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오늘의 묵상
오늘 아침은 무척 추운 영하의 날씨입니다.
오호에는 풀린다고 하니 건강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것에 실려 왔던 중풍 병자가 우뚝 일어섭니다.
그러고는 두리번거리며 걷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그 자리는 기적의 자리였고, 감동의 자리였습니다.
중풍은 무서운 병입니다.
나이 들수록 어르신들에게는 두려워지는 병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중풍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오늘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의 이웃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환자를 데려갈 수 없자, 지붕을 벗겨 내고 줄에 매달아
그분 앞에 내려 보냈습니다.
대단한 열성입니다. 우리네 가옥 구조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가능했습니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했기에 비가 없는 건기에는
지붕에 거적을 덮어 두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용기와 적극성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낫게 하시면서 죄를 용서한다고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풍과 같은 무서운 병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참에 그들의 잘못된 생각까지 고쳐 주고자 하셨던 것이지요.
죄의 결과가 중풍이라 믿어 왔기에 그 원인인 죄를 용서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주변 이웃들에게 작은 것이라도
감동을 주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간절히
-박동진 신부-
‘지성이면 감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어쩌다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함없는 사실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외국어에서 ‘간절함’(영어의 supplicate, 프랑스어의 supplier)은 ‘바닥’(sub)에 완전히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린’(plier) 모습입니다. 마치 깨끗한 물을 떠놓고 두 손을 싹싹 빌어 소원을
비는 모습과 다를 바 없고, 동냥하는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고 손을 내밀어 그 간절함을 표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그를 쭉 지켜보던 이웃들의 간절한 마음이 드디어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그를 보여 줍니다. 이 간절한 마음은 하늘에 닿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 때의 ‘섭’(攝)이라는 말처럼, 하느님은 귀를 쫑긋 세우시고, 그것도 부족해서
손까지 귀에다 대고 들으시는 분이기에, 온전히 바닥에 굽히고 간절히 청하는 이의 기도를 굽어
들으십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표현을 쓰든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든, 간절한 이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의 답변은 오로지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꼬리를 잡고 시비를 거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중차대한 문제일지 모르지만, 간절한 이의 소원과 그것에 화답하는 이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간절히 청하오니’라고
기도하는 그 ‘간절함’이 진정한 것이라면, 굽어 살피시는 분의 답변은 어쩌면 여러 다른 표현으로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첫댓글 아~멘!
아 멘