종단적 배경,자료의 접근성에 의해 제한된다. 그의 정토교 연구는 종파적 이해를 확장시켰지만 근대 일본의 불교사 서술이 가진 국가와 제도 중심의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또한 중국불교와 인도불교를 일본불교의 전사로 배치하는 경향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모치즈키는 참조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대상이다.
모치즈키의 작업을 검토하는 일은 그 자체로 근대 불교학이 어떤 방식으로 개념을 표준화하고 종파 전통을 학문적 대상으로 전환했는지 검토하는 일이다. 그의 작업은 연구자의 질문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기준선 위에서 무엇을 다시 물어야 하는지 보여준다. 이 점에서 모치즈키 신코의 작업은 나 자신에게도 불교를 바라보는 토대로 기능하는 동시에 그 한계와 문제점을 포착해야 하는 대상이다. 한 세기 전의 인물이 남긴 성과는, 지금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이상민
고려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주요 논저로 《6세기 북조불교 연구》와 〈地論學派の四量說について〉 〈“삼법인(三法印)”과 동아시아 불교〉 〈누가 경전을 지었는가?-법상(法上, 490~580) 찬 〈교적의(敎迹義)〉의 경전관〉 〈지론학파의 법계연기〉 등의 논문, 역서 《대승기신론 성립 문제 연구》 등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본지 편집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